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한국사사전1 한국사전2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5-03 (월) 11:06
분 류 문화사
ㆍ조회: 2683      
[고대] 로마미술 (한메)
로마미술 -美術 Romanart

고대 로마를 중심으로 BC 8세기 무렵부터 AD 4세기까지 로마인이 지배했던 지역에서 전개된 미술.

BC 5세기까지의 로마 미술은 일찍부터 북쪽의 에트루리아인과 반도쪽에 널려 있던 그리스 식민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독자성을 지니지 못하고 그 활동도 활발하지 못했다. 그러나 BC 3세기 슈라크사이(시라크자)의 정복에 의해 그리스의 우수한 미술품이 로마로 보내져 로마인은 그리스 미술에 직접 접촉하게 되었다.

로마사회에 있어서 사치의 침투는 심각한 정치문제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독자적인 미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로마미술에 고도의 외래 미술을 도입시키는, 후대의 복잡한 미술전개의 원인을 만들었다. BC 27년 초대 황제자리에 오른 아우구스투스는 이미 지중해 세계전역을 지배하는 국가로 성장해 있던 로마제국의 이념적 통일과 그 표현을 위해 그리스 미술을 모범으로 하는 고전주의 미술을 채용했다.

클리우스 클라우디우스왕조(14∼68)의 여러 황제도 그 정책에 따르는데, 네로의 치세로부터 플라비우스 왕조시대 (69∼96)에 걸쳐서는 공화정 말기의 간결·소박하고 사실적(寫實的)인 로마적 요소가 건축·조각 분야에서 대두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와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시대는 전대의 연장 선상에 있었으며, 차츰 높아져 가는 사회불안이 미술에도 반영되어 고전주의적 조화가 결여된 작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경향은 세베루스 왕조시대(193∼235)에 더욱 뚜렷해지고, 동방적 요소의 대두와도 어울려 제정 말기 미술양식의 특징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연주의적 형태의 방기(放棄), 그에 따른 형태의 경직화와 왜소화(矮小化), 또 표현 내용과 형태의 일치가 해체된 데 의한 관념적·표현주의적 조형의 대두이다.

3세기말의 4분치제(四分治制;테트라르키아)는 토리노·밀라노 등 관구(管區) 중심도시의 미술활동을 번성케 했지만, 한편으로 수도 로마의 미술상의 위치를 떨어뜨리게 하였다. 그 결과, 중심을 잃은 로마 미술은 그 창조력을 분산하고 지방양식에 매몰되어 쇠퇴했던 것이다.

로마 미술은 지중해세계를 중심으로 배양된 갖가지 고대 미술의 마지막 등장이었으나, 그에 앞선 여러 미술의 집대성이 아니라 그리스 미술의 계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미술에서는 포섭성(包攝性)과 총합화의 점에서 그리스 미술과 크게 다르며 이 특질은 미술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곳곳에 미쳤으므로, 로마미술은 정치 이념을 표현할 수 있었으며 실생활의 장식화 기능을 했던 것이다.

[건축]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받아 온 로마는 건축에서도 처음부터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아들였다. 한편 남이탈리아에는 예로부터 그리스 식민도시가 있고 또 로마가 지중해로 진출할 무렵, 즉 BC 2세기의 지중해 세계에는 헬레니즘 건축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영향도 당연히 로마 건축에 강하게 나타났다.

또 저마다 다른 요소를 통합하고 조직화하는 로마인 자신의 능력이 그들의 건축에 반영되어 있는 점도 빠뜨릴 수 없다. 로마인의 탁월한 재능이 가장 잘 나타난 미술 분야가 건축으로, 그리스 건축과는 전혀 다른 그들대로의 독창성이 나타나 있다. 신전·주택·묘 등에는 에트루리아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나는데, 로마 건축에 중요한 역할을 한 아치도 또한 에트루리아인으로부터 배운 기술이라는 견해가 있다.

로마의 신전은 수직으로 높게 쌓아올린 기단(基壇) 위에 세워졌으며, 신전으로 오르는 계단은 정면뿐이다. 앞면은 넓은 현관 주랑(柱廊)으로 되어 있고, 신실(神室)의 폭은 현관 주랑의 나비와 대체로 같다. 옆면과 뒷면에는 열주(列柱)가 세워졌지만 독립된 원기둥이기보다 신실의 벽에 딸린 부족기둥인 것이 보통이다.

즉 로마의 신전은 정면성이 중시되고 신실의 나비가 넓은데, 이것은 에트루리아의 신전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도리스·이오니아·코린트 양식 등 그리스 건축에 쓰였던 오더(기둥이나 기둥 위에 얹히는 처마까지의 部材의 형식과 짜맞추는 것)의 채용에서는 헬레니즘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로마인은 오더를 더욱 발전시켜 콤퍼지트식 기둥머리를 만들었으며, <개선문 모티프>라고 불리는 수법은 로마의 독특한 건축표현으로서 후세 서구건축에 영향을 미쳤다. 로마인은 또한 콘크리트 구조를 발명하여 발전시켰는데, 쇄석(碎石)·연와설(煉瓦屑) 등의 골재와 모르타르를 섞어 제조했다.

처음에는 기초 등에 돌 대용품으로서 창고 등의 실용적 건축에 이용되었으나, 제정기에는 모든 건축의 기본적 재료가 되었다. 큰크리트를 사용하여 판테온 같은 큰 공간을 기둥 없이 덮어 씌울 수가 있는데, 로마인은 여러 형태의 공간을 둘러싸는 이 기술의 발전에 의해 고대건축에서 처음으로 내부공간을 조형한다는 관념을 건축 안에 정착시켰다.

[조각]

그리스의 미술을 모범으로 하면서도 헬레니즘 이전의 그리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개인을 위한 기념조영물이 로마에서는 성행, 모든 건조물이 신(神)을 위해 만들어졌던 그리스미술과 차이를 보인다. 이 개인의 명예나 기념을 위한 미술을 즐겨했던 로마인의 성격은 조각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초상조각을 받아들이면서도 이상화(理想化)된 인간상 대신 특정한인물의 양상을 반영하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로마인은 개인의 모습을 영원히 남겨 두기 위해 밀랍으로 데스 마스크(death mask)를 떠서 가정에 보존하기도 했다. 이 로마인 초상의 사실적 경향은 《카라칼라황제의 초상》을 조금도 이상화함 없이 뚜렷이 나타낸 점에서 알 수 있는데 헬레니즘미술의 사실주의가 로마미술에 계승된 일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 웅장·화려함을 나타내려는 로마미술의 특징은 사실을 요구하는 초상조각의 성격과 때때로 모순을 일으킨다. 개인의 모습을 남기는 구상성과 동시에 그 작품상에 황제의 권위, 지배자의 권력이라는 추상적 표현도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모순을 교묘히 조화시켜 로마조각 특유의 성격이 창조되었다.

제국이 동서로 분열해 고대세계에 종지부를 찍기 직전의 《발렌티아누스의 거상》은 이 경향을 가장 잘 설명해 준다. 극단으로 형식화된 그 자세는 인간을 초월한 황제라는 권력 그 자체가 뚜렷이 드러나 있는데, 이것은 사실주의에서 형식주의로의 전환을 뜻한다. 부조(浮彫)에도 역시 로마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스의 부조가 조소적 효과를 가졌음에 대해 로마의 부조는 회화적 효과, 즉 빛과 그림자에 의한 음영의 효과를 내며 또한 구조상으로도 그리스의 구심적인 것과는 달리 원심적인 것이 되었다. 여기서는 명석한 형식에 의해 생겨나는 정돈된 감각보다도 혼돈한 동태 속에서 느껴지는 환혹적(幻惑的)인 감각을 즐기는 미의식(美意識)의 변화가 보인다.

그 결과 인물의 자태가 과장되고 왜곡되어 장식적이 되어 버린다. 로마미술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회화적·장식적이 되는데 이것은 조화와 통일을 추구한 그리스 미술로부터의 이탈이며, 여기에서 독자적 성격이 형성된 것이다.

[회화]

로마의 회화는 헬레니즘 회화의 수용에서 시작한다. 헬례니즘기(期) 회화의 원작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79년 베수비오화산의 폭발로 매몰된 폼페이 및 헤르쿨라네움의 벽화를 통하여 헬레니즘시대 및 로마시대의 회화를 알 수 있다. 프레스코와 모자이크로 된 회화양식은 헬레니즘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고, 감각적이며 신비적이고 산문적인 주제가 사실적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폼페이에서 출토된 모자이크화 《이수스의 전투》는 그 예로서, 알렉산더대왕의 궁정화가 필로크세노스의 작품을 모자이크로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미 그 무렵에 선(線) 묘사법에서 명암화법으로 옮겨가고 완전한 원근법이 형성되었음을 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프레스코화 《디오니소스 비의 》는 헬레니즘양식에 로마적인 취향이 가미된 새로운 양식으로, 색채가 중시되었다는 사실은 회화상의 큰 발전이다.

또한 로마인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정물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는데, 인간상을 주제로 하지 않고 전개된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물화·풍경화의 발생은 이 시대 정신의 한 단면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데, 사람들의 정서가 인간을 벗어나서 자연이나 정물에까지 충분히 발휘되어 즐거움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의 사고가 인간 중심주의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슬픔이나 기쁨이라는 인간의 정서는 인간의 행위에서만 나타난다는 사고방식이 확대되어 자신만이 사고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한층 더 뿌리 깊게 되었다는 사실의 표현이었다.

[공예]

금속공예 기술은 거대한 조각의 주조(鑄造)에서부터 각종 가정용품과 촛대·가구장식 등의 작은 것까지 다양하게 발달되었는데, 청동제품은 재료가 풍부한 데다 주조가 용이하여 침대나 탁상 등이 다량으로 제작되었다. 보스코레알레에서 발견된 2개의 손잡이가 달린 은접시는 로마인의 사실주의 정신을 보여준다.

로마시대의 도자기로서 유명한 것은 BC 1세기부터 AD 2∼3세기에 걸쳐서 제작됐던 아레초도자기이다. 이것은 신들이나 영웅의 이야기를 틀에 눌러서 만든 부조를 나타내고, 그것에 적갈색의 유약을 덧칠한 것이다. 아레초 도자기를 제외하면 이 시대의 도자기들은 일반적으로 예술성이 뒤떨어지는데, 이것은 유리그릇이나 은그릇이 상층계급 사람들에게 애호되어 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줄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시대 로마의 보석세공은 카메오커팅(Cameo―cutting)이 발달했다. 이 카메오기술을 로마인은 유리세공에 전용했는데, 《포틀란드 바즈(Portlandvas)》는 암청색의 투명한 유리바탕에 불투명한 우윳빛 유리를 씌우고 그림을 부조한 것이다. BC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리 공정은 극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으나, 취관(吹管)이 발명됨으로써 급속도로 발전해 유리가 일상용품에서 더욱 실용적으로 쓰였다.

로마인들은 이 유리 그릇과 카메오에서 탁월한 기량을 나타냈다. 유리그릇은 헬레니즘시대에 시리아에서 발명된 유리의 제조법을 계승하여, 작은 잔이나 병 모양 등 각종 용기에 고도의 기술을 보였는데, 이 중에는 이집트의 줄무늬 모양의 유리병, 모자이크 유리, 판유리 등의 제품도 보인다.

유명한 《포틀란드 바즈》와 같은 기술의 극에 이른 카메오 유리 등은 대부분 귀족층에서 애용하였다. 카메오는 줄무늬의 마노(瑪瑙)처럼 반투명한 상층에 암색(暗色)의 색층(色層)으로 된 보석에 인물이나 그 밖의 것을 부조한 것으로, 《산트 샤펠의 카메오》 《아우구스투스의 카메오》가 유명하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윗글 [고대] 로마미술 (브리)
아래글 [고대] 로마미술 (두산)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1192 문화사 [고대] 로마미술 (브리) 이창호 2004-05-03 1886
1191 문화사 [고대] 로마미술 (한메) 이창호 2004-05-03 2683
1190 문화사 [고대] 로마미술 (두산) 이창호 2004-05-03 2523
1189 문화사 [고대] 콜로세움 (브리) 이창호 2004-05-03 2110
1188 문화사 [고대] 콜로세움 (한메) 이창호 2004-05-03 2151
1187 문화사 [고대] 콜로세움 (두산) 이창호 2004-05-03 3661
1186 문화사 [건축] 로마건축 (브리) 이창호 2004-05-03 3282
1185 문화사 [건축] 로마건축 (한메) 이창호 2004-05-03 2521
1184 문화사 [건축] 로마건축 (두산) 이창호 2004-05-03 2915
1183 문화사 [건축] 서양건축사 (한메) 이창호 2004-05-03 4584
1,,,11121314151617181920,,,13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