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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02 (화) 17:32
분 류 문화사
ㆍ조회: 7605      
[삼국/남북국] 삼국ㆍ통일 신라 시대의 회화 (민족)
회화(삼국·통일신라시대의 회화)

세부항목

회화
회화(삼국·통일신라시대의 회화)
회화(고려시대의 회화)
회화(조선시대의 회화)
회화(근대 회화)
회화(현대 회화)
회화(참고문헌)

우리 나라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 시대부터라고 믿어진다. 삼국의 회화는 중국을 비롯한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받아 수용하고 서로 교섭을 가지며 발전하여 각기 다른 성격의 회화를 형성하였다. 같은 삼국시대의 회화이면서도 나라와 지역에 따라 제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며 발달하였던 것이다.

1. 고구려의 회화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도 가장 일찍부터 한대(漢代)와 육조시대(六朝時代) 회화의 영향을 받아들여 자체 발전의 토대를 삼았다. 이렇게 중국 회화 및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서역 회화의 영향을 수용하면서도 고구려는 어느 나라의 회화보다도 힘차고 율동적인 고구려 특유의 회화를 발전시켰다. 고구려의 회화는 통구(通溝)와 평양 부근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고분의 벽화를 통하여 알아볼 수 있다.

초기에 해당되는 4, 5세기의 것은 대체로 주인공, 즉 묘주의 초상이 위주가 되고 불교적인 요소와 풍속화적인 요소가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의 능이라는 설과 중국인 동수(冬壽)의 묘라는 설 등으로 논란이 많은 안악3호분(安岳三號墳)을 들 수 있다. 357년(영화 13년)의 묵서명(墨書銘)이 있어 그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이 무덤의 벽화는 묘주가 누구이든 고구려 초기 고분 벽화의 한 전형을 보여 주는 것임은 분명하다.

이 고분의 벽화에는 묘주가 생전에 누렸던 풍족하고 위엄 있는 생활상이 잘 묘사되어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묘주와 그의 부인의 초상화이다. 안악3호분 묘주의 초상화는 묘주 자신의 앉음새는 물론 그 좌우의 시인(侍人)들도 모두 삼각형의 포치(布置) 속에 들어가 있어 고식(古式)의 구도를 보여 준다. 안악3호분의 벽화가 보여 주는 여러 가지 특색은 408년(광개토왕 18년)에 축조된 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의 벽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사실 등은 고구려의 회화가 늦어도 4세기경부터는 중국 회화로부터의 영향을 받으며 고도의 발달을 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하여 준다.

그러나 고구려의 동적이고 힘이 넘치는 회화의 특징이 특히 두드러지게 된 것은 대체로 중기인 5, 6세기경부터라고 믿어진다. 5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 무용총(舞踊塚)의 〈수렵도〉를 예로 보면, 활을 겨누며 말을 달리는 기마 인물들이나 사력을 다하여 달아나는 산짐승들이 모두 힘찬 운동감에 휘말린 상태로 표현되어 있다. 굵고 가는 파상선(波狀線 : 물결 모양의 선)만으로 이루어진 상징적인 산들조차도 그림 전체의 율동에 발맞추듯 그려져 있어 한층 힘찬 느낌을 자아낸다.

이 수렵도는 물론 그 소재 자체가 힘찬 동작의 세계를 표현해야만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힘차고 율동적인 효과의 정도가 같은 소재를 다룬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도 격렬함을 보여 준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무용총의 〈수렵도〉가 고구려인들의 기질과 재질을 동시에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임을 말하여 준다. 또한 이 그림은 늦어도 5세기경에는 고구려적인 회화의 특색이 완연해졌을 뿐만 아니라 인물화가 고도로 발달하였고, 산수화도 발전의 궤도에 오르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이 점은 408년에 축조된 덕흥리고분벽화의 수렵도와 비교해 보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실이다.

5, 6세기 고분 벽화들은 벽면에는 주인공의 생활상이나 주인공이 겪은 중요한 일들을 서사적으로 표현하여 기록적인 성격을 띤다. 반면에, 천장 부분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 등 주인공의 영혼이 향할 천상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 보편적인 특징이다. 그러므로 무덤 내부는 현실 세계와 내세를 함께 구현한 일종의 소우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이와 함께 이 시기의 벽화에는 불교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남도 간과할 수 없는 특징이다.

무용총의 〈수렵도〉에 보이는 고구려적인 회화의 특색은 6세기 말부터 7세기 전반에 이르면 더욱더 현저해진다. 이 점은 통구의 사신총(四神塚), 중화군 진파리1호분(眞坡里一號墳) 등의 후기 고분 벽화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엿볼 수 있다.

통구 사신총의 현무도(玄武圖)를 일례로 살펴보면, 거북과 그것을 휘감고 있는 뱀의 뒤틀린 몸 그리고 그들의 사납게 벌린 입에 세찬 정기가 감돌고 있다. 거북과 뱀의 격렬한 동작에 따라 그들의 주변에는 마치 바위에 부딪힌 파도와도 같은 것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이것이 과연 물결인지 비운문(飛雲文 : 구름이 날아가는 모양의 무늬)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무튼 이것이 자아내는 동적인 효과는 매우 강렬한 것이다.

이와 같은 동적인 미술의 근원이 본래 중국의 육조시대 미술에서 나온 것임은 진파리1호분의 벽화와 미국 캔자스시티의 넬슨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석관의 표면에 새겨진 석각화(石刻畵)를 비교하여 보면 알 수 있다.

진파리1호분 현실(玄室) 북벽에 그려진 고구려의 벽화나 중국의 석각화(약 525년경)가 다같이 바람에 나부끼는 듯 생동하는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것이 보다 유연하고 곡선적이면서도 율동적이다. 이렇듯 7세기경의 고구려 고분 벽화는 힘차고 동적인 모습을 훨씬 더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전대에 비하여 대체로 구성이나 묘사법이 더욱 합리적이고 색채도 훨씬 선명해졌으며, 산수화적인 요소도 좀더 사실적인 모습을 띤다. 그러나 이 시기의 벽화에서는 기록적인 성격의 인물화나 풍속화가 자취를 감춘다. 그 대신 도교의 영향을 받아 사신(四神)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 그 이전의 벽화 내용과 큰 차이를 나타낸다.

고구려는 이처럼 활력에 넘치는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고구려적 경향은 중기의 5, 6세기경부터 더욱 현저해지다가 후기인 7세기에 들어서면서 절정에 달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회화는 다른 미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백제, 신라, 가야,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고구려의 회화는 비단 우리 나라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미술사상 그 비중이 더 없이 크다고 하겠다.

2. 백제의 회화

백제는 고구려 및 중국 남조, 특히 양나라의 회화와 교섭하였으나 역시 다른 나라의 회화와 구분되는 부드럽고 세련된 모습의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하였다.

공주 송산리6호분(宋山里六號墳)과 부여 능산리고분벽화(陵山里壁畵古墳)에 그려진 사신도·비운문·연꽃무늬, 부여의 규암면에서 출토된 산수문전(山水文塼) 그리고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족좌(足座)와 두침(頭枕)에 그려진 어룡(魚龍)이나 연꽃무늬, 동탁은잔(銅托銀盞)에 새겨진 산악도 등의 자료 등을 통하여 백제 회화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백제에서도 웅진시대(475∼538년)부터는 무덤 내부에 사신을 그렸는데, 공주 송산리6호분은 그 좋은 예이다. 이 무덤의 벽화는 중국 남조의 자극을 받아 생겨난 전축분(塼築墳)의 벽면에 회를 바르고 사신을 그려 넣은 것이다. 따라서 이 무덤에서 백제가 수용하였던 고구려 및 중국 남조 미술의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상이한 요소들을 결합하여 색다른 것을 창조한 것은 역시 백제적인 능력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여 능산리고분벽화의 경우에는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진 벽면에 직접 사신을 그리고, 천장에는 비운과 연꽃을 그려 넣었다. 이렇게 판석으로 이루어진 벽면에 회를 칠하지 않고 직접 사신을 그려 넣은 것 자체가 고구려 후기의 고분 벽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하여 준다. 이 능산리벽화고분에 그려진 그림들은 대체로 고구려의 후기 고분인 진파리1호분의 그것과 매우 유사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백제의 고분 벽화는 비운문과 연꽃무늬에서 보듯이 고구려의 벽화에 비하여 훨씬 부드럽고 원만한 동감(動感)을 자아내고 있다. 이렇듯 백제의 회화 양식은, 힘차고 율동적이면서도 어쩐지 긴장감이 짙은 고구려의 회화 양식과는 현저한 대조를 보인다.

이러한 백제 회화의 특색은 부여의 규암면에서 출토된 산수문전에서도 역력히 보인다. 7세기경에 제조된 것으로 믿어지는 이 산수문전은 지금까지 알려진 삼국시대의 회화적인 작품들 중에서 가장 발달된 산수문을 보여 준다. 좌우가 대칭을 이룬 안정된 구도, 근경으로부터 후경으로 후퇴하며 전개되는 공간과 거리 및 오행감, 나무가 우거진 산다운 분위기 등은 그 이전의 우리 나라 미술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회화 세계를 나타낸다.

공예 작품들이 지니는 도식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곡선으로 된 삼산형(三山形)의 산들과 울창한 송림의 표현에는 백제적인 부드러움과 온화함이 넘치고 있다. 이렇듯 이 산수문전은 7세기경에 고도로 구체화된 백제 미술의 특색을 보여 줌과 동시에 발전된 백제 회화, 특히 산수화의 일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같은 삼국 시대에 같은 한반도 내에 존재하였던 고구려와 백제의 회화가 서로 교섭하였으면서도 각기 독자성이 강한 다른 양식의 미술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3. 신라의 회화

삼국시대 고신라의 회화는 경주의 천마총(天馬塚, 155호분)과 황남대총(98호분)이 발굴되기까지는 아무런 작품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고분들에서 출토된 〈천마도〉·〈기마인물도〉·〈서조도 瑞鳥圖〉·〈우마도〉 등을 통하여 신라 회화의 일면을 엿보게 되었다. 그러나 앞의 세 그림들은 자작나무껍질에 그려진 일종의 공예화며, 끝의 〈우마도〉도 역시 검은 칠기의 표면에 붉은 선으로 간결하게 그려진 공예화이다. 그래서 이들이 신라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고는 볼 수 없다.

특히 천마총 출토의 그림들은 고구려 회화의 영향을 반영하고는 있지만 그 수준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신라 회화의 수준이 고구려의 그것보다 낮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이 고분 출토의 그림들이 회사(繪事)를 전문으로 하였던 화원의 작품이 아니고 공예품을 장식하는 공장(工匠)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아무튼 이 그림들을 통하여 신라의 회화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재확인하게 되고, 신라 회화의 최소한의 일면을 엿보게 되었다. 이 밖에도 ‘己未年銘順興邑內里壁畵古墳(기미년명순흥읍내리벽화고분)’과 ‘乙卯年於宿知述干(을묘년어숙지술간)’이라는 명기(銘記)가 있는 영주벽화고분이 발견되었다. 신라에서도 경주가 아닌 변방 지역에서 벽화 고분이 축조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의 그림들은 비록 우수한 작품들은 아닐지라도 고구려나 백제의 회화와는 다른 경향을 보여 준다. 힘차고 율동적인 고구려의 회화나 부드럽고 유연한 백제의 회화와는 달리 신라의 회화는 어딘지 사변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지금까지 대충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시대의 회화는 외국으로부터의 영향과 상호 교섭에도 불구하고 각기 성격이 다른 독자적 양식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발전된 삼국시대의 회화는 일본 고대 회화의 발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늦어도 5세기 후반부터는 백제에서 건너간 화공들이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였고, 7세기 초부터는 고구려 출신의 화공들도 괄목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백제의 백가(白加)·아좌태자(阿佐太子)·인사라아(因斯羅我)·고구려의 담징(曇徵)·가서일(加西溢)·자마려(子麻呂) 등은 일본에 건너가 활약한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우리 나라 화가들이다.

이밖에 황문화사(黃文畵師)·산배화사(山背畵師)·책진화사(愁秦畵師) 등도 이 시대 우리 나라 출신의 전문 화사씨족(畵史氏族)들이다. 일본에서 9세기에 활약하였던 뛰어난 화가 하성(河成)도 백제의 후손이다. 이러한 단편적인 예들만 보아도 삼국시대의 우리 나라 회화가 일본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4. 통일 신라 시대의 회화

상호 연관을 맺으면서도 각기 다른 양식을 형성하였던 삼국시대의 회화는 불교 조각이나 공예의 경우처럼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통합되고 조화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통일신라시대에도 고신라시대 말기에 회사(繪事)를 관장하기 위하여 세워졌던 것으로 믿어지는 채전(彩典)이 계속 기능을 발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솔거(率居)·정화(靖和)·홍계(弘繼)·김충의(金忠義) 등의 유능한 화가들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당나라와의 빈번한 문화 교섭을 통하여 궁정 취향의 인물화와 청록 산수화(靑綠山水畵)가 발전하였다. 또한 불교 회화가 활발히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 신라 시대에 활동하였던 화가들 중에서 솔거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경주 황룡사(皇龍寺)의 〈노송도 老松圖〉, 분황사(芬皇寺)의 〈관음보살상 觀音菩薩像〉, 진주 단속사(斷俗寺)의 〈유마상 維摩像〉을 그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솔거의 생몰년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통일신라 때 지어진 진주의 단속사에 〈유마상〉을 그렸다는 사실이나, 황룡사의 〈노송도〉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주는 화풍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기에 활동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솔거가 황룡사의 벽에 그린 〈노송도〉는 너무나도 훌륭하여 까마귀·제비·참새 등의 새들이 종종 날아들다 떨어지곤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믿는다면 솔거는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기운 생동하는 채색화에 뛰어났고 불교 회화에도 능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솔거의 〈노송도〉에 얽힌 이야기, 당나라에서 활약한 김충의에 관한 기록, 당나라의 대표적 인물화가인 주방(周昉)의 그림들을 신라인들이 대량으로 사들였던 일 등을 고려하면, 통일신라시대의 회화에서는 청록 산수 계통의 사실적이면서도 기운 생동하는 산수화와 풍만한 미인들을 즐겨 다루는 궁정 취향의 인물화가 유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대 불교 회화의 양상은 1977년에 발견된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 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를 통하여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754∼755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불보살들의 자연스럽고 유연한 자태, 균형 잡힌 몸매가 이루는 부드러운 곡선, 정확하고 정교한 묘사, 호화롭고 미려한 분위기 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 8세기 중엽경의 불교 회화가 당시의 불상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

한편, 이 시대에 북쪽 고구려의 옛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발해에서도 회화가 상당히 발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송석(松石)과 소경(小景)을 잘 그렸다는 대간지(大簡之)라는 화가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 정효공주(貞孝公主)의 무덤에서 유려한 선과 아름다운 채색으로 그려진 인물화가 발견되어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안휘준>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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