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백제 문화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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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

소재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지정 : 사적 제5호

부소산 백화정 밑에서 내려다본 백마강백제탑의 저녁노을,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봄날 백마강가 아지랑이, 고란사의 은은한 풍경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간간이 내리는 부슬비, 낙화암에서 애달프게 우는 소쩍새,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빛,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떼, 규암나루에 들어오는 돛단배. 부여의 팔경이다. 이중 수북정, 고란사, 낙화암이 부소산에 있고 다른 네 가지도 부소산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풍경들이니 부소산은 부여팔경을 다 누릴 수 있는 곳이라고도 하겠다.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으로 부여의 북쪽인 쌍북리에 있는 해발 100m쯤 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구릉이다. 북으로 강을 두르고 바로 산이 막아선 형상이 북으로부터 내려오는 고구려 군사를 방비하기에 알맞게 되어 있는 점이 공주의 공산성과 흡사하다. 그래서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경기도 하남 위례성터와 함께 백제식 도성 방식을 보여 준다.

이 부소산에는 왕궁과 시가를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던 백제의 부소산성이 있다. 산성이 완성된 것은 성왕이 538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던 무렵으로 보이나 그보다 앞서 500년쯤에 이미 그 선왕인 동성왕이 산봉우리에 산성을 쌓았고, 후대에 무왕이605년에 고쳐 다시 쌓았다.

성곽은 산정에 테뫼식(머리띠식)으로 산성을 쌓고, 그 주위에 다시 포곡식(성의 내부에 낮은 분지가 있는 형식)으로 둘렀으며 축조 방식은 흙과 돌을 섞어 다진 토석혼축식이다. 경사면에 흙을 다진 축대를 쌓아 더욱 가파른 효과를 낸 성곽이 2,200m에 걸쳐 부소산을 감싸고 있다. 사적 제5호이다.

부소산성에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삼충사(三忠祠)가 있다. 백제 말의 3충신인 성충ㆍ흥수ㆍ계백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데 1957년에 처음 세워졌고 1981년에 지금처럼 대대적으로 만들었다.

부소산 사자루5분 남짓 더 걸어가면 있는 영일루는 사비성의 동대(東臺)가 되는 영일대가 있던 자리이다. 지금 건물은 1964년에 홍산에 있던 홍산문루를 옮겨 지은 것이다. 부소산의 동쪽 산봉우리이니만큼 아침 해뜨기를 보기에 안성맞춤이어서 '해 맞는 곳'으로 이름이 붙었겠다.

그 아래쪽으로는 군창터가 있어 너른 터에 철책을 둘러놓았다. 백제 때에 군대 곡식창고였다고 한다. 지금은 잔디를 심어놓았지만, 땅속을 파면 불에 검게 탄 쌀이나 보리, 콩이 나온다고 하는데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저항하던 백제군이 군량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1915년에 한 국민학생이 칡뿌리를 캐다가 처음으로 발견했다니 땅속에 묻힌 지 1,250년만의 일이다.

군창터 옆에 움집 두 채가 있어 이채로운데, 이것은 백제 때 군인들의 움막을 발굴 복원해 놓은 것이다. 1m가 채 못 되게 움을 파고 사방에 벽을 두른 뒤 지붕을 얹은 모습인데, 가운데 화덕에서 나는 연기를 빼려고 환기창을 달아 놓은 것이 재미있다. 바로 옆에 본래 움집터를 발굴한 곳은 현대식 건물을 지어 놓고 볼 수 있게 했다.

부소산 가장 높은 곳에는 사자루(泗泚樓)가 있다. 한자가 '사비'(泗沘)와 비슷하나 왜 사자루가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백제 때에는 송월루(送月樓)가 있었으니 해맞이 영일루와는 반대로 달을 보내는 곳이다. 지금 건물은 1919년에 당시 군수가 임천의 문루였던 개산루를 뜯어다 짓고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현판 '백마장강'(白馬長江)의 시원하고 힘찬 글씨는 근대 서예의 한 봉우리인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쓴 것이다.

백화정바로 아래쪽으로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육모지붕의 백화정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힘들지 않은 걸음이라도 땀이 났을 만한데 백마강 강바람에 땀을 식히기에 안성맞춤이다. 부소산성에 오르는 이들은 대개 여기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실은 그 바로 아래 나무 모양의 난간을 두른 자리가 백마강이 휘돌아 가는 모습이 배경으로 더 근사하게 잡히는 곳이다.

아래쪽에 낙화암이 있다. 사비가 나당 연합군의 발 아래 유린될 때에 삼천 궁녀가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아래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에 더 잘 보인다. 삼천궁녀 전설로 해서 낙화암(落花巖)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국유사}에는 원래 이름이 '타사암'(墮死巖)이니 곧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다. 사실과 전설의 차이는 이런 이름에서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끔찍한 역사도 세월의 더께는 그런 대로 옷을 입혀 준다.

조선 숙종때의 사람 석벽 홍춘경은 이곳에 와서 낙화암에 비추어 백제의 스러짐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읊조렸으니 오늘에 와서도 쓸쓸한 부소산성과 잘 어울린다.

나라가 망하니 산하도 옛 모습을 잃었고나

홀로 강에 멈추듯 비치는 저 달은 몇 번이나 차고 또이즈러졌을꼬

낙화암 언덕엔 꽃이 피어 있거니

비바람도 그 해에 불어 다하지 못했구나
가파르게 내려가는 계단 길 왼쪽에 약수가 유명한 고란사가 있다. 바위 절벽 좁은 터에 법당 한 채를 돌아가면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물을 한번 맛보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북적하다.

왕에게 이 약수물을 올릴 때 반드시 띄웠다는 고란초는 바위 틈새 어디엔가 숨어서라도 있을 법한데, 너무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서인지 찾아보기가 어렵다.

절벽 아래쪽에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백제대교가 놓인 규암나루까지 갈 수 있는데 배를 타면 반드시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하는 유명한 노래를 들을 수 있으니, 한번쯤 유행가 가락에 실려 보는 것도 좋겠다.

사비 도성의 후원이기도 했던 부소산성은 한갓진 산책로로는 그만이다. 시내에서 올라 사자루를 거쳐 낙화암과 고란사까지 이르는 길은 천천히 걸어 2시간 남짓 걸린다.
 

고란사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 扶蘇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고, 주위에는 낙화암·조룡대(釣龍臺)·사비성 등이 있다. 절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룡대

낙화암과 조룡대고란사 아래 유람선 선착장에서 보면 백마강 상류 쪽으로 작은 바위섬이 하나 강 위에 떠 있는데 이 바위가 조룡대이다. 당나라장수 소정방이 이 바위에서 백마를 미끼로 사용하여 백제를지키는 용을 낚았다 하여 조룡대라 부르고, 금강이 부여를 지나는 부분을 가리켜 백마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용어 해설]

고란초 : 고사리과에 딸린 늘푸른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잎은 손톱크기보다 작지만 수명은 30∼50년이나 된다. 1년에 2개씩 반점형태의 포자(胞子)가 잎 뒷면에 생겨 나이를 헤아릴 수 있다. 고란초는 이곳 고란사를 제외하고는 부여 근방에서는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부소산성

백제 여인의 절개와 충절로 대표되는 역사적 명소 부소산성은 산이 그리 높지 않고 경관도 좋아 부여를 찾았을 때 한가로이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부소산성 입구->삼충사->영일루->군창터->궁녀사당->송월대->사자루->백화정->낙화암->고란사->사자루->부소산 입구로 돌아오는 코스는 2시간 정도 걸린다.

출전 : [답사여행의 길잡이 4 충남] (돌베개, 1995)                이전 위로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