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한국사사전1 한국사전2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0-03 (목) 21:27
분 류 문화사
ㆍ조회: 1386      
[조선] 안동 의성김씨학봉종택 (안동넷)
의성김씨학봉종택

안동 의성김씨학봉종택. 문화재청 사진

소재지 :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56.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

안동 의성김씨학봉종택 출입문. 안동넷(http://www.andong.net) 사진조선 선조때의 명신이며 학자인 학봉 김성일 선생의 종택으로 '巳'자 형의 양반 가옥이다. 종택 내에는 선생이 사용했던 여러 가지 유물, 유적을 보관 전시한 운장각이 있다.

이곳에는 선생이 남긴 서적, 유품, 친필기록, 제초고 및 선조 전래의 전적 문서와 후손들의 유품 등 500여점의 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운장(雲章)'은 '탁피운한 위장우천(倬被雲漢 爲章于天)'이란 옛 시구에서 인용한 것으로서 이것이 바로 선생의 기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학봉 선생은 일찍이 퇴계 문하에서 성리학적 수양을 쌓고 인격을 도야했으며, 그 윤리와 가치를 직접 실천해 나가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문화재 안내>

의성현(義城縣) 제일의 토성(土姓)인 의성(義城) 김씨는 여말(麗末)에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여 안동으로 이주하면서 전형적인 영남사림파(嶺南士林派)로 발전한 가문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종택은 원래는 현 위치에 지어졌으나 지대(地帶)가 낮고 침수(沈水)가 자주된다 하여 선생의 8세손인 광찬(光燦)이 그의 나이 27세이던 1762년에 '현 위치에서 100m가량 떨어진 현재의 소계서당(邵溪書堂)이 있던 자리에 새로 종택을 건립하고 종택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한다.

그러나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건전하였는데, 이 때 종택의 사랑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 소계서당으로 사용케 하고 하고 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을 종택의 사랑채로 사용하였다. 정침(正寢)은 구(口)자형의 평면을 취하고 있으나 최근에 좌측으로 아랫채를 달아내어 전체적으로 보면 일(一)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가구(架構)는 모두 5량가(樑架)의 간결한 구조이다. 정침의 우후측(右後側)에는 3칸 규모의 사당을 배치하였으며 주위에는 토석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였다.

※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조선 선조 때의 문신, 학자.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38년(중종 33)에 나서 1564(명종 19) 2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뽑혔고 1586년(선조 1) 31세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국(史局)에 들어갔으며 한림(翰林), 삼사(三司), 이랑(吏郞), 사인(舍人),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호당 (湖當)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공이 아우 복일과 함께 도보로 임하현 천전서 도산 퇴계 선생께 나아가 인심과 도심의 구별과 선기(璿璣) 옥형(玉衡)의 원리를 배워서 아우와 함께 연구해서 그림을 그리며 몰두하는 것을 퇴계선생은 창밖에서 엿보고 기쁘게 여겼다.

1577년(선조 10) 공이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종계의 잘못된 것을 이미 개찬(改纂)할 것을 허락하였으나 회전(會典)이 아직도 옛날 잘못된 것을 그대로 답습하므로 공은 일행과 힘써 예부상서(禮部尙書) 마공(馬公)을 움직여 낭중(郎中) 심현화(沈玄華)로 하여금 개찬하게 하였으니 그 뒤에 반포한 회전은 이때 수정한 것이다.

1591년(선조 24)에는 통신사가 되어 부사(副使)로 정사(正使) 황윤길과 함께 일본에 다녀 왔다. 정사는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고하였으나 부사는 민심의 동요를 우려해서 그와 상반되는 의견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로 인하여 공이 경상도 우병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대노하여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김성일이 일찌기 왜가 오지 않는다 하여 변정(邊情)이 해이했기 때문에 적변이 생겪으니 내 장차 국문하리라'하고 금부에 명하여 잡아 오라 하였다.  

이에 우의정 류성룡과 대간이 변호하니 선조는 묻기를 '김성일의 장계에 일사보국(一死報國)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성일이 과연 능히 할 수 있을까'하니 류성룡과 최황이 '성일이 평생 마음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것 뿐이었으니 진충(盡忠) 보국 하리라 믿습니다.'하고 왕세자 또한 극히 간하니 선조는 노여움이 풀려 선전관을 보내어 용서하게 하고 또 초유사(招諭使)를 제수하니 공이 직산(稷山)에 이르러 명을 받고 남쪽으로 돌아갔다.

공은 초유사로 종군하여 죽산, 함양 등지에서 격문(檄文)을 돌려 김면, 정인홍, 곽재우 등의 도움을 받아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순직하였다. 공이 경상 우감사로 봉명(奉命)한 이래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수고하여 심열이 극히 번거롭더니 마침내 1593년(선조 26) 4월에 내장(內腸)에 여기가 끼어 병을 얻은지 10일 만에 진주공관에서 졸(卒)하니 살길을 바라는 유민들이 서로 붙들고 호곡(號哭)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어찌 막막(漠漠) 하여 우리 부모를 빼앗아 가는가'하였다.

공이 56세에 졸한지 두달째 성이 함락되고 강우(江右)가 도륙(屠戮)이 되어 적의 소굴이 되니 식자(識者)가 말하기를 '하늘이 만일 공의 한번 죽음을 늦추어 주었다면 일이 어찌 여기에 이르리오'하였다.

여러번 증직(贈職)을 내려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숙종 기미년에 문충공의 시호가 내렸다. 안동 임천서원에 향사했다. 저서로는 <학봉집> 이 있다.

출전 : 안동넷
   
윗글 [미술] 한국미술사의 시대구분 (민족)
아래글 [조선] 정선의 인왕제색도 (호암미술관)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212 문화사 [고려] 2633. 화성 용주사 범종 (민족) 이창호 2002-06-29 1405
211 문화사 [고려] 2660. 청동 다층 소탑 이창호 2001-06-12 1405
210 문화사 [남북국] 2190. 김생의 글씨(집자본) 이창호 2001-06-07 1404
209 문화사 [조선] 3920. 능행도2 이창호 2001-06-19 1398
208 문화사 [근대] 정동교회 (문화재청) 이창호 2003-05-11 1397
207 문화사 [고려] 2640. 강화 전등사 중국종 이창호 2001-06-11 1396
206 문화사 [조선] 4130. 주합루 이창호 2001-06-19 1388
205 문화사 [미술] 한국미술사의 시대구분 (민족) 이창호 2003-05-22 1387
204 문화사 [조선] 안동 의성김씨학봉종택 (안동넷) 이창호 2002-10-03 1386
203 문화사 [조선] 정선의 인왕제색도 (호암미술관) 이창호 2002-10-13 1383
1,,,101102103104105106107108109110,,,13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