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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6 (화) 23:56
분 류 문화사
ㆍ조회: 14362      
[고려] 고려 문화 (민족)
고려(문화)

세부항목

고려 역사 개관
고려의 성립과 발전 1
고려의 성립과 발전 2
고려의 제도
고려의 대외 관계
고려 문화
고려의 역사적 성격
고려 시대 연구사
고려 시대 참고문헌  

[국가 불교의 성격]

고려는 불교 국가라 할만큼 불교가 성행하였다. 유교가 고려의 정치 이념이 되었다면, 불교는 정신계의 지도 이념이 되었고, 현실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불교는 고려 시대의 문화·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불교의 발달은 왕실·귀족들의 두터운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왕실·귀족들은 불교가 국가나 개인의 현세 생활에 행복과 이익을 준다고 믿고 열심히 숭상하였다. 고려의 불교가 현세 구복적이고 호국적인 성격을 띤 것은 이 때문이었다. 왕실·귀족이 국가를 비보하고 국리민복을 가져다주는 불교를 국교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의 숭불 정책은 이미 태조 때부터 실시되었다. 태조는 ‘훈요십조’ 제1조에서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제불의 호위에 의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사원을 세워 주지를 보내어 수호하게 하고 각기 그 업을 닦게 하라.”고 하여 자손들에게 불교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태조는 개경에 법왕사(法王寺)·왕륜사(王輪寺)·흥국사(興國寺) 등 10개의 사찰을 지었다. 문종 때는 2,800칸이 넘는 흥왕사(興王寺)를 건립해 번성할 때는 개경에만도 70개의 불사가 즐비할 정도로 불교 왕국의 면모를 이루었다.

불법이 국가를 비보한다는 관념은 사원의 건립뿐 아니라 각종 불교행사의 실시로도 나타났다. 정월보름날(뒤에는 2월 15일)의 연등회(燃燈會)와 11월 15일의 팔관회(八關會)는 가장 커다란 불교행사였는데, 그것은 군신이 가무와 음주로 함께 즐기며, 제불과 천지신명에 제사해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또한, 호국 경전인 〈인왕반야바라밀경 仁王般若波羅蜜經〉을 독송하는 인왕도량(仁王道場)이 설치되어 국가의 안태(安泰)를 빌었다. 이 때 승공양의 불사인 반승(飯僧)이 행해졌다.

현종 때 외적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간행했던 것도 불교 행사가 국가 호위에 큰 목적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장경 간행은 현종 때 시작해 문종 때 이르러 6천여 권의 대장경 조판이 완성되었다. 그 뒤 선종 때 의천(義天)이 송·요·일본으로부터 불서를 사들여 4,700여 권의 ≪속장경 續藏經≫을 간행했고, 다시 고종 때 강화도에서 몽고병의 침입을 격퇴하려는 의도에서 이른바 ≪팔만대장경≫을 간행하였다.

국가 불교의 성격은 국가가 관할하는 승과 제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승과는 종파에 따라 교종선(敎宗選)과 선종선(禪宗選)으로 나누어지고, 급제자에게 다같이 대선(大選)이라는 첫 법계를 주었다. 그들이 승진하면 교종은 승통(僧統), 선종은 대선사(大禪師)라는 최고의 호를 받았다. 또한, 고승을 국사·왕사로 삼아 신앙면에서 국가·왕실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게 했는데, 그것은 승려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직이었다.

불교에 대한 국가적 뒷받침은 사원에 대한 경제적 후원에도 나타났다. 국가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사찰을 건립했고, 토지를 지급하였다. 사원전에는 면세의 특권을 주어졌으며, 왕실·귀족의 토지 희사와 농민들의 투탁에 의해 더욱 확대되어갔다. 또한, 승려에게는 면역의 특권을 주었다. 그러자 백성들이 다투어 출가해 승려의 수가 증가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왕실·귀족 출신으로 승려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고려 불교의 귀족성에서 나온 현상이었다.

[천태종의 성립]

초기에는 5교·9산의 신라 불교가 그대로 계속되어 교종과 선종의 대립이 있었는데, 집권적인 지배 체제의 확립과 함께 교종 불교가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교종은 신라 때도 통일과 화합의 사상으로 왕권을 옹호해준 불교였지만, 신라 말기 호족 세력의 기반 위에 선종이 유행하면서 한때 쇠약해졌으나,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다시 세력의 신장을 보게 된 것이다. 고려는 교종과 선종을 동등하게 병립시키면서도 교종 우위의 정책을 썼던 것이다.

국가적 안정을 위해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지양하기 위한 교선합일(敎禪合一)의 운동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천태종(天台宗)의 성립으로 나타났다. 국초부터 중국의 천태종을 받아들여 연구하고, 광종 때는 체관(諦觀)이 ≪천태사교의 天台四敎儀≫를 지었지만, 당시에는 하나의 종파로서 성립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의천이 송나라에 건너가 그것을 연구하고 돌아와 천태종을 창설함으로써 독립된 종파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는 고려불교계의 일대 혁신이었다. 의천은 교종과 선종의 대립에서 오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범불교 운동을 일으켜 교관 겸수(敎觀兼修), 즉 교선의 일치를 주장하고 천태종을 폈던 것이지만, 실제로는 교종인 화엄종(華嚴宗)에 서서 선종을 흡수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천태종은 잡념을 정지하고 지혜로써 사물을 관조하는 지관(止觀)을 중히 여겨 그 실천수행법이 선종의 그것과 비슷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법화경을 정종으로 삼는 통일적이고 지적인 종파로, 왕권 우위의 중앙 집권적 귀족 사회에 알맞은 사상이었다. 의천이 천태종을 일으킴으로써 고려의 불교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게 되었다.

[조계종의 발전]

무신란 이후 불교계에 새로운 기운이 나타나게 되었다. 곧 선종인 조계종(曹溪宗)의 발전이었다. 의천이 교종과 선종을 융합해 천태종을 개창했지만, 그것은 교종 위주로 한 것이었고, 무신집권기에는 그에 대신해 선종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처음 무신정권이 성립하자 불교계에는 격렬한 반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왕실·귀족의 비호를 받고 문신과 결탁된 사원 세력이 무신란으로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들 무신 정권에 항쟁한 사원 세력은 당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교종측이었다. 왕실의 권위를 부정하고 문신 귀족 정치를 붕괴시킨 무신 정권에 대해 당시 교종 중심의 불교계는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러한 교종 사원의 반란은 무신 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쇠퇴하게 되었으며, 그에 대신해 선종 세력이 흥륭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말 여초에 호족의 옹호를 받았던 선종은 왕실·귀족과 밀착된 권위주의적인 교종에 대한 무신들의 생리와도 상통되는 것이었다. 선종은 경전에 의한 복잡한 이론적 접근을 배격하고 참선을 통한 불교 신앙을 그 중심 내용으로 삼았기 때문에 소박한 무인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특히 선종의 혁신성은 종래의 문신 귀족에 의한 기성 질서를 무너뜨리고 성립된 무신 정권의 성향에 알맞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무신 정권은 교종 사원의 반란을 탄압하는 반면 선종 세력에 두터운 후원을 보냈다. 그 때 선종 자체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지눌(知訥)이 새로운 불교 이론을 구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선종 위주의 불교 혁신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지눌은 돈오점수(頓悟漸修)·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창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자성을 깨닫는 한편 화엄 교리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으로, 선종을 위주로 교종을 융합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불교 혁신 운동은 무신란 이후 정치적·사회적 변혁의 분위기 속에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눌의 선종 신풍 운동은 조계종으로 성립되고, 혜심(惠諶)에게 계승되어 교단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고, 다시 몽여(夢如) 등의 후계자에 의해 발전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조계종의 성립과 발전은 불교계에 있어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종래의 교종 중심의 불교를 선종중심으로 옮기게 했고, 선종 자체도 새로운 혁신의 기풍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리 나라 불교사의 일대 전환이 되었다. 따라서, 조계종은 종래의 교종과는 달리 정치적이며 세속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왕실·귀족에 대신해 민중을 저변으로 한 종교로 기반을 확대할 수 있었다.

특히, 조계종의 심성에 대한 철학적 사상 체계는 고려 후기에 성리학을 수용하는 바탕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조계종의 혁신적 기운에도 불구하고 고려 후기의 불교계는 점차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당시 집권 세력인 권문 세족의 후원을 받은 사원은 막대한 농장을 겸병하고 고리대나 양주(釀酒)로 경제적 부를 확대했으며, 승려는 세속화되어 그 비행이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불교가 혼란한 고려 사회를 이끌 수 있는 정신적 이념이 되지 못했으며, 결국 성리학의 수용에 따른 유불 교체의 요인을 만들었던 것이다.

[유학의 발달]

고려 시대에는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채용되어 크게 흥륭하게 되었다. 광종이 과거 제도를 실시하고, 성종이 유신(儒臣) 최승로의 보필을 받아 숭유정책을 펴서, 유교는 정치의 사상 체계로 성립되고 학문적으로도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지배층인 문벌 귀족이 문반으로 구성되고 문치주의를 표방함에 따라 숭문의 풍조는 더하였다.

유학은 귀족 정치의 전성기인 문종 때 크게 융성했으며, 해동공자(海東孔子)의 칭을 받는 최충(崔食)이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세워 사학의 효시가 되었다. 최충의 구재학당은 그의 시호에 따라 문헌공도(文憲公徒)로도 불렸으며, 이를 본보기로 11개의 사숙이 성립되어, 십이도(十二徒)가 성립되었다. 사학의 설립자는 대개 과거의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한 유신들로, 과거 응시를 위한 준비 교육에 치중했기 때문에 과거 준비를 하는 귀족 자제들이 많이 입학하였다.

사학의 융성은 관학인 국자감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는 귀족의 자제들이 명성 높은 사학에만 몰려 국자감교육이 유명무실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숙종은 국자감에 서적포(書籍孃)를 두어 도서를 출판하게 했고, 예종은 국학에 칠재라는 전문강좌를 두어 관학의 부흥을 꾀하였다. 또, 일종의 장학 재단인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해 관학의 재정 기반을 강화했으며, 궁내에 청연각(淸博閣)과 보문각(寶文閣)이라는 학문 연구소를 두어 유학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인종은 학제를 상정해, 안으로 경사육학(京師六學)의 제도를 정하고, 밖으로 주현에 향학을 세워 관학 기관을 정비하였다.

고려가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채용함으로써 신라의 종교적 관념에서 보다 새로운 지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체계가 성립되었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며, 유학은 귀족사회의 발달과 함께 귀족 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융성하였다. 그러나 과거 준비에 급급해 이론이나 사상면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사장학(詞章學)·훈고학(訓鈐學)에 몰두하게 된 유학자들은 유교가 현실 생활에, 불교는 정신 생활을 주안으로 하는 것이라 해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려 시대 유학에 한계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더욱이, 중기 이후 귀족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유학은 시문을 주로 한 귀족 취향의 보수적인 경향으로 흐르는 폐단을 가져왔다.

[성리학의 수용]

후기에는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의 수용을 보게 되었다.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의 폐해는 신진사대부로 하여금 새로운 지도이념을 추구하게 했는데, 때마침 원나라로부터 들어온 성리학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성리학은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신유학이었다. 성리학은 송나라의 멸망 후 원나라에 이어져 성행했는데, 다시 고려에 전하게 된 것이다. 고려는 이미 무신란 이후 심성화된 선종의 흥륭으로 성리학 수용의 터전이 마련되어 있어 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처음으로 소개했고, 그 뒤 백이정(白蓬正)이 직접 원나라에 가서 배워와 이제현(李霽賢)·박충좌(朴忠佐) 등에게 전수하였다. 말기에 이색·이숭인(李崇仁)·정몽주·길재(吉再)·권근(權近)·정도전 등이 발전시켰다. 고려에 수용된 초기의 성리학은 송나라의 주자학이 원나라에 들어와 한 차례 걸러진 내용으로, 형이상학적인 측면보다도 실천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우주론적인 이기론(理氣論)에 대한 사변적(思辨的)인 면은 별로 발전이 없었다. 반면, 일상 생활에 관계되는 실천적 기능이 수용되어 주자(朱子)의 실천덕목의 책인 ≪소학≫이 존중되었고, 또 습속을 바로잡기 위해 주자의 ≪가례 家禮≫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철학적인 이기론에 대한 깊이가 더해갔다. 이색은 불교의 적(寂)을 가지고 성리학의 태극으로부터의 생성론과 ≪대학≫·≪중용≫에서의 경(敬)까지를 포괄하려 하였다. 그것은 불교 철학으로써 성리학 체계를 이해하려는 한계를 보이는 것이었다. 또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고 불리는 정몽주의 저술 중에도 이론적인 배불론(排佛論)이나 이학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도전에 이르러 그의 ≪불씨잡변 佛氏雜辨≫에서 본격적인 이기철학(理氣哲學)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발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성리학의 수용은 사상계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종래의 훈고학적 유학에서 철학적인 유학으로 변화해 새로운 사상체계가 이루어졌고, 유불교체의 계기가 되었다. 그 때까지 고려의 유교는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어 종교적인 불교와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유학이 형이상학적인 철학으로 변화함에 따라 양자는 충돌하게 되었다. 이에 정도전 등 성리학자는 불교를 인륜에 어긋나는 도라고 하여 불교 자체를 공박했고, 이로써 불교에서 유교로의 교체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기에는 성리학이 넓혀져 그때까지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 사상이 쇠퇴하고 새로운 사상 체계인 유교가 흥륭하게 되었다.

[역사학의 발달]

이미 전기부터 유학의 발달에 따라 유교적인 역사 서술체가 정립되었다. 그것은 편년체인 실록편찬에서 비롯되어 기전체인 정사체로 완결되었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으로 많은 역사기록이 불타버렸으므로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 실록이 황주량(黃周亮) 등에 의해 편찬되었다. 문종 때 박인량(朴寅亮)이 ≪고금록 古今錄≫을 저술했으며, 예종 때 홍관(洪灌)이 전부터 전하던 ≪편년통재 編年通載≫에 이어 ≪속편년통재≫를 지어 편년체의 역사 서술이 발달하였다. 인종 때 기전체인 ≪삼국사기≫가 편찬됨으로써 역사 서술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1145년(인종 23) 김부식이 왕명을 받고 편찬한 기전체의 정사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랜 사서이며, 문신 귀족으로서 유교적 역사 의식에 입각해 서술한 것으로 고려 전기 사풍을 대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종교적이며 전통적인 신라의 고대 사관을 탈피해 유교사관의 합리성을 내세웠으며, 당시의 귀족 사이의 분쟁과 송·금의 대립에서 오는 국내외의 불안정 속에서 자체 문화의 고양을 위한 자국 역사의 재구성을 의도했다는 점에 역사의식의 성장을 나타낸다. 그러나 역시 유교적인 문신 귀족의 입장에서 서술했다는 점에 한계를 지니고 있다.

또한, 고종 때 승려 각훈(覺訓)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 역시 교종의 입장에서 편찬한 불교사라는 점에서 ≪삼국사기≫와 그 성격을 같이한 것이다. 후기에는 이러한 유교 사관에 대항해 우리의 고대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새로운 경향이 일어났다. 그것은 무신란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대몽항쟁의 위기를 경험한 지식인들의 민족적 자주 의식의 표현이었다. 고종 때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동명왕편〉과 충렬왕 때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 이승휴(李承休)가 지은 ≪제왕운기≫ 등이 대표적인 저술이었다.

≪삼국유사≫는 같은 우리 나라 고대사를 엮은 사서이지만 ≪삼국사기≫와 성격이 판이하다. 사대적인 유교사관에 입각해 편찬된 기전체의 정사인 ≪삼국사기≫에 대해, ≪삼국유사≫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설화와 야사를 많이 수록하고, 특히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자주의식이 간직되어 있다. ≪제왕운기≫에서도 역시 우리 나라 역사를 단군으로부터 서술했고, 또 〈동명왕편〉에서도 동명왕을 고구려 건국의 영웅으로 커다란 긍지를 가지고 서사시를 쓴 것과 같은 민족의식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한편, 후기에는 유교적인 신흥 사대부의 대두로 ≪삼국사기≫의 전통을 이은 유교사관이 보다 발달하게 되었다. 충렬왕 때 원부(元傅)를 대표로 관찬한 ≪고금록 古今錄≫과 정가신(鄭可臣)이 지은 ≪천추금경록 千秋金鏡錄≫, 충선왕 때 민지(閔漬)가 지은 ≪본조편년강목 本朝編年綱目≫, 공민왕 때 이제현이 엮은 ≪사략 史略≫ 등이 그것이다. 이들 사서는 유교의 합리주의사관이 반영되고, 점차 정통과 대의 명분을 존중하는 성리학적 사관이 나타나는 새로운 경향이 일어나게 되었다.

[문학의 발달]

전기에는 신라 향가의 여맥이 남아 있었다. 대표적 작가인 균여(均如)는 흔히 〈보현십원가 普賢十願歌〉로 널리 알려진 사뇌가 11수를 남겼으나, 예술적인 향기보다는 기교에 치우친 작품이며 찬송가적 느낌이 드는 것들이다. 그것이 향가로서는 마지막 작품이며, 그러한 향가에 대해 새로이 등장하게 된 것이 한문학이다.

과거제의 성립과 관련을 갖는 한문학은, 특히 전기의 과거제가 경전 이해보다는 시문 창작능력을 중시했기 때문에 귀족사회의 필수교양으로 크게 발전해갔다. 성종 때 문신월과법(文臣月課法)이라 하여 문신들에게 매달 시를 지어바치게 했고, 시간을 정하고 시를 지어 문재를 겨루는 각촉부시(刻燭賦詩)가 유행한 것도 모두 한문학의 발전에 이바지한 것이었다.

이 무렵은 설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금관(김해)지방의 수령이라고만 전하는 어떤 문인에 의해 ≪가락국기 駕洛國記≫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또 신라 때부터 전해온 책을 박인량이 보완, 개작했으리라고 믿어지는 ≪수이전 殊異傳≫도 이 무렵 설화의 관심에 대한 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무신란으로 인해 고려 사회는 전반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문학의 경우, 많은 문인들이 세속을 등지고 은거하는 현상이 나타나지만, 문학 자체는 발전해 갔다. 오히려 오세재(吳世才)나 이인로(李仁老) 등은 죽림고회(竹林高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삶의 보람을 찾는 한편 무신정권에 등용되는 길을 열고자 하였다.

한편, 후기에 신흥 사대부의 대두와 함께 새로운 문학 경향이 나타났다. 우선, 시가에 있어 경기체가를 들 수 있다. 〈한림별곡〉·〈관동별곡〉 등으로 대표되는 경기체가는 송악(宋樂) 내지 송사(宋詞)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향가의 형식을 계승한 것으로, 내용의 대부분은 신흥 사대부의 생활상을 반영하였다. 또한, 새로운 시가문학으로 〈어부가〉가 있었다. 경기체가가 관료적 문학이었다면, 이것은 정취를 추구하고 한적한 인생을 스스로 즐기는 처사적 문학이었다.

사대부 계층의 시가와 아울러 장가(長歌) 또는 속요(俗謠)라 불리는 민중의 노래가 유행하였다. 〈동동〉·〈정읍사〉·〈정과정〉·〈쌍화점〉 등은 토속적이며 민중적인 감정을 대담하고 자유분망한 형식으로 읊은 노래로서, 시가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창조한 것이었다.

한문학에서도 이인로의 ≪파한집 破閑集≫, 최자(崔滋)의 ≪보한집 補閑集≫, 이제현의 ≪역옹패설 饑翁稗說≫ 등으로 대표되는 일종의 수필형식인 패관문학(稗官文學)이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임춘(林椿)의 〈국순전 麴醇傳〉, 이규보의 〈국선생전 麴先生傳〉, 이곡(李穀)의 〈죽부인전 竹夫人傳〉 등 사물을 의인화한 가전체 문학이 등장하였다.

또, 한시도 완숙한 경지에 이르러, 이인로는 자못 세련된 시를 읊어 명성을 떨쳤고, 이규보는 〈동명왕편〉에서 자유로운 문장체를 구사함으로써 새로운 문학 세계를 추구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은 하나의 문집 체재를 갖춘 것이었다. 이제현과 이색을 비롯해 이숭인·정몽주 등은 모두 이 시대를 대표하는 한문학자들이었다.

[예술의 발달]

귀족 사회의 발달은 호화로운 예술 문화를 낳았다. 귀족들은 그들의 사치 생활을 충족하기 위해 여러 가지 예술 작품을 만들어 즐겼고, 이로 인해 예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의 예술이란 귀족 취향의 귀족 예술이었고, 일반 서민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다.

귀족 예술을 대표로 한 것이 고려청자였다. 고려청자는 그릇 표면에 독특한 무늬를 넣어 병·항아리·연적 등의 우아한 형태를 만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릇 표면에 양각 또는 음각을 하여 무늬를 새기는 단순한 청자에 불과했으나, 뒤에는 무늬를 음각해 초벌을 구운 다음 그 안에 백토 또는 흑토를 메우고 청자유약을 발라 구워내는 상감청자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상감청자는 고려인이 창안한 특수한 수법으로 고려 자기의 정수를 이루었다.

귀족 문화의 발달은 서화와 음악에도 나타났다. 서예는 왕희지체(王羲之體)와 구양순체(歐陽詢體)가 문신귀족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문종 때의 유신(柳伸)과 인종 때의 승려 탄연(坦然), 고종 때의 최우(崔瑀)가 명필로서 신라의 김생(金生)과 함께 신품사현(神品四賢)이라 일컬어졌다.

회화도 왕실과 귀족들의 취미 생활로 자못 발달했는데, 〈예성강도 禮成江圖〉를 그린 인종 때의 이령(李寧)과 그 아들 광필(光弼)이 유명하였다. 음악 역시 왕실·귀족들의 향락 생활의 소산으로 발달하였다.

아악은 송나라로부터 수입한 대성악(大晟樂)이 궁중음악으로 발달한 것이고, 향악은 신라시대 이래의 고유음악이 당악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것으로 〈동동〉·〈한림별곡〉·〈대동강〉 등의 곡이 유명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청자와 금속공예 등의 귀족 예술이 호화롭고 정교함에 반해, 건축·조각 등의 불교 예술은 신라 시대에 비해 뒤떨어졌다. 고려 시대의 석탑은 신라의 모형을 그대로 계승했으나, 예술성은 퇴보되었다.

경기도 개풍의 현화사(玄化寺) 칠층석탑은 고려의 독특한 형태를 나타낸 것이고, 오대산의 월정사(月精寺) 구층석탑은 송나라 석탑의 영향을 받아 8각으로 이루어졌다. 불상은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아미타여래상이 신라 양식을 계승한 걸작품으로 꼽히지만, 그밖의 것은 거의 뒤떨어진 것이었다. 논산의 관촉사(灌燭寺) 미륵불은 거대하기는 하나 균형이 잡히지 않아 미술적 가치가 적었다.

후기의 예술은 문벌 귀족의 몰락과 선종의 융성으로 퇴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 종풍의 변화와 원나라 예술의 영향으로 조형 미술의 형태와 양식에 변화는 있었다.

후기에 세워진 목조 건축으로는 안동 봉정사(鳳停寺)의 극락전과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조사당, 그리고 예산 수덕사(修德寺)의 대웅전, 안변 석왕사(釋王寺)의 응진전(應眞殿) 등 몇 개가 남아 있는데, 그것들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부석사의 무량수전으로 고려 시대 목조 건축의 일반적 양식인 주심포 양식으로 간결하고 조화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석왕사 응진전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다포양식의 중후장엄한 건축으로 조선 시대 다포 건축의 시초가 되었다.

후기의 석조 건축으로는 탑파와 부도가 있는데, 대체로 미적 감각이 결여되고 형식에 흐르고 있다. 대표적인 석탑은 개풍의 경천사(敬天寺) 십층석탑(현재 경복궁에 이전)이고, 부도는 여주의 신륵사(神勒寺) 보제존자 석종(普濟尊者石鐘)이 있다. 경천사십층석탑은 원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은 이색적인 석탑 형태로, 조선 시대 세조 때 세워진 원각사탑(圓覺寺塔, 현재 서울 파고다공원 소재)의 원형이 되었다. 또한, 보제존자 석종은 전기의 화려한 모양에서 벗어나 인도 불탑의 영향을 받은 소박한 석종형의 부도로 조선 시대 부도 형식의 선구가 되었다.

서예는 신라부터 내려온 구양순체가 주류를 이루었다가, 후기에 이르러 원나라 조맹부(趙孟琅)의 송설체(松雪體)가 들어와 유행하였다. 충선왕 때의 이암(李末)은 그 대표적인 서예가였다. 회화는 자못 발달해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전하는 것은 드물지만 공민왕이 그렸다는 〈천산대렵도 天山大獵圖〉가 남아 있어 당시의 화풍을 보여준다. 그것은 원대 북화(元代北畵)의 영향을 받아 필치가 뚜렷하고 표현이 세밀한 점에 특색이 있다.

또한, 후기에 그려진 불화가 일본에 흘러들어가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혜허(慧虛)의 〈양류관음도 楊柳觀音圖〉가 있는데, 장엄하고 화려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그밖에 사원과 고분의 벽화가 있는데, 부석사 조사당 벽화의 사천왕상(四天王像)과 수덕사 대웅전 벽화의 수화도(水花圖) 등이 유명하다. 특히, 후기에는 신흥 사대부들의 시화 일치론(詩畵一致論)이 유행해 회화의 문학화가 이루어졌다.

[기술학과 인쇄술]

유교를 숭상하는 고려 시대의 기술학은 잡학이라 하여 천시되었다. 그러나 현실 생활의 필요에서 여러 가지 기술학을 일으켜 발달을 보게 되었다. 즉, 국자감에서 유학 이외에 율학·서학·산학 등 잡학을 교육했고, 과거에서도 제술과·명경과 이외에 의(醫)·복(卜)·지리(地理)·율·서·산 등 잡과를 설치하였다. 또 그러한 부문을 담당하는 기구로 천문·역수를 관장한 서운관(書雲觀), 의약치료를 담당한 태의감 등이 있었으므로 기술학은 자못 발달하게 되었다. 먼저 천문·역법에 있어, 서운관에서는 천문〔占星〕·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 등의 일을 관장해 천문관측학과 역(曆)의 계산법이 발달하였다.

천문 관리는 천체 운행을 관측해 그 결과가 ≪고려사≫ 천문지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과학적 가치를 가진 천문관측도 있었지만, 점성(占星)을 목적으로 한 것이 많았다. 특히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따라 천변(天變)을 인간행동의 훈계로 삼으려는 뜻에서 열심히 관측하였다. 그러한 천문 관측은 정확한 역계산을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천문계산표의 개선에 따라 역법이 발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통일신라 때 사용되기 시작한 당나라의 선명력(宣明曆)을 그대로 계승했는데, 중국은 이미 새 역법으로 바꾼 뒤였으므로, 고려는 그 정확한 역계산법을 알지 못해 오차가 생겼다. 그러한 오차를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독자적 역법을 만들지는 못하였다.

충선왕 때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을 받아들여 사용했는데, 천문 관리들은 수시력의 개방술을 완전히 알지 못해 일월교식(日月交食)의 추산법을 몰랐다. 그래서 선명력의 구법에 의해 그대로 추산했으므로 일월식의 추산에 오차가 심하였다.

의학은 학교에서의 교수와 과거에서의 의과 설치로 발달을 보게 되었다. 특히, 궁정 의술에서 평민을 위한 의술로 개방된 점에 그 의의가 크다. 고려 초까지는 의술의 혜택이 왕실이나 귀족층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963년 제위보(濟危寶)라는 서민층의 치료 사업을 담당하는 기관이 설치되고, 989년 내외의 문관 5품, 무관 4품 이상의 질병자에게 의관을 보내어 시약, 치료하게 함으로써 의학 발달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처음에는 송나라 의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전통적인 의약을 개발해 자주적인 의학 체계를 이루었다. 김영석(金永錫)의 ≪제중입효방 濟衆立效方≫, 최종준(崔宗峻)의 ≪신집어의촬요방 新集御醫撮要方≫·≪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 등 고려인에 의한 의서가 나왔다. 특히, ≪향약구급방≫은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의서로 1236년(고종 23)에 초간되었다. 이 책은 그때까지 쓰이던 중국 약재들을 한국산 약재, 즉 향약으로 충당하려 했기에, 우리 나라 의약의 독자적 연구의 계기를 마련한 점에 가치가 있다. 그리하여 고려 말에 이르러 향약의 지식은 본초학(本草學)으로 학문적 결실을 맺게 되어 ≪삼화자향약방 三和子鄕藥方≫ 등 고려의 독자적인 의약서의 출현을 낳게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우경(牛耕)에 의한 심경법(深耕法)이 행해지고 2년3작식의 윤작법이 시행되었다. 후기에는 농업 기술이 더욱 발달해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벼재배도 보급되었다. 특히 이암은 원나라의 농서인 ≪농상집요 農桑輯要≫를 소개해 넓힌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말기에는 목화가 재배되기 시작해 우리 나라 의복 원료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목화는 공민왕 때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재배에 성공해 보급되었다. 이로써 일반 평민의 의료(衣料)가 종래의 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화약의 제조법이 전래되어 화약과 화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원나라·명나라가 화약 제조법을 비밀에 붙여 고려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때 최무선이 중국으로부터 제조법을 배워 들여와 1377년 정식으로 화통도감(火桶都監)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포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전함에 화포를 설치해 왜구격퇴에 위력을 발휘하였다. 1380년 진포(鎭浦)에 침입한 왜선 5백여 척을 화통과 화포로써 격파한 것은 그 첫 실험이었다.

한편 인쇄술의 발달이 특히 괄목할 만하다. 처음에는 대장경과 같이 고정식인 목판 인쇄였으나, 뒤에는 이동식인 활판 인쇄로 발전하게 되었다. 1234년 주자(鑄字)로써 최윤의(崔允儀) 등이 지은 ≪상정고금예문 詳定古今禮文≫ 50권을 인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주자는 금속 활자임이 분명하므로 그 이전부터 금속 활자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속 활자의 발명은 서양의 그것보다 2백여 년이나 앞선 것으로 세계 최초의 일이다. ≪상정고금예문≫은 오늘에 전하지 않지만 다행히 1377년에 간행된 ≪직지심경 直指心經≫이 남아 있어 세계 최고의 것으로 공인받고 있다. 금속 활자의 사용은 고려 말에 더욱 활발해 1392년 서적원(書籍院)을 두고 주자 인쇄를 맡게 하였다.

<변태섭>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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