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백제 문화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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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들

공주 무령왕릉 출토 유리동자상소재 :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무령왕릉에서는 108종 2,096점에 이르는 유물이 나왔으며 그 중 1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부장품들은 모두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실제로 지금의 국립공주박물관 건물은 무령왕릉 유물을 전시하려고, 또 그 모양을 본떠 새로 지은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은 부장 유물로 왕과 왕비의 관식, 목걸이와 귀걸이, 허리띠, 은제 팔찌* 등의 장신구, 목제의 머리받침과 발받침, 왕과 왕비의 금동제 신발, 용 모양의 손잡이 장식이 달린 칼 등이 있고, 그밖에 무덤의 수호신 격인 돌짐승과 각종 생활용품, 무덤을 봉하며 제를 지냈던 술병과 술잔, 구리거울 등이 있다. 그 중에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이 무덤이 무령왕의 것임을 밝힌 지석(誌石)과 토지신으로부터 땅을 샀다고 새겨 놓은 매지권(買地券)이다.

왕비의 은제 팔찌 한 쌍에는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州主耳"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경자년은 왕비가 생존했던 520년으로 짐작되는데, 여기에 새겨진 장인 '多利'는 일본의 호류지(法隆寺) 삼존불의작가인 도리(止利)의 집안 선조였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다리는 기록으로 나타난 우리 나라 최초의 공예가이다.

무령왕릉 지석과 매지권

소재 :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지정 : 국보 제163호

무령왕릉 왕의 지석무령왕릉은 1971년 여름에 공주 송산리 6호분의 배수로공사를 하다가 우연하게 발견되었다. 그 해에 무령왕릉을 발굴 조사하였는데, 무덤의 양식은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이었으며, 왕과 왕비의 지석은 널길 중앙에 놓여 있던 돌짐승(石獸) 앞에서 나란히 발견되었다. 왕의 지석은 세로 35cm, 가로 41.5cm, 두께 5cm이고, 왕비의 것은 세로 35cm, 가로 41.5cm, 두께 4.7cm이다.

왕의 지석 앞면의 내용은 사마왕[무령왕]이 나이 62세인 523년(계묘) 5월 7일에 사망하고, 525년(을사) 8월 12일에 그의 유해를 무덤에 안장(安葬)하였다는 것이고, 뒷면은 방위를 표시하는 간지(干支)를 음각으로 새겨 넣은 간지도이다. 왕비 지석 앞면의 내용은 왕비가 526년(병오) 12월에 사망하고, 3년상을 마친 529년(기유) 2월 12일에 그녀의 유해를 무덤에 안장하였다는 것이며, 뒷면은 525년(을사) 8월 12일에 돈 1만매로 사마왕이 지신(地神)에게서 토지를 매입하였다는 내용의 매지권(買地券)이다.

왕의 지석과 더불어 왕비의 지석 뒷면은 525년에 작성하고, 왕비의 지석 앞면은 그녀가 사망한 후인 529년에 추가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릉 지석은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임을 입증해주었고, 무덤을 쌓은 연대도 알게 해주었다. 나아가 지석에 무령왕의 나이와 사망연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웅진 시대 백제정치사의 연구에도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나아가 왕릉에서 발견된 유물들의 제작 시기를 알 수 있어 백제 고분이나 금속공예품 등의 양식 변천 연구의 기준자료로 활용되었다. 국보 163호로 지정되었다.

지석 원문 (김영심 판독)
寧東大將軍百濟斯
麻王 年六十二歲 癸
卯年五月丙戌朔七
日壬辰崩 到乙巳年八月
癸酉朔十二日甲申 安?
登冠大墓 立志如左

<이면(裏面)>
未------------------------------亥
丁------------------------------壬
午------------------------------子
丙------------------------------癸
巳------------------------------丑
--戌--------------------------己--
----辰---乙---卯---甲---寅-----

번역문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인 백제 사마왕(斯麻王)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병술일이 초하루인데)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525년) 8월 (계유일이 초하루인데)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大墓)에 올려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 백제조와 『수서(隋書)』 동이전(東夷傳) 백제조에 백제에서는 송(宋)의 원가력(元嘉曆)을 채용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백제에서는 일찍부터 유송(劉宋) 문제(文帝) 원가(元嘉) 20년(423)에 제정된 원가력이 전래되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왕 지석의 이면은 방위표(方位表) 또는 방위도(方位圖)라고 하는데 3면만을 기입하고 상부인 서쪽 방위는 기입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첫째 가운데에 뚫린 구멍을 사방의 중앙으로 정할 경우 석재(石材) 자체가 정방형이 아니고 또 구멍을 위쪽으로 치우쳐서 뚫었기 때문에 서쪽의 방위 표시는 비워두었다는 견해와 둘째 복서(卜筮)관계 혹은 음양방위사상(陰陽方位思想)에 의해 일부가 절단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출전 : 『역주 한국고대김석문』Ⅰ, 1992,, 김영심 판독

왕비 지석

<표면>
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大妃壽
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
未朔十二日甲午 改葬
還大墓立
志如左

<이면>
錢一万文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以前件錢 詢土王
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 故立券爲明
不從律令

출전 : 『역주 한국고대김석문』Ⅰ, 1992,, 김영심 판독

<표면>
병오년(526년) 12월 백제국(百濟國) 왕대비(王大妃)가 천명(天命)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정서방(正西方)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529년) 2월 (계미일이 초하루인데) 갑오일인 12일에 다시 대묘(大墓)로 옮겨서 정식 장례를 지내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이면>
돈 1만매, 이상 1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賣主인) 토왕(土王), 토백(土伯), 토부모(土父母) 천상천하(天上天下)의 이천석질(二千石秩)의 여러 관리들에게 문의하여 남서(南西) 방향의 토지를 매입해서 능묘(陵墓)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명증(明證)을 삼으며 (이 묘역에 관한 한) 모든 율령(律令)에 구애받지 않는다.

출전 : 『역주 한국고대김석문』Ⅰ, 1992, 김영심 번역

무령왕릉 진묘수

무령왕릉 출토 진묘수소재 :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지정 : 국보 제162호

진묘수(鎭墓獸)는 무덤을 지키는 짐승을 말한다. 무령왕릉 진묘수는 뭉툭한 코에 툭 튀어나온 눈을 하고 입을 벌린 채로 지석 뒤쪽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양쪽 옆구리에 날개 같은 것이 조각되어 있고 머리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철제 뿔을 달고 있어 현실적인 동물 모양이라기보다는 상상의 동물이라고 보아야 옳을 듯하다. 입술에 붉은 칠이 있고 몸에도 칠을 했던 흔적이 있어 붉은색으로 귀신 등 삿된 것을 쫓는 전통적인 벽사방식을 하고 있다.
이 돌짐승은 악귀를 막고 사자를 보호하려는 뜻에서 놓은 것으로 중국 한대 이래의 풍습을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의 것이 대개 흙으로 빚은 데 견주어 돌로 만든 것은 역시 뛰어난 문화적 소화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국보 제162호이다.

무령왕릉의 왕과 왕비의 관모 장식

무령왕릉 출토 왕과 왕비의 관식소재 :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지정 : 국보 제154호, 국보 제155호

아름답고 우아한 곡선의 불꽃 모양인 이 관모 장식들은 각각 두매 씩으로 모자의 앞뒤나 양 옆에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의 관모 장식은 전체적으로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불꽃이 치솟는 모양을 표현하였는데 중간 부분은 꽃이 활짝 피어난 모양과 인동당초문을 나타내었다. 얇은 순금판을 불꽃 모양으로 오려 내고 거기에 달개 장식을 달아 입체감을 주고 화려함을 더했다. 국보 제154호이다.

왕비의 관모 장식은 왕의 것에 비하면 좀 도안적이어서 정돈된 느낌을 준다. 연화대좌 위에 꽃병이 놓였고 주위는 인동당초문을 둘렀으며 꽃병에서 한 송이 소담스러운 연꽃이 피어나는 모양이다. 달개 장식이 달리지 않아 왕의 관모 장식보다 소박해 보이나 전체적으로 불꽃 모양을 이루고 있는 점은 같다. 국보 제155호이다.

금제 뒤꽂이는 출토 상태로 보아 왕의 것으로 보이는데, 얇은 금판을 새처럼 날렵한 모양으로 오려 내서 섬세한 무늬를 눌러서 만들었다. 국보 제159호이다.

그밖에도 왕과 왕비의 섬세한 귀걸이, 유리구슬을 꿰어 만든 목걸이, 팔찌와 반지들이 있고, 왕의 부장품으로는 허리에 찬 환두대도의 손잡이 부분에 용 새김이 매우 특이하며 왕비의 허리부분에서는 장도(粧刀)와 함께 3cm 크기의 귀여운 유리동자상도 나왔다. 눈 코 입이 간결한 선으로 표현되고 두 손을 앞가슴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이 동자상은 왕비가 생전에 늘 품에 지녔던 호신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토록 귀중한 유물과 유적이 너무나 서투른 발굴로 제대로 갈무리되지 못한 점이 있다. 당시 발굴을 주도했던 김원룡박사는 이를 두고 뒤에 학자적인 양심의 가책을 깊이 토로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참고] 김원룡 박사의 무령왕릉 발굴 회고담

런던에서 돌아온 다음해, 1970년 5월부터 19개월 동안 나는 본의 아니게 국립박물관장을 지내야만 했다. 25년 동안이나 관장이었던 김재원 씨가 정년으로 그만두게 되었는데, 갑자기 후임자가 없었던 것이다. (중략)

그 열아홉 달의 마지막을 장식해 준 것이 1971년 7월에 발굴한 공주 무령왕릉이었다. 그 무렵 문화재관리국은 공주의 한 벽화고분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그 뒤쪽에 도랑을 파고 있었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의 모습그러다가 7월 5일 한 인부의 괭이 끝에 벽돌이 걸렸다. 그것이 바로 무령왕릉 앞면 벽의 윗 모서리였다. 벽돌을 따라 파 내려가니 입구인 듯한 아치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발견은 7월 6일 서울로 급히 보고되었다. 7일은 수요일이고 아침에 문화공보부에서 기관장회의가 있었다. 그때 문화재관리국장이던 허련씨는 공주에 관해 장관에게 보고하면서 전문가인 김 아무개관장을 현지에 보내 달라고 내 이름을 세 번이나 입에 올렸다.

그것을 장관이 받아서 "그러면 전문가 김 아무개 곧 내려가 보시오"라고 해서 모두 크게 웃었다.

그래 그날로 공주에 내려가서 계속 파 내려가니 벽돌로 막고 강회로 단단하게 바른 입구가 나온다. 무덤이 틀림없었으나 아무도 그것이 무령왕릉일 줄은 꿈에도 예기치 못했고, 또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신라 고분과는 달리 고구려나 백제 고분은 출입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열이면 열 모두 도굴되어 있는 것이다. 그날 저녁은 큰비가 내렸다. 우리는 밤을 새워 무덤 앞에 도랑을 파서 빗물을 돌려야했다. 다음날은 다행히 비가 그쳤으나 문 앞의 강회가 콘크리트처럼 단단해 입구를 막은 벽돌의 맨 윗줄을 들어낸 것은 오후도 늦은 때였다. 그런데 그 구멍으로 들여다보니 터널형의 연도에는 항아리가 굴러 있고 돌 짐승 한 마리가 지석 두 장을 앞에 놓고 우리들을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함께 들여다본 국립공주박물관장 김영배씨와 나는 가슴이 덜컹하였으나 주위사람들이 눈치 못 채도록 입을 다물고 벽돌을 떼어 갔다. 그리고 중간쯤에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지석 첫머리에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라고 되어 있다. 무령왕이다. 우리 나라 고분은 연대나 이름을 써넣지 않는 것이 하나의 특색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무덤을 파도 가장 중요한 연대를 알 수 없는 것이 공통된 안타까움이고 그것이 또 우리 고대 문화나 역사를 밝히는 데 근본적인 장애로 되고 있다. 그래서 유적을 파나 무덤을 파나 우리들의 가장 큰 소망은 연대가 써 있고 명문이 써있는 유물들을 발견하는 것이고, 나 자신도 꿈에서 그런 물건을 파내고 이게 웬일인가 기뻐하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눈앞에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일본의 어느 유명한 고고학자는 그런 행운은 백년에 한 번이나 올까말까 하다고 나를 축하해 주었지만, 이 엄청난 행운이 그만 멀쩡하던 나의 머리를 돌게 하였다. 이 중요한 마당에서 나의 고고학도로서의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일어난 것이다. 무령왕의 이름은 전파를 타고 전국에 퍼졌고, 무덤의 주위는 삽시간에 구경꾼과 경향 각지에서 헐레벌떡 달려온 신문기자들로 꽉 찼다.

우리 발굴대원들은 사람들이 더 모여들어서 수습이 곤란해지기 전에 철야작업을 해서라도 발굴을 속히 끝내기로 합의하였다.

철조망을 돌려치고, 충분한 장비를 갖추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눌러앉았어야 할 일이었다. 예기치 않던 상태의 흥분 속에서 내 머리가 돌아 버린 것이다. 우리 나라 발굴 사상 이런 큰 일에 부딪친 것은 도시 처음인 것이다.

카메라를 서너 개씩 둘러멘 기자들은 어서 사진부터 찍게해 달라고 야단이다. 그래 입구에서 안쪽으로 한 신문사마다 2분씩만 찍기로 약속했는데, 그것은 약속뿐이고 카메라를 대자 발을 뗄 줄 몰랐고, 안으로 마구 들어가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기까지 했다. (중략) 그 북새통 속에서 나는 무령왕 쪽을 맡고 김영배 씨는 왕비 쪽을 맡아 정리하기로 하였다. 급히 발전기를 돌려서 어두운 전등을 켜 보니까 썩어서 내려앉은 관의 널들이 방안에 가득 깔려 있다. 그것을 광목에 싸서 하나하나 들어내니 바닥 벽돌 틈에서 나무뿌리들이 수세미처럼 바닥을 덮었고 썩은 널 사이사이에 구슬이니 금장식들이 흩어져 있었다.

사실은 몇 달이 걸렸어도 그 나무뿌리들을 가위로 하나하나 베어내고, 그러고 나서 장신구들을 들어냈어야 했다. 그런데 그 고고학 발굴의 ABC가 미처 생각이 안 난 것이다. 어두운 데서 메모를 하고 약도를 그리며 물건을 들어내는 작업이 꼬박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하여튼 유물을 들어내고 바닥은 청소되었다. 아무리 변명하여도 장신구 원상들이 소홀히 다루어진 것은 분명하였다. 큰 고분을 발굴하면 불길한 재난을 당한다는데 내가 바로 그것을 당한 것이다. 고고학도로서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아니 그보다 1년 뒤는 나 자신이 파산해서 집을 내놓는 변이 일어났다. 그러나 무령왕릉 발굴의 쓰라린 경험은 그 뒤 경주 고분을 발굴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이 되었다. 그저 그것으로 스스로 위안할 뿐이다.

(김원룡, '죽은 사람들과의 대화―고분에서 배우는 일생', [노학생의 향수])

출전 : [답사여행의 길잡이 4 충남] (돌베개, 1995)                이전 위로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