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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8 (목) 16:58
분 류 문화사
ㆍ조회: 17264      
[조선] 조선 시대의 문화 (민족)
조선(1)(문화) 조선 시대의 문화

세부항목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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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2)(역사적 성격)
조선(2)(연구사)
조선(2)(참고문헌)

1. 한글 창제

우리 민족 문화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훈민정음, 즉 한글 창제이다. 그런데 사실 훈민정음을 ‘한글’이라 부르게 된 것은 20세기 초에 들어와서부터였다. 국자(國字)인 한글이 생기기 전에는 한자만이 사용되었으므로 대단히 불편하였다. 비록,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한 이두(吏讀)나, 한자 자획 일부를 뗀 구결(口訣)로 한문에 토를 달아 읽기도 했지만, 워낙 어려워 일부 양반만이 배우고 썼지, 일반 백성은 문맹자로 살았다.

세종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한글 창제의 취지를 민족 의식과 애민 정신으로 밝혔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의 보다 중요한 역사적 배경은 훈민 정책에 있었다. 고려 말기에 신흥 사족(新興士族)이 권문 세족과 싸워 이긴 것도 당시 농민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과전법에는 소유권 보장 및 10분의 1조 등의 규정으로 농민의 권익을 보장해 생활의 안정을 도모했고, 지위를 향상시켰다.

조선 왕조는 이러한 농민의 기반 위에 세워졌으므로 그들의 생활 안정과 함께 교화하는 정책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조정에서는 농민을 교화하는 데 두 가지 방향을 잡아나갔다. 그 하나는 농업 기술의 지도 보급이요, 다른 하나는 유교 윤리인 삼강오륜의 실천ㆍ권장이었다. 농업 기술의 지도를 위해 태종은 이두로 토를 단 농업기술서를 간행했고, 세종은 ≪농사직설 農事直說≫을 엮어 농민에게 보급하였다.

한편, 삼강오륜의 권장을 통해 왕에 대한 신하의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와 함께 전주(田主)에 대한 전호의 의무까지 하나의 윤리 질서 속에 묶었다. 세종 때 ≪삼강행실 三綱行實≫을 만들어 농민들을 가르치고, 그 뒤에도 이와 비슷한 책들이 잇따라 나온 것은 모두 농민 교화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농업기술서나 윤리 교본 등이 모두 한문으로 되었으므로 무식한 농민을 교화하는 데는 별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때문에 세종은 쉬운 국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세종의 뛰어난 생각과 꾸준한 집념, 그리고 집현전(集賢殿) 소장 학자들의 우수한 두뇌가 어울려 훌륭한 새 글자가 탄생,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1446년(세종 28) 반포되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당시 양반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였다. 양반들은 한문을 진서(眞書)라 하고 훈민정음은 언문(諺文)이라 하여 멸시하였다. 그러나 한글이 창제된 뒤, 조선 건국을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비롯, 부처님의 일대기를 적어 그 공덕을 찬양한 <월인석보 月印釋譜> 등이 한글로 지어졌고, 이 밖에 유교ㆍ불교의 여러 경전들이 한글로 번역, 출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대모화사상에 찌든 양반들에게 중요한 서책은 여전히 한문으로 기록, 간행되어, 한글이 국자로서 제구실을 하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의 일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한글 소설이 나오고 시조 등 한글 시가가 활발히 지어지면서 한글은 자리를 잡아가다가, 한말에 이르러 민족적 자각과 함께 국자로서 우리 문자 생활의 주도적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2. 사상ㆍ종교

[유교]

조선 건국을 추진한 신진사대부의 학문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고려 말기에 전래된 주자학(朱子學)으로서,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심성(心性) 문제를 다루는 철학적인 유학이었다. 성리학은 건국 후 국가의 장려 아래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유학의 두 경향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문예ㆍ사장(詞章)을 주로 하면서 현실적으로는 정치ㆍ경제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학풍이고, 다른 하나는 유교 경전을 통해 유교의 정치 철학을 체득, 이를 정치 현실에 반영시키려는 학풍으로 전자를 관학파(官學派), 후자를 사학파(私學派)라 한다.

관학파는 철학적인 학문보다 실제적인 법전ㆍ전례(典禮)ㆍ문예ㆍ사장 등에 능통하면서 경세(經世)적 학문에 주력, 기성사류(旣成士類)를 형성하였다. 반면, 사학파는 고려 말기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었으며, 그 일부가 성종 때 중앙 정계에 진출, 기성 세력과 대립하는 이른바 사림파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사림파는 계속되는 사화(士禍)로 박해를 받아 관직을 단념하고 은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때문에 그들의 학풍은 16세기 이후 철학적 경향이 짙어져 갔다.

한편,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을 선(善)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통해 유교적인 교화 정치의 이론적 근거를 찾는 학문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주 만물의 원리를 밝혀내려는 철학적 유학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은 주리파(主理派)와 주기파(主氣派)로 갈라졌는데, 주리파는 이언적(李彦迪)에서 비롯되어 이황(李滉)이 대성하였다. 반면, 주기파는 서경덕(徐敬德)에서 비롯되어 이이(李珥)가 대성하였다.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했으나, 그의 이론은 결국 주리적 관점이었다. 주리설에서는 사물의 법칙을 인식하는 것보다 우주의 근원이 되는 생명력에 대한 인식이 더 중요시되었다. 또, 인간의 본질도 실제 행동보다 이념적인 면을 더 추구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도덕적ㆍ인격적 완성을 가장 중시하였다. 주리파는 이황 이후 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ㆍ정구(鄭逑) 등에 계승되어 이른바 영남학파를 이루었다. 또, 이황의 학문은 일본에 전파되어 퇴계학파를 형성케 하고 큰 영향을 주었다.

이이의 주기설은 사물의 법칙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관점에 서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도 이념적이기보다는 실질적인 윤리를 더 중요시하였다. 이에 이이는 비단 철학자로서만이 아니라 정치ㆍ경제ㆍ국방 등 현실 문제에 대해서도 개혁론을 주장하였다. 주기파는 이이 이후 김장생(金長生)과 정엽(鄭曄) 등에 계승, 이른바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이황과 이이는 조선의 유학사상에서 쌍벽을 이루었지만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고, 다만 시대 배경이 그런 차이를 가져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황이 살던 때는 사림이 재야의 비판적 처지에 있었고, 이이가 살던 때는 사림이 중앙 관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기설(理氣說)의 논쟁에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사단이란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의 마음을 각각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실마리로 보는 이론이고, 칠정은 희(喜)ㆍ노(怒)ㆍ애(哀)ㆍ낙(樂)ㆍ애(愛)ㆍ오(惡)ㆍ욕(欲: 欲 대신 懼를 들기도 함.)의 감정을 가리킨다.

조선 후기 주리설은 주자의 학설과 가까워져서 관념론에 중점을 두었다. 때문에 현실을 관념적인 원리로써 정당화시키려는 경향을 띠었다. 이에 비해 주기설은 대체로 실학파 학자에 이어져 현실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현실 개혁에 철학적 근거를 찾으려는 경향을 띠었다. 주리론은 기정진(奇正鎭)ㆍ이진상(李震相) 등에 의해 이일원론(理一元論)으로 발전해 뒤에 척사 위정 사상의 철학적 배경을 이루었다. 한편, 주기론은 임성주(任聖周)와 정약용을 거쳐 최한기(崔漢綺)에 이르러 서양의 경험론과 결합해 발달하다가 그 뒤 개화 사상과 연결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 사회적ㆍ경제적 여러 변화와 함께 실학 사상이 발달하였다. 당시의 학풍은 성리학의 이기설이나 예론(禮論)에 사로잡혀 붕괴되어 가는 사회 질서를 세우는 데 무력하였다. 따라서, 유교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 현실적으로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방향으로 학문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실학의 발생 원인은 임진왜란 이후 자아(自我)에 대한 반성과 서양 사상 및 과학적 지식이 시야를 넓혀준 데 있었다. 실학자의 연구 대상은 여러 분야에 걸쳤으나, 공통 기반은 현실적ㆍ실증적ㆍ독창적ㆍ민족적인 것이었다. 실학자들이 부국 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해 제시한 개혁안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중농적(重農的) 제도 개편론을 편 경세치용 학파(經世致用學派)이고, 또 하나는 중상론(重商論)과 기술 도입론을 편 이용후생 학파(利用厚生學派)였다.

경세치용 학파는 전제(田制)를 비롯, 행정 기구 등 제도상의 개혁에 중점을 두었다. 그에 속하는 대표적 학자로는 유형원(柳馨遠)ㆍ이익(李瀷)ㆍ정약용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자영농 육성을 주장하고, 농민에게도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주어 능력에 따라 관료로 등용하는 농업 중심의 이상적 국가 건설을 기본 목표로 삼았다.

이용후생 학파는 상공업을 일으키고 기술을 도입하며 부국 강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을 흔히 북학파(北學派)라 한 것은 청나라의 문화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에 속하는 대표적 학자로는 유수원(柳壽垣)ㆍ박지원ㆍ박제가(朴齊家)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북학파의 사상은 뒷날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현실 개혁을 위해 청나라의 우수한 문화를 수용하자는 입론은 개화 사상에서 자본주의 선진 제국의 장점을 수용하자는 입론으로 이어진 것이다.

북학파가 국내 산업과 대외 무역을 일으키자는 주장은 개화파가 통상 무역을 강조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또, 조선에서 산업이 뒤지고 백성이 가난한 원인은 놀고 먹는 양반들 때문이라고 지적한 북학파의 주장은 개화기의 민권 사상으로 연결되었다.

[불교]

조선 왕조는 건국과 함께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였다. 태조가 신봉한 종교는 불교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유교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는 도선(道詵)의 밀기(密記)에 지정된 절과 승 100인 이상이 상주하는 절 외에는 토지를 몰수했고, 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첩제(度牒制)를 강화하였다. 태종도 22사(寺)만 사격(寺格)을 인정하고 나머지 사사(寺社)는 노비와 토지를 몰수하였다. 태종 때 몰수된 사사의 노비는 8만여 구였고, 사사전(寺社田)도 전국에 1만 1000결만 남기고 몰수된 것이 5만∼6만 결로 추산되었다. 이로써 불교는 재기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세종은 불교의 7종파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양종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절도 36본산(本山)에만 사격을 인정하고 본산에 7, 950결의 토지만을 보유하게 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자신이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월인천강지곡>을 짓고, <월인석보>를 간행하게 하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궁궐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법회(法會)를 행하는 등 불교를 독신하였다.

세조도 건국이래 불교 억압책을 늦추어 원각사(圓覺寺)를 짓고,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어 많은 불경을 번역, 간행하였다. 그러나 그 뒤 성종ㆍ연산군ㆍ중종은 잇달아 다시 불교 억압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선종ㆍ교종 양종의 중앙 기관이 없어지고, 고려 이래의 승과(僧科)와 승계(僧階)도 폐지되고 말았다.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섭정하면서 중 보우(普雨)를 중용하고 불교를 비호, 일시 활기를 띠었다. 이 때 봉은사(奉恩寺)를 선종, 봉선사(奉先寺)를 교종의 본산으로 삼고, 승과도 부활시켰으나 문정왕후 사후에 불교는 다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우리 나라 승려의 법맥은 크게 두 갈래가 있었다. 고려 말기의 양대 법문인 나옹(懶翁)과 보우(普愚)의 법맥이 그것이다. 나옹의 법사(法嗣)는 무학(無學)ㆍ기화(己和) 등으로 처음에는 세력이 컸으나 그 뒤 법맥이 끊어졌다. 보우의 법맥은 지엄(智儼)ㆍ휴정(休靜)으로 이어져 조선 불교의 정통이 되었다.

휴정은 임란 때 왕의 부름을 받고 의승군(義僧軍)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 문하에서 준수한 제자들이 배출, 조선 불교는 거의 휴정의 종문을 따랐다. 그의 좌선견성(坐禪見性)이라는 교의(敎義)는 불교를 선ㆍ교 양종에서 조계종(曹溪宗)으로 일원화하였다. 그는 염불을 선(禪)과 동일시,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이바지했고 이로부터 염불을 중요한 수행의 방법으로 삼게 되었다. 휴정은 선ㆍ교ㆍ염불의 일원화뿐만 아니라, 유ㆍ불ㆍ선 3교의 일의(一義)를 제창, 후기 불교의 3교합일론의 기원을 이루었다. 휴정의 문하에서는 유정(惟政)ㆍ언기(彦機)ㆍ태능(太能)ㆍ일선(一禪)이 가장 뛰어나 이들에 의해서 4대 종파가 성립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숙종과 정조가 불교를 숭상하였다. 숙종은 진관사(津寬寺)를 재건하고, 정조는 용주사(龍珠寺)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승려의 사회적 지위는 천류로 떨어지고, 불교는 궁중이나 민간에서 부녀자들이나 믿는 종교가 되었다.

[서학]

서학은 서양 문물과 함께 명나라를 통해 전해졌다. 서학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실학자들이었다. 광해군 때 이수광(李邈光)은 ≪지봉유설≫에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천주실의 天主實義≫를 소개한 바 있고, 이익(李瀷)ㆍ안정복(安鼎福) 같은 실학자도 서학에 호기심을 가졌으나 신앙으로서는 비판적이었다. 18세기 말부터 학문의 대상이 되었던 서학은 남인(南人)학자를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 운동으로 번져갔다. 그런데 이 때는 서양 선교사의 전도로서가 아니라,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 서적을 읽고 자발적으로 신앙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1783년(정조 7) 이승훈(李承薰)이 최초로 세례를 받았는데, 당시 신자가 된 이벽(李檗)ㆍ이가환(李家煥), 정약전(丁若銓) 3형제, 권철신(權哲身) 형제 등은 모두 이익의 문인이었다. 당시 천주교 운동은 벌열 중심의 양반 사회와 성리학 지상주의의 사회적 질곡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천주교의 도전은 유교적 의식을 거부한 전례 문제(典禮問題)로 표면화해 박해가 시작되었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에서 윤지충(尹持忠) 등이 처형당한 것을 필두로, 1801년(순조 1)에는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신유사옥은 대왕대비 김씨와 연결된 노론의 벽파(僻派)가 남인의 시파 (時派)를 타도하기 위해 천주교 탄압을 행한 것인데, 이 때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帛書事件)이 일어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그런 탄압 속에서도 1831년(순조 31) 조선교구(朝鮮敎區)가 독립했고, 서양인 신부가 들어와 선교에 힘썼다. 1839년(헌종 5) 기해사옥으로 천주교는 또 큰 탄압을 받았다. 이 무렵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이 귀국해 활동하다가 순교하기도 하였다.

철종 때 천주교에 대한 금압이 다소 느슨해지자 신도가 약 2만 명으로 늘어났다. 천주교도는 처음 남인계 양반들이 많았으나, 점차 무식하고 빈천한 사람들과 부녀자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지역으로는 서울과 그 인근에 신자가 집중되어 있었다.

[동학]

동학은 우리 나라의 독자적인 종교로 철종 때 최제우(崔濟愚)가 양반 사회의 모순을 해소하고, 서양 세력인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힘을 길러야 한다며 창시하였다. 동학 사상은 유ㆍ불ㆍ선 3교와 무격신앙(巫覡信仰)ㆍ음양오행설ㆍ정감록 등 여러 요소가 혼합된 것으로, 그 교리는 ≪동경대전 東經大典≫과 ≪용담유사 龍潭遺詞≫ 등에 담겨 있다.

동학의 기본 사상은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이다. 따라서, ‘인심은 곧 천심이요,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사상은 자연히 사회적 신분을 초월, 만인의 평등을 부르짖게 되었다. 동학이 농민들에게 쉽게 환영받은 까닭은 전통적인 토속 신앙을 수용한 점도 있었지만, 천대받던 농민들까지 평등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동학은 단순한 종교 운동에 그치지 않고, 농민을 중심으로 사회적 모순을 바로잡으며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려는 사회 운동으로 번져갔다.

이에 조정에서는 1863년(철종 14) 교조 최제우를 체포, 처형하였다. 그러나 동학은 농민들에게 양반의 횡포에 저항하고 외국의 침략 세력을 배격하는 운동을 계속하게 하였다. 그것은 동학을 통한 민권 의식과 민족적 국가 의식의 발로였다.

3. 과학 기술

[농업 기술]

여말 선초에 걸친 농업 기술상의 두드러진 변화로는 시비법(施肥法)의 개발에 따라 휴한법(休閑法)을 극복하고 연작법(連作法)을 보급시킨 점을 들 수 있다. 또 논농사를 위한 수리 시설로서 둑(堤堰)을 쌓는 일 외에 16세기부터는 보(洑)를 막는 것이 개발되었고, 벼농사에는 우리 나라의 강우량에 맞춰 건경법(乾耕法)으로 생산량을 늘렸다. 또한 한전 농업(旱田農業)은 연작에 그치지 않고 기름진 땅에는 윤작법(輪作法)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농업 기술의 발달은 고려 말기 이후 신흥사대부들이 중국의 강남농법을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이다.

농업 기술의 개선을 위해서는 농서(農書)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고려 말 이후 원나라의 농서인 ≪농상집요 農桑輯要≫가 간행되기는 했으나, 우리 실정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세종 때 정초(鄭招) 등이 ≪농사직설≫을 편찬하였다. 그 뒤 성종 때 강희맹(姜希孟)은 사철의 농작과 그 기술을 개설한 ≪사시찬요 四時纂要≫와 지금의 시흥 지방인 금양(衿陽)을 예로 농경 방법을 수록한 ≪금양잡록≫을 편찬하였다. 중종 때는 ≪농사직설≫의 보급을 위해 김안국(金安國)이 ≪농사언해 農事諺解≫와 ≪잠서언해 蠶書諺解≫를 간행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농업 기술이 더욱 발달해 수전(水田)은 직파법에서 이앙법으로, 한전(旱田)은 농종법(壟種法)에서 견종법(腔種法)으로 바뀌어갔다. 이앙법은 이미 고려 말기에 삽종(揷種)이라 하여 그 방법이 알려졌다. 이후, 조선 초기에 경상도 북부 일대와 강원도 남부에서 부분적으로 행해지다가 중기에 호서ㆍ호남으로 전파되고, 18세기 전반에는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수전의 7, 8할이 이앙법을 택하였다.

이앙 농법에는 수리 시설이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1662년(현종 3)에는 제언사(堤堰司)가 설치되었다. 1772년(정조 2)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이 반포되는 등 국가가 수리 시설을 뒷받침하였다. 경상도의 경우, 조선 초기에는 수전이 전체 전결의 3분의 1이었다. 그 중 수리 시설이 된 전결은 약 5분의 1이었으며, 제언의 수는 800개소였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초에 이르면, 경상도에 제언이 1,000개소, 보가 1, 000개소나 되었다. 한편, 이앙법의 보급으로 삼남 지방에서는 논에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널리 행해졌다. 한전에서도 견종법의 시행으로 노동력이 절감되고 시비 관리도 잘 되어 수확이 크게 늘었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많은 농서가 간행되었다. 효종 때 신속(申琳)은 ≪농가집성 農家集成≫을 냈고, 숙종 때 박세당(朴世堂)은 ≪색경 穡經≫을 간행했는데, 이는 한전농업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홍만선(洪萬選)이 낸 ≪산림경제≫도 넓은 의미의 농서에 해당하고, 헌종 때 서유구(徐有梏)가 낸 ≪임원경제지≫는 후기 농서의 집대성이었다.

[천문ㆍ기상]

천문ㆍ기상은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어 일찍부터 많은 관심이 기울여졌다. 1442년(세종 24) 측우기를 만들어 전국의 강우량을 조사했는데, 이는 서양에서 최초로 발명한 이탈리아 카스테리의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세종 때는 이 밖에도 천문 관측을 위한 대소의 간의(簡儀), 천체관측기인 혼천의(渾天儀),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등이 만들어졌다. 또, 천문학의 발달에 따라 역법(曆法)도 중국과 아라비아의 역법을 참조해 우리 실정에 맞는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이 저술되었다.

18세기에는 천문 관측에 있어 조선 중심의 천문학이 수립되었다. 즉, 종래 연경(燕京) 중심의 관측에 편도시차(偏度時差)를 추가함으로써 조선 중심의 일식(日食)ㆍ월식(月食) 시각방위의 관측법이 수립된 것이다. 또, 서양 역법이 중국을 통해서 들어와 1653년(효종 4) 시헌력(時憲曆)을 채용하게 되었다. 한편, 김석문(金錫文)ㆍ홍대용(洪大容) 등은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해 종래의 세계관과 우주관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의학]

고려시대의 약재는 중국산을 들여다 썼으나, 고려 말기부터 국산 약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서 1433년(세종 15)에는 이를 집대성한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이 나왔다. 1445년에는 역대 중국의 의서를 널리 수집, 참조해 의학의 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의방유취 醫方類聚≫가 편찬되고, 같은 세종 때 일종의 법의학서(法醫學書)인 ≪신주무원록 新註無寃錄≫이 간행되었다. 1610년(광해군 2)에는 우리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동양의학사상 특기할만한 역저인 허준(許浚)의 ≪동의보감≫이 편찬되었다. 또 1798년(정조 22) 정약용이 지은 ≪마과회통 麻科會通≫에는 우두(牛痘)의 시술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

[인쇄술]

우리 나라는 이미 1234년(고종 21)에 금속활자를 사용하였다. 이는 서양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고, 1403년(태종 3)의 계미자(癸未字)도 서양의 금속활자보다 약 5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조선 초기의 국가적 편찬 사업은 인쇄술을 발달시켰다. 즉, 계미자의 사용은 고려 말기 이래 망각되었던 금속활자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이 때의 활자는 동판 위에서 황랍(黃蠟)으로 고정시켰으므로 활자가 움직이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에 1420년(세종 2) 경자자(庚子字)에 이르러 활자마다 네모의 입방체로 크기를 같이 하여 황랍을 쓰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아 인쇄가 편리해졌다.

1434년에는 활자를 개주하여 자체가 정교하기로 유명한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었다. 조선 후기에도 1772년(영조 48) 15만자의 임진자(壬辰字), 정조 때에 8만자의 한구자(韓構字), 1796년(정조 20) 30만자의 정리자(整理字) 등은 좋은 활자로 인정되고 있다.

[군사 무기]

고려 말기에 화약의 제조법을 알게 되어 화통도감(火糧都監)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포를 제조하였다. 당시 화약은 신무기로서, 이웃 일본이나 여진은 아직 그 제조법을 몰랐다. 때문에 여말 선초에 왜구를 격퇴하고, 세종 때 육진의 개척, 사군(四郡)의 설치에는 화약에 힙입은 바가 컸다. 1448년(세종 30)에 편찬된 ≪총통등록 銃筒謄錄≫에는 화포의 제조법과 사용법이 그림과 함께 한글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문종 때에는 일종의 로케트라 할 수 있는 화차(火車)가 제조되었다. 그 뒤 화약을 사용하는 대포 완구(碗口)와 소포인 총통(銃筒) 등이 제조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이장손(李長孫)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발명하였다. 임진왜란 뒤에는 조총과 서양식 대포인 홍이포(紅夷砲)가 꾸준히 제조되어 무기의 제조 기술이 진보하였다. 병선(兵船)은 고려 때의 전선(戰船)인 예선(曳船)에 덮개를 씌운 귀선(龜船)이 1403년(태종 3)에 만들어졌다. 이것이 실전에서 크게 전투력을 발휘한 것은 임진왜란 직전에 완성된 이순신(李舜臣)의 거북선이었다.

이 밖에 정약용은 청나라에서 들여온 ≪고금도서집성 古今圖書集成≫ 중 테렝(Terreng.J., 중국명 鄧玉涵)의 ≪기기도설 奇器圖說≫에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기중기를 고안, 화성(華城) 축조에 이용하게 하였다.

4. 예술

[문학]

국문학은 훈민정음 창제 직후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이 창작되어 한글 문학의 문이 열렸다. 시조는 국문학 중 가장 대표적인 우리 고유의 정형시로서, 고려 중기에 발생한 이래 조선시대에는 더욱 발전하였다. 시조는 박인로(朴仁老)ㆍ신흠(申欽) 등을 거쳐 윤선도(尹善道)에 의해 대성되었다.

시조는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양반 문학에서 서민 문학으로 전환되어갔다. 형식면에서는 사설시조라는 장형시조가 발달했고, 표현에서는 사실성을 띠게 되었다. 또한, 작자는 양반뿐만 아니라 서리나 기생 등에 이르기까지 신분계층이 확대되었다.

김천택(金天澤)은 1728년(영조 3) ≪청구영언≫, 김수장(金壽長)은 1763년(영조 39) ≪해동가요≫라는 시조집을 편찬했는데, 그들은 다같이 서리 출신이었다. 거기에는 자신들의 작품 외에도 하급 신분 작가의 작품이 무명으로 많이 수록되어 있다. 1876년(고종 13) 박효관(朴孝寬)ㆍ안민영(安玟英)이 편찬한 ≪가곡원류≫는 고시조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중기에는 가사(歌辭)가 발달하였다. 가사는 송순(宋純)에 이어 송강가사(松江歌辭)의 저자 정철(鄭澈)에 의해 대성되었다. 이와 아울러 조선 후기 문학에 나타난 큰 변화로는 한글 작품이 많이 쏟아져 나온 점을 들 수 있다. 광해군 때 허균(許筠)은 <홍길동전>을 지어 국문소설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는 서얼차대와 빈부 문제 등 사회적 모순을 비판한 내용이었다.

고전 국문소설들을 내용에 따라 살펴보면, 권선징악류에 <장화홍련전>ㆍ<심청전>ㆍ<흥부전>, 군담류에 <임진록>ㆍ<임경업전>, 애정물에 <춘향전>ㆍ<옥루몽>ㆍ<숙향전> 등이 있다.

국문학에서 특징 있는 장르의 하나는 판소리이다. 판소리는 18세기 호남 지방에서 발생했으며 19세기에는 여러 명창이 나와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사설의 정리에는 신재효(申在孝)가 절정을 이루었다. 그는 판소리 여섯마당을 지어 서민뿐만 아니라 양반층까지 판소리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한편, 조선 시대 문학의 한 큰 갈래로 한문학이 있다.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 등이 ≪동문선≫을 편찬해 신라 이래 조선 초까지의 시문을 정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관료 문인들의 설화문학이 성하였다. 그 대표적인 설화집으로는 서거정의 ≪필원잡기 筆苑雜記≫, 성현 (成俔)의 ≪용재총화 弁齋叢話≫,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 稗官雜記≫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김시습(金時習)은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다.

초기의 유명한 한문학자인 권근(權近)ㆍ김종직(金宗直) 등은 고려 말 이제현(李齊賢)ㆍ이색(李穡)의 뒤를 이었는데, 그들은 송ㆍ원나라 문단의 영향을 받았다. 중기에는 명나라의 영향으로 고문의 부흥이 유행했는데, 이정구(李廷龜)ㆍ신흠(申欽)ㆍ장유(張維)ㆍ이식(李植) 등이 유명하다.

종래 전통적인 문체에 구애없이 자유롭게 표현하는 새 문체를 개발한 사람은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이었다. 그가 지은 <열하일기>는 참신한 문체와 독보적 내용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박지원의 뒤를 이은 한문학자로는 신파사가(新派四家)라 불리는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ㆍ이서구(李書九) 등이 있다. 김택영(金澤榮)의 문인 왕성순(王性淳)은 우리 나라의 한문 10대가를 꼽았는데,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과 이제현을 비롯, 조선시대의 장유ㆍ이식ㆍ김창협(金昌協)ㆍ박지원ㆍ홍석주(洪奭周)ㆍ김매순(金邁淳)ㆍ이건창(李建昌)ㆍ김택영 등이었다.

후기 한문학의 새로운 변화는 서얼이나 기술관ㆍ서리 신분의 문인이 많이 배출되고, 이들에 의해 시가의 수집ㆍ편찬이 행해진 점이다. 즉, 숙종 때 홍규태(洪圭泰)는 항간에 전해오는 서민의 시가를 모아 ≪해동유주 海東遺珠≫를 출간하였다. 영조 때 고시언(高時彦)은 이를 증보해 ≪소대풍요 昭大風謠≫를 간행했으며, 철종 때 유재건(劉在建) 등은 ≪풍요삼선 風謠三選≫을 냈다.

[그림ㆍ글씨ㆍ공예]

조선 시대의 그림은 주로 신분이 낮은 화원(畵員)들이 그렸으나, 양반 중에도 취미로 그린 사람들이 있었다. 전기의 그림은 초상화가 많았는데, 이는 양반들이 자신들의 출세를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예술적 가치는 희박하였다. 양반의 그림은 대부분이 산수화였는데 북종화(北宗畵) 계통의 화풍이었다. 초기의 주요 화가로는 세종 때 안견(安堅)ㆍ최경(崔涇)ㆍ강희안(姜希顔), 중종 때의 이상좌(李上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정(李楨)ㆍ신사임당(申師任堂) 등의 그림에서는 화법이나 의도에 한국적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후기에는 북종화에서 남종화로 바뀌어갔고, 한국적 특징을 나타내려는 경향이 농후해졌다. 또, 전기의 사실적 화풍에서 운치를 중시하며 수묵화를 주로 하는 문인 화풍이 널리 유행하였다. 17세기 이징(李澄)ㆍ윤두서(尹斗緖) 등은 보다 한국적인 그림을 그렸고, 정선(鄭敾)에 이르러 한국적 독자성이 완전히 정착되었으니, 그의 <금강산도 金剛山圖>는 대표적인 예이다.

후기 그림 중 또 하나의 특징은 풍속화의 개척이다. 김홍도(金弘道)와 신윤복(申潤福)은 풍속화의 쌍벽으로, 서민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어 그 애환을 소박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해냈다. 19세기 말에 장승업(張承業)이 나와 안견ㆍ김홍도와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로 일컬어졌다.

서예는 양반들의 필수 교양이어서 누구나 글씨를 썼다. 여말 선초에는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했고, 중기에는 왕희지(王羲之)의 서체가 유행하였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송설체, 중종 때의 김구 (金絿)는 왕희지체의 명필이었다. 여기에 초서의 양사언(楊士彦), 해서의 한호(韓濩)를 합해 조선 전기 서예의 4대가라 일컫는다. 후기에 김정희(金正喜)는 중국 서예의 모방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추사체(秋史體)를 개척하였다.

조선 시대 공예품 중 자기에는 분청과 백자가 있었다. 초기의 분청자기는 고려청자가 퇴화한 것인데, 기법의 차이에 따라 상감분청(象嵌粉靑)과 백토분청(白土粉靑)으로 구분된다. 분청자기에 이어 청화백자(靑華白瓷)가 만들어졌는데, 백자에도 순백ㆍ유백ㆍ회백 등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 백자의 형태는 아래쪽이 펑퍼짐해져서 안정감과 실용성이 더해졌다. 조선시대의 백자는 고려 청자가 귀족적ㆍ곡선적인 데 비해 서민적ㆍ직선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재룡>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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