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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6-04 (금) 15:04
분 류 문화사
ㆍ조회: 528      
[무덤] 돌무지무덤 (두산)
돌무지무덤 積石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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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구역의 지면에 구덩이를 파거나 구덩이 없이 시체를 놓고 그 위에 돌을 쌓아 묘역을 만든 무덤.

돌무지시설을 한 점에서 침촌리형(남방식) 고인돌과 공통되므로, 원래 고인돌인 무덤이 후대에 상석이 없어져 돌무지무덤으로 된 가능성도 있다.

청동기 시대 초기의 것으로는 랴오둥반도[遼東半島] 일대의 장군산(將軍山)ㆍ노철산(老鐵山)ㆍ우가촌 타두무덤 등을 들 수 있다. 돌무지 밑의 묘광 배치는 중심적인 주체가 없고, 시설규모 또한 특별한 무덤이 없으며, 부장품에서도 서로 차이가 없다. 따라서 무덤의 피장자는 가족이거나 서로 밀접한 혈연관계가 있는 구성원으로 보인다.

이처럼 피장자 사이에 부장품 및 무덤시설의 차별이 없는 돌무지무덤은 남한지역에서도 보이는데, 한강 상류의 춘천시 천전리(泉田里) 돌무지무덤과 제주시 용담동(龍潭洞) 돌무지무덤 등이 있다. 이들 무덤에는 부장품으로 토기편과 석촉 등의 석기류 몇 점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무덤은 다음 시기에 이르면 많은 사람이 묻히고, 중심과 주변 무덤구덩이 간에 부장품과 무덤시설에서 차이가 나는 무덤으로 변하는데, 랴오둥반도 다롄시[大連市]의 강상(崗上)과 누상(樓上)무덤이 대표적이다. 강상무덤은 동서 28 m, 남북 20 m의 직사각형 묘역 안에 23기의 무덤이 있는데, 판돌로 정성들여 만든 7호무덤 주변으로 자갈로 거칠게 만든 22개의 무덤구덩이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들 주변의 무덤에서는 140여 명이 한꺼번에 화장(火葬)된 채로 묻혀 있고, 누상무덤(동서 30 m, 남북 24 m)에서도 1ㆍ2호 돌덧널무덤 주위에 있는 10개의 돌덧널에서 화장된 많은 뼈가 나왔다. 부장품으로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마구류ㆍ수레부속ㆍ방패ㆍ활촉ㆍ도끼ㆍ끌과 각종 장신구가 나옴에 따라 북한학계에서는 이들 무덤을 수십 명의 노예를 순장한 노예소유자무덤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단계의 돌무지무덤은 이후 고구려와 백제 초기에 보이는 돌무지무덤으로 연결된다.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돌무지무덤을 조성하여 왔는데, 압록강의 지류인 훈강[渾江] 유역의 랴오닝성[遼寧省] 위안런현[桓仁縣]지방과 압록강 남안인 독로강(禿魯江) 유역의 시중군(時中郡)ㆍ자성군(慈城郡)ㆍ위원군(渭原郡) 등에 군집되어 있다.

초기에는 강가 모래바닥에 냇돌을 네모지게 깔고 널[棺]을 놓은 뒤 다시 냇돌을 덮는 정도의 간단한 구조였으나, 점차 냇돌 대신에 모난 깬돌[割石]을 써서 벽이 무너지지 않게 계단식(階段式)으로 쌓았으며, 돌무지의 외형은 대체로 방대형(方臺形)을 이룬다. 이것이 3세기 말~4세기 초가 되면 중국계 돌방무덤[石室墓]의 영향을 받아 퉁거우현[通溝縣]에서도 돌무지무덤의 중심부에 널길[羨道]이 달린 돌방[石室]을 만들게 된다.

일부 지배계층의 돌무지무덤에 있는 장대한 돌방은 쌍실(雙室)로 만든 것이 많은데, 이것은 부부(夫婦)합장인 것으로, 그 대표적인 예로는 장군총(將軍塚)ㆍ태왕릉(太王陵)ㆍ천추총(千秋塚) 등이 있다. 이들 돌무지무덤은 5세기 전반 평양천도(平壤遷都) 이후 차츰 쇠퇴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한강 유역에서도 돌무지무덤이 나오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백제 때의 것으로 초기 백제의 지배세력이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강 지역에서는 무기단식이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기단식을 축조할 시기에 고구려 세력이 이주해 왔거나, 아니면 하천 근처에 있던 무기단식 돌무지무덤이 모두 물에 의해 없어진 때문일 것이다. 백제의 돌무지무덤의 특징은 고구려 재래식 무덤형태로 얕은 대지 위에 네모난 돌무지를 층층이 쌓아올리고 가운데 주검을 넣은 형식으로, 제일 아래 단(段)의 네 변에는 돌이 무너지지 않도록 버팀돌을 설치하였는데, 1변이 50 m가 넘는 것도 있다.

석촌동 3호분은 크게 파괴되었지만 1974년, 83년, 84년의 발굴에 의하면 동서 55.5 m(불확실), 남북 43.7 m의 대형 돌무지무덤으로 제1단은 가에 큼직한 판석을 놓고 그 위에 작은 판석을 한두 겹 얹고 그 안쪽에 크고 작은 막돌을 메운 것이다. 4호분의 경우는 3단의 기단식돌무지무덤으로 위에 돌방과 형식상의 널길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돌방무덤 이전의 단계로 돌무지무덤으로서는 가장 발전된 단계이며, 환인현 고력묘자(高力墓子) 제11호분과 아주 비슷하다. 그 연대는 모두 4,5세기 정도로 여겨진다.

한편, 냇돌을 쓴 고식(古式) 돌무지무덤이 한강 상류인 양평군 문호리, 춘천시 중도, 제천시 교리ㆍ도화리 등의 남한강 유역에서 보인다. 문호리의 것을 예로 들면 1변 약 10 m, 높이 2.7 m 정도의 네모무덤[方形墳]으로 강가에 냇돌을 깔고 아마 세 사람의 시체를 놓은 다음 직접 냇돌을 3단 피라미드형으로 쌓은 것으로,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가장 오래 된 형식과 통한다. 이상과 같은 한강유역의 돌무지무덤들은 고구려 무덤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으나, 압록강ㆍ대동강 지역과 한강 유역 사이가 돌무덤 분포상 단절되었으므로 역시 백제 초기의 백제 고분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곳에서 출토된 김해토기ㆍ철제무기, 퇴화된 민무늬토기편들로 보아 그 연대는 2, 3세기로 짐작되는데, 이 유적은 백제 초기인 한성 도읍 시대의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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