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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01 (월) 15:13
분 류 사전1
ㆍ조회: 93824      
[삼국]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1 (민족)
고구려(성립과 발전)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1

세부항목

고구려
고구려(성립과 발전) 1
고구려(성립과 발전) 2
고구려(제도)
고구려(문화)
고구려(연구사)
고구려(참고문헌)

1. 기원

[지리적 환경]

고구려의 발상지인 독로강 및 혼강 유역을 포괄한 압록강 중류 일대는 깊은 계곡과 산이 많으며, 평야는 계곡을 따라 흐르는 하천 연변에 좁게 형성되어 산재해 있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는 혼하(渾河)를 거쳐 요동 방면까지 이르고, 동으로는 독로강을 거슬러올라 개마고원을 넘어 동해안으로 빠져, 동서를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있었다.

한편 청천강 상류 지역을 거쳐 평양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고, 북으로는 혼강 상류를 거슬러 용강산맥을 넘어 송화강 유역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와 평야가 부족한 자연 조건은 뒷날 고구려의 정복 활동을 촉진하는 주요 동인의 하나가 되었다.

[나(那)집단의 성장]

청동기 시대 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은 강계군 공귀리, 시중군 심귀리, 통화현 강구촌 등지의 유적을 통해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주민들은 하천가의 평야를 바라보며 산을 등진 아늑한 곳에 마을을 형성해 살고 있었다. 농경이 주업이었으며, 가축 사육도 성했고 사냥과 어로도 많이 행하였다. 이들의 무덤양식인 적석총은 기원이 요동지역의 그것과 통하며, 토기의 형태 등으로 볼 때 송화강 상류와 중류 지역의 주민과 문화적인 친연 관계를 보인다.

환인 집안 일대에 서기전 3세기 무렵 이후부터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철제 도끼는 벌목을 쉽게 해주어 개간을 촉진했고, 낫은 수확의 효율성을 높였다. 또한 이 무렵에는 중국 군현과의 교역이 진전되었다. 무기단 적석총에서 발견된 명도전 등의 화폐는 교역의 일면을 나타내 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에 따른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외부와의 교역은 압록강 중류 지역 주민집단의 성장을 촉진하였다. 그에 따라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마을의 규모도 커지고 그들 상호간의 교류도 증진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정치적인 움직임이 태동하였다. 씨족간의, 그리고 씨족 내 친족집단들간의 우열이 현저해졌다. 나아가 유력한 친족집단을 중심으로 일정한 계곡이나 하천 유역의 촌락들을 규합하는 지역 정치집단이 형성되어 갔다. 야철지(冶鐵址)와 온돌시설을 갖춘 집자리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쇠도끼 등의 철제품이 출토된 서기전 4∼3세기에서 서기 1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시중군 노남리 남파동 제2기층과 토성리 제3기층과 같은 문화유적을 남긴 이들은 지역집단의 모체가 되는 세력이었을 것이다.

이 집단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나(那)'였다. '나'는 그 음이 '내(內)'ㆍ'노(奴)'와 통하고, '천 (川)'ㆍ'양(壤, 讓, 襄)' 등으로도 기술해, 때로는 음독하고 때로는 뜻을 새겨 읽기도 하는데, 여진어의 '納(nah, 地)', 만주어의 'na', 일본어의 'na(na-ye, 地震)' 등에 대응한다. '나(那)'는 내가[川邊]나 계곡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집단으로서, 부족이나 일부 국가 형성과정에 있던 시원적인 국가 같은 소국(小國)으로 파악된다. '나'집단은 주위의 작은 집단을 흡수해 세력을 확대했으며, 서로간의 연계를 모색해 나갔는데 그 무렵 외부로부터 자극과 압박이 가해져 왔다.

[현토군의 설치]

중국세의 동점(東漸)과 특히 서기전 2세기의 위만조선의 팽창에 따른 압박은 압록강 중류 유역의 나집단들간의 상호연합을 촉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전 128년 한나라에 투항한 예군(濊君) 남려(南閭) 휘하 28만 명의 집단은 그러한 추세를 말해준다. 이 28만 명의 집단은 강력한 조직과 결속력을 지닌 국가라기보다 각 지역의 부족과 소국들을 연결한 완만한 연맹체적인 성격의 집단으로 여겨진다. 더 이상의 통합이 진전되지 못한 상태에서, 한(漢)나라의 동방 침략에 따라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 지역에는 서기전 107년에 현토군(玄勤郡)이 설치되었다. 현토군의 군치(郡治)는 집안이고 당시의 토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석성인 국내성의 성벽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현토군은 요동(遼東)의 혼하 상류에서부터 동해안의 옥저(沃沮)에 이르는 동서 교통로를 중심으로 설치되었으며, 그 중심지가 집안 일대였다. 그런데 ≪한서 漢書≫ 지리지에서는 현토군의 인구를 4만 5,006호, 22만 1,845명으로 보았, 소속현으로 고구려ㆍ상은대(上殷臺)ㆍ서개마(西蓋馬)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토군 소속현이 셋이라는 것은 당시의 낙랑군(樂浪郡)이나 요동군과 비교해볼 때 매우 적은 수이다.

이는 곧 ≪한서≫ 지리지에 나온 현토군의 인구는 전(全) 현토군 때의 것이고, 현의 숫자는 현토군이 퇴축된 뒤 압록강 중류 방면에 있던 현 가운데 일부를 요동 방면에 옮겨 설치했을 때를 기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현토군이 설치될 당시에 이미 '고구려'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고구려족의 저항]

현토군의 설치에 따라 압록강 유역은 한나라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때 중국인과 토착민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런데 낙랑군 지역에서는 중국 방면의 유이민과 토착민으로 이루어져 연합 정권의 성격을 가진 위만조선 때와는 달리, 토착민과 한인(漢人)이 뚜렷이 구별되어 민족적 이중구조하에서 지배와 피지배 관계 나타났다.

또한 종래의 8조의 금법이 군현제가 실시되어짐에 따라 급속히 60여 조로 늘어난 데서 알 수 있듯이 급격한 사회 변화가 일어났다. 법의 급격한 증가는 토착사회에 의해 선진 중국의 문물이 수용됨에 따라 일어나는 자기 사회의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취해진 조처는 아니다.

춘추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고도로 사회 분화가 이루어졌고, 산업이 발달했던 한대의 문물과 조직이 상대적으로 소박한 단계의 사회 구조와 문화를 지녔던 동방 사회를 무력으로 침공해 일방적으로 강요됨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곧 이는 토착사회의 전통적인 사회 질서와 문화가 급속도로 와해되고 혼란에 빠졌음을 나타낸다.

이에 따라 기존 토착 사회의 정치적인 상급 통합 조직은 분해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중국 상인과 관리가 진출함에 따라 그들의 도둑질로 인심이 각박해졌다는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군현의 공적인 수취 외에도 개인간의 거래 관계에 있어서도 일방적으로 한인이 수탈적으로 상행위를 자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현토군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와 유사한 상황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 한군현의 지배는 곧 고구려족의 반발을 유도했고, 이는 군현의 폐합과 퇴축으로 나타났는데, 현토군의 경우 서기전 75년, 중심지가 흥경ㆍ노성 방면으로 옮겨졌다.

[계루부의 대두]

현토군을 몰아낸 뒤 고구려 지역은 고구려왕을 대표로 하는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연맹체 구성의 기본 단위는 나(那)였다. 압록강 중류 지역의 '나'들은 서기전 2세기 말에는 그들간에 완만한 연맹체를 형성했으며, 그 무렵 고구려라는 명칭이 존재하였다. 서기전 107년에는 한나라의 지배에 들어가 있다가 한군현의 직접적인 지배에 저항해 이를 물리친 뒤, 서기전 75년 이후 다시 연맹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뒤 연맹체 내의 주도권을 놓고 각축이 벌어졌다.

초기에는 소노집단(消奴集團)이 우세했다가 뒤에 계루집단(桂婁集團)이 점차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삼국사기≫에서 나오는, 부여에서 이주해 온 집단의 대표인 주몽(朱蒙)과 혼강 상류 비류국(沸流國)의 송양왕(松讓王) 사이에 벌어진 투쟁을 전하는 설화는 그러한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송양은 특정 개인이라기보다 소노집단의 장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계루집단의 기원에 대해 ≪삼국사기≫나 〈광개토왕비문〉 등에서 전하는 걸 보면 이 집단은 북부여(北扶餘)에서 갈라져 나왔다.

그런데 길림을 중심으로 하는 부여의 묘제는 석관묘와 토광묘였는데, 이에 반해 압록강 중류 지역의 묘제는 적석총이어서,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와 부여의 묘제가 상이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고려해 보면 만약 부여 방면에서 이주해 온 집단에 의한 정복으로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면 마땅히 석관묘나 토광묘가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이 사실은 주몽집단이 (북)부여에서 이주해 왔다는 설화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말한다.

주몽 설화는 허구이며 4세기 이후 고구려 왕실이 건국 전승을 만들면서 부여의 동명설화를 차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서는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別種), 즉 한 갈래라는 고구려의 옛 전승이 있음을 기술하였다. 이는 곧 3세기 초 이전부터 주몽설화와 같은 부류의 전승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말한다. 5세기 후반 백제가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부여에서 기원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에서 주몽 집단이 대두한 과정을 살펴보면, 이는 이주와 급속한 정복보다 선주민 집단과 융합하면서 서서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이 압록강 중류 지역에 부여의 묘제인 석관묘나 토광묘가 확인되지 않는 이유로 보인다. 즉 계루집단은 압록강 중류 지역에 정주해 기존의 '나'집단들과 큰 단절이 없이 상호 융합되어 갔고, 이어 기원 전후 무렵 연맹체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무렵 고구려의 군장이 '추(鄒)'였다고 중국측 기록에서 전해지는데, 이 사람이 주몽이었던 것 같다. 주몽설화는 서서히 진행되었던 계루부 왕실의 대두과정을 뒷날 압축해 주몽 당대에 모두 이루어진 일인 것처럼 설화화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계루부 왕실의 흥기는 늦어도 서기전 2세기 이래 압록강 중류 지역 일대에서 진행된 '나'집단들의 성장과 정치적 움직임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송양집단에서 주몽집단으로의 교체, 즉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교체는 어디까지나 연맹체장의 교체에 불과한 것이다. 고구려족 역사 전체를 볼 때 그것은 연속선상에서 파악된다. 고구려 말기에 전해지던 비기(煉記)에 고구려가 900년간 지속되었다는 설이나 문무왕이 안승(安勝)에게 내린 책봉문에서 고구려국의 수명이 800년간 지속되었다는 표현 등이 나온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계루집단이 연맹체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된 이후에도 고구려족 전체를 통합하는 강력한 국가조직은 확립되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고구려 사회가 안고 있는 공동체적 유제와 '나'집단들간의 갈등, 그 틈을 이용해 들어오는 한군현의 힘에 의해 상당 기간 저지되었다. 서기전 75년 이후 한은 고구려에 대해 직접적인 지배를 다시 도모하면 전체 고구려족의 공동전선이 형성될까 봐 간접적으로 통제하였다. 한군현은 때로는 물자나 작위(爵位)를 주고 때로는 직접적인 무력침공을 해 고구려의 내적 통합력의 성숙을 저지하고, 각 집단별로 개별적인 관계를 맺어 분열, 회유하였다.

그에 따라 현토군의 퇴축 이후에도 상당 기간 중국 군현의 영향력이 고구려 사회에 미쳤다. 서기 10년경 북방 유목종족을 공격하기 위해 왕망(王莽)이 내키지 않아하는 고구려병을 강제로 동원했던 사실은 중국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말해준다. 서기 47년 1만여 명을 이끈 잠지락(蠶支落)의 족장 대승(戴升)이 낙랑군에 투항한 사례는 한군현의 분열 정책에 따라 고구려 연맹체 내부에서 일어난 원심 분리현상의 한 예이다.

이어 1세기 후반 모본왕이 피살되는 등 고구려 내부에서는 장기간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던 같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고구려 사회 내에서는 한편으로는 외세의 작용력을 극복하고 한편으로는 '나'집단간의 통합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부체제(部體制)의 성립]

대체로 1세기 종반 2세기 초 태조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족 전체를 포괄하는 강력한 통제력을 지닌 고대 국가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는 대내적으로는 그간 진행되어 온 '나'집단들 상호간의 통합의 움직임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나'집단들은 유력한 '나'를 중심으로 서로 병탄해 나가면서, 보다 큰 단위세 력을 형성해 갔다.

계루집단에 의한 조나(藻那)ㆍ주나(朱那) 및 개마국의 병탄이나 1만여 명의 부여계 집단이 연나(椽那)로 합병된 사실들은 그러한 움직임을 나타낸다. 이들 다수의 '나'들은 점차 다섯 개의 유력한 '나'로 통합되고, 다섯의 '나'가 계루집단의 우두머리이기도 한 고구려왕을 정점으로 강력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 아래 귀속되어졌다. 이에 고구려의 5부가 확립되었다.

각 부(部)는 대내적인 자치권은 인정되었으나, 대외적인 무역권ㆍ외교권 및 전쟁권은 박탈당하였다. 나아가 각 부가 자체적으로 임명한 관인의 명단을 왕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각 부내의 동향까지 왕실에서 통제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대외적으로 중국 군현과의 교섭은 중앙정부에서만 취급해 교섭 창구를 일원화하였다. 현토군과의 경계에 세운 책구루(岫溝鷺)는 그 교역 지점이었다.

이는 곧 중국 군현의 분열ㆍ회유책을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고구려는 한군현의 간접적인 영향력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나아가 태조왕 때부터 왕의 지휘하에 중국 군현에 대한 조직적인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또한 옥저 방면 등에 대한 정복 활동이 전개되었다. 한편 1세기 후반의 정치적 혼란 상태를 극복하고 태조왕이 강력한 집권력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계루집단 내에서도 각 친족 집단들간에 격렬한 상쟁이 있었던 것 같다.

태조왕 이전의 고구려왕들의 성은 해씨(解氏)였는 데 비해, 태조왕 이후에는 고씨(高氏)라 칭하였다. 태조왕과 이전의 모본왕(慕本王)이 사촌간이라고 했지만, 태조왕의 재위기간이나 수명 등을 고려할 때 양자는 실제 계보상에서 직접적인 계승관계에 있었던 것 같지 않다. 태조왕계는 종전의 계루부 왕실의 방계 집단이거나 또는 직접적인 혈연 관계가 없는 세력으로서, 이 때 대두해 세력을 굳힌 것으로 여겨진다.

태조왕(太祖王) 또는 '국조왕(國祖王)'이라는 왕호를 칭한 것도 신흥세력으로서의 의식을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이후 태조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갔고, 그들의 계보의식 또한 태조왕을 시조로 여겼다. 이런 태조왕계와 주몽왕계를 합쳐 주몽을 시조로 하는 일원적인 왕계를 구축한 것은 4세기 후반 소수림왕대 이후였고, 그것이 〈광개토왕릉비〉에 기술된 고구려왕계이다. 그 과정에서 모본왕과 태조왕을 계보상으로 직결시키려고 한 결과 태조왕의 수명과 재위 기간이 과도하게 늘어난 것이다.

2. 발전

[중앙 집권력의 강화]

태조왕대 이후 고구려 내부의 정치적 추세는 각 부의 자치력과 상위 권력인 중앙 정부의 집권력과의 상관 관계에서 설정되었다. 그것은 대체로 부의 자치권 약화와 중앙 집권력 강화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의 상황을 전해주는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의하면, 이전의 왕실이 소속되었던 소노부가 독자적으로 종묘와 영성사직에 대한 제사를 행하였다. 이는 곧 소노부의 시조신, 지역 수호신 및 지모신(地母神)과 같은 농업신 등에 대한 제사와 의식을 자체적으로 행했음을 말한다.

당대에 있어 이러한 행사는 종교적 의미뿐 아니라 집단 내부의 여러 문제들을 조정하는 정치적 기능을 행하는 집회였다. 그리고 소속원의 일체감과 단결을 도모하는 대회로서 중요한 기능을 가졌다. 이는 소노부가 독자적인 정치 체로서의 운동력과 결집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절노부 등 다른 3부도 내부적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미 각 부의 자치권은 중앙정부에 의해, 초기에는 대외적인 외교ㆍ군사ㆍ무역권 등이, 이어 점차적으로 각 부 내부의 동향까지 통제당했다. 각 부의 대가(大加)들은 스스로 사자(使者)ㆍ조의(誓衣)ㆍ선인(仙人)과 같은 관원을 두었지만, 그 명단을 왕에게 보고해야만 하였다. 그에 따라 왕권이 대가들의 관원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같은 위계의 관원일지라도 중앙 정부의 관원과 대가들의 관원은 격을 달리하는 위계 질서가 형성되었다.

나아가 왕권이 개입해 각 부의 관원의 위계를 올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중앙 정부가 발탁해 임용하기도 해, 중앙 정부의 관계조직 체계에다가 각 부의 크고 작은 족장(加)들과 여타의 관원들을 연계시켜 부의 독자성을 해체시켜 나갔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됨에 따라 각 부의 자치력이 약화되어갔고, 그에 함께 각 부의 일부 유력자들은 중앙 정부와 연결해 그에 소속되어 점차 중앙 귀족으로 전신하게 되었다.

이런 추세에 부응해 수도 지역을 구획한 행정단위로서 방위명(方位名) 부(部)를 설치해, 계루부인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각급 족장 출신들을 소속시켰다. 구체적으로 부의 명칭은 신대왕 이전에는 고유한 명칭의 부만 보였지만, 고국천왕대부터는 방위로 표현된 부가 등장했으며, 서천왕대 이후부터는 방위명(方位名) 부만이 보이게 되었다.

이는 대체로 중앙정부와 각 부 사이의 집권력과 자치력의 상관 관계에서 집권력이 강화되어 가는 개략적인 추세를 나타낸다. 3세기 말 이후 자치력을 지닌 단위 정치체의 부는 소멸되고 행정단위이며 귀족의 편제단위이기도 한 방위명 부만이 남게 되었다.

[부자 상속제의 확립]

중앙 집권력과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왕위 계승면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고구려 초기에는 왕위가 형으로부터 아우로 계승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대무신왕 다음 동생 민중왕이 즉위했고, 이어 대무신왕의 아들인 모본왕이 즉위해 형제 계승의 일면을 보여준다. 태조왕 즉위 이후 왕위는 동생 차대왕ㆍ신대왕의 순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왕위가 형제 관계로 계승되었던 것은 왕족 내에서 적자(嫡子)와 중자(衆子), 또는 본가(本家)와 지가(支家)를 구분하는 제도와 의식이 뚜렷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왕이 생존중일 때도 왕제들은 왕위에 대한 잠재적인 권리를 보유했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공인되고 있었다. 따라서 왕제들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높았고, 왕국의 운영에 적극 개입하기도 했다. 왕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왕족 대표였을 뿐이었다. 각 부의 경우에 있어서도 동일했다. 자연히 왕국의 운영에서 왕족 출신 대가와 각 부의 대가들로 구성된 회의체가 주요한 기능을 행사하였다. 이는 곧 당시 고구려 사회에 친족 집단의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게 유지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친족 집단의 공동체적 성격은 당대의 혼인풍속에도 반영되고 있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취해 아내로 삼는 취수혼(娶嫂婚, levirate)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형이 죽은 뒤 형수를 취하는 관행은 곧 왕위를 형제가 계승하는 관행과 성격이 동일하다. 왕권이 강화되는 한편 사회가 분화됨에 따라, 왕위 계승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변화가 시도되었다. 이는 몇 차례 진통을 겪은 뒤 마침내 동천왕 이후 확립되었다. 이와 함께 왕제들의 지위는 하락하였다.

또한 왕실의 취수혼 관행은 3세기 초에 파기되었으며, 다른 대가들의 가계에서도 점차 그런 추세였다. 이는 곧 친족 집단의 공동체적 성격이 해체되어 가는 추세를 반영한다. 한편 변화를 낳은 사회 분화의 진전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몰락해 예민으로 떨어졌다. 고국천왕 때 상대적으로 한미한 집안 출신인 을파소를 국상(國相)으로 등용해 집권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때 시행되었던 '진대법(賑貸法)'은 공동체적 관계가 해체됨에 따라 증가한 가난한 농민들을 보호해 이들이 귀족의 예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고 국가의 공민(公民)으로 확보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들 공민은 곧 왕실의 강력한 집권력의 기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변화는 고대국가의 특색 중 하나였다. 이는 당대 사회의 생산 방법이기도 한 대외 전쟁을 통해 정복과 약탈 및 공납의 징수 등이 가져다주는 부의 증가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

그에 따라 5부의 대가들은 점차 정치적인 독자성을 상실하고 왕권에 크게 의존하는 중앙 귀족으로 전신해 나갔다. 그들을 편제한 형류(兄類)와, 수취와 행정을 주관했던 사자류(使者類)를 중심으로 일원적인 관등 체계가 성립되어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정비되었다.

[대외 정복 활동―초기 단계]

주변의 다른 종족들을 상대로 한 고구려의 대외적 정복 활동은 이미 서기 전후 무렵부터 전개되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자체적으로 강력한 집권력을 구축하지 못했고, 중국 군현의 압박이 가해졌기 때문에, 그것은 일시적인 성격을 띠었다. 보다 지속성적인 대외 정복 활동은 태조왕대 이후부터로, 대략 세 단계로 그 과정을 나누어볼 수 있다.

첫 단계는 태조왕대부터로, 고구려족의 통합에 따른 국력의 분출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시기 대외적 팽창은 한군현이 설치되어 있고 물산이 풍부한 비옥한 농경지대인 요동ㆍ현토ㆍ낙랑과 동해안의 옥저, 그리고 동예 방면으로 집중되었다. 이 무렵 정복한 옥저ㆍ동예ㆍ양맥(梁貊)ㆍ숙신 그리고 일부 선비족 등은 그들 재래의 읍락 단위의 질서를 유지시키고 공납을 징수하는 형태로 지배당했다. 현토ㆍ낙랑ㆍ요동 등의 한군현에 대한 공격은 기습적으로 물자와 인민을 노획하는 약탈적인 성격을 띠었다.

포로는 노예로 분배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한군현과 타협해 보상을 받고 돌려주기도 하였다. 이어 중국이 삼국으로 나누어지자 고구려는 양쯔강(揚子江) 이남의 오나라와도 통교해 보다 폭넓은 국제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활발한 대외 정복 활동이 가져다준 막대한 부는 대내적으로 집권력의 강화와 왕권의 강대화의 밑받침이 되었다. 3세기 초에는 이미 국내에 1만여 명이나 되는 소위 좌식자(坐食者)라는 지배층 전사단(戰士團)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3세기 중반 위나라 관구검(溪丘儉)의 침공을 받은 이후 대외 활동은 한동안 위축되었다.

[4세기의 대외 관계]

4세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는 크게 팽창하였다. 이는 진대법의 시행이나 각 부의 자치력 약화 등에서 보듯, 그간의 집권화와 중앙 정부의 지배 기반 확충 등에 따라 내적으로 충실해진 고구려의 국력이 5호 16국시대로 접어드는 국제적인 대 혼란을 맞아 대외적으로 발산된 것이었다. 미천왕대에 낙랑 대방군을 병합하고,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권 쟁탈을 치열하게 벌여나갔다. 요동지역의 병합은 잇달아 흥기하는 유목민족과의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가능하였다. 이 경쟁에서 고구려는 선비족(鮮卑族)의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전연(前燕)과 첨예한 대결을 벌였다.

342년 전연의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등 큰 타격을 받기도 했고, 남에서 새롭게 부상하던 백제가 북으로 팽창해 와, 371년 고국원왕이 백제군을 막다가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까지 하였다. 미천왕 이후의 일련의 팽창은 이 시기에 서와 남에서 저지되고, 도리어 타격을 입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종래와 달리 넓은 평야와 고도로 문물이 발달한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그리고 서로 투쟁하는 유목 민족이나 백제에 대처해 생존하기 위해, 새로운 수취 체계와 지배 질서의 창출이 시급하게 요청되었다.

이에 고국원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 때 일대 개혁이 시도되어 율령의 반포, 불교의 수용, 태학의 설립 등이 행하여졌다. 일정한 법체계를 형성한 율령의 반포와 태학의 설립은 관료체계 확립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보편적인 정신 세계를 탐구하는 불교의 수용은 고구려 영역 내의 잡다한 여러 족속들이 지닌 신화와 설화들을 포용하면서, 이것들을 보다 고양된 종교와 철학의 세계로 규합시켜 나갈 수 있게 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 기존의 태조왕계와 전시기의 주몽왕계를 결합해 주몽에서 비롯된 계루부 왕실의 단일 왕계 체계를 정립하였다.

그와 함께 기존의 여러 전승들을 종합하고 부여의 동명설화의 일부를 차용해, 주몽설화를 위시해 유리왕에서 대무신왕에 이르는 고구려 건국과정을 기린 전승을 정립하였다. 이를 통해 고구려가 하늘신의 자손(天孫)에 의해 건국되고 왕위가 이어졌음을 내세워, 고구려와 왕실의 신성함과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당시 대내외적인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보편성을 지닌 제도적 개혁과 새로운 종교의 수용을 단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적 결속을 강화코자 하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일련의 조처를 통해 체제 정비가 보다 견실히 진전되었다.

[독자적 세력권 구축]

이러한 토대 위에서, 광개토왕 및 장수왕 때에는 고구려의 웅비를 가져왔다. 5세기 후반 고구려의 판도는 서로는 요하선을 돌파해 요서지방을 사이에 두고 북위와 대치했으며, 남으로는 아산만과 영덕을 잇는 선까지 밀고 내려갔으며, 신라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북으로는 광개토왕대에 이미 오늘날의 길림인 북부여에 진주했고, 말갈족의 대부분을 복속시켰으며, 동으로는 오늘날의 북간도 지역에 있었던 동부여 지역을 병합하였다.

서북으로는 만주 서북지역의 유목종족인 지두우(地豆于)의 분할을 유연(柔然)과 함께 도모하는 등 흥안령 동록에까지 깊숙히 세력을 뻗쳤다. 그리고 요하 상류에 세력을 뻗쳐 거란족의 상당부분을 예하에 복속시켰다. 한편 이 시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다원적인 세력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4세기의 격렬한 상쟁과 혼돈의 시기를 벗어나, 5세기 중반 이후 국제 정세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전 시기와는 달리 어느 한 나라가 국제 정세를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상태는 아니었다. 주요 국가들간의 역관계(力關係)의 연동성(連動性)에 의해 여러 세력들이 균형적인 상태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당대의 국제 정세하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와 몽고 고원의 유연 등과 각각 관계를 맺으며, 한편으로 이들을 견제했고, 특히 국경에 접해 있던 팽창적인 북위(北魏)를 견제해, 대륙 세력들과 장기간에 걸쳐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이 무렵 고구려는 영내에 포괄된 광대한 정복 지역을 점차 크고 작은 성(城)을 기본 단위로 한 지역편제를 행해 이를 중앙 정부에 일원적으로 귀속시켜 나갔다. 지방 통치 체제의 정비와 그에 따른 지역간 교류의 증대는 자연 고구려 영역 내의 여러 종족 집단들간의 교류와 융합을 촉진하였다. 이전 시기와 달리 고구려가 대외적으로 외세의 간섭이나 침공에 따른 원심분리적인 작용력 없이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사실은 이 시기의 고구려 사회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하게 기여하였다.

아울러 그러한 대외관계에 힘입어 문화적으로도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 중앙아시아 지역과도 직접 간접의 교류를 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구려 사회의 발전에 따라 필요해진 제반 문물을 수용해, 전통적인 문화를 기반으로 이들을 복합시켜 독자적이면서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이룩해 나갔다. 오늘날 남아 전하는 고구려 벽화 고분에서 그러한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융성과 국제 사회에서의 위치는 고구려인들의 국가의식에 반영되어 호기롭게 표현되어 전해진다.

〈광개토왕릉비〉와 〈모두루묘지 牟頭婁墓誌〉에서 시조 주몽을 '천제(天帝)의 아들', '하백 (河伯:강의 신)의 손자', '해와 달의 아들'이라 표현했으며, 스스로 자국이 천하의 중심임을 자부하였다. 〈중원고구려비 中原高句麗碑〉에서도 신라를 동이(東夷)라 기술하는 등 동일한 의식을 나타냈다.

<노태돈>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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