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백제 문화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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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미륵사지 탑지 발견과 동탑 복원    이전 목차 다음

익산 미륵사지 탑지(사리장엄) 발견

탐방 과제 : 미륵사지 서탑의 탑지를 넣도록 한 사람은 누구인가?

익산 미륵사지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箕陽里) 104-1번지에 있는 미륵사터로서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익산시에서 관리하고 있고 면적은 1338만 4699㎡으로, 마한의 옛 도읍지로 추정되기도 하는 금마면의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추정 규모로는 한국 최대의 사찰지이다. 백제 제30대 무왕(600~641년) 601년(무왕 2)에 왕후의 청으로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국보 제11호인 동양 최대의 미륵사지 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 8월 원광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도 발견되어 1992년 복원하였다. 건물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창건 설화 백제 최대의 익산 미륵사의 창건 설화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기록에는 미륵사 인근 오금산(현재 이산토성 쌍릉)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마를 캐며 홀어머니와 살던 마동이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하는 서동설화와 미륵사 창건설화로 되어있는데 선화공주와 결혼한 후 왕이 된 무왕이 왕비와 더불어 용화산(현재 미륵산)에 있는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자 왕비가 무왕에게 절을 세우기를 청하여 미륵삼존을 위한 전(殿)ㆍ탑(塔)ㆍ낭무(廊?)를 세 곳에 세웠다고 한다 미륵사 창건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발굴조사를 통해 못을 메운 흙이, 산흙이라는 점과 가람이 3원으로 구성된 것 등이 확인됐다.

창건 동기 : 미륵사지는 미륵삼존불의 출현으로 절을 짓게 되었으며 미륵이 이 세상에 와서 3번의 설법을 하기 위한 3군데의 장소를 마련하였으며, 미륵이 머무를 장소로 금당에 지하공간을 설치하는 등에서 확인 되듯이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내려오기를 발원하여 건립된 것이다.

구조와 출토된 유물 : 미륵사지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 일제강점기 때 이미 조사되기 시작했으며, 그 뒤 1980년대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의 결과로 동탑과 서탑 사이에 목탑을 세워서 일직선상에 탑 3개를 배열하고, 각 탑의 북쪽편에 금당을 1개씩 둔 가람 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한 쌍의 금당과 석탑에는 각기 회랑이 둘러져 있어 탑과 금당을 1개의 절로 생각할 때 마치 3개의 절이 모여 있는 듯한 3원식(三院式)의 구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3개의 금당에 모두 지하공간이 있는 특이한 구조의 건물이다. 이 절터에서는 막새기와ㆍ토기ㆍ불상 등을 비롯하여 1만여 점의 각종 유물이 나왔으며, 특히 '미륵사'라든가 '국 5년 경진'(國五年庚辰)ㆍ'요봉원'(姚奉院)ㆍ'지원 4년'(至元四年)ㆍ'천력 3년'(天歷三年) 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아래의 관련 사진 및 번역문 참고

출전 : http://blog.daum.net/yum815/17441292

익산 미륵사지 서석탑(국보 제11호)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와 금제사리봉안기 음각 금판

금제사리봉안기 :가로 15.5㎝ 세로 10.5㎝)

음각 금판 전면

*.앞면에는 붉게 주칠을 하여 문자를 선명하게 나타나게 하였다.

금제사리봉안기 (金製舍利奉安記) 음각(陰刻) 금판(金板) 전면 내용

<탑지(금제사리봉안기) 원문>


金制舍利奉安記

(앞면)

竊以法王出世隨機赴
感應物現身如水中月
是以託生王宮示滅雙
樹遺形八斛利益三千
遂使光曜五色行?七
遍神通變化不可思議
我百濟王后佐平沙?
積德女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撫育萬
民棟梁三寶故能謹捨
淨財造立伽藍以己亥

(뒷면)

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
願使世世供養劫劫無
盡用此善根仰資 大王
陛下年壽與山岳齊固
寶曆共天地同久上弘
正法下化蒼生又願王
后卽身心同水鏡照法
界而恒明身若金剛等
虛空而不滅七世久遠
?蒙福利凡是有心
俱成佛道

탑지 번역문

가만히 생각하건데, 法王(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셔서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감응(感應)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왕궁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사리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오색(五色)으로 빛나는 사리(舍利)를 7번 요잡(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삼라만상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639년)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원하옵건대 세세토록 하는 공양이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으로써 자량(資糧)이 되어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건대 왕후 당신의 마음은 수경(水鏡)과 같아서 법계(法界)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과 같아서 허공과 나란히 불멸하시어 칠세(七世)의 영원토록 다함께 복되고 이롭게 하고, 모든 중생들이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미륵사지유뮬전시관)

탑지(금제사리봉안기) 음각 금판 후면

탑지(금제사리봉안기) 음각 금판 후면 내용

익산 미륵사지 동탑 복원

탐방 과제 : 익산 미륵사지 동탑의 처마의 각도가 서탑과 다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소재 :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1993년 복원, 높이 27.67m, 기단 12.4m

이 미륵사지 동탑은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조사에 의해 목탑지가 아니라 석탑이 있던 곳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1980년대부터 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를 계속하여 노반 덥개석, 노반석 등 각층 부재의 출토로 탑의 높이가 9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복원되었다. 예산 부족으로 기계를 이용해서 깎았기 때문에 탑 같은 느낌이 전혀 안 들었으나, 최근에 이끼가 좀 끼고 연륜이 쌓이면서 이제는 제법 탑 같은 느낌을 주기 시작하였다.

2012년 4월 21일 빗속의 미륵사지 동탑 (이창호 사진)

☞ [참고] 서동과 선화공주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인데 그의 어머니가 홀로 경사(京師)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의 용과 교통하여 그를 낳았다. 그는 마를 캐다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맛동(薯童)이라 불렀다. 맛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신라의 서울에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선화공주가 맛동을 남몰래 숨겨두고 밤마다 안고 논다”라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 노래가 유행하여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맛동은 도중에 기다리고 있다가 쫓겨난 공주를 데리고 백제로 왔다. 공주는 쫓겨날 때 어머니에게서 받은 순금 한 말을 내놓으며 살아갈 방도를 세우자고 했다. 맛동은 그런 물건이라면 자기가 매일 마 캐는 곳에 흙처럼 쌓여 있다고 했다. 그곳에 가보니 정말 금이 많았다. 그 금을 진평왕에게 보내기로 하고 끌어모아 언덕처럼 쌓은 후 용화산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의 힘을 빌어 하루 만에 모두 신라 궁궐로 보내 주었다. 진평왕은 그 신묘함에 놀라 맛동을 존경하게 되었고, 맛동은 그 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삼국유사] 기이 무왕편)

    출전 : [답사여행의 길잡이 1 전북] (돌베개, 1994)            이전 위로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