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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03-23 (금) 20:55
분 류 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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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백, 한국 문화와 외래 문화
이기백, 한국 문화와 외래 문화

1. 민족 문화와 고유 문화

한국 문화는 곧 한국의 고유 문화라고 하는 생각이 과거에는 지배적이었다. 한국에는 자기대로의 고유 문화가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화 민족으로서의 독립성이 박약하다는 침략주의자들의 주장과, 이에 대하여 한국은 독자적인 문화를 5천년 동안 발전시켜온 문화 민족이었다는 국수주의자들의 주장은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기는 하지만, 양자가 모두 민족 문화는 곧 민족의 고유한 문화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한국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고유한 문화가 곧 한국의 문화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연 한국의 원시 문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삼품창영씨는 한국 문화 고유의 기본적 특질은 민족이 역사를 통하여 언제까지나 존속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원시 문화가 외래 문화의 영향을 받음이 근소하고, 또 그것이 생애적이란 면에서, 이에 대한 고찰이 한국사에서 기본적인 것 내지는 고유 문화를 이해한다는 목적에 부응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삼품창영, <조선 문화의 기조>, [조선사 개설], p.12). 이러한 삼품씨의 입장은 어떠한 결론을 가져오게 하였는가. 그에 의하면, 후대에 불교와 유교에 지도력을 빼앗긴 고유 문화는 이러한 외래 문화의 세력이 도달하기 힘든 민간 사회에 보존될 뿐이어서, 이것이 민간 문화·여성 문화를 형성하여 관변 문화·남성 문화인 중국 문화 즉 외래 문화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일반적 현상이긴 하지만, 자율적 발전이 적은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두드러진 것으로서 하나의 문화적 특성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삼품창영, 같은책, pp.21∼22).

그러나 씨가 원시 문화의 보편성을 인정하면서 원시 문화 속에서 민족 문화의 기본적인 특질을 찾아내려고 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만일 민족 문화가 보편적이 아니고 보다 민족 특유의 것이어야 한다면, 보편적인 원시 문화에서가 아니라 특유한 성격이 나타나는 후대에서 더 찾아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특성은 보편적인 원시 문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을 특수하게 만든 어떤 다른 요소에 있다는 것은 자명한 논리적 귀결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는 스스로가 인정한 여러 가지 전제들을 무시하고 위의 결론만을 이끌어 내기에 급급해 있었던 것같이 보인다. 그리고 논리적인 모순 위에 세워진 결론이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요컨대 한국 문화를 한국의 고유 문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그러므로 조지훈씨가 "애초부터 있었던 문화를 고유 문화라고 한다면, 우리는 고유 문화를 원시 시대에 우리 선민들이 발견한 의식주 생활 문화의 풍토적 양식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당시의 의식주 문화가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내려온 것은 하나도 없다. 이렇게 본다면 고유 문화는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민족 문화의 주체성>, [한국 문화사 서설], p.207)라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

2. 외래 문화의 수용과 민족 문화

조지훈씨는 그러나 앞에 인용한 「민족 문화의 주체성」에서 민족 문화는 결국 고유 문화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고유한 것을 개별적인 혹은 주체적인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통념에서 벗어난 이러한 용법은 결코 현명한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사고의 혼란을 가져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민족 문화란 반드시 외래 문화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민족 문화란 것도 반드시 다른 외래 문화를 수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조지훈, 상기서, p.210).

그러면 민족 문화와 외래 문화는 어떠한 관계에 놓이는 것일까. 조지훈씨는 외래 문화를 주체적 입장에서 받아들이면 민족 문화가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수긍할 수 있는 정당한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그 민족의 주체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계급적 입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민족을 하나의 통일된 단위로서 파악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자칫하면 민족을 신비화시킬 우려가 있으며, 따라서 민족 및 민족 문화라는 구체적인 것이 감상적으로 미화될 염려가 있다.

이에 비하여 손진태씨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민족 문화의 올바른 이해에 진일보한 것인 아닌가 한다. 즉 그른 민족 내부의 계급 대립을 인정하면서도, 귀족 중심의 문화가 민족 문화가 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국 문화의 주류가 비록 귀족 중심적이라 할지라도(이것도 세계 공통적이다) 이것은 결코 피지배 민중과는 하등의 관련도 없는 단순한 귀족 계급만의 문화는 아니다. 지배 귀족 계급이란 것이 피지배 계급을 토대로 하여 성장된 것과 같이, 그 문화도 민중을 토대로 하여 성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문화는 귀족 계급만으로 생성될 수는 없었고, 그 두 계급의 관련하에서만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혹은 계급 문화라고 하나 나는 이것을 일종의 민족 문화라고 하고자 한다"(손진태, [한국 민족사 개설], p.5).

이같이 그는 민족 내부의 계급의 분열을 인정하고 지배 계급의 귀족 문화를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서도, 그 귀족 문화가 민중을 토대로 하고 성장하였다는 점에서 이를 민족 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분명히 민족을 그 전체로서 단일한 하나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러나 가령 민중은 민중대로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지 않았겠는가 하는 점이 문제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통일 신라 시대를 보면, 민중들 사이에서 정토 신앙이 크게 성했다고 보아지는데, 이러한 내세 신앙의 성행은 당시의 민중의 생활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기록이 없어 모르고 있을 뿐이지 이같은 민중 문화 자체는 언제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귀족 문화와 여러 면에서 차이를 갖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귀족 문화뿐 아니라 민중 문화도 민족 문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격이 다른 두 개, 혹은 여러 개를 이것도 저것도 다 민족 문화다 하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동일 시대의 여러 성격의 문화를 서로 관련시켜 종합적으로, 혹은 구성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또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그 발전 과정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 민족 문화란 복잡 다단하면서도 하나의 통일성을 가진 존재로서 부각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라서 민족 문화의 주체성이란 것도 비로소 올바로 이해되리라고 믿는다. 즉 그 주체성은 단일한 것이 아니고 보다 다양한 것이 될 것이요, 다양하면서도 하나의 통일성을 가지고 파악될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외래 문화의 수용이란 것도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 같이 단수한 것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하여 많은 성격의 것이 동시에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유교와 불교는 처음부터 동시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같은 시대에 모두 그 신봉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민족을 단일한 성격으로 보려는 입장에서는 설명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령 삼국 시대 신라에서 진골 귀족들이 주로 불교를 신봉하고 이에 대해서 육두품 귀족들이 유교를 받아들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 역사적 현상을 골품 제도와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성격의 문화가 동시에 받아들여져 공존할 뿐 아니라, 같은 문화가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 계층이나 집단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가지고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같은 불교라도 신라의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믿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러 교파가 생기고, 또 대체로 교파에 따라서 일정한 사회적 성격을 지닌 신자의 무리를 구분할 수 있는 점이 이를 말하여 주고 있다. 또 같은 조선의 유교라도 주리설을 내세우던 사람들과 주기설을 신봉하던 사람들, 혹은 마음 속으로 양명학을 받아들이던 사람들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지배층은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문화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들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내세운 것이라든가, 혹은 조선 말에 양반 귀족들이 천주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과 같은 그것은 그러한 구체적인 보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배자의 강요는 반드시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영구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어서, 시대가 변하면 지배층도 변하고, 이에 따라서 지배적인 문화도 변하여 왔다. 불교에서 유교로 변했다든가 혹은 기독교가 널리 퍼졌다든가 하는 것은 다 이러한 좋은 예이다.

위에서는 주로 외래 사상에 대한 예를 들어 설명하였지만, 반드시 사상에서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문학·미술 등의 예술면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 제도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라고 믿어진다.

3. 민족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

문화란 원래 보편성을 지닌 것이며 세계성을 띠는 것이다. 이 점은 언뜻 보기에는 이상한 것 같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곧 납득이 가는 것이다. 가령 종교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면, 이를 아무리 믿더라도 어떤 특정한 민족만이 구원을 받고 다른 민족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 그 종교는 결코 훌륭한 종교일 수 없을 것이다. 또 학문에 있어서도, 특정한 민족만이 진리라고 주장하고 다른 모든 민족은 진리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로 훌륭한 것일 수가 없다. 이는 미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한 민족에게만 아름답게 보이는 미술 작품은 결코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종교에도 불교ㆍ기독교 등 여럿이 있고, 학문에도 여러 학파가 있고, 미술에도 여러 유파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민족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간혹 민족과 직결되는 것들이 있더라도 그 교리나 주장이 어떤 한 민족에 국한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이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나치즘에 있어서와 같은 인류의 배신자들에게만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신도와 같은 것이 고등 종교일 수 없는 까닭도 분명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민족 문화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한국 문화란 것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가능성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아무리 문화가 보편성을 띤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에서나 조금도 차이가 없는 동일한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민족에 따라서 그것은 자연히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 문화를 받아들이는 시대적 사회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화를 성격지어 주는 것은 바로 이 시대적 사회적 조건인 것이다.

인간 사회는 우리가 미처 모두 헤아려 밝힐 수 없는 많은 법칙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들 법칙은 물론 모두 보편적인 성질의 것이지만, 그들 법칙이 결합하는 양상은 늘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이나 혹은 민족이나 그 밖의 여러 사회적 단위들의 성격차를 가져오는 원인인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 문화도 이러한 원칙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보편성을 지향해 나가면서도 민족에 따라서 문화가 각기 다른 특수성을 지니게 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문화를 논함에 있어서 그것이 원래 한국에 고유한 것인가 외래(外來)한 것인가 하는 점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그것이 민족의 역사적 현실에 적합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데 있는 것이다. 한국이 그때 그때의 역사적 현실에 적합한 문화를 받아들였고, 또 발전시켰다면, 그것은 훌륭한 한국 문화요, 한국의 민족 문화인 것이다.

출전 : 이기백, [민족과 역사], 일조각, 1992, pp.161∼166 (원문 : [서강] 창간호,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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