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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06-06 (수) 01:12
분 류 문화사
ㆍ조회: 7512      
[삼국] <특집> 고대 고분 양식의 변천
<특집> 고대 고분 양식의 변천

고대 사회의 무덤은 그 시대 문화 역량의 총체적 수준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지금 남아 있는 무덤들은 대체로 왕이나 지배층의 것들로서 사후 세계의 생활을 중요시 한 고대인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에는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이 묻혀 있는데, 그 전실(前室) 천정부분의 명문에 "자손들은 더욱 부자가 되고 벼슬은 후왕(侯王)에 이르게 하며 후세까지 쇠고기, 양고기, 술, 쌀밥, 맛있는 반찬[우양주미찬(牛羊酒肉米餐)]이 끊이지 않게 해달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무덤을 만든 이유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나라에는 고인돌[지석묘(支石墓)]이 많이 만들어졌으나, 철기시대 이후에는 봉토분이 많이 만들어진다. 철기 시대 이후 지배층의 무덤 양식에는 흙무덤[봉토분(封土墳)]·덧널무덤[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독무덤[옹관묘(甕棺墓)]·돌방무덤[석실분(石室墳)]·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돌무지무덤[적석총(積石塚)] 등이 있다. 그 중 삼국 시대까지 계속 이어지는 무덤 양식으로는 흙무덤과 돌방무덤이 결합된 돌방흙무덤[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과 돌무지무덤이 있다.

고구려 초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는 돌무지무덤[적석총(積石塚)]과 돌무덤[석총(石塚)] 및 흙무덤[(봉토분(封土墳)]이 있다. 초기(1∼3세기)의 돌무지무덤은 환인(桓因) 지방에서 나타나는데, 냇돌을 네모지게 깔고 그 위에 널[관(棺)]을 넣은 후 다시 돌을 쌓은 형식이다. 돌무지무덤은 그 뒤 점차 냇돌 대신 모난 깬돌[할석(割石)]을 써서 벽이 무너지지 않게 계단식으로 쌓아 올렸는데, 이를 보통 돌무덤[석총(石塚)]이라고 한다. 통구를 중심으로 한 압록강 유역과 한강 유역에서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돌무덤의 외형은 대체로 4각형[방대형(方臺形)]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돌무덤을 그냥 돌무지무덤으로 혼동하여 부르는 경우도 있다.

3세기 말 4세기 초가 되면 중국계 돌방무덤[석실분(石室墳)]의 영향을 받아 통구 지방에도 돌무지무덤의 중심부에 널길[연도(羨道):고분의 입구에서 현실(玄室)에 이르는 길]이 달린 돌방[석실(石室)]을 만들게 된다. 일부 지배층의 돌무덤에 들어 있는 장대한 돌방은 쌍실(雙室)로 만들어진 것이 많은데 이는 부부의 합장 무덤이다. 돌무덤으로 대표적인 것은 장군총·태왕릉·천추총 등이다. 특히 태왕릉은 한변의 길이가 60m이며 7단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무덤으로 부근에서 '원태왕릉 안여산 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고 쓰인 명문이 있는 벽돌이 출토되었으며 이 무덤에서 약 500m 가량 떨어진 곳에 광개토왕비가 세워져 있어, 이 무덤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장군총에서는 돌무덤 주위에 한쪽에 3개씩 모두 12개의 긴 돌[장대석(長大石)]을 기대어 놓았는데, 이것이 통일신라시대로 가면 12지신상으로 바뀐다. 돌무덤은 5세기 전반 평양 천도 이후 차츰 쇠퇴하여 자취를 감추게 된다.

고구려의 봉토분은 널길을 갖춘 굴식돌방[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을 반지하 또는 지면 가까이에 축조하고 그 위에 흙과 돌무지·진흙·슻·재 등을 깐 뒤 흙으로 봉토를 만든 것이다. 봉토는 돌무지무덤처럼 4각형을 이루고 있으나 때로는 바닥 주위에 몇 단의 돌기단을 쌓기도 한다. 돌방의 갯수에 따라 널방[주실(主室)]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단실묘(單室墓)]과 앞방[전실(前室)]·뒷방[후실(後室)]·옆방[측실(側室)] 등 두방 이상으로 이루어진 여러방무덤[다실묘(多室墓)]으로 나누기도 한다. 돌방의 벽은 이른 시기에는 냇돌이나 깬돌을 썼지만, 후에는 잘 다듬은 큰 판석을 여러 장 세워 축조하였다. 천장 양식에는 납작천장[평천장(平天井)]·활천장[궁륭식천정(穹隆式天井)]·모줄임[말각조정(抹角藻井式)]천장 등이 있다. 특히 모줄임천장은 천장 네귀에 삼각형으로 받침대돌을 놓아 그 공간을 점차 좁혀 올리고 맨 위에 판석 한 장으로 덮는 형식이다.

고구려의 봉토분은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 사이에 요동지방에 있던 중국계 봉토분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것으로 평양 천도 이후에는 이 무덤 양식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한편 이들 봉토분 가운데에는 돌방 벽면과 천장에 그림을 그린 벽화무덤도 있다. 벽화가 그려진 무덤은 무덤의 축조 방법과 그림의 주제 및 변화 과정에 의해 3시기로 구분한다.

전기(350∼450)의 무덤으로는 외방무덤[단실묘(單室墓)] 또는 여러방무덤[다실묘(多室墓)]이 있으며 널길이 남벽 동쪽에 있다. 그림은 벽면에 회칠을 하고 회가 마르기 전에 묵선(墨線)으로 윤곽을 그린 후 안료로 채색하는 방법으로 그렸으며, 그 주제로는 안악 3호무덤[동수묘(冬壽墓)]과 덕흥리 무덤에서 볼 수 있듯이 부부초상·사냥·무용·행렬을 비롯한 생활 모습을 담은 인물풍속도·생활풍속도가 주로 보인다.

중기(450∼550)의 무덤은 돌방의 축조가 고구려식으로 정착되면서 앞방이 작아져 딸린 방처럼 되고 주인공의 초상도 널방으로 옮겨진다. 그림의 주제도 전기의 인물 중심에서 사신도와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을 비롯하여 불교적인 장식무늬도 나타난다. 그림도 필치나 구도가 자유로와지며 고구려적인 화풍이 전개되고 있다. 각저총(씨름무덤)·무용총(춤무덤)·개마총(鎧馬塚, 개마는 무장한 말) 등이 있다.

후기(550∼650)의 무덤은 구조적으로 단순화되어 외방무덤이 대부분이며 무덤바닥이 지면 가까이 내려간다. 그림의 주제는 사신도 일색으로 변하는데, 사신도의 배경에는 나무와 구름 등의 사실적인 것 외에도 해와 달, 북두칠성 등의 별자리[일월성신(日月星辰)]·신선·동물 등의 도교적인 요소가 많아지고 있다. 이 시기에는 힘차고 화려한 색체로 고구려의 국력을 나타내고 있으며, 전기와는 달리 물갈이[수마(水磨)]한 벽면 위에 그림을 직접 그리고 있다. 집안의 사신총·진파리 1 2호무덤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시기 외방무덤의 축조 방법과 벽화의 주제 등은 백제·신라에도 전해진다. 이들 고구려의 돌방무덤이나 벽화무덤은 다양한 구조와 소재에 비하여 출토유물이 매우 적다. 아마 원래 무덤 속에는 껴묻거리[부장품(副葬品)]들이 넣어졌을 것이나, 봉토분의 대부분은 도굴이 쉬워 부장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일부 무덤에서 나온 공예유물(관·관식·귀걸이·허리띠·신발·말갖춤)과 토기 등을 통하여 고구려의 문화 수준을 살필 수 있다.

백제 고분의 변천은 대체로 도읍의 위치에 따라 한성 시대, 웅진 시대, 사비 시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한성 시대에는 도성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무덤이 만들어진다. 무덤 양식에는 돌무덤과 흙무덤이 있다. 흙무덤은 방이동과 석촌동 등에 남아 있다. 돌무덤은 고구려 초기의 무덤 형태와 비슷하다. 잠실 석촌동 고분 공원에 돌무덤이 여러 개 남아 있어 백제 지배층이 고구려 출신이라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기록의 사실성을 보여주고 있다. 석촌동 고분에 대해서는 초기 백제의 무덤이 아니라 5-6세기에 서울 지역을 지배한 고구려 지배층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

웅진시대가 되면 고구려 계통의 돌무덤이 없어지고, 널길달린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한성시대에 이어서 계속 만들어지며, 중국계 벽돌무덤[전축분(塼築墳)]이 새로 만들어진다. 특히 장방형 돌방무덤에는 천장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으나 기본 구조는 비슷하다. 벽돌무덤은 백제 시대를 통틀어 공주에 2기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단면이 터널 모양이고, 기다란 전돌을 가지고 길이 모 또는 작은 모쌓기를 반복하여 만든 것이다. 송산리(금성동) 6호분의 벽면에는 회칠을 한 뒤 사신도를 그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영향을 말해주고 있으며, 무령왕릉(송산리 7호분)은 처녀분으로 발굴되어 화려하고 풍부한 껴묻거리가 나와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묘제나 미술 공예 연구에 중요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백제사 연구에 큰 영향을 준 중요한 유적이다.

사비 시대가 되면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기본적으로 장방형 돌방무덤이 유행하지만 능산리 고분군에서 보듯이 널길이 더욱 넓어져 널방의 너비와 거의 같아진다. 특히 능산리 동하총의 경우는 벽 한면이 하나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상자형 돌방으로 벽면은 물갈이[수마(水磨)]한 후 직접 벽에 사신도를 그렸다.

삼국 시대 신라의 고분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독무덤, 돌방무덤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4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조영된 전형적인 신라의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이라 할 수 있다. 이 무덤은 지하나 지상에 덧널[목곽(木槨)]을 짜놓고 그 속에 널[관(棺)]과 껴묻거리[부장품(副葬品)]를 넣은 후 덧널의 상부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봉토를 씌우는 특이한 구조이다. 봉토 안에 덧널을 여러개 넣은 다곽식(多槨式)과 하나만 넣은 단곽식(單槨式), 그리고 봉토를 잇대어 외형이 표주박 모양으로 된 쌍무덤[표형분(瓢形墳)] 등 몇 가지 형식이 있다. 경주 시내에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이 곳곳에 솟아 있어 당시 신라의 힘과 부를 상징하고 있다.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금관총, 금령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이 있으며, 여기서 출토된 많은 유물들로 미루어 당시 신라 왕족·귀족들의 사치와 부를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나 백제의 고분과는 달리 5∼6세기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그 구조상 도굴이 어려워 많은 유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의 무덤은 돌방무덤[석실분], 돌무덤[석총], 화장무덤[화장묘] 등이 있다. 돌방무덤은 6세기경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처음에는 돌무지덧널무덤과 같이 평야 지대에 만들어졌으나, 곧 경주 분지 주변의 구릉 지대로 옮겨간다. 깬 돌을 쌓아 올려 꼭대기에 한 장의 판석을 덮은 형식으로 봉토 주위에 석물(石物)을 배치하기도 한다. 돌방무덤 중에는 십이지 신상을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 십이지 신상은 당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나, 당에서는 봉토 둘레에 십이지 신상을 배치한 무덤은 없다. 이것은 당에서 얻은 요소를 신라화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그뒤 조선 시대까지 이어진다. 통일 신라 시대의 고분들은 통일 전의 돌무지덧널무덤과 달리 도굴이 쉬워 출토 유물이 많지 않다. 또한 통일 신라 시대에는 불교의 발전으로 화장이 유행하였으며, 유골을 넣기 위한 뼈항아리[골호(骨壺)]가 만들어졌는데,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우수한 녹유(綠釉) 골호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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