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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1 (일) 17:52
분 류 문화사
ㆍ조회: 10316      
[남북국] 발해 문화 (민족)
발해(문화)

[유학]

유학이 발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3대 문왕 시대부터이다. 물론 714년 학생을 파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건국 초기부터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학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짐으로써 유학이 발해 사회에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된 것은 대체로 문왕의 문치(文治)에 힘입었다 할 것이다.

문왕은 즉위한 다음 해인 738년 6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당례 唐禮≫, ≪삼국지 三國志≫, ≪진서 晋書≫, ≪삼십육국춘추 三十六國春秋≫를 구하였다. ≪당례≫는 유교에 입각한 국가 규범을 담고 있던 ≪대당개원례 大唐開元禮≫를 의미한다. 이러한 서적들은 궁중도서를 관장하던 문적원(文籍院)에 소장되었을 것이고, 주자감(胄子監)에서는 이를 교재로 자제들을 교육시켰을 것이다. 발해의 여러 제도를 살펴보면 유학과 관련된 명칭들이 다수 보인다.

우선 궁중에서 후궁의 업무를 담당하던 항백국(巷伯局)의 항백은 ≪시경 詩經≫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문왕의 존호(尊號)인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에도 불교 용어와 함께 효감(孝感)이란 유교적 단어가 들어 있다. 무엇보다도 충ㆍ인ㆍ의ㆍ지ㆍ예ㆍ신이라는 유교 덕목을 6부의 명칭으로 삼은 것은 그 사회에 유학이 얼마나 깊숙이 침투했는가를 실증해 주는 면이다. 발해 지배층에 유학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사실은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두 묘지에서도 확인된다.

이 비문은 중국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들을 두루 섭렵해 변려체 문장을 구사하고 있어서 당시 발해 지식인의 소양을 엿보게 한다. 묘지에 인용된 경전만 하더라도 ≪상서 尙書≫, ≪춘추 春秋≫, ≪좌전 左傳≫, ≪시경 詩經≫, ≪역경 易經≫, ≪예기 禮記≫, ≪맹자 孟子≫, ≪논어 論語≫ 등이다.

문왕 이후로 발해 사회는 유학이 크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황을 보여 주는 사료는 없다. 다만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유학이 발해인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우선 발해인의 이름이다. 왕 이름인 대원의(大元義), 대언의(大言義), 대명충(大明忠), 대인수(大仁秀), 공주 이름인 정혜(貞惠)와 정효(貞孝), 귀족 이름인 대의신(大義信), 대성경(大誠慶), 대성신(大誠愼) 등에는 추상적이고 유교적인 덕목들이 들어 있다.

다음은 외국에 오고간 국서이다. 국서는 비록 의례적이고 추상적이며 상투적인 말들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각각의 왕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실상을 보여 주는 일면도 있다. 특히 제10대 선왕이나 제11대 대이진에 대한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선왕은 일본으로부터 “신의로 본성을 이루고, 예의로 입신하였다(信義成性, 禮儀入神)”, “세속에는 예악을 전하고, 가문에는 의관을 이었다(俗傳禮樂, 門襲衣冠)”, “믿음은 금석과 같이 확고하고 절개는 소나무ㆍ대나무처럼 곧다(信確金石, 操貞松筠).”는 말을 들었다.

대이진은 중국으로부터 “대대로 충정을 이어받았고, 사람 됨됨이는 인후에 바탕을 두었다(代襲忠貞, 器資仁厚).”는 평가를 얻었다. 이러한 두 가지 정황을 통해 유학이 발해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던 양상을 추정할 수 있다.

[한문학]

발해인들이 문학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고원고(高元固)와 관련된 글에서 조금이나마 더듬어 볼 수 있다. 그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에 같은 시기에 과거에 급제한 서인(徐繃)을 만나러 민중(萄中 ; 福建省 福州) 지방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때 그가 서인을 만나 지은 〈참사검부 斬蛇劍賦〉, 〈어구수부 御溝水賦〉, 〈인생기하부 人生幾何賦〉를 발해 사람들이 집집마다 금으로 써서 병풍을 만들어 놓았다는 말을 전하였다. 이들이 급제한 것이 892년이므로 그 시기는 10세기 초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이러한 발해인들의 취향으로 보아서 많은 문학 작품들이 만들어졌을 터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극소수만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발해인의 문학 작품으로 문장과 시가 전해지고 있다. 문장에는 사적인 것보다 외교와 관련된 국가 사이에 오고간 공식 문서들이 중심을 이룬다. 문장 형식은 당나라에서 크게 유행하던 변려문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산문도 있다. 발해는 당나라ㆍ일본ㆍ신라ㆍ거란ㆍ돌궐 등의 이웃 나라들과 외교 교섭이 있었다. 하지만 전해지는 문서들은 당나라, 일본과 오간 것들뿐이다.

그 숫자를 보면, 발해에서 당나라에 보낸 것이 1편,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것이 23편이 된다. 발해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160차례 이상이 되지만, 발해가 당나라에 보낸 문서로는 연대를 확인할 수 없는 하정표(賀正表) 1편만이 있을 뿐이다.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23편의 문서 가운데에서 발해 국왕이 보낸 것이 16편이고, 발해 중대성이 일본 태정관(太政官)에 보낸 관청 문서가 7편이다. 이들은 외교 문서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고 있고 대부분 상투적인 어구로 채워져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서들을 통해서는 작자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다만 이들을 분석해 보면 초기에는 변려문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후기로 갈수록 대구가 적어지면서 문장의 호흡이 자유로워지는 경향이다. 이를 통해 발해문학의 전반적인 흐름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배구(裴谷)가 동단국의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일본 조정에 사과하는 글을 올린 것이 있다. 이상은 외교와 관련된 문장들이지만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쓰인 문장도 없지는 않다.

그 하나는 발해 승려인 정소(貞素)가 영선(靈仙)의 죽음을 애도해 지은 시에 붙인 서(序)가 있다. 또 하나는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지문이다. 이들은 서(序)와 명(銘)을 갖추어 당나라의 전형적인 묘지문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제 한시로 눈을 돌려보자. 발해인의 시는 정소가 중국에서 지은 1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에 파견된 사신들이 지었다. 일본 문인들과 시문을 교환했던 발해 사신으로는 758년에 파견된 부사(副使) 양태사(楊泰師), 814년에 파견된 대사(大使) 왕효렴(王孝廉)과 부사(副使) 고경수(高景秀) 및 녹사(錄事) 석인정(釋仁貞) 등이 있다.

또한, 858년에 파견된 부사 주원백(周元伯), 871년에 파견된 대사 양성규(楊成規)와 부사 이흥성(李興晟), 882년에 파견된 대사 배정(裴煞), 894년에 파견된 대사 배정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부사, 907ㆍ919ㆍ929년에 파견된 대사 배구(裴谷) 등이 있다. 일본에서는 이들 문인을 대하는 데에 대단한 신경을 쓰기도 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시는 양태사 2수, 왕효렴 5수, 석인정 1수, 석정소 1수로서 모두 9수이다. 형식은 오언율시 2수, 칠언고시 1수, 7언절구 6수로 되어 있어서 발해인들이 7언시를 즐겨 사용했음을 볼 수 있다.

내용으로는 멀리 타국에서 고국을 그리는 향수를 그린 것이 있는가 하면, 일본 조정으로부터 환대를 받아 즐거운 마음을 표현한 것도 있다. 고국을 그리는 시로서 대표적인 것은 양태사의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듣고〉라는 서정적인 시이다. 이 시는 일본에서 가을밤에 다듬이질 소리를 듣고 고국에 있는 부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일본 조정에서 환대를 받아 즐거운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는 왕효렴의 〈봄날에 비를 보고 정자(情字)를 얻어 지음〉이란 시를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발해 유민으로서 문학 작품을 남긴 인물도 적지 않다. 이러한 인물로서 요나라 때의 천조제 문비 대씨(天祚帝 文妃 大氏), 금나라 때의 왕준고(王遵古)ㆍ왕정견(王庭堅)ㆍ왕정균(王庭筠)ㆍ왕만경(王萬慶) 집안, 고간(高駕)ㆍ고헌(高憲) 집안, 장여위(張汝爲)ㆍ장여능(張汝能) 형제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발해에 한자 이외에 고유문자가 있었는지 살펴보자. ≪구당서≫ 발해말갈전에는 “문자와 서기가 있다.”고 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기와에 찍혀 있는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들을 근거로 발해에 고유문자가 있었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되곤 한다.

그러나 고유문자로 표기된 문장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발해인이 남긴 두 공주의 묘지나 시문을 보면 이들은 한자를 일상적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발해에 고유문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만한 자료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불교 및 기타 종교]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불교가 들어와 있었다. 이것은 건국하던 해에서 멀지 않은 713년 12월 당나라에 갔던 발해 왕자가 절에서 예배하기를 청했던 기록에서 확인된다. 또한 발해 불상들이 거의 대부분 당나라 이전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막새기와(瓦當)의 연꽃 문양이 고구려의 전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발해 불교가 같은 시대의 당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발해 불교가 발전기에 접어든 것은 제3대 문왕 시기에서이다. 그의 존호에 ‘금륜’과 ‘성법’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불교 용어이다. 특히 금륜이란 용어에서 문왕 스스로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지향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문왕대에 조성되었던 상경(上京), 중경(中京), 동경(東京) 주변에 절터들이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딸인 정효공주(貞孝公主) 무덤이 지하에 무덤칸을 만들고 그 위에 탑을 세운 모양을 취하고 있다. 또한 부근에 능사(陵寺)로 보이는 절터가 있는 사실들도 이 당시에 왕실에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9세기에 들어와 불교가 융성해지면서 승려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발해 승려로서는 석인정(釋仁貞, ?∼815), 석정소(釋貞素, ?∼828), 살다라(薩多羅), 재웅(載雄) 등이 있다. 이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석인정과 석정소이다. 석인정은 희왕(僖王)대의 인물로서, 814년 녹사의 직책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시를 잘 지었으며, 일본에서 지은 시 한 수가 남아 있다. 기록이 제일 많이 남아 있는 승려는 석정소이다. 그는 희왕대부터 선왕대까지 활동하였다.

석정소는 일찍이 당에 유학해 813년 가을에 일본 유학승 레이센(靈仙, ?∼828)을 만나 사귀었다. 그 후로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간 레이센과 일본 조정 사이를 왕래하면서 서신과 물건을 전해 주는 중개자 역할을 수행하다가 828년에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귀족층에서도 불교와 관련된 활동이 보인다. 762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왕신복(王新福) 일행이 도다이지(東大寺)에서 예불하였던 사실을 보여 주는 고문서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814년 사신으로 갔던 왕효렴(王孝廉)이 일본의 유명한 승려인 쿠우카이(空海, 774∼835)와 시문을 나누었던 기록 등도 보인다.

861년 사신으로 갔던 이거정(李居正)이 일본에 전해 준 다라니경(陀羅尼經)도 지금 전해진다. 또한 814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고예진(高禮進)이 금불상과 은불상을 바치기도 하였다. 926년 발해가 멸망하자 많은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했는데, 이 가운데에는 927년 3월에 들어온 승려 재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발해 불교의 명맥은 요동 지방에서 활발히 이어지고 있었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928년에 유민들을 요동 지방으로 강제로 이주시킴으로써, 현재의 요양(遼陽) 지역이 이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불교 전통은 금나라 때에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금나라 황실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발해 유민들이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발해 불교의 자취로서는 절터와 탑터, 불상, 사리함 등이 있다. 절터로서는 모두 40군데 정도가 확인되었다. 이들이 주로 통치의 중심지였던 5경에 집중되어 있어서, 불교가 지배자를 중심으로 전파되었던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탑으로는 영광탑(靈光塔)만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러한 탑이 승려들의 사리를 모시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정효공주 무덤탑처럼 일반 무덤 위에 세워진 경우도 있어 발해문화의 한 특색을 이루고 있다. 불상으로는 석불(石佛), 철불(鐵佛), 금동불(金銅佛) 또는 동불(銅佛), 전불(塼佛), 소조불(塑造佛) 등이 있고, 벽화 조각도 남아 있다. 석불로서는 상경유지박물관(上京遺址博物館)에 남아 있는 것과, 일본 오오하라(大原)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함화4년명비상(咸和4年銘碑像)〉이 대표적이다.

발해 불상의 전형을 이루는 것은 전불이다. 이들은 크기가 10cm 내외로 아주 작은 것으로서 틀빼기를 해 구워 만들었다. 또한, 형식면에서는 관음보살입상(觀音菩薩立像), 선정인여래좌상(禪定印如來坐像), 미타정인여래좌상(彌陀定印如來坐像), 2불병좌상(二佛竝坐像), 3존불(三尊佛), 5존불(五尊佛)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크게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특색을 보이고 있다. 상경 지역에는 관음상(觀音像)이, 동경 지역에서는 2불병좌상이 주류를 이룬다. 이것은 두 지역에 관음신앙과 법화(法華)신앙이 각기 유행하고 있었던 사실을 반영한다. 이 밖에 발해인의 종교로서 경교(景敎)가 들어왔던 흔적이 일부 보이고 있다. 그 외에도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샤머니즘이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미술과 공예]

발해의 회화에 관해서는 원나라 때에 편찬된 ≪도회보감 圖繪寶鑑≫에 대간지(大簡之)가 송석(松石)과 소경(小景)을 잘 그렸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그런데 대간지를 발해인이라 하면서도 금나라 항목에 넣은 점으로 보아, 그는 금나라 때에 활동한 발해 유민으로 보인다. 발해 시대의 그림으로는 정효공주 무덤과 삼릉둔(三陵屯) 2호묘의 벽화가 대표적이다. 정효공주 무덤에는 널길과 널방의 3벽에 모두 12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비록 공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여기에 그려진 무사(武士)ㆍ시위(侍衛)ㆍ내시(內侍)ㆍ악사(樂師)ㆍ시종(侍從)을 통해 공주의 궁중생활을 엿볼 수 있다.

관대(棺臺) 남쪽 측면에도 백회 위에 그린 사자머리 같은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나 손상이 심해 원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인물 표현을 보면 하얗게 칠한 얼굴은 둥글고 크며 살이 쪄서 풍만하다. 눈은 작고 눈썹은 가늘며 코가 낮다. 그리고 뺨은 둥글며 붉은 입술은 작고 동그랗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인물 표현은 대체로 당나라 풍을 지니고 있다. 이 벽화는 발해인의 복식도 엿볼 수 있게 한다. 머리에는 높은 상투를 틀고 복두나 말액(抹額)ㆍ투구를 썼다. 그리고 몸에는 단령포나 갑옷을 입었다.

단령포는 깃이 밭아서 목둘레선에서는 속옷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허리 아래에서 옆으로 트인 옆트임을 통해 속에 입은 중단(中單)ㆍ내의(內衣)ㆍ고(袴)가 드러난다. 소매에는 넓은 것과 좁은 것이 있고, 옷자락이 발등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다. 겉옷에는 여러 가지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겉옷의 색깔은 갈색ㆍ붉은색ㆍ짙푸른색ㆍ흰색ㆍ자색 등이 있는데, 동일한 직분인데도 옷 색깔이 각기 다른 점으로 보아서 관복 규정에 따른 것은 아닌 듯하다.

다음으로 허리에는 가죽띠를 띠었고 신발은 검은 가죽신이나 미투리를 신었다. 삼릉둔(三陵屯) 2호묘의 현실과 연도의 벽 및 천장에도 백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렸다. 이 무덤에는 인물과 함께 꽃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정효공주 무덤 벽화와 조금 다르다. 인물 그림은 현실 동ㆍ서쪽 벽에 각각 4명, 북쪽 벽에 3명, 남쪽 연도 입구 좌우에 각각 1명, 연도 동ㆍ서쪽 벽에 각각 무사 1명씩 도합 15명이 그려져 있지만 거의 훼손되었다. 널방 천장과 널길 천장에는 꽃 그림이 있다.

삼각 고임한 천장에는 흰색 바탕에 노란색 꽃이 가득 그려져 있다. 상경성에서 발굴된 절터에서도 꽃이나 천불도(千佛圖)가 그려진 아주 작은 벽화파편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아브리코스(Abrikos) 절터에서도 번개무늬와 직물무늬가 복합된 벽화 파편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상경성에서 출토된 벼루 위에 복두를 쓴 인물의 얼굴이 그려진 예도 있다. 발해의 공예품으로는 조각ㆍ도자기ㆍ기와ㆍ벽돌ㆍ금속 세공품 등이 있다. 상경성 2호 절터에는 현무암으로 만든 높이 6m의 거대한 석등(石燈)이 지금도 남아 있다.

돌사자상(石獅子像)으로 대표적인 것은 정혜공주 무덤의 연도에서 출토된 두 마리의 화강암제 사자상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당나라의 돌사자보다 크기가 아주 작지만 강한 힘을 표현한 조각수법이 돋보인다. 상경성 제1궁전지에서도 7마리의 돌사자상 머리가 출토되었다. 조각품에 속하는 것으로는 이 밖에 귀부(龜趺)ㆍ그릇 다리ㆍ묘지석(墓誌石) 등이 있다. 현무암으로 만든 귀부는 1976년 상경성에서 발견되었다. 상경성에서 출토된 그릇에는 다리에 짐승머리가 조각된 것도 있다.

그것은 길게 내민 혀가 바닥에 닿고 머리로 그릇의 몸을 떠받들게 되어 있어서 발해 예술품의 하나로 삼을 수 있다. 정혜공주와 정효공주 묘지석의 경우는 모두 규형(圭形)으로서, 앞면에는 해서체(楷書體)로 묘지문이 음각되어 있다.

한편, 발해 시대에 사용되었던 그릇으로는 도기(陶器)와 자기(磁器)가 있다. 도기에는 유약을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이 있는데, 발해인들이 주로 사용한 것은 유약을 바르지 않은 도기이다. 초기에 만들어진 도기들은 바탕흙이 거칠고 모래가 많이 섞여 있다. 그리고 홍갈색ㆍ회갈색ㆍ황갈색이 많고 색깔이 고르지 못하다. 이 것들은 손으로 빚은 것이 대부분이다. 입술이 두 겹이고 배가 깊은 단지〔重唇長腹罐〕는 발해 초기의 전형적인 그릇으로, 말갈의 전통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중ㆍ후기에 만들어진 도기들에는 바탕흙에 모래가 섞인 것이 줄어든다. 그리고 물레를 사용한 것이 많아지며 회색이 주류를 이룬다. 이 때 유약을 바른 도기도 출현한다. 아가리를 구름 무늬와 인동 무늬로 표현한 흑회색의 큰 접시(盤)는 길이 86cm, 너비 64cm, 높이 10cm 크기로서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입이 나팔꽃처럼 활짝 벌어지고 목이 긴 병은 고구려 유적에서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사이호(四耳壺)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유약을 바른 도기는 구운 온도가 높고 바탕이 희고 단단하다.

유약으로 삼채(三彩)를 즐겨 사용하였다. 삼채로서는 노란색ㆍ갈색ㆍ녹색ㆍ자색 등이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1988년에 화룡(和龍) 북대(北大) 고분군 7호 무덤에서 출토된 삼채 병과 삼채 사발이다. 자기는 수량이 아주 적고 그마저 조각난 상태로 발견되었다. 상경성에서 출토된 것으로 백자(白磁) 사발(碗)과 자색(紫色) 단지(罐)가 있다. 호리병(葫蘆甁)도 있는데 갈색 교유(絞釉)를 흐르는 구름이 에워싸듯이 생동감 있게 처리되었고, 바닥에는 먹으로 ‘함화(咸和)’라는 발해 연호가 씌어 있다. 발해 그릇이 중국에도 잘 알려져 있었던 사실은 《두양잡편 杜陽雜編》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음으로 기와와 벽돌 생산을 살펴보자. 발해 기와에는 암키와ㆍ수키와ㆍ치미(悉尾)ㆍ귀면와(鬼面瓦)ㆍ기둥 밑 장식기와〔柱礎裝飾瓦〕 등이 있다. 이들 기와에는 유약을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이 있는데 유약은 녹유를 바른 것이 대부분이고, 자색 유약을 바른 것도 일부 있다. 암키와의 겉에는 새끼줄 무늬ㆍ그물 무늬ㆍ마름모꼴 무늬 등이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안쪽에는 포목 무늬가 많으며, 가장자리에는 손가락으로 누른 무늬나 연주문(連珠紋) 또는 톱날 무늬가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수키와는 막새기와〔瓦當〕가 대표적이다.

수막새의 문양으로는 연꽃잎 무늬가 주종을 이룬다는 점에서 고구려를 강하게 계승했다는 걸 나타낸다. 그렇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고구려 막새기와에서 보이지 않는 문양들도 나타난다. 연꽃잎은 대체로 양식화되어 있는데, 잎의 숫자는 4개에서 8개 사이로서 6개가 기본을 이루고 있다. 연꽃잎 사이에는 연해주 코르사코브카(Korsakovka) 절터에서 출토된 것처럼 봉황새를 부조해 넣은 예도 있다. 발해 기와에는 문자를 찍거나 새긴 것이 다수 발견되었다. 숫자는 400개 정도에 달하고, 문자의 종류는 250종 이상이 된다. 건물에 장식적 효과를 더해 주는 기와에는 치미ㆍ귀면와ㆍ기둥 밑 장식기와 등이 있다.

치미는 상경성ㆍ서고성ㆍ연해주 아브리코스 절터 등에서, 귀면와는 상경성ㆍ서고성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기둥 밑 장식기와는 발해에서 독특하게 발견되는 것이다. 커다란 고리 모양을 해서 기둥과 주춧돌이 만나는 부분을 씌워서 장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비가 들이쳐 기둥이 썩는 것을 방지하였다.

금속 공예품에는 쇠나 구리 또는 은이나 금으로 만든 것들이 많다. 814년에는 발해 사신이 당나라에 금과 은으로 만든 불상을 바쳤고, 836년에는 발해에서 당나라의 허락을 얻어서 등주에 숙동(熟銅)을 가져가 교역하였다. 연해주 아누치노(Anuchino) 구역에 있는 노보고르데예브카(Novogordeevka) 산성은 조사 결과 발해시대에 커다란 수공업 중심지였음이 밝혀졌다. 하남둔(河南屯)에서 발견된 순금 세공품은 금 알갱이를 촘촘하게 붙인 누금(鏤金) 수법이 뛰어나다.

그리고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 부근의 강가에서 발견된 청동용(靑銅俑)은 발해인의 얼굴과 의상을 자세히 보여 준다. 청동으로 만든 기마인물상(騎馬人物像)은 상경성에서 2개, 연해주 우수리이스크에서 1개가 출토되었으며, 대단히 양식화된 모습을 보여 준다. 1975년에 상경성 토대자(土臺子)에서 발견된 사리함에 새겨진 사천왕상(四天王像)도 주목된다. 방형의 은합(銀盒) 4면에 양각한 것으로 선이 가늘고 유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음악과 무용]

발해의 중앙 관청에 예의와 제사를 관장하던 태상시(太常寺)가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일본 기록에는 발해 음악에 관한 것이 많이 보인다. 사신으로 갔던 기진몽(己珍蒙) 일행이 740년 정월에 성무왕(聖武王) 앞에서 ‘본국의 음악’을 연주한 것이 발해 음악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아마 이 연주를 계기로 발해 음악이 일본에 알려졌을 것이다.

발해 음악이 일본 조정에 전해져 최초로 연주된 것은 749년에 도다이지(東大寺)에서 개최된 법회(法會)에서였다. 이 무렵에 발해 음악이 정식으로 일본 궁중음악의 하나에 속하게 되어, 발해 사신들을 접대할 때에 수시로 연주되었다. 아울러 일본 조정에서는 발해 음악을 직접 배워 올 필요성을 느껴 유학생 내웅(內雄)을 발해에 파견한 적도 있다. 발해 음악은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중국의 송나라와 금나라에 이어졌다.

송나라에서는 효종(孝宗) 12년(1185) 3월에 발해 음악을 금지하는 조처를 내렸다. 금나라에는 발해교방(渤海敎坊)이 있어서 발해 음악이 제도적으로 계속 명맥을 유지하였다. 발해 악기로는 송나라 때에도 사용된 발해금(渤海琴)이 있지만 실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정효공주 무덤의 서쪽 벽에 그려진 3명의 악사(樂師) 그림을 보면 각기 보자기에 싼 악기를 들고 있다. 보자기에 들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악기인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체적인 외형으로 보아 앞에서부터 박판(拍板), 공후(謙隸), 비파(琵琶)인 듯하다.

음악이 연주될 때에는 춤과 노래가 따르므로, 발해 음악에도 노래 및 악기 연주와 함께 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발해인들 사이에는 답추(踏鎚)라고 하는 춤도 유행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세시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논다. 먼저 노래와 춤을 잘 하는 사람을 여러 명 앞에 내세우고 그 뒤를 남녀가 따르면서 서로 화답해 노래 부르며 빙빙 돌고 구르는데 이를 답추라 한다.”고 했다. 이는 발해에서 일반인들 사이에 춤추고 노래 부르는 일종의 집단 무용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발해 문화의 성격]

발해 문화는 건국 초기에 고구려 문화를 바탕으로 하였다. 초기의 도성(都城) 체제나 고분 양식이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발해 불교도 고구려계가 주도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뒤에 당나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점차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발해의 각종 제도는 당나라 제도를 기초로 한 것이며, 벽돌 무덤 양식이나 벽화 양식도 이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기층문화는 말갈 문화가 중심이었다. 이 밖에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로부터 전파된 요소도 눈에 띠며, 발해인들이 창조한 고유한 요소도 나타난다.

<이용범>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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