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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22 (목) 16:41
분 류 문화사
ㆍ조회: 2471      
[조선] 조선시대의 미술 (민족)
미술(조선시대의 미술)

세부항목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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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참고문헌)

[건축]

조선시대의 목조 건축 양식에는 고려시대의 주심포 양식과 다포 양식 그리고 주심포 양식에서 변화한 익공 양식(翼工樣式)과 익공이 없어진 무익공 양식(無翼工樣式)의 네 가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 건축은 우리 나라 자연환경에 가장 적합한 양식으로서 건축 세부에 있어서도 익공과 같은 탈중국의 한국적 수법을 고안해 냈다. 그리고 건축사에서는 한국적 목조 건축 양식의 발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전기는 주심포·다포 두 양식이 공존하였다. 공포의 첨차 끝에서 뻗어 나오는 쇠서〔牛舌〕의 모습은 곡선이 그리 심하지 않은 웅건한 것이다. 그러나 후기가 되면서 다포집과 익공집이 유행하였으며 공포가 섬세해지고 쇠서도 길고 나약해졌다. 뿐만 아니라 짐승·초화(草花) 등 조각물을 쇠서 위에 얹고 건물 안쪽의 공포는 운궁(雲宮)이라 하여 구름무늬를 닮은 화려한 윤곽의 형태로 되어 전기 건물의 간결하고 웅건한 맛이 없어지게 되었다.

익공이라는 것은 주심포 양식에서 기둥머리에 꽂아 끼는 첫 번째 첨차를 역(逆)사다리꼴의 한 장 널로 대용한 것이다. 그리고 바깥쪽에는 쇠서도 만들어 공포를 간단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익공 위에 장여(長等, 長舌)와 보〔樑〕가 얹힌다. 그리고 지붕을 더 올리기 위해서는 초익공(初翼工) 위에 또 하나의 익공을 얹어 이익공(二翼工)으로 만들면 된다.

익공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중국 건축의 공포를 약화(略化)한 새로운 양식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증가하는 관청·사찰 등의 부속 건물 수요에 대응하기 위하여 발명된 능률 기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익공 양식의 공안은 한국적 건축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것으로 한국 목조 건축의 한국적 개성은 더 뚜렷해지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주심포집 대표적인 예는 무위사극락전(無爲寺極樂殿, 국보 제13호)이다. 이 건물은 정면·측면 모두 3칸이고 공포는 안팎 2출목(二出目 : 첨차를 상하 이층으로 짜는 수법)이다. 그리고 첫 번째 첨차가 좌우로 그대로 뻗어 장여로 되어 있다. 이 건물 안에는 1476년의 아미타삼존벽화가 있어 유명하다. 같은 시기의 대표적 다포 건물은 서울 남대문으로 웅건한 쇠서와 보머리가 특징적이며 지붕의 곡선 등이 균형 잡힌 성문이다.

한편, 해인사장경판고(海印寺藏經板庫, 국보 제52호)는 1488년에 세워진 건물로서 공포는 없다. 하지만 기둥머리에 헛점차(바깥쪽에만 끼어 있는 반쪽 점차) 같은 부재(部材)가 끼어 있어 고려시대 주심포 건물의 헛점차가 안쪽으로 뻗으면서 초공화(草工化)하는 과도 단계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초기를 지나 16, 17세기로 들어가면 후기 양식으로 넘어가는 다포 건물이 많아진다. 서울 문묘대성전(文廟大成殿, 1602년)·창경궁의 홍화문(보물 제384호)·창덕궁의 돈화문(보물 제383호)·전등사대웅전(보물 제178호)·법주사팔상전(1624년, 국보 제55호)·송광사영산전(松廣寺靈山殿, 1639년, 보물 제303호) 등이 대표적인 건물이다.

18, 19세기의 주요 건물로는 불국사대웅전(1765년)·화엄사각황전(華嚴寺覺皇殿, 1703년, 국보 제67호)·해인사대웅전(1769년)·수원팔달문(1796년)·서울동대문(1869년, 보물 제1호)·경복궁근정전(1807년, 국보 제223호)·덕수궁중화전(1906년) 등이 있다.

근정전은 조선 말기를 장식하는 대표적 건물로서 십이지석(十二支石)으로 둘러싸인 2단의 석단 위에 선 중층 건물(重層建物)이다. 바깥 세 겹, 안쪽 네 겹의 높은 공포 안쪽은 화려한 조각의 운궁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10개의 높은 기둥으로 받들고 있는 천장과 함께 내부 공간은 왕궁 정전(正殿)으로서의 웅장함을 돋우어 주고 있다. 그러나 복잡한 공포로 둘러싸인 처마 밑이 이 건물의 크기에 알맞은 힘을 다 못 내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조각]

조선시대의 조각은 고려 말기의 무표정한 얼굴, 굳어진 몸과 옷의 퇴화 양식을 이어받아 그것이 더 양식화되었다. 초기에는 명나라 불상의 영향을 받은 듯한 조그만 불상들이 만들어진 예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조선시대의 불상 조각은 관념화되고 양식화된 신(神)이 들어 있지 않은 우상 조각의 타락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경향은 무덤 앞의 석인 조각(石人彫刻)에서도 마찬가지이며 15세기에는 인체 표현에 약간의 사실성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말기가 되면 네모난 돌기둥에 옷주름만 표현한 것 같은 도식화된 것으로 변하며, 몸의 비례도 4등신·3등신으로 되고 있다.

그리하여 조각에서는 신라시대를 정점으로 하는 자연주의는 고려로 들어가면서 추상 양식으로 바뀌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그 정점에 도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회화]

조선시대의 그림은 남아 있는 작품과 기록이 많아서 그 성격과 양식 변천을 이해하기 쉽다. 전반적으로 전기의 중국화 전통에서 중기 이후의 탈중국 노력과 한국화(韓國化)의 성립이 그 양식상의 특색이라 하겠다.

전기는 북송의 곽희(郭熙)·이성(李成) 양식을 따른 안견 화풍(安堅怜風)과 남종 원체화(南宗院體怜, 馬遠·夏珪 양식)를 따르는 남송화풍(南宋怜風)이 공존하였던 시기이다. 대표적인 화원(怜員)으로는 안견·최경(崔涇)·이상좌(李上佐) 등이고, 사대부 화가로는 강희안(姜希顔)·최수성(崔壽緖)·양팽손(梁彭孫) 등이 있다.

안견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몽유도원도〉(1477년)는 경치·필치·구도 모두 북송풍이다. 그리고 화면에 넘치는 기운(氣韻)과 풍격은 그가 북송화풍의 진수를 터득한 거장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 이상좌의 〈송하보월도 松下步月圖〉는 이른바 잔산잉수(殘山剩水)의 남송 원체파의 전형적 구도이다. 15세기의 조선 화가들이나 지식 계급이 회화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관념이나 자세를 보여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전기를 지나 중기(16, 17세기)로 들어가면 전기의 남송화풍 대신에 명나라의 남송 원체화풍이라고 할 수 있는 절파 양식(浙派樣式)이 들어와서 영향을 주었다. 또 거기서 변한 조선 양식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절파는 결국 근대화한 남송화풍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필치에서는 북종화의 부벽준(斧劈齧)을 쓰고 묵색(墨色)의 농담 대조를 통한 공간 표시 노력, 화면에 있어서의 인물 강조 등이 특징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잘못되면 형식화·양식화가 지나치고 농담의 강조에서 오는 화면의 조경감(燥輕感)이 두드러져 신(神)이 들어 있지 않은 그림으로 되기 쉽다.

강희안은 이 절파 화풍을 가장 먼저 들여온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17세기에 내한한 맹영광(孟永光)도 조선에서의 절파 양식 보급에 공헌하고 있다. 이 절파 양식의 중기 화가로는 김제(金壻)·이경윤(李慶胤)·이정(李禎)·김명국(金明國)·윤의립(尹毅立)·이징(李澄) 등이 있다.

이러한 절파 그림에서 출발하면서 탈중국의 첫 방향을 제시한 것이 김식(金埴)과 조속(趙涑)이다. 김식은 소를 잘 그렸으며 기본적으로 절파 전통을 따르면서 대상 표현에서의 개성 강조, 대담한 배경 삭제에 의한 공백 면적 확대, 필선(筆線)의 절약과 변형 등으로 종래의 중국산수화 같은 그림과는 달리 소라는 화제와 함께 조선화 양식, 이른바 한국화에로의 방향전환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조속도 까치라는 자기 주변의 대상물을 즐겨 그려 한국화의 분위기를 퍼뜨리는 데 공헌하였다.

중기에 이은 후기(18, 19세기)는 한국화 양식이 발전하고 새로 중국의 남종화가 도입되어 유행한 시기이다. 중기 말에 시작된 한국화를 이어받아 대성한 것은 정선(鄭類)이다. 그는 청나라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남·북화의 기법을 섞어 쓰면서 청초관화(淸初官怜)의 좋은 점만을 따고 나쁜 것은 버렸다.

그리고 따로 자기가 창조한 빗발준〔齧〕으로 종래의 상상적 경치가 아니라 우리 나라의 실경을 그려 기법·정신·효과 면에서 정말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진경화(眞景怜)를 그려 내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금강전도 金剛全圖〉(국보 제216호, 호암미술관 소장) 등을 꼽을 수 있다. 〈금강전도〉는 그 독특한 구도에서, 〈인왕산도〉는 암벽(巖壁) 표현의 청신(淸新)과 대담(大膽)에서 독보적이다. 〈인왕산도〉의 필치는 형식화한 중국 산수화에 눈 익어 온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새 화풍이요 작품이었을 것이다.

이 한국화풍을 이은 작가로는 김홍도(金弘道)·신윤복(申潤福)·강세황(姜世晃)·이인문(李寅文)·최북(崔北)·변상벽(卞相璧) 등을 들 수 있다.

김홍도·신윤복은 당시 사람들의 실제 생활에 관심과 흥미를 가졌으며, 조선시대 풍속화가의 대표적 존재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작가가 나오게 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전쟁 뒤의 민족 감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그런 그림을 걸어 놓고 그 한국적 분위기에 친밀감과 애착을 느꼈던 것이다.

강세황은 사대부 화가로서 산수·인물·동물 등의 그림에 모두 능하였으며, 미술 평론도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기법의 개발에 관심을 가져 〈송도기행첩 松都紀行帖〉에서 보듯이 계곡에 뒹구는 거암(巨巖)의 입체감을 서양화식의 음영법(陰影法)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후기의 한국화는 19세기에 들어서서는 문제 의식을 가진 화가가 뒤를 잇지 못하여 차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나라 판화 양식인 남북양식 합작이면서 남화기법이 주가 되고 화면에서 감정 표현이 빠져 버린 화풍이 우세하게 되었다.

이러한 후기 화단의 주요 작가로는 이재관(李在寬)·조정규(趙廷奎)·허련(許鍊)·장승업(張承業)·조석진(趙錫晉)·안중식(安中植) 등이 있다. 이들 화풍이 이른바 전통화로서 20세기로 넘어가게 되었다.

다만, 이러한 후기 화단에 있어서 각각 개성을 발휘한 사람으로 김정희(金正喜)·김수철(金秀哲)·홍세섭(洪世燮)·민영익(閔泳翊) 등을 들 수 있다.

김정희는 문인화가로서 작품 수는 적으나 그의 제작 정신은 전통적인 중국 문인화 세계의 파악이었다. 그리고 조선이 낳은 진실한 문인화가(文人怜家)라는 점에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민영익도 난(蘭)을 그리면서 구도·필치 등에서 자기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였다는 점에서 김정희와 함께 조선 회화사에 남을 중요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개성은 있으나 기본적으로 보다 중국 전통을 따르는 작품에 대해서 김수철의 그림은 맑은 색감과 간결한 구도의 참신하고 현대적인 성격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승지였던 홍세섭은 중기의 한국화 전통을 되살린 조선시대 마지막 화가이다. 그의 그림에는 언제나 한국적인 개성이 뚜렷하다. 특히 〈유압도 遊鴨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빠르게 헤엄치는 한 쌍의 오리를 위에서 내려다본 의표를 찌르는 구도이다. 실감 나는 물결의 처리와 함께 그가 드물게 보는 천재적 화가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는 조상 숭배의 관습 때문에 많은 초상화가 그려져 큰 발전을 하였다. 조선 초상화는 대상 인물의 정신을 표출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였다. 그 목적이 달성되면 그 밖의 의복의 세부 따위는 간단히 처리해 버리는 수가 많았다. 그것이 도리어 인물의 생명감을 돋우는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항복(李恒福) 초상화〉(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는 최소한의 필선으로 안면 묘사를 끝내고 옷은 억양 있는 힘센 선으로 빠르게 표현해서 특이한 생명감이 감도는 중기 초상화의 한 걸작이다.

그리고 〈이재(李縡)의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음영법까지 사용한 안면의 사실성과 복건(邏巾)·깃·옷소매의 검은 세모꼴들이 만들어 내는 구조학적 힘이 인상적인 18세기의 명작이라 하겠다.

조선시대는 이러한 그림들과 함께 일반 민가에서 쓰이는 민화(民怜)가 유행하였다. 그것은 화가가 아닌 화공의 작품들이지만 대상물의 표현·배색에서 기발한 양식화·도식화가 시도되어 매우 독특한 한국적인 회화 양식으로 반전되고 있다.

끝으로, 조선시대는 목판 인쇄·활판 인쇄에 의한 많은 서적이 간행되었다. 그중에는 판화라고 할 수 있는 삽화본도 적지 않다. 이러한 삽화는 원화(原怜)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 기본 목적이다. 하지만 판각 특유의 태세(太細)와 규각(圭角)이 있는 선 그리고 필요 없는 세부의 생략이 화면에 판화 특유의 힘과 효과를 주었다. 또 판화 중 그것을 의식한 판화가적 제작 정신이 엿보이는 것이 있다.

15세기 판화본에서는 ≪삼강행실도≫(1434년)·≪관음경≫(乙亥字刊本, 1485년) 등에서 보듯이, 판각이 원화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원화의 선과 격이 잘 재현되고 있다. 그러나 판화가 가지는 특유한 힘이 없는 것이 결점이다.

16세기로 들어가면 원화의 불필요한 선이 생략되고 판각 특유의 억센 선이 나타나기 시작, 판화 자체의 기준에 의하여 작업한 자세가 보인다. 따라서 개성이 있는 판화가 만들어진 것이 16세기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부모은중경 父母恩重經≫은 판본이 많아 16세기의 판화 변천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1536·1584년에 간행된 ≪목련경 目連經≫은 16세기의 힘센 판화 양식의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즉, 세부의 불필요한 부분은 일체 생략되고 옷주름도 주름이 아니라 몸의 굴곡 면을 표시하기 위한 등고선같이 표시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이 선들의 태세와 함께 몹시 현대적인 감각과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17세기가 되면 다시 원화가 가지는 회화적 효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綱行實圖≫(양주 佛巖寺, 1673년)·≪부모은중경≫(龍珠寺, 1696년) 등은 그 좋은 예이다. 18세기의 판화는 ≪이륜행실도≫(1730년)·≪오륜행실도≫(整理字本, 1797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17세기 양식을 이어받으면서 산·바위의 표현이 모가 없는 남화 양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19세기는 전반적으로 퇴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화면의 극히 간단한 처리와 판각 특유의 표현 방법을 합쳐서 민화에서 본 바와 같은 매우 천진난만한 화면을 만들고 있다. ≪도정절집 陶靖節集≫의 귀거래도(歸去來圖), ≪한묵유방시 翰墨流芳詩≫(1861년)의 단교도(短橋圖) 등은 19세기 양식의 좋은 예들이라 할 수 있다.

[공예]

(1) 도자기

조선시대는 값싼 백자와 잡유기(雜釉器)의 개발로 도자기의 사용이 고려 때보다 크게 증가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5세기 초 전국의 도자기 가마 수는 321곳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선 도자기는 대체로 임진왜란을 경계로 하여 전기의 분청 시대(粉靑時代), 후기의 청화 백자(靑華白磁) 또는 백자 시대의 둘로 나누어진다.

분청자기(또는 사기)는 분장 청자(粉粧靑磁)의 약칭으로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고려 말기 상감 청자에서 시작, 조선 특유의 변화를 거쳐가는 일련의 조선 청자를 총칭하는 말이다. 분청은 결국 백토(白土)를 가지고 청자를 여러 가지로 장식(분장)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시대순 또는 발생순에 따라 감화(嵌花)·인화(印花)·박지(剝地)·선화(線花) 또는 각화(刻花)·철화(鐵怜), 그리고 백토 분청의 여섯 가지로 나누어진다.

감화 분청은 상감 청자의 조선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거칠고 대담한 상감 무늬에서 선이 가늘고 도안적(圖案的)인 고려 상감과 구별이 된다. 또, 백토의 발색 효과를 돋우기 위하여 유약은 보다 무색 투명해졌다. 그래서 태토의 어둡고 탁한 빛이 그대로 나타나 청자라고는 하지만 고려청자와는 빛이 전혀 다르다.

인화 분청은 상감하는 수공을 생략하기 위하여 점열 또는 국화무늬 등을 새긴 도박(陶拍)으로 그릇 표면 전부를 두드려서 자국을 내고 거기에 백토를 발라 메운 것이다. 감화 분청과 함께 15세기에 유행한 수법이다. 그릇 전면에 백토를 바르고 배경을 깎아서 태토 바탕 빛을 나타내어 상감 무늬 같은 효과를 내려고 한 것이다. 선화 또는 각화 분청에서 다시 변화하여, 배경을 그대로 두고 무늬의 윤곽을 선각한 것으로서 16세기에 유행하였다.

철화 분청은 백토 바탕 위에 자토로 무늬를 그린 것이다. 결국 붓으로 흑상감(黑象嵌)의 효과를 내거나 또는 각화 분청 무늬의 선각을 붓그림으로 대치한 것이다. 이 수법 역시 16세기에 유행한 수법으로서 가마가 계룡산에 모여 있기 때문에 계룡산 양식이라고도 불린다. 변형되고 추상적인 물고기·새·꽃 등이 소박하면서 때로 날카로운 필치로 그려져 있다.

백토 분청은 이상과 같은 백토 바탕 위의 장식 수법들을 모두 중지하고 백토 바탕을 그대로 남기는 방법이다. 이것으로 조선까지 끌어온 고려청자의 전통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백토 분청에는 귀얄로 바른 것과 그릇의 굽을 잡아 거꾸로 들고 백토를 탄 물에 담갔다가 들어내는 덤벙 방식의 두 가지가 있다. 따라서 전자의 경우 그릇 표면에 힘차게 돌아간 귀얄자국이 멋이 있다. 후자의 경우 그릇의 상반부만이 흰색으로 되는 특수한 배색이 개성적이다.

이 백토 분청이 끝남으로써 조선 청자 전통은 끝나게 되었다. 그것은 결국 고려청자 700년 역사가 막을 내린 것이 되는데, 백토 분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미 수십년 전에 소멸되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일본에서 분청사기가 아니라 청화 백자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토 분장은 1550년경에 제작이 끊겨 임진왜란 당시는 그 기술은 잊혀지고 있었다. 다만, 현재 일본 오키나와(沖唎)에서 인화분청 양식의 도자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조선 초기에 표류한 조선 도공의 기술 전수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선 전기의 백자는 당당하면서 우아한 형태, 맑고 티가 없으면서 따뜻한 불투명 유약이 그 특색이라 하겠다. 이러한 백자에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리는 청화 백자는 15세기 중엽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처음은 그릇 형태나 무늬에서 명나라 초기 청화 백자의 영향이 반영되었다. 구례 화엄사의 송죽무늬항아리(1489년 작,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의 매조무늬〔梅鳥文〕항아리 등은 그러한 초기 청화 백자의 본보기이다.

그러나 16세기가 되면서 무늬 면적이 몹시 제한되고 간단한 초화 (草花)를 즐겨 그리는 조선 청화 백자 양식이 확립된다. 이 시기의 정부 관리의 청화 가마로는 광주 도마리(道馬里)·번천리(樊川里) 가마가 있다.

임진왜란이 조선 도자기사를 이분(二分)하고 있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구주(九州) 서중부의 사츠마(薩摩) 지방에만 조선 도공 22성(姓) 80여 명이 잡혀가서 도자기를 생산하였다. 1594년 북구주로 잡혀간 도공 이씨(李氏, 일본 이름 金江參平)는 사가현 아리다(佐賀縣有田)에서 백자 흙을 발견, 일본에서 처음으로 자기(porcelain)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17, 18세기는 단단한 실투유(失透釉)가 계속된다. 하지만 18세기는 안정된 사회 정세를 반영하는 듯 투명 유약이 쓰인 옥 같은 질감의 항아리·문방구 등이 광주 금사리(金沙里) 가마에서 구워졌다.

또, 무늬도 16, 17세기의 면적이 제한된 것과는 달리 그릇 크기에 맞먹는 활달한 초화·사군자·산수 등이 그려졌고 봉황·용 그림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산화동(酸化銅)을 이용한 붉은 무늬의 진사 그림 백자도 이 무렵부터 실물이 남아 있다.

19세기의 청화 백자는 광주(廣州)의 분원요에서 대량 생산되었다. 화원(怜員)이 파견되어 산수·조수·모란꽃 등이 훌륭한 솜씨로 그려진 작품도 있다. 그러나 차차 품질 관리가 이완되어 막그릇 같은 질로 떨어지다가 1848년에 폐요되었다.

그러나 19세기의 청화 백자는 양산에서 오는 무작위(無作爲) 때문에 도리어 조선 미술 특유의 소박과 해학이 나타난 작품들이 있고 성격이 서민적이어서 친근미를 주는 경우가 있다.

(2) 화각(華角)

화각은 뿔을 엷게 깎아서 펴고 한쪽에 채색 그림을 그려서 목기 위에 뒤집어 붙여 장식으로 하고 무늬의 오손(汚損)을 막는 조선 특유의 공예이다.

그 기원은 복홍(伏紅)이라고 불리는 고대 중국의 대모 장식법(玳瑁裝飾法)에서 출발하였겠지만 쇠뿔을 썼다는 데 착상의 기발함이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릇 전부를 덮었다는 데 감각의 근대성이 있다고 하겠다.

화각의 무늬는 화조·십장생 등 도안으로 적합한 것들이 채용되었다. 그리고 색은 황·홍·녹·백(호분)을 써서 화려하면서도 따뜻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화각에 즐겨 이용되는 목기는 장·경대·자·실패·베갯모 등 주로 여자용인 것이 특색이다.

(3) 목공

조선시대의 목공품은 나무가 가지는 아름다움을 최고로 살리면서 기능과 장식의 조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불필요한 기교가 없는 견고한 형태와 구조는 최소한으로 제한된 장식과 함께 방안에 부드럽고 친밀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조선 목공품에 주로 쓰인 나무는 느티나무·소나무·오동나무·오리나무·먹감나무 등이다. 느티나무는 그 견고성과 결의 아름다움으로 반닫이·뒤주·서안(書案) 등 각종 장에 많이 쓰였다. 그리고 오동나무는 가볍고 벌레를 막고 결이 아름답기 때문에 내방의 장 따위에 애용되었다.

조선시대의 목공품 중 반상(飯床)은 한국인의 생활 철학이나 소박한 심미감을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호족반(虎足盤)의 다리에는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이 살아 있다. 그리고 풍혈반(風穴盤)의 구멍에는 신라시대 안상(眼象)의 여운이 남아 있다. 직선적인 나주반(羅州盤)에도 받침대의 약간 휜 곡선이 아름다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반상이라는 가장 친밀한 생활 도구에 보일 듯 말 듯 비치게 한 조선 사람들의 낙천적인 자연주의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조선시대 목공품의 전부에 깔려 있는 기본 철학이라 하겠다.

<김원룡>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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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문화사 [근대/현대] 근현대의 미술 (민족) 이창호 2003-05-22 4883
1005 문화사 [조선] 조선시대의 미술 (민족) 이창호 2003-05-22 2471
1004 문화사 [고려] 고려시대의 미술 (민족) 이창호 2003-05-22 2392
1003 문화사 [고대] 고대의 미술 (민족) 이창호 2003-05-2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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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