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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9-25 (토) 05:46
분 류 문화사
ㆍ조회: 7824      
[미술] 서양회화사 1 (브리)
서양회화사 西洋繪畵史 history of Western painting 서양회화사 1

서양에서 회화 예술이 변천해온 역사.

평면 또는 입체의 표면에 안료로 그리는 회화는 2만 년에 걸쳐 존속해왔다. 회화는 자신의 개성표현이자 현세 너머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최초의 방식 중 하나였으며 오늘날의 우리가 1만 5,000년 전에 그려진 라스코 동굴벽화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모든 회화에는 보편적 미의 특질이 나타나 있다. 서구의 회화는 인간표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르네상스는 회화를 해부학과 광학에 연계시키며 균형·조화·원근법을 탐구함으로써 이 전통을 확장시켰다. 인물화에서 처음 탈피한 것은 17, 18세기에 들어 풍경화가 부상하면서부터였다. 풍경화·인물화의 전통은 19세기에 와서 빛과 색채의 상호작용인 '회화적' 특질 및 물감의 표현적 특질에 연관되어 발전했다. 이는 물감 및 그리는 행위와 형태를 통한 회화의 본질적 특성을 드러내려는 20세기 추상 회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석기시대

구석기시대의 동굴화는 19세기에 처음 발견되었는데, 형태는 단순하지만 운동감과 생생한 느낌을 준다. 동물들은 설명적 의미 없이 개별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무리지어져 보이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차츰 겹쳐 그려졌기 때문이다. 석기시대에는 인간보다 동물의 형상이 많이 나타나며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독창력이 우선시되었던 듯하다.

중석기시대의 동굴화는 구석기와 유사하나 최초로 설명적 의미가 나타나고 결국 인간은 서로 협동하는 주역으로 등장하는데 집단이 살아 남고 번영하려면 사회적 단결이 필요했으리라 짐작된다. 신석기시대에는 처음으로 정착생활을 했으나 오히려 대형 벽화가 없는 대신 인간과 동물 형상이 가끔 나타나는 칠도기를 제작했다.

에게

BC 3000년경 에게 및 동지중해 지역에서는 크레타의 미노스 문화, 중부 에게의 키클라데스 문화, 그리스 본토의 헬라도스 문화를 꽃피웠으며 키프로스 문화가 포함되기도 한다. 이때 동세공품과 대다수의 회화 작품들이 제작된 곳은 지중해 지역이었다.

크레타에서는 벽 장식이 나타나지 않으며 도기는 3단계로 나누어진다. 1단계는 단순한 직선으로 장식되었고 2단계(BC 2500~2200)에도 반점무늬를 포함하여 초기와 유사한 양식이 번창했다. 3단계(BC 2200~2000)는 대부분 검은 바탕에 흰색 및 크림색으로 장식되었다. 키클라데스에서는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파거나 찍은 기하학적 문양이 대부분이었다.

중기 이후의 도기는 윤이 나는 물감으로 엷게 칠하거나 각진 패턴으로 장식되었다. 그리스 본토에서도 도기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관심이 적었고, 기념비적 건물들이 꽤 있지만 벽 장식은 없다(→ 색인 : 그리스 도기, 장식예술). BC 2200년경 새로운 정착민들이 구세력을 무너뜨렸는데 단순한 형태의 도기들이 극소수나마 남아 있다.

BC 1600년경의 대형건물들에는 프레스코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나 지진으로 인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항아리 장식이 발전되어 흰색·노란색·빨간색의 소용돌이 패턴이 쓰였다. 말기도 이와 유사하나 벽화는 기념비적 프레스코와 꽃·동물이 단순하게 그려진 배경에 치장벽토 부조로 이루어졌다. 중기 키클라데스와 중기 헬라도스에서는 단순한 도기의 토속 양식이 계속되었으나 말기에 보다 큰 문화적 세력권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에게의 분리된 세 지역들은 말기 청동기시대에 들어 서로 밀접한 관계와 문화적 확산을 보여준다. 장식적 풍경은 새와 동물, 꽃을 따는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거나 예식 및 궁정생활을 보여주는데 검은 윤곽선 드로잉 안에 칠을 메운 양식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부분만 남아 있으나, 테라의 아크로티리에 남아 있는 저택의 벽을 보면 원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으며 토속적인 도기 전통에도 불구하고 크레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 색인 : 벽화).

가장 놀라운 것은 항해하는 배, 해안의 사냥꾼들, 숲 등을 묘사한 긴 프리즈 부분이다. 또다른 그림은 이 시기에 처음 알려진 예로 종교적 축제 중의 여인들, 권투하는 두 소년, 낚은 고기를 보여주는 어부 등을 그린 것이다. 크레타와 그리스 본토의 대저택들에서 보이는 장면들은 다소 형식적이며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에서 종교예식은 벽화가들의 중요한 모티프였던 듯하나 서아시아와 이집트의 저택과 사원에서 역사적·연대기적 장면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에게 회화는 중부 유럽보다 과장이 적다고 볼 수 있다.

말기 미노스 문명에서 도기 양식은 처음(BC 1600경~1500경)에는 곡선 패턴과 단순한 식물 문양이 지배적이었으나 BC 1500~1450년 해양생물 모양이 나타나며 분방한 전면적 배열로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 색인 : 머린 양식). BC 1450~1380(또는 1370)년 초기 미노스 양식의 자연성은 엄격한 형식성으로 진부해져 결국 말기 미노스 도기는 미케네 양식의 변형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후기 청동기시대의 키프로스 도기는 3종류로 나뉘는데, ① 갈색 유약을 발라 만든 것, ② 흰 점토에 검은 선 장식을 한 것, ③ 물레로 돌려 만든 것 등으로, 대체로 미케네 도기를 부분적으로 모방한 것이다.

그리스

그리스 예술은 인간존재에 대한 열망의 표현으로서 신적인 주제조차 인간의 행동방식으로 해석되었다 (→ 색인 : 미학). 헬레니즘기 이전까지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개념이 없었던 것만은 분명하고 예술작품은 기능적이었으며 그리스어에서 예술과 공예간의 구별 없이 '테크네'라 불렸는데도 예술가들은 작품에 자부심을 가졌다. 화가들은 작품에 서명을 했으며, 새로운 표현수단을 탐구했고 때로 예술철학을 상세히 기록한 책을 쓰는 등 BC 5~4세기 화가들의 기법 이면에는 뚜렷한 철학사상이 있었다.

BC 5세기말경, 이는 철학자들에 의해 논쟁거리가 되었으며 예술이론이 예술실기와 공존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회벽, 나무, 대리석 판에 그려진 그림들은 쉽게 지워져 대부분 소실되었다. 한편 그리스 공예 발전의 중요한 증거인 항아리 그림들은 고대 저술에서는 거의 언급되지도 않은 것으로 보아 수요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예술품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암흑기(BC 1200~900)

BC 13세기 에게 중심부가 멸망하자 청동기시대의 정교한 미는 사라졌다. BC 11세기 이전 당시 중요했던 아테네의 새로운 회화양식은 조화로운 원시기하학 양식이었고 붓과 컴퍼스 등 새로운 기구와 기법으로 다양하게 제작되었으며 그리스 도기화에서는 패턴의 단순한 정밀성이 두드러진 특성이다.

기하학기(BC 900경~700)

기하학 양식은 전통을 수용하는 가운데 뇌문·卍자형·총안무늬 등이 많고 BC 760년경이 되어서야 인물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기념 항아리를 전문으로 그렸던 디필론 마스터에 의한 것인데 도식적인 모습이 전면적인 기하 문양을 거의 방해하지 않게끔 형식화되었다. 이후에 동물과 인물이 형식적 틀 속에 들어가게 되면서 기하학 양식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BC 8세기말 인물 형태는 훨씬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고, 서아시아에서 들어온 꽃 문양과 결합되어 새로운 양식이 도래했으나 인물이 도입된 근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학자들은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과거 영웅들의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다고 보거나, BC 8세기의 특권계급과 영웅적 선조들을 동일시했다고 보고 있다.

동방화기(BC 700경~625)

BC 700년경 항아리 그림에는 시리아와 페니키아로부터 꽃·동물·괴물 등의 모양이 도입되어 기존의 기하 양식에 우아함을 가져온다. 이를 원시 아티카 양식이라 하며, 처음으로 영웅사를 분명하게 말해주는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실루엣 그림자와 붓질은 대담하여 기념비적·인상적인 효과를 준다. 코린트에서는 원시 코린트라 부르는 세밀양식을 창조해냈다. 7세기말경 도입된 흑회식 기법 항아리들은 활발하게 수출되어 BC 7세기 후반에는 지중해 전역에 퍼졌다.

아케익기(BC 625경~500)

코린트는 BC 550년경까지 선도적으로 도기를 수출했지만 대량생산으로 급속히 질이 떨어졌다. BC 7세기말 아테네는 흑회식 기법뿐 아니라 코린트 양식 항아리의 양식화된 형상을 수용했다. 주요작가로는 엑세키아스, 아마시스의 화가 등이 있다. BC 530년경에는 흑회식 기법 대신 윤곽선만 그리고 세부를 붓질로 나타내는 적회식 기법이 등장했으며, 이것은 에우티미데스와 에우프로니오스 같은 예술가들에 의해 바로 정착되었다.

적회식 기법으로는 선을 그을 때 물감의 양이나 굵기를 조절할 수 있었고 유약을 묽게 타서 색을 밝게 할 수도 있었다. 기념물에 그려진 그림들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코린트 이스트무스에 있는 포세이돈 신전에서 그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는 최초의 신전장식은 BC 7세기의 테르몬에 있는 아폴론 신전이다. 도기에 있어서는 섬세한 선의 표현에 가장 중점을 두었고 음영, 원근법, 환영적 처리에 대한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고전기(BC 500경~323)

초기 고전기(BC 500경~450)에서는 아케익적 요소가 사라지고 해부학적 요소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게 되지만 여전히 경직된 느낌이 남아 있다. 주요화가로는 파나이노스(회랑그림인 〈마라톤 전투〉를 그림)가 있다. 이 시기의 건축 회화는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기념비를 제작한 예술가들의 영향 아래 있던 도기 회화로 그 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 주요 벽화가로는 아테네와 델피에서 활동한 폴리그노토스· 미콘 등을 들 수 있다.

전성기(BC 450경~400)의 그리스 도기 장식은 대부분이 선묘이며 회화기법에 있어서는 아테네의 화가 아폴로도로스가 스키아그라피아라는 음영법을 도입함으로써 혁신적 변화가 일어났다. 후기 고전기(BC 400경~323)의 짧은 기간 동안 제욱시스· 아펠레스· 파라시오스 등 유명한 화가들의 활동을 통해 회화기법이 상당히 발전했다. 기념물로는 마케도니아의 레우카디아 거대 묘가 있으며 파라시오스의 특징인 선묘는 레우카디아에 있는 헤르메스 상과 펠라에 있는 사자사냥 및 디오니소스 모자이크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헬레니즘기(BC 323경~100)

이 시기의 미술은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주요화가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정화가였던 아펠레스가 있다. 중요 기념물로는 베르기나의 거대 묘(BC 336~317)로, 정면은 아펠레스 양식의 거대한 벽화로 사자사냥이 묘사되어 있다(→ 색인 : 그리스 예술, 장식예술).

에트루리아

BC 8~7세기경 그리스인들은 풍부한 지하자원을 이용할 줄 알았던 에트루리아인들과의 무역을 확장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에 많은 식민지를 개척했다. 아케익기에 정착하여 지금의 토스카나와 로마 등지에 흩어져 있던 에트루리아인들은 장차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될 도시국가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을 커다란 분묘실에 안치했는데, 대부분 분묘의 벽을 석회로 바른 후 그 위에 생생한 장면들을 그려넣었다 (→ 색인 : 벽화).

이러한 프레스코들의 내용은 그리스 신화로부터 빌려온 것이 대다수였으나 에트루리아인들의 생활을 묘사한 것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다루어진 주제는 장례행렬로서, 타르퀴니의 아우구르스 분묘벽화가 유명하다.

BC 5세기경 아테네의 양식이 전파됨에 따라 에트루리아에서도 고전기를 맞이했으며, 그리스 본토에서 사용된 새로이 발견된 음영, 명암, 단순한 공간표현 등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에트루리아에서는 고전기에 벽화가 활기를 띠지 못했고 오히려 헬레니즘기 동안 로마의 정치적·문화적 영향이 밀려오면서 회화가 부흥하게 되었다.

로마

BC 6세기말경 로마 공화국이 설립된 후에 로마인들은 정치적 목적을 지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에트루리아 양식을 부활시키고 에트루리아 화가들을 고용했다. 고대의 저술가들은 당시 로마의 화가들로서 전쟁의 장면을 묘사했다는 메트로도루스와, 풍경화와 로마의 저택장식을 즐겨 그렸다는 데미트리우스 이외에도 파비우스 픽토르· 파쿠비우스· 리콘 등의 이름이 전해지나, 이들의 작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BC 2세기경 폼페이에서는 개인 저택의 실내 벽화장식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른바 외피 양식 또는 제1양식으로 알려진 대리석의 채색 치장벽토 모방방식이 사용되었다. BC 1세기 중반에는 갑자기 로마와 그 주변도시들에서 소위 제2양식이라 불리는 화려한 벽화들이 나타났는데, BC 1세기경에 제작된 〈오디세우스의 일행〉처럼 벽면 전체를 깊이·분위기·빛이 묘사된 정교한 회화적 방식으로 그린 풍경화들로 채우는 것과 BC 50년경 폼페이의 일명 '신비의 별장'에 그려진 '디오니소스 입문의식과 신부의 혼전의식'처럼 벽을 마치 그 안에서 의식이 거행되고 있는 좁은 무대처럼 다룬 것들이 있다.

한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퍼진 제3양식에서는 벽 위에 걸리는 중앙 패널화가 창문을 통해 보는 듯한 풍경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칸막이 및 태피스트리에 삽입되거나 그대로 벽에 장식용으로 걸리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가 끝나면서부터 폼페이의 멸망까지 성행했던 제4양식은 이전의 양식들과는 달리 좀더 차분하고 사실적인 건축 구도와 무대배경을 모방한 듯한 건축의 윤곽선, 그리고 벽면 전체가 평평하고 중립적인 흰색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로마의 초상화들은 사실성과 기교면에서 초상조각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흥미로운 것은 금과 유리의 메달에 그려넣은 초상화들로서, '부네리우스 케라무스 가족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세련되고 정교하게 그려져 있어 16세기 유럽의 세밀화 양식에 견줄 만하다.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

초기 그리스도교 회화는 AD 2세기말에 와서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화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혹은 유대교적인 알레고리의 개념이 합법성을 얻게 된 것은 3세기에 이르러서였고 그나마 그리스도의 모습을 승리에 찬 태양신으로 묘사하는 등 절충적인 양상을 보였다. 즉 새로운 요소들은 형태보다 내용면에서 먼저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교회가 사람들의 공적·사적 생활에 영향을 끼치게 됨에 따라 종교적 요소들이 중요하게 되었지만, 이교적인 장면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카타콤베의 천장과 벽에는 새, 동물, 큐피드, 계절의 이미지 등에 관련된 모티프들로 이루어진 미묘한 선묘가 나타나며, 그밖에도 기도하는 사람들과 어깨에 양을 메고 가는 목동, 즉 '선한 목자'가 종종 그려졌다.

3세기 중반에는 이러한 중립적 주제들이 순수하게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지닌 장면에 결합되었다. 이러한 그림들의 양식적 특징은 매우 다양했는데, 여기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가벼운 필치와 우아함을 지닌 매력은 이전의 훌륭한 이교적 회화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비잔틴

4세기초 비잔티움의 자리에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 세워짐에 따라 지중해 동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예술 중심지역이 탄생했다. 비잔틴이란 대개 330~1453년에 존재했던 그리스 정교회의 동로마 제국 및 이 도시의 예술을 말한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부터 비잔틴 세계와 서유럽 세계 사이에는 명백한 종교적·정치적 차이점들이 존재했으며, 이러한 상이점들을 광범위하게 반영하는 지중해 예술은 결과적으로 두 극단으로 분리되었으나 실제로는 예술적인 접촉이 빈번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예를 들어 비잔틴의 영향은 12세기경 시칠리아와 베네치아의 회화들에서 발견되며, 러시아, 불가리아, 서부 발칸 지역에서 성장하고 있던 정교회 국가들로도 전파되었다. 잘 알려진 〈블라디미르의 성모〉는 1130년경 러시아의 후원자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제작하여 가져간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비잔틴 화가들은 정교사회의 독특한 종교적 내용과 양식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나, 서유럽의 화가들보다 그리스·로마의 전통에 더 충실했다. 회화의 종류로는 성인들을 묘사한 성상들이나 패널화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모자이크 장식벽화도 교회마다 대부분 갖추고 있었다. 채색필사본은 제작이 제한되었으며, 주제 영역 또한 서유럽에서보다 한층 더 제약을 받았다 (→ 색인 : 사본장식). 필사본에서 즐겨 다룬 주제는 〈신약성서〉의 내용 및 그 인물들과 초대교회사 등이었으나, 후기 비잔틴의 필사본들에서는 후원자인 덕망 높은 귀족의 생애를 다룬 삽화가 그려지기도 했다.

비잔틴 회화는 신앙심과 정신성을 표현하는 고도로 효과적인 그리스도교 예술이었다. 전체적으로 비잔틴 예술은 자연주의적인 설명을 제시하기보다는 초자연적이고 초시간적인 신앙의 영역에 대한 존재의 암시를 더 강조했다. 화가들이 고전 고대의 회화적 방법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세계에 대한 좀더 추상적인 해석을 그려내는 데 목표를 두었다. 결과적으로 비잔틴 예술은 자연주의적인 표현방식과 추상적인 표현방식 사이에서 항상 일종의 긴장감을 지니고 있었다.

초기 중세

서유럽의 고대 로마 문명은 6세기 후반경에 침몰되었으며, 이후 암흑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 가지 근본적인 변화들이 발생했다. 수세기에 걸친 지중해의 예술전통은 거의 모두 소멸했고 북부 유럽의 문화적 구조는 점차적으로 새로운 부족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북유럽에서 7세기경에 회화가 다시 부활한 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요인에 기인했다.

첫째, 새로운 민족들이 그리스도교로 전향하여 광범위한 그리스도교 도상과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발전시켰고, 둘째, 그들에게는 회화가 발달했던 후기 로마 문화를 모방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나무판자 위에 인물을 약간 그려넣는 것 이외에, 건물 벽에 그리는 대형벽화와 필사본에 그려넣는 소형 삽화들이 있었다. 이 그림들은 서로 분리된 전통을 갖고 있었고 서로 다른 기법을 사용했다.

거의 모든 교회와 공공건물에서 발견될 법한 벽화들은 의외로 극소수만이 남아 있으며, 반면 채색필사본들은 다수 전해지고 있다. 중세의 화가들은 복음서와 〈구약성서〉, 그리고 교회에서 필요로 했던 예배 및 헌신과 교리용 책들을 그림으로 장식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색인 : 사본장식).

교황의 본거지였던 로마에서는, 고대 전통의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 동안 계속되었으나 600년경부터 약화되면서 비잔틴 양식의 영향과 함께 평면적이고 비현실적인 인물들을 그리는 양식이 등장했다. 7~8세기에는 동방의 여러 가지 회화 전통이 전파되어 엄격하게 대칭적인 구성, 엷게 칠하는 미묘한 채색, 그리고 모델링 없이 경쾌하고 유연한 선들을 사용했다.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6, 7세기경에 수도원들이 설립되기 시작했으며, 수도원 내의 공방에서 필사본들이 정교한 양식으로 복제·장식되었다 (→ 색인 : 스크립토리움). 영국 제도의 화가들은 교차되어 엮어진 때와 뒤섞인 동물, 그리고 크게 확대시켜 그린 머리글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보통 ' 카펫 페이지'라고 불리는 풍부한 장식기법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필사본들은 켈트족의 전통과 6세기경 영국에 정착한 앵글로색슨족이 가져온 금속 제련기술의 전통, 그리고 지중해 전통의 복합적인 영향을 받아 독특한 장식체계를 갖게 되었다.

유럽 대륙에 있어서 초기의 채색필사본들은 프랑크 왕족 중의 메로빙거 왕조 시기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필사본들의 장식은 상징적인 주제를 많이 담고 있었다 (→ 색인 : 메로빙거 왕조 미술).그 예로 머리글자의 획은 비둘기 또는 물고기의 모양을 하고 있거나 단순한 장식적 모티프들로 채워져 있었다.

8세기 중반경에 새로운 세력을 얻게 된 프랑크 왕국은 서로마 제국 최초의 황제인 샤를마뉴 대제의 치하에서 후기 고대 로마나 동시대 비잔틴 문화에 버금 가는 궁정문화를 이루었다 (→ 색인 : 카롤링거 왕조 미술). 화려한 장식의 복음서를 만들어낸 샤를마뉴 궁정화파는 매우 창조적이며 기지에 찬 장식을 보여주었고, 〈성 마르코>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물 표현의 경우 밝은 색채와 정교하게 주름 잡힌 의복 묘사, 주의 깊게 그려진 팔다리 등을 통해 능숙한 인체묘사를 나타냈다.

당시 영국에서는 예배의식에 사용되는 책들을 상당수 제작했는데, 그 책에는 번쩍거리는 황금색채와 휘날려 헝클어진 옷주름을 지닌 활기찬 인물들을 가득 담고 있다. 서술적인 구성과 머리글자 양식은 수많은 나뭇잎들로 가득 찬 황금막대, 아치형 또는 4각형의 돌출된 격자 모양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10세기말경 교회 내의 개혁정신을 반영하는 북부를 중심으로 영국에서 유입한 기운찬 윤곽선 양식이 발전되고 있었다.

독일의 경우 작센 오토 왕조 치하에서 통합된 왕족과 교회의 후원을 배경으로 커다란 예술부흥이 있었다 (→ 색인 : 오토 왕조 미술). 10세기 후반에는 ' 그레고리 등기소의 거장'이라고 알려진 화가가 유명했는데,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와 카롤링거 왕조 필사본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회화 양식을 개발했으며, 상세하고 부드럽게 모델링한 인물들을 정확하게 계산된 배경에 배치했다. 그의 제자들은 밝은 빛을 받은 인물들이 황금색 바탕과 색띠를 배경으로 초자연적인 장중함을 나타내는 일련의 장식본들을 제작하기도 했다.

로마네스크

11세기 후반에는 유럽 전역에서 구성상 좀더 도식화되고 대담한 형상을 표현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선과 색채가 강하고 추상적인 구조가 지배적이었다. 인물표현에 있어서 여러 겹의 복잡한 주름들과 반복된 평행선들의 강조는 정교하고 유형화된 당시의 비잔틴 회화가 서유럽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에서는 1060년경에 데시데리우스 대수도원장이 비잔틴 미술가들을 불러들여 사원을 장식하게 함에 따라 동서 전통의 융합을 이루게 되었다.

12세기 이탈리아의 화가들은 점차로 고대 로마 미술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으며, 실제로 고전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구성형식 및 모티프들, 심지어는 복고풍의 부활이 일어났다. 12세기초에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일어난 화파들이 클뤼니의 대(大)베네딕투스 대수도원과 시토 수도원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프랑스의 초기 로마네스크 벽화 중 가장 완벽한 것으로 전해지는 것은 생사뱅쉬르가르탕프 교회에 있는 그림들로서 생생한 서술성과 창조성을 보여준다. 그당시 영국의 화가들은 필사본을 통해 비잔틴 회화의 영향과 대륙 회화의 영향을 받아 좀더 유기적인 인물형태를 표현했다. 1130년경에 제작된 '베리 성서'의 필사본 삽화에서 볼 수 있듯이 팽팽한 옷주름은 3차원의 형태를 묘사하고 있으며, 얼굴은 전보다 더 짙게 모델링되어 있고 표정과 몸짓 또한 날카롭고 강렬하다.

11세기 후반 영국 남부와 프랑스 북부에서는 사람·괴물·짐승·새 등이 뒤엉켜 있는 머리글자 유형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죄악 및 악마와 끊임없이 갈등을 겪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필사본은 자세한 표현의 배경에다 복잡한 도상을 가득 그리는 형식이 주를 이루었다.

잘츠부르크에서는 영국 필사본의 영향을 받아 화면을 가득 채우는 인물과 비현실적인 풍경을 그렸으며, 비잔틴 양식을 연상시키는 얼굴 묘사를 보여주었다.

스페인의 경우 산클레멘테 교회 제단벽화로 그린 프레스코에서 볼 수 있듯이, 인체의 형태와 인체를 둘러싸고 있는 경직된 옷주름들이 동시대 유럽의 다른 지역 회화보다 더 이상화·추상화되어 있었다.

12세기 후반에는 서유럽 전역을 통해 벽화와 필사본 장식에서 다음과 같은 2가지 발전을 이루었다. 첫째, 형태가 더 부드러워지고 자유로운 흐름을 갖게 되었으며 추상성과 유형화된 해석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을 대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서유럽의 화가들이 비잔틴 회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정교하게 유형화된 각진 옷주름의 직선적인 표현이 사라지고, 그대신 옷 속의 단단한 신체를 나타내주는 잔물결과 불규칙한 파동들로 대치되었다 (→ 색인 : 물덴스틸). 이러한 부드러운 양식은 독일의 라인 강 중부지방과 레겐스부르크에서 제작된 세밀화들에서도 발견된다.

1200년경 비잔틴의 모자이크 화가들은 베네치아와 시칠리아로부터 많은 제작 의뢰를 받았는데, 이것은 서유럽의 화가들로 하여금 비잔틴 미술을 직접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유입된 비잔틴 미술은 북부 유럽, 특히 잘츠부르크 화가들과 라인 강 북부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고딕

고딕 초기에는 비잔틴의 영향에서 벗어난 좀더 부드럽고 사실적인 필사본 양식이 프랑스와 영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부드럽고 우아한 회화양식이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그대신에 비잔틴 전통을 계승한, 소위 '톱니 양식'(Zackenstil)이라 불리는 뒤틀리고 각이 진 양식이 발전했다. 전성기 고딕 회화는 조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러한 사실을 최초로 보여준 것이 성 루이의 시편집 삽화이다.

또한 프랑스의 생샤펠에서 사용했던 복음서집을 보면, 초기 고딕의 회화적 양식이 크고 각진 주름들을 통합하는 착의 양식으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명암을 통해 착의와 형상을 취급하는 방식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회화 발전으로부터 자극받았을 가능성이 높은 이러한 ' 빛의 발견'은 1270~80년경에 시작되었지만, 그 이후에 활동했던 마스테르 오노레라는 파리의 장식가에게서 두드러졌으며, 14세기 중반 장 퓌셀의 책에서는 '빛의 사용'뿐 아니라 이탈리아 회화의 원근법을 연상시키는 공간 표현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프랑스 양식은 영국으로 급속히 전파되었고 영국에서는 여기에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을 덧붙였다. 14세기 전반 이후의 영국 시편들은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데 모두 가장자리 장식을 한 화려한 양식을 보여준다.

다른 곳의 고딕 미술이 그러했듯이 이탈리아에서도 사실주의적 경향으로의 변화를 겪고 있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시에나 대성당의 제단 장식화로 두초 디 부오닌세냐가 그린 〈마에스타 Maestà〉에 잘 나타나 있다(→ 색인 : 벽화, 이탈리아 고딕 양식). 당시 이탈리아 회화의 원근법과 빛의 탐구는 주로 프레스코 같은 대형 그림들에서 이루어졌으며,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는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걸작을 남긴 조토 디 본도네를 들 수 있다.

조토 디 본도네의 뒤를 이은 피렌체와 시에나의 화가들도 사실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시에나 화가인 시모네 마르티니의 그림은 〈수태고지 Annunziazione〉에서 볼 수 있듯이, 우아함과 기품을 지니고 있어 북유럽의 영향을 강하게 암시하지만 세부에 대한 관심은 두초 디 부오닌세냐를 상기시키며 주의 깊은 배경 구조는 조토 디 본도네를 상기시킨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탈리아에서 비잔틴의 전통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사실적인 풍경화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그것은 관습적 표현을 버리고 시각적 체험을 토대로 하는 과정을 통해 천천히 이루어졌다.

14세기 후반과 15세기초에 우세했던 유럽의 회화양식은 국제 고딕이라고도 불린다. 대부분 궁정의 후원 아래 실행된 국제 고딕 양식의 공통된 특징은, 우아하고 기품 있으나 동시에 어떤 부자연스러움을 지닌 인물표현이었다. 독일어권 지역과 라인란트, 그리고 파리의 화가들은 카를 4세의 후원 아래 테오도리크가 '부드러운 양식'과 얼굴 표정에 강조를 두는 ' 보헤미아 양식'을 계속했다.

그러나 1370~1410년경에 활동했던 ' 나르본 장식의 대가' 공방의 화가들은 매우 독특한 양식으로 작업했다. 그들의 그림에 나타난 인물들은 우아한 반면 눈에 띄게 표현적인 얼굴을 갖고 있었다. 또한 배경에 대한 관심을 나타냄으로써 인물들을 3차원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암시해주었으며 초기 이탈리아 회화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게 되었다.

3차원적 공간의 묘사에 대한 관심은 매우 인상적인 풍경화와 건축적인 배경을 그렸던 15세기초의 필사본 화가들에게도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그 예로 베리 공작의 후원을 받은 림뷔르흐 형제는 〈베리 공작의 귀중한 성무일과〉에서, 귀족과 농부들의 계절에 따른 활동을 풍경화와 함께 묘사하여 일종의 달력 그림을 만들어냈다. 이탈리아의 국제 고딕 화가로는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를 들 수 있다. 그의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보면 얼굴과 착의 묘사는 부드럽고 둥글게 모델링되어 있으며, 어느 정도 북유럽의 '부드러운 양식'을 상기시킨다.

후기 고딕이라 불리는 15세기 플랑드르 회화의 선구자는 투르네의 로베르 캉팽이었다. 그와 그의 제자였던 반 데르 웨이덴, 얀 반 에이크의 작품은 15세기를 통틀어 막강한 영향력을 남겼다. 초기 플랑드르 화가들은 얀 반 에이크의 〈롤린 대주교와 성모〉에서 볼 수 있듯이 빛이 형태·형상·질감 등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과, 풍경화의 경우 빛이 분위기를 나타내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편으로 일부 개별적 화가들은 그로테스크하고 수수께끼 같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러한 예로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동산〉을 들 수 있다.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대체로 1400~1600년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 기간은 고전 고대 미술에 비견되고자 하는 태도의 탄생 또는 부활로 특징지어진다 (→ 색인 : 휴머니즘). 고전 문학과 그림은 이러한 새로운 목적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때 이후 예술에 대한 이론적 저서들은 인간 자신이 바로 지배적인 주제임을 암시했으며, 종교화에서조차도 드라마와 감정은 인간적인 언어로 표현되었다 (→ 색인 : 종교예술). 회화는 종종 스스로에게 불리할 정도로 점점 더 지적(知的)으로 변해갔으며, 교훈이나 장식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아각성과 자아확신의 표현형태로 바뀌었다.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1420경~95)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는 각 예술가들의 개별적인 양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초기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맞은 피렌체는 예술이 발전할 수 있는 지적·문화적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피렌체 산타마리아델카르미네 교회의 브란카치 예배당에 그린 마사초의 프레스코 〈봉헌금 The Tribute Money〉은 성 베드로의 생애를 서술적인 연속장면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마사초는 설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택해 그것에 대한 인간적인 감동을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는 작품과 관람자 간의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원근법의 발명에 근거한 것이었다. 원근법 체계에 의하여 회화의 소우주와 관람자의 실제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15세기초 이탈리아의 화가들빛의 효과, 인체의 해부학과 비례, 세계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 화가들로는, 마사초를 비롯해 세속성과 부드러움을 지닌 마돈나를 그린 프라 필리포 리피, 최초의 '성스러운 대화'(sacra conversazione)를 보여준 프라 안젤리코, 원근법의 실행자 파올로 우첼로, 마사초로부터 영향을 받아 조각적인 인물묘사와 빛에 대한 관심, 합리적으로 고안된 공간을 창조하려는 열망을 지녔던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와 도메니코 베네치아노를 들 수 있다.

또한 〈예수의 책형〉에서 볼 수 있듯이, 명확하고 합리적인 공간을 통해 수학·원근법·비례 등 15세기초의 관심을 요약해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도 있다. 피렌체의 초기 르네상스가 보여주었던 낙관주의, 합리성, 조용한 인간적 드라마 등은 도메니코 베네치아노를 통해 좀더 개인적·표현적·선적인 양식으로 이어졌다.

1465~75년경 피렌체에서는 새로운 세대의 젊은 화가들이 부각되었다. 폴라이우올로는 움직이는 근육의 표현을 강조했으며, 보티첼리는 〈봄 The Primavera〉에서 볼 수 있듯이 부드럽고 우아한 선의 움직임을 통해 세련된 양식을 창출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페루지노의 스승으로 알려진 베로키오, 프레스코 기법을 피렌체 화가들에게 전해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가 있었다.

15세기초 피렌체의 발견과 혁신들은 15세기 중반경에 다른 중심지들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파도바에서는 안드레아 만테냐가, 베네치아에서는 조반니 벨리니가 피렌체로부터 온 영향에 부드러운 빛의 효과를 더함으로써 독특한 양식을 이루어냈다.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에 있어서 고전기라 불리는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은 조화와 균형을 성취하려는 열망과 더불어 15세기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운동감이 매우 중요한 필수 요소였던 반면 구성은 상당히 자제되었으며, 알베르티가 말한 '더하거나 덜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이 아닌 부분들의 조화'를 실현하고 있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우르비노 태생의 라파엘로, 그리고 베네치아의 티치아노 등이 있다.

풍부하고 다양한 15세기의 피렌체 회화는 다방면에서 천재성을 나타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예술에 의해서 구체화되고 변형되었다. 그가 관심을 갖고 연구함으로써 얻은 모든 지식은 그의 예술을 풍부하게 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특징인 피라미드 구도를 도입한 〈동굴의 성모 Madonna in the Rock〉는 피라미드 구도의 안정감 속에 운동감과 장엄함, 그리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미묘한 모델링과 암시적인 안개 낀 분위기는 '스푸마토' 기법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좀더 중요한 것은 그가 명암을 이용하여 구성적 요소를 통일시킨 점이다. 이러한 효과들은 유화 재료로만 가능했다. 유화는 그림에서 분위기의 명암의 통일성을 이룰 수 있는 투명성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회화기법을 벽화라는 까다로운 장르로 옮겨보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시도는 〈최후의 만찬 Last Supper〉이라는 승리이자 비극을 낳았다. 즉 벽화에 유화 기법을 도입했는데, 이것은 영구적이지 못한 것이어서 그의 생전에 이미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그리스도의 안정된 피라미드 구도와 원근법적 실내묘사, 동요된 제자들의 모습과 감정 및 운동감 표현 등의 새로운 종합을 보여주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모범으로 삼아 성공한 화가는 의심할 여지 없이 라파엘로였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굴의 성모〉로부터 새로운 마돈나 유형을 발전시켜 부드러운 풍경을 배경으로 성모를 그렸다. 교황 서명실의 벽화 〈아테네 학당〉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에 속한다(→ 색인 :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 프레스코).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인물의 운동감과 균형 및 질서를 성취했으며 공간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라파엘로가 교황궁의 서명실에서 작업하던 당시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장식을 맡기로 수락했다. 그는 천지창조 장면부터 그리도록 요구받았는데, 창세기의 연대적 순서와 상관없이 제단의 끝부분에 〈술 취한 노아〉를 그렸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는 당대에 이미 걸작으로 유명해졌고, 그는 '신(神)의 미켈란젤로'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1513년경 율리우스 2세가 죽고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피렌체·로마의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은 그 원래의 모습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었다. 라파엘로의 프레스코들은 〈헬리오도로스의 성전 추방〉에서처럼 마니에리스모 양식의 긴장감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에게 있어서 로마의 약탈과 종교적 체험들은 그로 하여금 미학적 문제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했다. 그러한 사건들의 공포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에 나타나 있다.

15세기 후반경 베네치아의 회화는 피렌체에서처럼 전성기 르네상스로 향하고 있었으며, 한편에서는 여전히 순수하게 베네치아적인 취향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반니 벨리니가 그린 성모와 성자들에는 '성스러운 대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다. 벨리니에게서 배운 조르조네는 목가적인 풍경화를 그리는 데 있어서 스승을 능가했다.

〈전원의 합주〉· 〈폭풍〉에서 그는 베네치아인들의 질감 표현과 부드럽게 확산되는 빛, 전원풍의 효과를 보여주었으며, 그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풍경 속에 인물을 배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조르조네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은 티치아노는 〈바코스 축제〉에서 볼 수 있듯이, 베네치아적인 색채와 질감을 통해 신화적 주제를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16세기말 베네치아에서 가장 뛰어났던 화가로는 베로네세와 틴토레토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티치아노의 양식을 받아들여 그것을 발전시켰다. 베로네세는 티치아노에게서 배운 풍부한 색채와 복잡한 구성으로 유명하다. 틴토레토라고 불린 자코포 로부스티는 1594년의 〈최후의 만찬〉에서 대각선 구도를 사용하고, 극적인 효과와 명확한 형태를 나타내도록 빛을 잘 구사했다.

마니에리스모

전성기 르네상스 화가들에 대한 반작용이 1515~24년 피렌체와 로마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전성기 르네상스의 조화와 자연주의로부터 약간 벗어난 이러한 양식을 '마니에리스모'라 한다. 그후 유럽 전역으로 퍼진 로마의 마니에리스모 양식은 예술적 기교, 우아함과 유용함에 대한 자기확신과 세련됨, 이상스러운 것에서 느끼는 체변적인 즐거움을 그 특징으로 갖고 있었다.

마니에리스모 양식에 관한 바사리의 표현을 들자면, 인물 양식에서 형식적인 복합성의 기준은 미켈란젤로에 의해 설정된 것이었고 이상화된 미(美)는 라파엘로의 작품에서 취한 것이었다. 또한 예술기법상의 복잡한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는 데 큰 가치를 두었으며, 완성된 작품에는 제작과정에서 고심한 흔적이 드러나지 않아야 했다.

로마에서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 폰토르모, 로소 피오렌티노 등이 형태와 색채의 조화 속에서 미묘하고 모호한 감정적 긴장을 나타냈으며, 파르마 출신의 파르미자니노의 작품은 가늘고 섬세한 우아함의 양식을 보여주었다. 한편 피렌체에서는 코시모 메디치의 궁정화가였던 바사리와 브론치노가 우아하고 세밀한 형태의 초상화로 명성을 떨쳤다 (→ 색인 : 이탈리아).

이탈리아 밖에서의 르네상스

16세기초 스페인에서는 페르난도 야녜스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적인 작품을 제작했으며, 후안 데 마시프와 그의 아들 후안 데 후아네스의 작품들이 베네치아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스페인의 마니에리스모는 페드로 캄파냐와 알론소 산체스 코에요의 그림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엘 그레코는 〈성모승천〉에서 보여주듯이 인체의 형태를 길게 늘인 로마의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사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생생하고 감동적인 색채를 구사함으로써 베네치아 미술에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예술 및 이론을 깊이 이해했던 독일 최초의 주요예술가였다. 뒤러의 그림들은 〈네 사도〉에서 볼 수 있듯이 북유럽인들의 세밀묘사 취향을 드러내고 있으나,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이탈리아적인 면모를 나타내고 있다. 16세기 독일의 르네상스 회화는 뒤러에 의해 완성된 양식을 따랐는데, 그중 루카스 크라나흐는 공들여 충실하게 묘사하는 전신 초상화를 발전시켰으며, 한스 홀바인은 후에 영국에 정착하여 모델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보여주는 초상화들을 남겼다.

16세기초 플랑드르에서는 ' 안트웨르펜 마니에리스트'라고 불리는 일군의 화가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과장적·환상적 구성은 후기 고딕 예술의 장식성을 물려받은 것이었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건축가·금세공인들의 책을 통해 전달된 이탈리아적인 묘사도 지니고 있었다. 얀 호사르트(마뷔즈라고도 함), 베르나르트 반 오를레이, 얀 반 스코렐, 메르텐 반 헴스케르크, 안토니 모레 경 등이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그곳의 양식을 흡수하여 자신들의 독특한 예술을 만들어냈다.

피테르 브뢰헬은 1551~53년에 이탈리아를 방문했는데, 이탈리아 회화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알프스 북부의 시골풍경화를 꾸준히 그리면서 대중적 주제와 일상생활, 농부들을 다루었다. 그러한 예로 1568년의 〈농부의 춤〉을 들 수 있다. 마니에리스모 양식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와는 달리, 플랑드르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다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어느 정도 소화되기 시작했다. 바사리와 함께 수학한 프레데리크 수스트리스, 추카리의 동료였던 헨드리크 골치우스, 요한 폰 아헨, 바르톨로메우스 스프랑게르 등이 하를렘과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북유럽의 마니에리스모를 발전시켰다.

(뒤에 계속)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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