2004 백제 문화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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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소산성       이전 목차 다음

소재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지정 : 사적 제5호

부소산 백화정 밑에서 내려다본 백마강백제탑의 저녁노을,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봄날 백마강가 아지랑이, 고란사의 은은한 풍경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간간이 내리는 부슬비, 낙화암에서 애달프게 우는 소쩍새,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빛,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떼, 규암나루에 들어오는 돛단배. 부여의 팔경이다. 이중 수북정, 고란사, 낙화암이 부소산에 있고 다른 네 가지도 부소산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풍경들이니 부소산은 부여팔경을 다 누릴 수 있는 곳이라고도 하겠다.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으로 부여의 북쪽인 쌍북리에 있는 해발 100m쯤 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구릉이다. 북으로 강을 두르고 바로 산이 막아선 형상이 북으로부터 내려오는 고구려 군사를 방비하기에 알맞게 되어 있는 점이 공주의 공산성과 흡사하다. 그래서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경기도 하남 위례성터와 함께 백제식 도성 방식을 보여 준다.

이 부소산에는 왕궁과 시가를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던 백제의 부소산성이 있다. 산성이 완성된 것은 성왕이 538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던 무렵으로 보이나 그보다 앞서 500년쯤에 이미 그 선왕인 동성왕이 산봉우리에 산성을 쌓았고, 후대에 무왕이605년에 고쳐 다시 쌓았다.

성곽은 산정에 테뫼식(머리띠식)으로 산성을 쌓고, 그 주위에 다시 포곡식(성의 내부에 낮은 분지가 있는 형식)으로 둘렀으며 축조 방식은 흙과 돌을 섞어 다진 토석혼축식이다. 경사면에 흙을 다진 축대를 쌓아 더욱 가파른 효과를 낸 성곽이 2,200m에 걸쳐 부소산을 감싸고 있다. 사적 제5호이다.

부소산성에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삼충사(三忠祠)가 있다. 백제 말의 3충신인 성충ㆍ흥수ㆍ계백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데 1957년에 처음 세워졌고 1981년에 지금처럼 대대적으로 만들었다.

부소산 사비루5분 남짓 더 걸어가면 있는 영일루는 사비성의 동대(東臺)가 되는 영일대가 있던 자리이다. 지금 건물은 1964년에 홍산에 있던 홍산문루를 옮겨 지은 것이다. 부소산의 동쪽 산봉우리이니만큼 아침 해뜨기를 보기에 안성맞춤이어서 '해 맞는 곳'으로 이름이 붙었겠다.

그 아래쪽으로는 군창터가 있어 너른 터에 철책을 둘러놓았다. 백제 때에 군대 곡식창고였다고 한다. 지금은 잔디를 심어놓았지만, 땅속을 파면 불에 검게 탄 쌀이나 보리, 콩이 나온다고 하는데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저항하던 백제군이 군량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1915년에 한 국민학생이 칡뿌리를 캐다가 처음으로 발견했다니 땅속에 묻힌 지 1,250년만의 일이다.

군창터 옆에 움집 두 채가 있어 이채로운데, 이것은 백제 때 군인들의 움막을 발굴 복원해 놓은 것이다. 1m가 채 못 되게 움을 파고 사방에 벽을 두른 뒤 지붕을 얹은 모습인데, 가운데 화덕에서 나는 연기를 빼려고 환기창을 달아 놓은 것이 재미있다. 바로 옆에 본래 움집터를 발굴한 곳은 현대식 건물을 지어 놓고 볼 수 있게 했다.

부소산 가장 높은 곳에는 사비루(泗?樓)가 있다. 입구와 현판에도 '사자'(泗?)로 잘못 표기한 곳이 있다. 글자가 비슷하여 혼용된 것 같다. 백제 때에는 송월루(送月樓)가 있었으니 해맞이 영일루와는 반대로 달을 보내는 곳이다. 지금 건물은 1919년에 당시 군수가 임천의 문루였던 개산루를 뜯어다 짓고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현판 '백마장강'(白馬長江)의 시원하고 힘찬 글씨는 근대 서예의 한 봉우리인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쓴 것이다.

백화정바로 아래쪽으로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육모지붕의 백화정(百花亭)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힘들지 않은 걸음이라도 땀이 났을 만한데 백마강 강바람에 땀을 식히기에 안성맞춤이다. 부소산성에 오르는 이들은 대개 여기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실은 그 바로 아래 나무 모양의 난간을 두른 자리가 백마강이 휘돌아 가는 모습이 배경으로 더 근사하게 잡히는 곳이다.

아래쪽에 낙화암이 있다. 사비가 나당 연합군의 발 아래 유린될 때에 삼천 궁녀가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아래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에 더 잘 보인다. 삼천궁녀 전설로 해서 낙화암(落花巖)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국유사]에는 원래 이름이 '타사암'(墮死巖)이니 곧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다. 사실과 전설의 차이는 이런 이름에서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끔찍한 역사도 세월의 더께는 그런 대로 옷을 입혀 준다.

조선 숙종때의 사람 석벽 홍춘경은 이곳에 와서 낙화암에 비추어 백제의 스러짐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읊조렸으니 오늘에 와서도 쓸쓸한 부소산성과 잘 어울린다.

나라가 망하니 산하도 옛 모습을 잃었고나
홀로 강에 멈추듯 비치는 저 달은 몇 번이나 차고 또이즈러졌을꼬
낙화암 언덕엔 꽃이 피어 있거니
비바람도 그 해에 불어 다하지 못했구나

가파르게 내려가는 계단 길 왼쪽에 약수가 유명한 고란사가 있다. 바위 절벽 좁은 터에 법당 한 채를 돌아가면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물을 한번 맛보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북적하다. 왕에게 이 약수물을 올릴 때 반드시 띄웠다는 고란초는 바위 틈새 어디엔가 숨어서라도 있을 법한데, 너무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서인지 찾아보기가 어렵다.

절벽 아래쪽에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백제대교가 놓인 규암나루까지 갈 수 있는데 배를 타면 반드시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하는 유명한 노래를 들을 수 있으니, 한번쯤 유행가 가락에 실려 보는 것도 좋겠다. 사비 도성의 후원이기도 했던 부소산성은 한갓진 산책로로는 그만이다. 시내에서 올라 사비루를 거쳐 낙화암과 고란사까지 이르는 길은 천천히 걸어 2시간 남걸린다.

의자왕과 낙화암 전설에 대하여

낙화암과 삼천궁녀의 전설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낙화암을 가본 사람은 한번쯤 이런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이곳 어디에 3000명의 여자가 통곡하며 줄을 서서 뛰어내릴 만한 공간이 있는가? 의자왕은 망국의 군주였다는 점에서 어느 모로도 미화될 수 없는 인물이다. 절대 군주 시대에 나라를 잃는 것은 결국 그 시대 최고 지배자인 군주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필부(보통 남자)에게도 책임이 있다(天下興亡匹夫有責)'는 고염무의 말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일이며, 그 시대의 지배 계급이야말로 흥망의 일차적 책임자이다. 그런 점에서 의자왕이나 경순왕, 공양왕, 순종황제 모두가 역사에 책임이 무거운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 같은 역사의 문책이 정도를 지나치는 것은 결코 온당한 필법이라고 할 수 없다. 의자왕의 경우가 그렇다. 우선 삼천궁녀 얘기만 해도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총 호구 수는 76만 호였으며, 총인구는 620만 명 정도였다.

우리가 백제의 옛 땅이라고 알고 있는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의 현재 총 호구 수가 170만 호에 인구가 574만 명인데 1400년 전 백제 인구가 지금보다 많았다는 점이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여기에는 엄청난 역사적 논쟁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백제의 영토가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가 아니라 보다 방대한 해상 강국이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또 다른 주제이므로 여기에서 더 이상 소상하게 다룰 수가 없다.).

백제가 멸망하던 날, 궁녀들이 백마강에 투신 자살한 것은 사실로 확인이 된다. 심국유사를 쓴 일연의 기록에 의하면, 그 날 궁녀들이 왕포암에 올라가 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전한다.(삼국유사 권1 태종 춘추공 조)

고려 시대에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李穀·1298∼1351)이 부여를 돌아보고 '하루아침에 도성이 기왓장처럼 부서지니 천 척의 푸른 바위가 이름하여 낙화암이러라(一日金城如解瓦 千尺翠巖名落花)'라 시를 짓고,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시인인 이존오(李存吾·1341∼1371)가 '낙화암 밑의 물결은 호탕한데 흰 구름은 천 년을 속절없이 떠도누나(落花巖下波浩蕩 白雲千載空悠然)'라는 시를 지은 것을 보면 고려 시대에 이미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백성들의 과음이 심해지자 세종대왕께서 "신라가 망한 것이 포석정의 술판 때문이었고 백제가 낙화암에서 멸망한 것이 모두 술 때문이었으니 백성들은 과음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것(세종실록 15년 10월 28일 정축 조)으로 보아 이 때 이미 낙화암이라는 말이 흔히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동국여지승람](권18 충청도 부여 편·1481)에 이 곳의 지명이 공식적으로 낙화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투신 자살했던 궁녀들의 숫자는 나오지 않는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패망할 당시 수도인 부여에는 총 1만 가구가 살았으니 인구는 4만5000명 정도였으며, 2500명의 군대가 있었다.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인구 4만5000명에 군대는 2500명이었던 도성에서 3000명의 궁녀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 당시의 농업 생산력이나 주거 공간을 감안할 때 과연 가능했을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부여의 인구가 9만5000명인데 현재의 도시 능력으로도 궁녀 3000명을 거느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부여 어디에 3000명을 수용할 주거 공간이 있는가. 그렇다면 '삼천궁녀'라는 말은 누가 먼저 했을까. 어떠한 1차 사료로도 궁녀가 3000명이었고 그들이 낙화암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다. 안정복의 기록(동사강목 권2 경신년 추 7월 조)에 따르면 '여러 비빈들'이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글이 처음 적힌 것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아마도 이홍직의 [국사대사전](지문각·1962)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홍직이 삼천궁녀의 첫 발설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삼천궁녀 얘기는 있었다. 이홍직은 참고 문헌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적어놓았으나 그 책에는 그런 얘기가 없다. 아마도 구전을 그렇게 정리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런 얘기와 함께 의자왕의 평소 공적이나 행실을 비교해 보노라면 나는 의자왕에 대해 일종의 연민을 느낀다. 그는 무왕의 아들로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고 부모에 효성이 지극해 해동증자의 칭호를 들었다. 집권 초기에는 국력이 부강해 신라를 제압했고, 성충, 흥수, 계백과 같은 충신이 있어 선정을 베풀었다.

다만 자식의 죽음으로 복수심에 불타던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해 이뤄진 나당연합군의 정복 전쟁에 대비하지 않은 것은 그의 실책이었다. 결국 재위 20년만인 서기 660년 전쟁에서 패한 그는 중국으로 끌려가 그 해에 죽어 망국의 제후들이 묻히는 망산(芒山)에 매장됐다.

요컨대 의자왕과 낙화암에 관한 역사는 허구이다. 그에 관한 어떤 일차 사료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일제시대 식민지 사학자들이 백제를 비하하기 위해 꾸며낸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의자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주색에 빠져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도리를 하지 않음)했고, 궁녀 3000명을 데리고 살았다는 식으로 역사를 곡필했으며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자료로 그를 인신 공격했다. 그런 점에서 의자왕도 이 나라 역사의 한 원혼이 되어 구천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출처 : 신복룡, [한국사 다시 보기])

고란사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 扶蘇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고, 주위에는 낙화암· 조룡대(釣龍臺·사비성 등이 있다. 절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룡대

낙화암과 조룡대고란사 아래 유람선 선착장에서 보면 백마강 상류 쪽으로 작은 바위섬이 하나 강 위에 떠 있는데 이 바위가 조룡대이다. 당나라장수 소정방이 이 바위에서 백마를 미끼로 사용하여 백제를지키는 용을 낚았다 하여 조룡대라 부르고, 금강이 부여를 지나는 부분을 가리켜 백마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용어 해설]

고란초 : 고사리과에 딸린 늘푸른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잎은 손톱크기보다 작지만 수명은 30∼50년이나 된다. 1년에 2개씩 반점형태의 포자(胞子)가 잎 뒷면에 생겨 나이를 헤아릴 수 있다. 고란초는 이곳 고란사를 제외하고는 부여 근방에서는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부소산성 등산 코스

백제 여인의 절개와 충절로 대표되는 역사적 명소 부소산성은 산이 그리 높지 않고 경관도 좋아 부여를 찾았을 때 한가로이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부소산성 입구->삼충사->영일루->군창터-> 궁녀사당->송월대->사자루->백화정->낙화암->고란사->사자루->부소산 입구로 돌아오는 코스는 2시간 정도 걸린다.

출전 : [답사여행의 길잡이 4 충남] (돌베개, 1995)           이전 위로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