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게시판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10 (일) 19:04
분 류 명문
ㆍ조회: 2160      
E. H. Carr, 역사란 무엇인가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 중에서

재1장 <역사가와 사실>의 결론 부분

비전문가들은 가끔 나에게 역사가들이 역사를 서술할 때에 어떻게 일을 진행해 나가는가를 묻는다. 아마도 극히 상식적으로는, 역사가들은 명확히 구분되는 두 개의 단계나 시기로 갈라놓고 일을 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즉, 우선은 사료를 읽고 노트에 사실을 채워 넣는 데에 긴 준비 기간을 소비하고, 이 일이 끝난 다음에는 사료는 치워놓고 노트 앞에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써내려 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이런 광경은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럴 듯해 보이지도 않는다. 내 경우에는 우선 기본 사료라고 생각되는 것을 조금만 읽기 시작하면 아주 재미없고 지겨워서 그냥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쓰는 부분이 처음 부분이어야 한다는 법도 없고 어디서부터거나 상관없다. 그 다음부터는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동시에 병행해 간다. 읽는 것은 씀으로 해서 인도되고 방향이 제시되며 풍부해지는 것이다. 즉, 쓰면 쓸수록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욱 잘 알게 되고 내가 찾아낸 것의 의미와 연관성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와 같은 예비 단계의 집필 전부를 펜이나 종이나 타이프라이터 없이 머리 속으로만 해치우는 역사가들도 있을 것이다.

장기의 판과 알이 없이도 머리 속으로만 장기를 둘 수 있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이것은 부러운 재주이지만 나로서는 따라 갈 도리가 없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는 바로서는 적어도 역사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에게는 경제학자들이 인풋트(Input)*과 아웃트풋트(Output)*이라고 부르는 이 두 개의 과정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고 실제에 있어서는 단일 과정의 두 부분이라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양자를 떼어놓으려고 한다든가 하나를 다른 것보다 우위에 놓으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두 이단(異端) 중의 하나에 빠지고 말 것이다. 즉, 의미도 중요성도 없는 가위와 풀의 역사를 쓰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선전소설(宣傳小說)이나 역사소설을 써서 역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저작물의 장식물로서만 과거 사실을 이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 역사상의 사실과 역사가의 관계를 검토해 온 우리들은 두 개의 위험 지점 사이를 간신히 항행(航行)하고 있는 지극히 위태로운 상태에 도달하고 말았다. 역사를 사실의 객관적인 편찬(編纂)이라고 보고 '해석에 대한 사실의 무조건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타당치 못한 역사 이론의 위험 지점과 역사는 역사상의 사실을 설정해 주고 해석 과정을 통해서 이를 지배하는 역사가의 마음의 주관적인 산물이라고 보는 마찬가지로 타당치 못한 역사 이론의 위험 지점과의 사이, 다시 말해서 중심을 과거에 두는 역사관과 중심을 현재에 두는 역사관의 중간 지점 말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위치는 보기보다는 덜 위태로운 것이다. 사실과 해석이라는 이상과 같은 대립은 여러 다른 외양하(外樣下)에 - 특수와 일반, 경험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가가 처해있는 어려운 지점은 인간 본성의 하나의 반영인 것이다. 사람이란 아주 어린 유아기나 극단한 노년기를 제외하고서는 전적으로 자기 환경 속에 만들어지거나 무조건 거기에 예속당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전적으로 환경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거나 그에 대한 무조건의 지배자일 수도 없는 것이다. 인간의 환경에 대한 관계는 역사가의 테마에 대한 관계와 같다. 역사가는 사실의 천한 노예도 아니요, 억압적인 주인도 아니다. 역사가와 그가 다루는 사실은 평등 관계에 있는 것이며 말하자면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저술 중에 있는 역사가가 잠깐 일을 멈추고 자기가 생각하고 쓰는 동안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다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역사가란 자기의 해석에 맞추어서 사실을 형성하고, 자기의 사실에 맞추어서 해석을 형성하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 중의 어느 한 쪽만을 우위에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가는 임시로 선택한 사실과, 그러한 사실 선택을 이끌어 준 임시적인 해석 - 그것이 타인에 의한 것이건 자기 자신에 의한 것이건 - 이 양자를 가지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일이 진행됨에 따라서 해석이나 사실의 선택과 정리는 다 같이 쌍방의 상호 작용을 통하여 미묘한 반(半)무의식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상호 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울러 내포되는 것이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을 못 가진 역사가는 뿌리를 박지 못한 무능한 존재이다. 역사가 없는 사실이란 생명 없는 무의미한 존재이다. 이리하여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나의 제일답(第一答)은 결국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 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제5장 <진보로서의 역사> 결론 부분

'가치는 사실에서 나올 수 없다.' 이 말에는 일면의 진실함과 일면의 오류가 동시에 들어있다. 가치가 환경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얼마나 많이 형성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한 시대, 한 국가를 지배한 가치 체계를 검토해 보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가령 노예제도, 인종차별, 아동 노동의 착취 - 한때는 이 모든 것이 도덕적으로 흠 없는 것 혹은 훌륭한 것으로 인정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 를 일반적으로 부도덕한 일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준 과거 일 세기 반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 보라. 가치는 사실로부터 나올 수 없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더라도 그릇된 이야기이다.

'사실은 가치로부터 나올 수 없다.' 여기에도 일면의 진실은 있지만 오해를 초래하기 쉽기 때문에 조건을 달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실을 알려고 할 경우를 생각할 때,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나 우리가 입수하는 해답 같은 것은 모두가 우리들의 가치 체계의 도움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 환경의 여러 사실들을 우리들이 어떠한 모양으로 파악하고 있는가는 우리들의 가치, 즉 우리가 그것을 매개로 하여 사실에 접근하는 여러 범주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가치는 사실 속에 들어가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다. 우리들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도, 환경을 우리 자신에게 적응시킬 수 있는 능력도, 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하여 역사를 진보의 기록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능력도 모두가 우리들의 가치를 통하여 획득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환경의 투쟁을 극적으로 과장하여 사실과 가치를 거짓으로 대립, 분열시켜서는 안 된다. 역사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의 상호 의존과 상호 작용울 통해서 이룩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 작용을 가장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객관적인 역사가라고 할 수 있다.

사실과 가치에 관한 이러한 문제의 단서는 보통 우리들이 '진리'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라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말은 사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의 양쪽에 걸쳐 있는 말로서 양쪽의 요소에 의하여 성립되고 있다. '내가 지난 주에 런던에 갔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보통 진리라고는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떠한 가치 내용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의 건국자들은 독립선언문에서 '만인은 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자명한 진리를 언급하고 있지만, 여러분은 이 경우에 선언의 가치 내용이 사실적인 내용을 압도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따라서 진리로써 인정받을 만한 권리가 없다고 부정할 것이다. 역사적 진리의 영역은 이러한 양극 - 가치를 떠난 사실이라는 북극과, 사실이 되고자 애쓰는 가치 판단이라는 남극 - 의 중간 지대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란 사실과 해석, 사실과 가치의 양자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이 양자를 분리할 수 없다. 정적인 세계에서라면 사실과 가치의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정적인 세계에서 역사란 무의미한 것이다. 역사는 본질상 변화요, 운동이요 진보이다.

이리하여 나의 결론은 진보를 가리켜 '역사 서술의 토대가 될 수밖에 없는 과학적 가설'이라고 말한 액튼의 말에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만일 원한다면 과거의 의미를 역사 외적인 초이성적인 힘에 종속시켜 역사를 신학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또한 그럴 생각만 있다면 역사를 문학 - 의미나 중요성이 결여된 과거의 이야기와 전설의 집성 - 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라는 것은, 역사 자체의 방향 감각을 찾고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온 방향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 굳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미래의 진보 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에 자기들이 이룩한 진보에 대해서도 급속히 무관심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역사관은 우리들의 사회관의 반영인 것이다.

<구절 풀이>

사료(史料) : 역사 서술의 자료. 신문. 통계자료 등과 같은 과거의 기록물.

인풋트(Input): 경제학 용어로 자본의 투입량. 여기에서는 자료의 수집 즉 독서를 말함.

아우트풋트(0utput): 산출. 생산. 여기에서는 서술 집필을 의미함.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 주고 받기.

이단(異端) : 자기가 지지하는 단체, 종교, 이론과 다른 생각이나 행동. 여기에서는 '극단'이라는 의미로 쓰인 듯함.

가위와 풀의 역사 : 철학과 사상적 관점이 없이 객관 자료만 모아 놓은 역사. 카아는 역사가의 철학적 관점 즉 사관이 개입하지 않는 역사 서술은 불가능.

가치는 사실에서 나올 수 없다. : 객관 사실은 그것 자체만으로 가치 판단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갓 태어난 아기 때부터 벌레만 먹고 자란 아이는 벌레를 보고 징그러워하기는커녕 군침을 흘릴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물에 대한 가치 판단은 그 사물의 고유한 성질로 의해 결정되지 않고 사물을 접한 관찰자 또는 경험자의 사고 방식에 의해 좌우된다.

가치를 통하여 획득되는 것이다. : 사료 수집 단계에서부터 역사가의 관점 즉 사관이 개입한다. 이 사관이 없이 역사 연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미.

역사 서술의 토대가 될 수밖에 없는 과학적 가설 : 시대가 바뀌면 당면 과제도 바뀌고 사물의 중요도에 대한 판단도 달라진다. 역사 서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역사 서술의 밑그림과 같은 역사가의 관점(사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사관이라는 것은 현재에 대한 불만이요, 미래에 대한 꿈과 같은 것이다. 진보라는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다르지 않은데 이 희망이 역사가의 가치관이 되고 곧 역사 서술의 토대가 된다.

출전 : http://my.dreamwiz.com/itrue/nonsul/jakmunlist/il-ki.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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