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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8-25 (일) 16:06
분 류 사전1
ㆍ조회: 46539      
[조선] 임진왜란 수군의 활약 (민족)
임진왜란(수군의 활약)

세부항목

임진왜란
임진왜란(배경)
임진왜란(전쟁의 발발)
임진왜란(의병의 활동)
임진왜란(수군의 활약)
임진왜란(조·명군의 반격과 휴전 성립)
임진왜란(정유재란)
임진왜란(난중의 사회상)
임진왜란(결과)
임진왜란(참고문헌)

왜란 직전에 조선이 소유한 판옥선(板屋船 : 戰艦) 수는 모두 250여 척으로 추측된다. 이때 경상·전라 양도의 수군 진용은 경상좌수사에 박홍, 경상우수사에 원균(元均), 전라좌수사에 이순신, 전라우수사에 이억기(李億祺)였다.

그러나 난이 발발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또한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세가 불리하자 전선과 전구(戰具)를 모두 침몰시켜 수군도 흩어지고 단지 4척의 전선만이 남게 되었다. 이런 실정이라 조선의 수군은 전라좌·우수사 휘하의 수군과 전선이 주축이 되었고 그 지휘는 이순신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제1차 출동에는 원균도 가세했으나 이순신 단독에 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592년 5월 4일에서 8일에 걸쳐 벌어진 이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해전에서 적선 37척을 분파(焚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우리 피해는 경상 1명에 불과했을 뿐이다.

제2차 출동은 5월 29일에서 6월 10일에 있었다. 사천(泗川)·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 네차례의 해전에서 왜선 72척을 침몰시키고 적병 88명을 참획하였다. 이때도 아군의 피해는 전사 11명, 전상 26명으로 적에 비하여 경미하였다.

이 2차 출동에서는 도중에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도 가세하여 원균의 3척을 합하여 연합 함대의 규모는 51척이나 되었다. 특히 사천 해전부터 거북선〔龜船〕이 사용되어 그 효능이 증명되었고, 적 수군의 주력이 괴멸되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 것은 그 뒤 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3차 출동은 제2차 출동 후 약 1개월이 지난 7월 6일부터 13일사이에 있었다. 6일 이순신은 이억기와 함께 90여 척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남해 노량(露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견내량(見乃梁)에 정박중인 일본의 대선단을 한산도(閑山島)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각종 총통(銃筒)을 쏘아 먼저 2, 3척을 부수니 적이 도망하려 하였다.

이 때 우리 함대가 일시에 달려들어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파괴하고 나포하는 등 대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을 지휘했던 와키사카는 쾌속선으로 겨우 탈주하고 적선 10여 척이 간신히 도망했을 뿐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이순신의 한산대첩(閑山大捷)이다.

이순신 함대는 이날 견내량에 임시로 정박하고 9일 다시 적선을 찾아 떠났다. 10일에서 다음날 새벽에 이르기까지 안골포(安骨浦)에 정박중인 적선을 포격과 엄습으로 모두 파괴하고 육지로 도망한 잔적을 소탕하였다.

그 뒤 12일에 한산도에 이르러 원균에게 한산도 해전에서 육상으로 도망친 적을 소탕하게 하고 13일 여수로 돌아왔다. 안골포 해전에서 대패한 적군은 구키가 지휘한 수군이었다.

이 3차 출동에서는 적선 약 100여 척을 격파 또는 나포하고 적 250급(級)을 참획하여 개전 이래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아군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한산도·안골포 해전으로 조선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적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할 수 있었다.

제4차 출동은 다음 8월 24일부터 9월 2일에 걸쳐서 있었다. 이순신의 연합 함대는 적선의 본거지인 부산포로 향하여 절영도(絶影島 : 지금의 부산 영도)에 이르러 적선 수 척을 파괴하였다.

이어 이순신은 왜선 470여 척이 나란히 정박하고 있는 부산포 내항으로 거북선을 앞세우고 전함대를 돌진시켜 적선을 분파하였다. 그러나 적장은 군사를 하선시키고 육지에서 총포를 난사, 종일 교전한 끝에 적선 100여 척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 함대는 적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하고 2일 여수로 돌아왔다. 그러나 본거지를 기습당한 적은 그 뒤 해전을 기피하고 육병(陸兵)으로 변화하는 이변을 가져왔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이 아끼던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의 전사를 비롯, 6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와 같이 수군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의 지휘 능력의 탁월함과 밝은 전략 전술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 전선이 일본 전선에 비하여 견고하며 화력이 우세한 데 있었다. 이순신에 의한 제해권의 장악은 의병의 활동과 함께 불리했던 전국(戰局)을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인 활력소가 되었다.

<이장희>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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