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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4-12 (월) 01:58
분 류 문화사
ㆍ조회: 1201      
[탑파] 백제계석탑의 양식분류와 특성 고찰 2 (천득염)
백제계석탑의 양식분류와 특성 고찰 2

천득염 (전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앞에서 계속)

마. 백제ㆍ신라 절충양식

이 형식은 백제계석탑과 신라계석탑의 세부수법을 혼합ㆍ절충한 것으로 어느 한쪽의 형식을 완전히 갖추지 않고 부분적으로 서로를 수용하여 이루어진 혼합형식이다. 특히 이들 절충양식의 탑군에 소속된다고 판단하는 여러 탑들은 크게 2가지 형식으로, 적게는 3가지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백제ㆍ신라시대석탑의 의장성이 혼합 절충된 성격에서 보다 백제양식에 가까운 형식과 보다 신라양식에 가까운 형식으로 대별되어 이들을 각기 [백제계절충양식]과 [신라계절충양식]으로 구별할 수 있겠다. 즉 백제ㆍ신라양식으로만 분류하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고 뚜렷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어서 이들을 2가지 형식으로 구분하였다. 다분히 백제양식적인 요소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지만, 형태상 세장고준한 모습과 탑신을 받치는 괴임대가 유난히도 강조된 모습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따라서 백제계 절충양식을 다시 '세장고준형'과 '탑신괴임대형'으로 나누어 명명하였다.

물론 이러한 형식구분이 다소는 무리가 있으나 모든 탑들을 하나의 범주에 넣고 의장적인 특성이나 상이성을 찾아 내기가 너무 광범위하고 어렵기 때문에 구분을 시도한 것이다.

➀ 백제계절충약식

이 형식은 상기한 바와 같이 백제ㆍ신라양식의 성격을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으면서 백제 양식적 성격을 보다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즉, 전체적인 모습이나 탑신에서는 백제적인 요소를 지니나 반면 옥개에서는 신라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별석재로 기단과 탑신을 조립하였고, 탑신의 체감도 심하며 옥개석에서는 옥개받침, 이중기단 등에서는 신라적 요소가 뚜렷하다. 반면 각형 3~5단을 이룬 각형의 옥개받침, 이중기단 등에서는 신라적 요소를 찾을 수 있다.

결국 이들은 백제의 고토에서 백제계 석탑을 이루고자 한 장인의 조형의지에다 백제 멸망 후 신라탑들의 강한 영향이 잠재적으로 내재하였다 표출된 형식이라 할 것이다. 이 형식에 속하는 탑으로서는 금골산5층석탑, 옥마리5층석탑, 송제리5층석탑, 천곡사지 7층석탑, 운주사방형탑군, 장문리5층석탑, 마곡산5층석탑, 안국사지 석탑 등이다.

<표7> 백제계절충양식 석탑의 특성

1. 백제계 석탑양식과 신라계 석탑양식을 부분적으로 혼용한 형태로 전체적인 모습은 보다 백제계 석탑양식에 가까운 형식이다.
2. 5층 이상이 대부분이다.
3. 옥개석의 체감비는 적은 반면 탑신고의 체감비는 아주 커서 세장고준해 보인다.
4. 탑신은 수개의 별석재를 조립 구성하여 백제탑적인 요소를 지닌다.
5. 옥개석은 폭이 넓고 얇은 모습으로 백제탑적인 요소를 나타내나 반면 옥개받침은 각형으로 된 3~5단이어서 신라탑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6. 옥개석은 단일석이며 모서리 부분에서는 반곡이 뚜렷하다.
7. 시기적으로 백제양식 석탑 중에서 가장 후대에 속하는 고려중기 이후라 추정된다.

가. 탑신괴임대형

이 형식은 전라북도 남부와 전라남도 북부를 중심으로 배치된 것으로 담양 읍내리5층석탑, 곡성가곡리5층석탑, 담양 연동사지폐탑, 남원 만복사지5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정림사지석탑의 형태를 따른 것으로 탑신하부에 탑신 보다 넓고 굵은 탑신괴임대가 첨가된 양식이다.

대부분 굵은 판석형으로 조립 구성된 이중기단의 뚜렷한 형식을 갖추었고, 평박하고 넓으며, 단일석으로 된 옥개석의 단부에서는 반곡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신라전형탑에 비해 다소 고준한 체감을 보이고 백제전형탑에서 나타난 각형이나 사능형 옥개받침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2단 내지 3단 층단형의 뚜렷한 옥개받침 형태를 나타낸다. 부재의 수도 줄어 3, 4개의 별석으로 탑신을 구성하여 다소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또한 백제계승양식 중에서 옥개석 상부의 내림마루인 우동이 둥글어 가장 둔중하고 뚜렷이 돌출되어 나타나고 있음이 특징이라 하겠다.

<표 8> 탑신괴임대형 석탑의 특성

1. 전체적인 감각은 정림사지석탑과 비슷하다.
2. 전라도 지방에 집중 배치되었다.
3. 각층 탑신하부에 탑신보다 넓고 두꺼운 탑신괴임대가 별석으로 놓여 있다.
4. 신라전형탑의 이중기단과는 다른 보다 소략한 형태, 즉 우주와 탱주가 생략된 모습의 이중기단이다.
5. 모두 5층이나 탑신과 옥개의 체감비가 완만하여 안정된 느낌을 준다.
6. 3, 4 매의 별석으로 탑신을 구성하였다.
7. 2단 내지 3단의 뚜렷한 각형 옥개받침이다. 즉 옥개받침이 신라계석탑보다 더 굵고 수효도 적다.
8. 옥개석은 단일석으로 얇고 넓으며 모서리 부분에는 반곡이 뚜렷하다.
9. 우동의 단면은 호형으로 가장 뚜렷하다.

나. 세장고준형

이 형식은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분포된 탑들로 정읍 천곡사지칠층탑, 진도 금골산오층탑, 보성 옥마리오층탑, 나주 송제리오층탑, 정읍 장문리오층탑, 화순 운주사탑군, 계룡산칠층탑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정림사지석탑의 기본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하여 은선리삼층탑과 같은 이미지를 풍기는 탑들이다. 1층 탑신이 유난히 높고, 2층부터는 급격한 체감을 가져 우리나라 석탑 중에서 가장 세장고준한 형태이다. 또한 탑신의 구성에 있어서도 4~5개의 별석으로 조립하여 백제양식탑의 성격을 갖고 있다. 반면 단일석으로 된 좁고 두툼한 옥개석의 둔중한 모습이나 낙수면의 급한 경사, 다수의 옥개받침 등에서는 신라탑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즉 탑신을 비롯한 전체적인 이미지에서는 백제양식을 지니고 있으나 옥개석에서는 신라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이러한 양식을 구분할 때 백제계절충양식, 그 중에서도 세장 고준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정림사지탑을 원형으로 하여 부분적인 계승을 하였으며 부여지방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백제양식의 영향은 줄고 반면 신라양식의 영향을 받아 백제원형양식에서 벗어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표 9> 세장고준형식 석탑의 특성

1. 백제탑과 신라탑의 요소들을 혼합한 형태이다.
2. 1층탑신은 대단히 높고 2층에서는 급격히 높이가 줄어 한국의 석탑 중에서 가장 가늘고 높은 형태이다.
3. 탑신은 백제탑적 요소, 옥개석은 신라탑적 요소가 나타난다.
4. 즉 수개의 석재로 탑신을 구성하였으며, 옥개석은 단일석으로 좁고 두툼하며 여러개의 각형 옥개받침과 낙수면의 급한 경사를 이룬다.
5. 옥개석의 모서리에서는 가벼운 반전을 느낄 수 있다.
6. 기단은 백제식 단층기단을 2층으로 겹친 듯한 모습을 한 좁고 높은 2중기단이다.
6. 부여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도 지방에 집중배치된 형식이다.
8. 시기적으로 백제양식탑 중에서 가장 늦은 고려중기 이후에서 고려말까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➁ 신라계절충양식

이 형식은 전형적인 신라탑에 백제탑의 단편적인 부분이 첨가되어 이루어진 형태로 거의 신라전형탑에 가까운 형식이다. 신라탑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나 백제탑의 특징적인 부분이 가미된 것이다. 이 형식에 속하는 탑들로는 무량사탑, 금산사오층탑, 금산사 심원암삼층탑, 보원사지오층탑, 발산리오층석탑, 성주사지삼층탑, 폐현화사지칠층탑, 마곡사오층탑 등을 들 수 있다.

이 양식의 공통된 특징으로는 이중기단의 모습을 하여 탑신은 단일석으로 우주가 각출되었다. 고려 초기의 탑들은 옥개석이 두께가 얇고 넓어 낙수면의 구배가 완만하지만 점차적으로 돌출이 작아지고 처마 부분이 두꺼워져 신라석탑 양식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처마에서 느껴지는 반곡의 수법이나 기단형식의 간략화 및 옥개석의 폭 넓은 모습 등에서 백제계 석탑의 영향을 받았음을 나타내 준다. 이들은 백제의 고토에 고려초기부터 건립된 탑들로 통일신라시대 동안 계속해서 신라탑의 조영에 익숙해 있던 장인들의 감각적 의식 속에 백제양식탑이 계승되어 재건되면서 신라계승탑에도 백제적 요소가 은연중에 표출 된 것이라 하겠다.

<표 10> 신라계절충양식 석탑의 특성

1. 신라전형탑과 거의 유사한 형식이다.
2. 그러나 부분적으로 백제탑양식이 가미된 형식이다.
3. 신라전형탑의 기단형식에서 약간 변화된 2층 기단이다.
4. 크고 시기적으로 앞선 무량사탑이나 금사사탑을 제외하면 탑신이 단일석이며 우주를 모각하였다.
5. 신라전형 탑에 비해 옥개석의 두께가 얇고 넓으며 낙수면의 구배가 완만하다.
6. 옥개석의 모서리에서 가벼운 반곡이 나타난다.
7. 우동을 표현하지 않았다.
8. 부연이 있다.
9. 옥개석 하부면에 낙수홈이 있다.
10. 옥개석 단부가 사선을 이루어 날카롭다.
11. 체감이 안정되었다.

4. 백제석탑과 신라석탑의 비교고찰

가. 시원과 그 계통의 문제

한국석탑의 시원을 미륵사지석탑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찾느냐 아니면 미륵사지석탑과 분황사모전석탑이라는 두 개의 뿌리에서 찾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과제이다. 하나의 뿌리에서 찾는다는 관점은 미륵사지 석탑에서 시원적으로 출발하여 정림사지 석탑과 분황사지 모전석탑으로 분리되어 변천되어 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두 개의 뿌리에서 찾는 방법은 아예 두 개의 뿌리로 미륵사지석탑이 반도의 서쪽인 백제에서 모목탑으로 출발한 것이고, 분황사모전석탑이 반도의 동쪽인 신라에서 모전탑형식으로 출발된 것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다만 두 가지 상황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를 강요받는다면 목탑의 형식으로 출발한 한국의 불탑은 백제와 신라의 경우에 처음부터 나누어진 모습으로 출발된 것이 아니라 백제에서 출발한 석탑조형의 의지는 당시 적대국이면서 교류를 하던 신라에 자극과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다소 부담을 느낀 신라는 중국의 조형의지를 연계시켜 불탑을 다른 모습의 탑으로 표현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는 백제의 건축술이 우수하였다는 상식적인 논거와 의성 탑리석탑 등 신라초기석탑에서 나타나는 조형의 유사성에서 찾을 수 있다. 백제가 '사탑심다(寺塔甚多)'의 나라로 널리 국외에 알려진 사실이나 당시 아비지를 비롯한 백제의 공인들이 신라의 한복판에 삼국 제일의 황룡사 9층목탑을 세운 것이나 백제의 사공이나 와박사 등이 바다 건너 일본에 최초의 왕탑가람 비조사를 조영하여 준 것은 백제 공인들의 기술이 뛰어났고 이들 상호간에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의미한다.

신라탑의 시원형식인 의성 탑리5층석탑에 나타난 여러 가지 의장요소들은 백제석탑양식이 신라석탑형식에 끼친 영향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즉 미륵사지석탑과 정림사지석탑에서 나타나는 바와 유사한 의성 탑리석탑의 기단형식과 별석재의 조립, 우주와 탱주의 민흘림, 주두와 창방의 표현, 2층 이상의 탑신에 기둥이 있어 주간을 형성한 점, 내부공간을 암시하는 감실표현, 석재로 조형한 재료 사용의 고집 등은 백제석탑양식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영향은 비단 의성탑리 석탑에 국한되지 않고 감은사지석탑과 고선사지석탑에서도 여러 가지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고 나원리석탑과 탑정리석탑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백제탑형식은 결국 신라석탑의 초기형식에 있어 끼친 영향이 컸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신라시대에 나타난 벽돌형식을 모방한 탑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신라계석탑의 전형적인 형태가 전탑 혹은 모전석탑에서 출발하고 발전되었으리라 생각하여 모전석탑을 신라석탑의 시원양식으로 보기도 하지만 전탑은 전형적인 석탑과 병행하여 제한된 지역에서 일정한 시기에만 건립되었기 때문에 이를 하나의 이형적인 탑형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모전탑은 석탑조영이 활발했던 신라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것이 아니라 목조탑에서 석탑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시적인 형식일 것이다는 견해이다.

물론 고유섭선생 이후 한국석탑연구에 있어서 선학들은 신라탑의 출발은 분황사모전석탑을 시발로 해서 모전석탑이 시원형을 이루었다고 이해하여 왔으나 분황사 석탑에서 의성 탑리석탑으로의 변화와 고선사지석탑과 감은사지 석탑으로의 변모와 신라초기석탑에서 나타나는 의장은 오히려 미륵사지석탑쪽에 가까운 형식이 더 많다는 사실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분황사모전석탑과 의성 탑리 석탑의 유사성은 옥개석상단에 나타나는 계단형과 간략화 된 감실이다. 오히려 의성 탑리석탑에서는 벽돌탑형식의 의장요소 보다는 목조탑형식의 의장요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필자의 견해는 한국석탑의 시원은 출발에서부터 양분법적으로 구분해서 볼 것이 아니라 목조탑을 근간으로 한 하나의 석탑양식에서 출발하여 지역을 달리하면서 점차 두 가지의 탑형식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분황사모전석탑 한 기로 끝나버리는 의사 벽돌탑 형식은 시원 탑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탑이 규범적인 것이었다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연속성을 유지한 신라에 있어서 최소한 몇기의 모전석탑 혹은 전탑이 더 조영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통일신라기에 접어들어서야 안동을 중심으로 몇기의 벽돌탑이 조영될 뿐이다.

이처럼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하였느냐, 혹은 두 개의 뿌리에서 출발하였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 명확히 결론지을 만한 연구결과가 없어 차지하더라도 한국석탑에 있어서 두 개의 커다란 줄기는 지역적 성격을 유지하고 그 나름대로의 특성을 나타내며 면면히 이어져 왔다. 물론 백제계석탑양식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의한 정치, 문화적 지배에 의해서 위축되어 통일신라시대에는 장시간 동안 그 모습이 나타나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퍽 흥미로운 현상이다. 즉 고려개국 이후에는 백제의 구 영토에서 백제시대 이루어졌던 양식의 석탑들이 많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백제의 문화유산에 대한 향수나 부흥의 염원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러한 형식의 대표적인 유구는 왕궁리5층석탑, 비인5층석탑, 장하리3층석탑, 계룡산남매탑, 은선리3층석탑, 귀신사석탑, 죽산리3층석탑 등이다.

그동안 한국의 불탑연구를 수행하였던 선학들은 한국석탑은 신라석탑이라는 등식을 연상할 만큼 신라의 전형석탑에 치중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 이유는 현존하는 백제 석탑이 2기에 불과하고 통일신라시대에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어 양식상 발전이 단절된 이유도 있다고 생각된다.

나. 백제탑과 신라탑의 양식적인 차이

그렇다면 백제탑형식과 신라탑형식은 양식상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논리의 전개상 미륵사지석탑과 분황사모전석탑을 두 양식의 시원적인 탑으로 설정하고 이에서 더욱 발전된 전형적인 탑으로 정림사지석탑과 석가탑을 설정하여 비교 고찰하고자 한다. 물론 정림사지 석탑과 석가탑이 동시대의 것은 아니나 양 석탑양식을 대표적으로 비교하고자 한 것임을 밝힌다.

한국 석탑의 출발점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 석탑은 백제무왕대(600~640)에 건립된 미륵사지석탑과 선덕왕3년(634)에 건립된 분황사모전석탑이다. 전자는 한국석탑 중에서 최고최대인 탑이며 앞서 유행했던 목조고루형식탑을 석조로 가장 충실히 옮긴 석탑의 조형이다. 후자 역시 고신라의 왕경이었던 경주에서 석재로 벽돌을 모방하여 출발한 모전석탑이지만 신라석탑건축의 효시이자 한국 석탑의 전형으로 알려지고 있다.

(1) 백제ㆍ신라 양 석탑 양식의 시원석탑 비교고찰

미륵사지석탑과 분황사지모전석탑을 두양식의 시원적 형태로 판단한다면 무엇보다도 우선 창건연대에 대한 규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분황사석탑의 창건연대에 관하여는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제5에 "선덕왕삼년춘정월개원인평분황사성(善德王三年春正月改元仁平芬皇寺成)"이라 하여 이탑의 건립연대에 대하여는 634년으로 이론이 없다.

그러나 미륵사지석탑의 창건연대에 대한 논의는 오랫동안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일인학자들에 의하여 통일신라초로 추청되었으나 현재까지의 결과는 『삼국유사』무왕조에 기록된 내용대로 백제 무왕대에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내용이 있어 그 기간이 막연하나마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문헌상 창건시기에 약간의 이론이 있다. 즉 하나의 이론은 미륵사를 왕흥사로 표현하는 삼국유사 무왕조 각주의 "국사운 왕흥사(國史云 王興寺)"라는 기록과 삼국유사 법왕금살조(法王禁殺條)의 "기사역명미륵사(基寺亦名彌勒寺)"라는 기록이 있어 무왕대에 건립한 왕흥사가 아닌가 하는 혼란을 주고 있는데 무왕35년의 "왕흥사성(王興寺成)"이 "미륵사성"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홍사준의 견해가 있어 정리가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삼국유사의 창건연기에 주서를 달아 옛 책에 "무강(武康)이라 함은 잘못이다. 백제는 무강왕이 없다."라고 하여 무강을 무왕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병도는 오히려 무령왕으로 해석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특히 미륵사의 창건연대를 논할 때 『삼국사기』의 기록인 "진평왕견견백공조지(眞平王遣百工助之)" 즉 신라의 진평왕이 여러 공인을 백제에 보내어 미륵사의 공사를 도왔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진평왕 재위(579~632)의 어느 시기일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즉 미륵사가 무왕대에 이루어졌고 진평왕이 “백공조지”할 수 있는 기간도 진평왕의 재위기간인 32년 사이에 있었다면 백제의 모목석탑에 관한 기술이 전해졌거나 최소한 상호 기술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동서로 병존되어 있던 양 국가들 중에서 거대한 모목석탑을 건립한다는 백제에서의 정보는 신라를 크게 자극하였을 것이고, 이에 신라의 창의성을 살릴 수 있는 모전석탑의 건립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도 가능하겠다.

<표 11> 백제ㆍ신라 양석탑양식의 시원석탑 비교고찰

양 석탑의 구성부위들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미륵사지석탑 하층기단 폭이 약 41尺, 상층기단 폭이 35.5尺인데 비하여 분황사모전석탑의 현존 기단 폭은 약 43尺의 단층기단으로 탑신부의 규모에 비하여 넓은 편이다. 분황사모전석탑의 넓은 기단을 이 탑의 조형계획에서 인정한다면 초층탑신의 감실과 연관시켜 석조계단도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모전석탑이면서도 탑신에 오금과 옥개에 미세한 반전을 나타낸 것은 한국적인 지붕에서 나타난 곡선미의 아름다움을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되며 중국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기적으로 비슷한 때에 발생한 한반도 동서양국의 시원형석탑은, 종적으로는 선행되었던 목탑형식을 기본으로 백제에서의 模木石塔을 고 신라에서는 모전석탑으로 변화시켰고, 횡적으로는 백제, 신라 두 나라가 서로 돕고 영향을 끼치면서도 독창적인 조형을 이룩하여 지역적으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하나 내부공간과 기단 및 석조계단, 처마의 표현, 탑신의 오금기법 등에서는 일맥상통한 조형의지를 보이고 있다.

양 탑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구체적인 비교는 표 11과 같다.

(2) 백제, 신라 전형석탑 비교고찰

또한 이처럼 시원적인 형태를 벗어나 형식면에서 완숙한 모습을 보인 전형탑으로는 정림사지5층석탑과 불국사 석가탑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들은 시기적으로 1세기 이상의 차이를 보이나 한국석탑을 두 가지 큰 부류로 나누어 본다면 두 양식의 대표적 석탑으로 손꼽을 수 있기 때문에 양국의 전형적인 석탑의 반열에 놓았다.

정림사지5층석탑은 목탑을 직접적으로 모사한 수법의 미륵사지석탑을 근본형으로 하고 있으나 석재로 석탑을 조립하는데 따르는 특성을 더욱 발전시켜 구축하려는 조형의지가 뚜렷한 변화양상을 보인다. 이 탑은 단층의 기단을 하고 있으나 기단 밑에 다시 1매의 지대석을 놓아 안정하게 하였다. 그 윗면에는 비교적 얕은 기단을 만들었으며 석계는 이 탑에서는 완전히 생략되면서 기단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초층 탑신에는 민흘림을 가진 4우주가 약간 안쏠림을 하여 세워졌다. 탑신 위에는 2단의 옥개받침을 내어 쌓았는데 위의 것은 두께가 약간 두껍고 모서리를 말각(抹角)하여 하부는 경사진 면으로 되었는데, 이는 목조두공형식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옥개받침 위에 얹어진 옥개석은 넓고 얇으며 우동(隅棟)을 나타내었고 처마곡선이 미륵사지탑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서리부분을 약간 들어올려 목조건축의 처마부분의 의장수법을 따라 경쾌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나타내고 있다. 2층탑신의 높이는 초층에 비하여 급격히 줄어드나 3층부터는 완만한 체감을 보이고 반면 탑신촉은 점차적으로 체감되어 미륵사지탑보다 고준한 맛을 보인다. 석재의 편수도 미륵사지석탑에 비하여 많이 감소되어 밖으로만 발현되는 가치를 중시하여 괴체화로 전개되고 간단 명쾌하게 정비된 형식으로 변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탑의 건립시기는 7세기 중반으로 미륵사지석탑의 다음으로 추정된다. 과거 일본학자들이 이 탑을 평제탑이라 주장하여 초층 탑신에 각자된 "당현경오년(唐顯慶五年)" 즉 백제 의자왕 20년(660년)으로 추정하였으나, 백제 말기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백제탑으로 보는 것이 정설화 되었다.

석가탑은 시기상의 차이는 있지만 양식상으로는 정림사지석탑에 대응되는 신라의 전형탑으로 경덕왕 10년(751)에 건립되었다. 석탑 주위의 지면에는 7.7미터 가량의 탑구를 구성하고 네 모퉁이와 이들의 중앙에 연화를 조각한 팔방금강좌가 있다. 이 팔방금강좌는 팔부신상을 안치한 자리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팔부보살을 안치했던 곳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으며 그가 설법할 때 하늘에서 뿌려진 꽃 즉 만다라 꽃으로 해석하여 신성한 구역의 표시라 하기도 한다.

하층기단갑석은 4매의 돌로 구성되었고 2단의 상층기단받침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윗단은 거의 직각이고 아랫단은 둥글게 굴렀으며 낙수면에는 약간의 물매를 두었다. 상층기단 면적은 4매의 돌로 네 귀에서 엇물려 짜였으며 각 면 모서리에는 귀 기둥과 면석의 가운데에 기둥을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2중기단 위에는 초층탑신이 놓였는데 이는 단일석으로 되어 그 모서리에 우주를 조출하였으며 층급받침과 옥개석을 단일석으로 조출하였다. 초층탑신고가 높아서 장중한 감을 주며 각층 옥개부의 정상부에는 2단의 탑신괴임을 두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 앙화까지만 원형이고 그 이상은 1966년 수리하여 실상사탑의 상륜부를 고증하여 복원한 것이다. 이 탑은 전체와 세부의 비례관계가 치밀하게 고안되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도록 조형된 것으로서 기술의 정교함과 남성적이며 웅건한 자태는 한국석탑의 전형적인 대표작이라 할 것이다.

이들 양 탑의 비교를 통하여 그 차이점을 고찰해 보면 다음 <표12>와 같다.

<표 12> 백제ㆍ신라 양석탑양식의 전형석탑 비교고찰

출전 : 미륵사지유물전시관, [사진특별전 백제 양식 석탑], 2005. 12, pp.189-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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