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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01 (월) 15:56
분 류 문화사
ㆍ조회: 28296      
[삼국] 고구려 문화 (민족)
고구려(제도와 문화) 고구려 문화

세부항목

고구려
고구려(성립과 발전) 1
고구려(성립과 발전) 2
고구려(제도)
고구려(문화)
고구려(연구사)
고구려(참고문헌)

[고구려 통치 조직과 사회]에서 이어짐

3. 문화

[문자 생활]

한자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전래되었다. 그러나 한자를 사용한 문자 생활이 본격화된 것은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국가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면서였다. 율령의 반포와 함께 한문 교양은 관리들에게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특히 불교가 수용되어 한역(漢譯) 불경이 보급됨으로써 한문에 대한 이해가 촉진되었으며, 승려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한문 보급에 앞장섰다. 또한 372년에 세워진 태학과 청소년 조직인 경당(蓋堂)에서 한문 경전 등을 가르쳤다. 광개토왕릉비는 당시 한문학의 수준을 말해준다. 그리고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에게 보낸 한시는 고구려 말기 한문학 소양이 귀족 생활의 일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외국 글인 한문의 사용은 자연 고구려인의 언어 생활을 이중적으로 만들었다. 일상 언어는 한문과는 구조가 다른 우리 말을 쓰면서도, 문자 표현은 중국어를 바탕으로 한 한문을 씀에 따라 여러 가지 불편이 발생했다. 이에 이런 문제점을 완화할 수 있는 독특한 표기법을 안출하게 되었다. 곧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 말을 기록하는 차자 표기법이 그것이다. 현재 확인된 가장 오래된 이러한 표기법은 광개토왕 비문이다. 이 표기법이 뒤에 신라로 전해져 향찰이 성립되었다.

[사서 편찬]

한자를 쉽게 구사하게 되고 고대국가가 성숙되어 감에 따라, 자기 나라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이 행해졌다. 사서는 당시 한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기록에 따르면, 역사서로서 ≪유기 留記≫ 100권이 있었다 하는데, 편찬 시기는 명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도 소수림왕대에 사서의 편찬이 행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뒤에 600년(영양왕 11)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에 의해 ≪유기≫를 재정리한 ≪신집 新集≫ 5권이 편찬되었다. 이들 사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파악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왕실의 내력과 국가의 성장과장을 기술해 정통성과 존엄성을 과시하는 내용을 담았을 것이다. 또한 왕실과 귀족 집안의 내력을 보여주는 각종 신화와 설화가 풍부히 기술되어 있어 고대문학의 정수 같았을 것이다. 사서의 편찬은 고대 국가의 성장을 말해주는 기념비적인 것으로서, 이들 사서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내용만은 몇 단계의 전승 과정을 거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주요 자료가 되었던 듯하다.

[종교ㆍ사상]

(1) 샤머니즘

불교 수용 이전에 고구려인들의 정신세계에 가장 영향을 주었던 것은 무속신앙이었다. 무속신앙에서는 자연을 중추에 놓고 세계를 파악했고, 인간은 그 세계의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 중 산천과 특이한 큰 돌과 나무 및 특정 동물 등에는 정령이 깃들여 있다고 믿었다. 또 인간이 죽은 후의 영혼, 특히 죽은 조상의 영혼과 유명했거나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의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주변에 머물러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세계는 이런 다양한 귀신이나 영적 존재에 의해 움직이며, 이들 각종의 정령이 현세에서 생활하는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인간사에 영향을 미치는 귀신의 정체와 뜻을 알아내 그에 맞는 제사를 지내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해 주는 무당(巫, shaman)의 역할이 자연히 중요시되었다. 무당은 비단 일상적인 신앙면에서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초기 부분에 무당이 왕과 조정의 조언자 역할을 한 사례가 군데군데 보인다. 또 전시에는 소를 죽인 뒤 발굽을 불에 구워 길흉을 점치고 점쾌를 풀이해 그에 따른 액막이 조치를 취하였다. 무당은 여론의 조성자로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불교 수용 이후 이런 측면의 상당 부분은 불교 승려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속신앙은 그 뒤에도 당시인의 의식세계에 계속 큰 영향을 미쳤다.

(2) 불교

372년(소수림왕 2) 순도(順道)가 전진(前秦)의 사신과 함께 와서 불경과 불상을 전하면서 고구려에서 불교의 공식적인 수용이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도 불교를 믿는 이가 민간에 일부 있었던 것 같다. 이어 374년 아도(阿道)가 왔다. 375년 초문사(肖門寺, 혹은 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機寺)를 짓고서 각기 순도와 아도를 거처하게 해 불교를 홍포하게 하였다. 고구려에서 불교가 수용되는 데는 별다른 알력이 없었고, 왕실에 의해 환영을 받으면서 공인되었다.

이는 고구려에 전래된 불교가 지닌 북방 불교적인 ‘왕즉불(王卽佛)’ 사상, 즉 왕이 현세의 부처에 비견될 수 있으며, 승려는 왕권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은 고대국가의 왕실의 권위와 지배체제 확립에 유용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확대된 영역 내에 있던 여러 집단들이 지니고 있던 다양한 관념의 세계를 보다 고차원적인 종교와 철학의 세계인 불교로 규합시켜 나갈 수 있다는 점은,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의 확립을 모색하던 상황에서 당대의 지배층에 의해 불교가 쉽게 받아들여졌다.

왕실과 귀족들은 불교를 지원했고, 승려는 왕실과 밀착해 그를 위한 일에 복무하였다. 자연 당대의 불교는 국가 불교ㆍ왕실 불교적인 성격을 띠었고, 호법(護法)은 호국(護國)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이 시기 불교는 재래의 샤머니즘과 융합되어 기복적이며 주술적인 면이 강하였다. 병을 낫게 하고 적군을 물리치는 신통술을 비는 등, 현세에서의 복락과 신이(神異)를 추구하는 기복적인 신앙이 크게 유행하였다.

그에 따라 초월적인 신이한 힘을 지녔다는 부처의 사리(舍利)를 모신 불탑이 사원건축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오늘날 남아 전하는 평양 청암동 절터의 가람배치도에서도 이러한 면은 뚜렷이 보인다. 고구려 사회에서 불교가 널리 믿어지고 불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감에 따라, 점차 현세 구복적인 불교에서 개인의 영혼의 구제를 중시하는 내세적 신앙이 중요시되었다.

아울러 불교적 윤리관의 보급에 따라 기존의 계세적 내세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즉 계세적 내세관에선 인간의 삶이 죽음과 함께 영원히 끝나지 않고 저승에서 그대로 계속된다고 믿었다. 내세는 죽은 자의 영혼이 사는 세계라는 점에서 현세와 다를 뿐, 사회구조와 위계질서 및 생활양식은 현세와 동일하다고 여겼다.

오늘날 전해지는 거대한 고분은 그러한 내세관에 따라 축조된 것이다. 현세에서 사자(死者)가 누린 지위와 신분을 저 세상에서도 그대로 누릴 수 있는 유택(幽宅)으로 큰 무덤을 짓고 많은 부장품을 묻었던 것이다. 또한 현실에서의 차등성과 신분 질서는 내세에까지도 이어지는 절대적인 것으로, 불변의 사항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불교 교리에선 죽은 자는 현세에서 행한 업(業)과 공덕에 따라, 즉 인과응보에 따라 내세에서 일정한 형태로 윤회전생하거나 왕생극락한다는 것이다. 이런 윤회전생설은 현세의 삶에 대한 당시인들의 태도에 양면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현세의 사회적 지위와 화복(禍福)이 과거세의 업의 소산으로 여겨 기존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긍정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세의 삶은 현세의 질서와는 다른 차원에 의해 결정되며, 왕생하게 될 극락세계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가능성의 세계라고 봄에 따라, 사람들은 내세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나아가 그런 사고는 인간의 본원적인 평등에 관한 의식을 내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비단 내세에서뿐 아니라 현세에서 일어난 일도 앞서 있었던 행위의 인과응보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개인들로 하여금 현세와 내세에서의 화복은 결국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불교의 계율에 입각해 성찰하게 하였다. 그에 따라 불교적 가치관은 당대인의 생활 속에 실천윤리로 깊숙히 자리잡아 갔다. 불교 교리 중 고구려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인과응보설과 윤회전생설이었다. 고분벽화에서 많이 보이는 연화전생도(蓮花轉生圖) 등은 그런 사실을 말해준다. 고구려 하대에는 일체의 중생은 누구나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열반종이 널리 퍼졌다.

보덕(普德)이 도교의 불로장생 사상에 대항해 열반종을 내세워 교세를 떨쳤다. 그리고 만유(萬有)의 실상(實相)은 공(空)이라고 주장하는 삼론종(三論宗) 또한 고구려에서 깊이 연구되었다. 구체적으로 5세기 말 요동지역 출신인 승랑(僧朗)은 중국 강남으로 건너가 삼론학의 대가로 활약하였다. 또한 7세기 초에 고구려 승려에 의해 삼론종이 일본에 전해졌다. 혜관(慧灌)ㆍ도증(道澄)ㆍ의연(義淵) 등은 고구려 삼론종의 대표적 승려였다. 고구려 후기에는 천태종(天台宗)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파약(波若)은 천태종 승려로서 유명하였다. 천태종의 부소(扶疎) 경전인 열반경의 연구가 성했고, 그런 가운데 보덕을 중심으로 열반종이 성행했다. 불교의 수용과 확산은 비단 종교적ㆍ사상적인 측면에서만 큰 의의가 있는 게 아니라, 불교의 수용과 전파 과정에서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문화교류를 증진시켰다.

불교와 불교 승려는 당시 국제적 교류의 주요한 매개체였다. 불교와 함께 서역 및 중국문화가 광범위하게 유입되었고, 불교 신앙의 토착화에 따라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쳐 한국 고대 문화의 주요 기반을 형성하였다.

(3) 유교와 교육 기관

중국 문물의 본격적인 수용과 함께 유학이 보급되었다. 372년(소수림왕 2) 태학을 세워 중앙의 귀족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태학은 고구려 말기까지 존속하였으며, 박사(博士)들이 있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지방에서는 경당(蓋堂)이 있어 젊은이들이 이곳에 모여 독서를 하거나 활솜씨를 익혔다. 고구려인은 오경(五經)과 같은 유교경전이나,≪사기≫ㆍ≪한서≫ㆍ≪후한서≫ㆍ≪삼국지≫ 등의 사서, 그리고 ≪옥편≫ㆍ≪자림 字林≫ㆍ≪자통 字統≫ 등의 사전,≪문선 文選≫과 같은 문학서 등을 읽었다.

그런데 이 시기 유교 정치 이념은 실제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못하였고, 유교의 도덕 윤리 또한 사회의 기층에 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유학은 사상적인 측면이 중요시되었다기보다는, 중국 문물을 수용함에 있어 수단이 되는 한문을 수업하기위한 방편으로 인식된 면이 강하였던 것 같다.

(4) 도교

도가적인 사유와 관념은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사회에 퍼져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장생불사하는 천인(天人)ㆍ선인(仙人) 등의 모습이 많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도가적인 사상 관념이 고구려 사회에 퍼져 있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이러한 도가적(道家的)인 관념은 재래의 산악신앙ㆍ신선사상 및 주술신앙 등과 어우러진 것으로 여겨진다. 교단 조직을 갖춘 종교로서 도교가 수용된 것은 고구려 말기 당나라로부터였다. 연개소문은 도교를 진흥시키기 위한 조처를 적극적으로 취하였다. 이에 반발해 열반종의 승려 보덕이 신라로 옮겨가는 등 불교와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다.

[문학과 음악]

고대 문학은 원시심성(原始心性)의 가장 보편적인 정령관(精靈觀)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가무제의(歌舞祭儀)에서 발생하였다. 고구려의 문학은 역사적 실존인물을 다룬 것으로, 왕자 호동(好童)이나 온달(溫達) 이야기 같은 설화문학과 유리왕(瑠璃王)이 지었다는 〈황조가 黃鳥歌〉,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여ㆍ수전쟁 때 수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보낸 오언절구의 한시 등의 시가문학이 있다.

시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음악도 또한 종교적인 성격이 짙다. 고구려의 악곡으로는 〈지서가 芝栖歌〉ㆍ〈지서무 芝栖舞〉 등이 전해온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한나라에서 고취기인(鼓吹技人)을 받았고, 그 뒤 남조(南朝)를 통해 악기를 받아들였다. 또 북위(北魏)나 몽고 고원의 유목민 국가들을 통해 오현(五絃)ㆍ필률(語郎)ㆍ요고(腰鼓)ㆍ수공후(竪謙隸)ㆍ비파(琵琶) 등과 같은 서역계(西域系) 악기를 다수 수용하였다. 이 때 악기의 수용과 더불어 외래 음악이 전래되었다.

또 외래악기를 개량했는데, 왕산악(王山岳)은 진(晉)의 칠현금(七絃琴)을 개량해 현학금(玄鶴琴)을 만들고 100여 곡을 지었다. 뒤에 현학금은 현금(玄琴)이라 불렸으며, 신라에 전해져 옥보고(玉寶高)와 같은 대가를 낳았다. 고구려 초기에는 풍속무(風俗舞)가 토속 음악과 함께 발달하였다. 뒤에 중국을 통해 새로운 악기가 전해지면서 종래의 풍속무는, 만주 집안현(輯安縣)에 있는 무용총(舞踊塚)과 장천(長川) 제1호분의 벽화에서 보이듯이, 형식이 보다 다양해지고 조화 있는 율동의 춤으로 세련되졌다.

고구려의 무용 예술은 높은 수준에 도달해 수나라와 당나라에서 각각 7부기(七部伎)와 10부기를 제정했을 때, 그 중 고려기가 포함될 정도였다. 고구려의 음악과 무용은 고대 일본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고마가쿠(高麗樂)’는 고대 일본에 전해진 외래 음악과 춤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과학 기술]

고구려의 과학기술로는 천문기상학ㆍ야금술ㆍ건축 등이 주목된다. 천문기상에 관한 지식은 고구려가 농업 사회였으므로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일식ㆍ월식ㆍ지진ㆍ우박 등을 관측하고 기록하였다. 또한 천문 지식은 농사 외에도 당대에 있어 정치적인 의미를 크게 지녔다. 초기 국가체 형성단계에서 왕은 비단 정치적인 군장으로서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제사장적 기능도 지녔다. 왕은 재난을 물리치고 풍년을 기약해 줄 수 있는 주술적인 신이한 능력을 지녀야 한다는 관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부여에서 가뭄이나 홍수로 흉년이 들면 왕의 책임으로 여겨 그를 죽이거나 교체한 사실이나, 신라 초기 왕의 명칭이 제사장을 뜻하는 차차웅(次次雄)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고대 국가 체제가 확립된 후에 이러한 측면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보다 세련된 정치 이념의 형태로 계승되었다. 즉 일식ㆍ지진 및 그 밖의 천체 현상의 이변은 흉한 징조로 받아들여졌고, 지배자는 이를 하늘이 내린 경고로 이해해 반성하고 절제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현실적으로 농업 사회에서 자연현상의 이변이 지니는 지대한 영향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에 자연 천문 기상의 관측과 기록은 국가의 주요 관심사였다. 고구려에서는 일관(日官)을 두어 이를 담당하게 하였다. 벽화고분의 천장에 그려진 별자리 그림은 당대인의 천문지식과 그에 대한 관념을 보여주고 있다.

그와 함께 역법(曆法)과 수학ㆍ역학(力學)의 발달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전하는 대표적인 고구려의 축조물인 거대한 적석총 석실분 등의 무덤과 성곽 등을 통해 이를 만드는 데 쓰였던 당대의 역학과 수학의 발달 정도를 이해할 수 있다. 야금술의 경우 이미 기원 전후 무렵부터 고구려인들은 강철제품을 만들었다. 압록강 중류의 노남리와 토성리 등지에서 발굴된 철제품의 성분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철은 당대의 생산과 전투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물질이었다. 철자원을 확보하고 양질의 철제품을 제조하는 것은 국가적인 주요관심사였다.

오늘날 전하는 철제품과 벽화고분에서 보이는 철기들은 당대 고구려의 제철기술과 다양한 품목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수백 가(家)가 모여 살며 은을 채굴하는 등 일종의 광산촌이 존재하였다. 이와 함께 평양에서 발견된 금동제 금동관장식 등은 고도로 발달된 고구려의 세공기술의 면모를 전해준다.

[미술]

조각품으로는 불상이 대부분이다. 고구려 불상으로는 금동불과 흙으로 빚은 니불(泥佛)이 약간 남아 전한다.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발견된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북위에서 발달된 불상 표현양식의 영향이 짙은 이 불상은 긴장된 얼굴에 위엄있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황해도 곡산군 화촌면 봉산리에서 발견된 신묘명금동삼존불상(辛卯銘金銅三尊佛像)은 무량수불을 새긴 불상이다. 또한, 평양 발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고구려의 반가사유상으로 유명하다.

회화로서는 고분벽화가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80기 이상의 벽화고분이 발견되었는데, 평양 부근과 집안(輯安)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널방의 사방 벽과 천장에 그림을 그렸다. 널방은 초기에는 앞방ㆍ뒷방ㆍ옆방 등 여러 개였다가 뒤에는 점차 하나가 되었다. 천장은 이른바 모줄임고임천장[抹角藻障, Lantern ceiling] 양식이다.

천장의 네 귀에 받침돌을 두어 공간을 차례로 좁혀나가 그 위에 두께돌을 얹었다. 이에 따라 천장은 점층적인 공간미를 지니게 되었고, 각 층마다 다양한 그림을 그려넣어 널방 전체가 아름다운 그림으로 가득찬 별세계를 이루었다. 벽화는 대부분 돌벽 위에 두텁게 회를 바른 다음, 채 마르기 전에 그리는 프레스코법을 썼으며, 묵선으로 윤곽을 그린 다음 채색하였다. 고구려 하대에는 다듬은 돌벽 위에 바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물감은 광물질로서 흑ㆍ황ㆍ적ㆍ자ㆍ청ㆍ녹색을 썼고, 때로는 금박도 사용하였다. 벽화의 내용은 초기에는 주인공의 초상과 생전의 생활상ㆍ행렬 등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주력한 풍속도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다 점차 신선ㆍ비천ㆍ역사(力士)ㆍ괴수ㆍ해ㆍ달ㆍ별자리, 그 밖에 각종 문양이 도안적으로 표현, 장식되는 등 회화 자체가 지니는 기능이나 효과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으며, 벽화에 표현된 관념도 보다 상징적이 되었다. 그리고 일정 공간의 사방을 진호하는 힘을 지녔다는 현무ㆍ주작ㆍ청룡ㆍ백호 등 사신(四神)이 벽화의 중심 소재가 되었다.

초기 벽화의 구도와 화법은 중국미술의 영향이 컸으나, 점차 독창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고구려 벽화는 투시법이 무시된 게 흠이지만, 생동감 넘치는 운동성은 독특한 면모이다. 이는 모든 사물에 생명성을 부여하려는 고구려인의 미의식의 소산이며,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생명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고시대 이래 고구려 사회의 기층에 이어져 내려오던 애니미즘적인 관념의 반영이다. 이를 애니미즘적인 상징주의라는 말로 표현하는 이도 있다.

또한 벽화는 회화적 측면 외에도 건축ㆍ생활풍속ㆍ전투ㆍ수렵ㆍ춤ㆍ음악 등 당대 고구려인의 생활상과 현세와 내세에 관한 그들의 관념을 반영해 주고 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질과 양에 있어서 오늘날 전해지는 동시대 동아시아 전체의 문화적 업적 중 가장 뛰어나다. 이 벽화와 고분 양식은 백제와 신라에,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 열도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의 공예품으로는 금동제의 관모(冠帽)가 있다. 이것은 평안남도 중화군 진파리 1호분에서 출토되었다. 또 경주 서봉총(瑞鳳塚)에서 나온 ‘연수원년신묘(延壽元年辛卯)’의 명문이 있는 은제 합(盒)과 경주 호우총(壺昺塚)에서 발견된 청동호(靑銅壺)가 있어, 신라에까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토기로는 흑회색 연질토기 계통의 납작바닥[平底] 항아리가 주류를 이루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적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세 발이 달린 검은간토기[黑陶]와 네 귀가 달린 항아리이다. 또한 와당(瓦當)은 적갈색 또는 황갈색을 띤 것이 많은데, 연화무늬를 비롯해 인동(忍冬)ㆍ당초(唐草)ㆍ수면(獸面) 무늬 등이 풍부한 변화 속에서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태왕릉(太王陵)과 천추총(千秋塚)에서는 묘전(墓塼)으로 짐작되는 벽돌이 발견되었다.

<노태돈>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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