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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6-02 (수) 23:14
분 류 문화사
ㆍ조회: 740      
[무덤] 고인돌 (민족)
고인돌

선사 시대의 돌무덤. '지석묘(支石墓)'와 같은 뜻이며 거석 문화에 속한다. 성격은 무덤으로서의 구실이 크다.

대표적인 집단 무덤의 예로는 석실 속에서 성별ㆍ연령의 구별없이 약 300개체의 뼈가 발견된 남부 프랑스 카르카송(Carcasonne) 근처에서 발견된 집단묘와 185구의 성인과 18개체분의 어린 아이의 뼈가 나온 아베이롱(Aveyron)을 들 수 있다.

[분포]

유럽의 고인돌은 프랑스ㆍ남부 스웨덴ㆍ포르투칼ㆍ덴마크ㆍ네덜란드ㆍ영국 등지에 두루 분포하고 있다. 연대는 대개 기원전 2,500∼2,000년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최근 영국의 고고학자인 렌프루(Renfrew, C.)가 보정탄소연대를 적용해본 결과, 유럽의 고인돌은 이집트 피라미드의 제작 연대보다 약 1,500년이 앞서는 기원전 4,000년대까지 올라간다.

또 영국이나 프랑스의 경우 가장 오래된 고인돌의 연대는 기원전 4,800년까지 나오고 있다. 따라서 기원전 4,000∼3,000년대에 이미 고인돌이 유럽 전역에서 축조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었다.

고인돌은 또한 미노르카(Minorca), 말타(Malta), 지안티자(GIan Tija), 하갈 퀴안드 (Hagar Quimand), 타시엔(Tarxan)사원, 사르디니아(Sardinia), 불가리아, 카프카스(Kavkaz), 다카(Dacca)지방에서도 보인다. 또한 에티오피아ㆍ수단 등 아프리카에서도 나타난다.

이들은 지중해연안을 끼고 있는 지역 일대에 중점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멀리는 팔레스타인ㆍ이란ㆍ파키스탄ㆍ티베트와 남부 인도에까지도 분포하고 있다.

인도의 경우, 일반적으로 인도 고고학 편년상 철기 시대에 나타나고, 실연대는 기원전 8세기경이며, 어떤 것은 기원후 2세기까지도 내려온다. 대체로 인도의 고인돌은 기원전 750∼550년 사이에 드라비다족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고인돌은 인도네시아ㆍ보르네오ㆍ말레이시아에서도 계속 나타나는데, 연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그러나 피코크(Peacock, J.L.)는 농업의 단계, 즉 화전민식 농경(火田民式農耕)에서 수전식 농경(水田式農耕)으로의 변천 과정에 착안해, 인도네시아지역의 오래된 고인돌은 기원전 2,500∼1,500년경으로, 늦은 것은 동손문화(Dongson文化)와 철기가 유입된 기원전 5∼4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고인돌은 일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전파된 구주지방(九州地方)의 고인돌은 조몽시대(繩文時代) 말기, 즉 기원전 5∼4세기까지 올라가는 것도 있으나, 보편적으로 야요이시대(彌生時代)에 속한다.

[우리 나라 고인돌의 형식]

고인돌에 대한 형식 분류는 학자에 따라 다르고, 또 지하 석실 구조에 따라 다시 세분된다. 즉, 돌방 뚜껑의 유무와 돌널[석관(石棺)]ㆍ돌방ㆍ덧널[토광(土壙)]등 돌방의 구조, 돌방의 수 또는 학자들의 분류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고인돌은 형태상 크게 3가지 형식, 즉 북방식ㆍ남방식ㆍ개석식으로 나뉜다.

(1) 북방식

북방식 고인돌은 4개의 판석을 세워서 평면이 장방형인 돌방을 구성하고 그 위에 거대하고 편평한 돌을 뚜껑돌로 올려놓은 것이다. 유해가 매장되는 돌방을 지상에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 뚜렷한 특징이다.

돌방의 긴 변에 세운 2개의 받침돌은 거대한 뚜껑돌의 무게를 직접 받고 있으므로 두꺼운 판석을 사용하고 있으며, 하부는 땅 속에 깊이 묻혀 돌방 내부 바닥보다 훨씬 뿌리가 깊다. 밑뿌리의 형태는 되도록 지하에 깊이 박을 수 있도록 삼각형이나 반달형을 이루고 있다.

돌방의 짧은 변에 세우는 받침돌은 긴 변 받침돌 내부에 들어와 ''모양으로 세워진다. 이 짧은 받침돌들은 뚜껑돌의 중량을 직접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입구를 여닫기가 비교적 용이하다. 그러나 북방식 고인돌 중에는 4개의 받침돌 중 한 두개가 없어진 경우도 많다.

돌방 내부 바닥에는 자갈이나 판석을 깐 것도 있으나, 맨땅으로 된 것이 보통이다. 받침돌 하부에는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 돌덩이로 보강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돌방 바깥쪽에 돌을 깐 경우는 거의 없다. 뚜껑돌 크기는 대개의 경우 2∼4m 정도가 보통이나, 황해도 은율 관산리나 오덕리에서처럼 8m 이상이며, 전체 높이가 2m 이상인 경우도 있다.

돌방은 대개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황해도 황주군 송신동의 예처럼 남북장축의 돌방 안에 3장의 판석을 동서방향으로 세워 4개의 칸을 만들고, 각 칸에 시체를 동서방향으로 눕혔던 흔적이 있는 형식도 있다.

북방식 고인돌은 전라북도 고창읍 도산리(전라북도 기념물 제49호, 현재 사적 제391호로 포함), 전라남도 나주군 만봉리와 회진읍 회진성내에서 발견되기도 하나, 주로 한강 이북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평안남도와 황해도 지방의 대동강ㆍ재령강ㆍ황주천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평안남도 용강군 석천산 일대에는 동서 2㎞, 남북 3㎞의 면적 안에 무려 120여 기가 밀집되어 있기도 한다.

그러나 평안북도와 함경도에는 분포가 드물다. 강원도 산악 지대에는 고성과 춘천을 연결하는 북한강 유역을 한계로 북방식 고인돌의 분포가 끝난다. 종전에 전라남도나 경상도에서도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들은 개석식 고인돌의 지하 돌방이 노출된 것으로 오인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북방식 고인돌이 전국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아도 된다.

북방식 고인돌은 돌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어 일찌기 도굴당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부장품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부장품은 대개 화살촉과 돌검(石劍)이 주이나 최근 옥(玉)류와 청동검도 나오고 있다.

황해도 연탄군 오덕리 두무동 제4호에서는 한 곳에서만 9개의 화살촉이 나왔다. 이들은 대부분 화살촉 몸의 단면이 마름모꼴을 이룬 슴베화살촉〔有莖石鏃〕이다.

그 밖에 반달형돌칼ㆍ대팻날도끼ㆍ둥근 도끼ㆍ대롱옥(管玉) 및 토기조각이 소수 출토되고 있다. 북방식 고인돌의 편년 및 연대에 대해 일치된 의견은 아직 없다. 그러나 하한에 대해서는 북한지구에 철기가 들어오기 전, 늦어도 기원전 3세기 이전에는 소멸된 것으로 보고 있다.

(2) 남방식

남방식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도 불리는 것으로, 판석ㆍ할석ㆍ냇돌 등으로 지하에 돌방을 만들고 뚜껑돌과 돌방 사이에 3∼4매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있는 형식이다. 주로 전라도ㆍ경상도 등 한강 이남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 전기(초기철기시대 : 기원전 300∼기원전 1년) 초에 걸쳐 유행한 거석 분묘이다.

지하 널방의 구성은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되어왔으나, 이들은 반드시 그 윗면을 덮는 뚜껑을 가지고 있다. 뚜껑으로는 판석을 이용했으나 나무로 만든 뚜껑을 덮었을 가능성도 많다. 일부에서는 개석식 고인돌을 남방식 고인돌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양자는 분포와 형식상 차이가 많아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남방식 고인돌은 평지나 구릉 위에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좁은 평지가 있는 계곡 사이나 산의 경사면 또는 산정상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대개 일정한 형식이 없이 거대한 뚜껑돌을 구하기 쉽고 운반하기 용이한 곳을 택하고 있다. 따라서 고인돌은 그 당시 인구문제, 뚜껑돌의 채석이나 이동 문제에 따른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인 측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3) 개석식

개석식 고인돌은 뚜껑돌과 지하 돌방 사이에 받침돌이 없이 뚜껑돌이 직접 돌방을 덮고 있는 형식이다. '무지석식 고인돌', '놓인형 고인돌', '변형 고인돌'로도 불린다. 남방식 고인돌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개석식 고인돌의 또 하나의 일반적인 특징은 돌무지시설[적석시설(積石施設)]이다. 대개의 경우 돌방을 중심으로 주위 사면에 얇고 납작한 돌을 평탄하게 깔았다. 경상북도 경주시 경석리, 광주광역시 충효동과 무안읍 성동리의 경우는 원형의 형태를 보인다.

이러한 돌깔이는 뚜껑돌의 무게에서 돌방을 보호하기 위한 보강책으로서, 돌방 상부 주위의 지면을 견고히 하려는 의도라고 생각된다. 또 한편으로는 묘역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대부분 돌무지시설은 돌방 주위의 지면에 설치되고 있다. 그러나 대구광역시 대봉동이나 경상남도 창원시 곡안리의 고인돌에서는 돌방의 상부까지도 완전히 돌을 덮은 특수한 양식이다. 이는 경상도 지방에서만 보이는 지방적 특성으로 볼 수 있다.

개석식 고인돌은 광복 이후 한강 이북에서도 많이 발견되어, 한반도에 전면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북쪽으로는 청천강을 넘어 독로강 유역까지, 동북쪽으로는 동해안을 따라 고성 지방과 마천령을 넘어 김책 덕인리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특히, 황해도 황주와 봉산군의 서홍천유역, 평안남도 강서군 태성리, 개천군 묵방리에서는 무리를 지어 많은 수가 발견되었다. 전라남도에서도 최근에 발견된 약 1만9068기의 고인돌 중 대부분이 개석식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개석식 고인돌은 분포상으로나 숫자상으로 볼 때, 우리 나라 고인돌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볼 수 있다.

[분포]

우리 나라의 고인돌은 거의 국토 전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이제까지 보고되지 않은 함경북도지방뿐만 아니라 강화도(하점면 부근리 지석묘, 사적 제137호) 같은 해안 도서나 또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와 흑산도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대체적으로 이들은 서해 및 남해의 연해 지역과 큰 하천의 유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특히, 전라도ㆍ황해도에 가장 밀집되어 있다. 그러나 동해 지방으로 가면 그 분포가 희박해지며 산악지대에서 가끔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의 위치는 서해로 흘러가는 강줄기 근처로, 결국 고인돌은 서해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상황은 무리를 지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황해남도 개천군 묵방리, 황해남도 은율군 관산리, 배천군 용동리, 안악군 노암리, 평안남도 성천군 용산리 고인돌(순장묘)과 같은 서북지방의 경우를 보면, 1∼2기의 고인돌이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5∼6기 내지 10여 기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100∼200여 기씩 무리를 지어 있다. 또한 이 곳의 고인돌의 방향은 보통 고인돌이 있는 골짜기의 방향과 일치한다. 전라남도에서도 고인돌은 예외없이 무리를 지어 발견된다.

전국적인 분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북방식 고인돌 중 서해안 지대에서는 전라북도 고창 지방(고창읍 죽림리 지석묘군은 현재 사적 제391호로 지정됨), 황해남도 은천군 은천읍과 평안북도 남포시 용강군 용강읍의 것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고창의 고인돌의 대부분은 개석식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한강 이남으로 내려가면 전라남도의 몇 예를 제외하고는 북방식 고인돌의 분포는 매우 희박해진다.

반도 중심부에서는 북한강 상류의 춘천을 한계로 하며, 동해안에서는 고성 지방에서 남방식과 같이 발견되고 있다. 남방식 고인돌은 한강과 북한강 유역 아래에서부터 분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부 지방에 국한되어 있다. 개석식 고인돌은 국토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숫자상으로도 가장 많다.

또한 북방식 고인돌의 경우, 중국의 요령성 요동반도지역, 즉 보란점(普蘭店) 석붕구(石棚溝), 와방점 화동광(華銅壙), 대자(臺子), 대석교(大石橋) 석붕치(石棚峙), 수암(岫岩) 흥륭(興隆), 해성(海城) 석목성(昔牧城), 대련시(大蓮市) 금주구(金州區) 향응향(向應鄕) 관가둔(關家屯)에서도 나오고 있다. 결국, 고인돌의 전체 분포 범위는 한반도와 중국의 동북부지방까지 확대되고 있다.

[축조방법]

뚜껑돌은 자연 암석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큰 바위에서 일부를 떼어낸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채석장이 강화도 하점 삼거리 천촌, 화순 춘양 대신리와 고흥 운대리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돌을 떼어내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바위틈이나 인공적인 구멍에 나무쐐기를 박아서 물을 부어 불려 떼어내는 방법이 이용되었을 것이다.

운반은 지렛대와 밧줄을 이용하거나 수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뚜껑돌은 받침돌을 세우고 그것과 같은 높이의 봉토를 쌓아 경사면을 이용해 끌어올린 다음 봉토를 제거했을 것이다.

[기타]

고인돌의 돌방은 길이가 1.5m 이상 되는 것도 있지만, 1m 미만의 돌방도 상당수 있어 어린아이의 무덤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어른의 시신을 일단 가매장하고 살이 썩으면 뼈만 추려 묻는 세골장(洗骨葬, 二次葬)도 있었던 것 같다.

고인돌에 관한 또 하나의 문제는 뚜껑돌에 파인 원형이나 사각형의 구멍들이다. 이들은 생산의 풍요성을 비는 성혈(性穴, cupmark) 또는 돌을 떼어낼 때 나무를 박았던 구멍으로 보기도 한다.

[껴묻거리]

고인돌의 규모와 수에 비해 껴묻거리[부장품(副葬品)]가 나온 것은 비교적 적다. 그나마 출토된 유물의 수와 종류도 매우 한정되어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껴묻거리에는 주로 화살촉과 돌검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 밖에 돌도끼ㆍ가락바퀴 등의 석기와 민무늬토기계통의 토기류, 옥으로 된 장식품과 소수의 청동기 등이 있다.

청동 유물의 수는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는 지석묘의 중심 연대가 청동기 시대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전라남도 순천 우산리, 보성 덕치리, 여수 봉계동ㆍ적량동ㆍ평여동ㆍ오림동, 경상남도 창원시 동면 덕천리,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 등지에서 변형 비파형 동검이 나왔다.

황해남도 은천군 은천읍 약사동 지석묘에서 청동활촉, 강원도 속초시 조양동(사적 제376호)에서는 부채꼴의 청동도끼〔扇形銅斧〕 등이 나왔다. 그러나 고인돌의 껴묻거리를 대표할 수 있는 유물은 돌검과 화살촉으로서, 출토된 껴묻거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돌검은 자루달린 식과 슴베달린 식의 두 종류가 모두 나오고 있다. 이들은 주거지에서도 차츰 발견되고 있다. 화살촉은 마름모꼴 슴베형이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마름모 납작 슴베형과 긴 마름모형은 중부 이남, 버들잎형은 황해도ㆍ평안남도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방, 슴베 없는 세모꼴촉은 중부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반달돌칼은 주로 개석식 고인돌에서, 양면날 돌도끼는 북방식에서, 대팻날 돌도끼는 남방식에서, 둥근 도끼는 북방식에서 나온다. 그 밖에 별도끼ㆍ홈자귀ㆍ석창ㆍ숫돌ㆍ가락바퀴 등의 석기류도 나온다.

적갈색민무늬토기조각들은 고인돌 주위에서 자주 발견되나 고인돌 내부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토기의 종류로는 팽이토기ㆍ적갈색민무늬토기ㆍ붉은간토기가 있고, 김해토기와 묵방리형토기도 있다. 장식품으로는 대롱구슬과 드리게구슬이 있으며 대부분 개석식에서 나온다.

[기원ㆍ변천 및 편년]

우리 나라 고인돌의 기원에 대해서는 북방설, 남방설, 자생설 등이 있다. 북방설은 시베리아의 카라숙(karasuk) 돌널무덤[석관분(石箱墳)] 계통의 거석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남방설은 세골장과 함께 동남아시아에서 왔다고 보며, 자생설은 한반도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했다고 본다.

고인돌의 변천이나 편년에 대해서도 아직 확실한 정설은 없다. 가장 전통적인 견해는 한반도 북부에서 북방식 고인돌이 먼저 나타나 점차 남부로 퍼지고, 이어 개석식 고인돌이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남부에만 있는 남방식 고인돌을 말기적 형식으로 보는 설도 있다.

또한 개석식 고인돌을 원초적인 것으로 보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북부에서는 북방식 고인돌로, 남부에서는 남방식 고인돌로 발전했다고 하는 제3의 설도 있다.

그것은 북한에서 침촌형(황해북도 황주군 침촌리에서 따옴, 변형 고인돌)과 오덕형(황해북도 연탄군 오덕리에서 따옴, 전형 고인돌)으로 나누고, 변형 고인돌(남방식ㆍ개석식)에서 전형고인돌(탁상식ㆍ북방식)로 발전해나갔다고 하는 견해이다.

[연대]

고인돌에 대한 연대문제는 출토유물 중 주로 돌검을 통해 연구돼오고 있다. 종래에는 돌검이 세형동검을 모방했다고 해서 소위 금석병용기시대에 속한다는 이론적 근거로 삼고 고인돌을 이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현재 고고학의 성과로 보아 돌검이 세형동검보다 연대가 앞서므로 부인되고 있다. 즉, 옥석리(玉石里) 고인돌 밑에서 발견된 움집 출토 이단자루식 돌검이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64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나왔고, 또 황석리 고인돌 출토 돌검의 연대가 기원전 410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고인돌은 금석병용기가 아닌 청동기 시대의 묘제로 밝혀졌다. 이는 최근 고인돌의 발굴에서 비파형동검이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도 입증이 된다. 그러나 그 상한 연대와 하한 연대에 관해서는 이론이 많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고인돌은 고대 국가 발생 이전의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족장 사회 상류층의 공동묘지이다. 나주 판촌리(板村里)에서 나타나는 어린 아이의 무덤은 세습 신분제의 사회까지도 반영하고 있다. 고인돌은 미송리형단지ㆍ거친무늬거울ㆍ비파형동검과 같이 고조선의 강역과 문화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유물이다.

북한에서도 고인돌 사회를 정치체와 연결시켜 무덤의 주인공이 군사령관 또는 추장(족장)이며, 고인돌 축조자들의 후예가 고조선의 주민을 형성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한편, 최근의 북한학자들은 1993년 평양시 강동구 대박산에서 단군릉을 발굴하고 이의 연대를 기원전 3,000년으로 올려 보아 그 때부터 단군조선이 있어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고인돌 사회=단군조선=청동기 시대의 시작=노예순장제사회=한국 최초의 국가 성립이란 등식의 견해가 성립되어 앞으로의 연구 과제가 된다. 고인돌에 대한 연구는 기원 문제, 형식간의 선후 관계, 편년, 출토 유물간의 관계 등에서 아직도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한편 우리 나라의 고인돌 중 강화(사적 제137호), 고창(사적 제391호)과 화순(사적 제410호) 고인돌은 2000년 12월 2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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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몽룡(崔夢龍)>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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