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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9-21 (토)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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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963      
[고대/고려/조선] 한국 한문학의 전개 (민족)
한문학(한국 한문학의 사적 흐름)

세부항목

한문학
한문학(한국 한문학의 사적 흐름)
한문학(한문학 연구사)
한문학(참고문헌)

[상고시대]

문학이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있어 왔다. 생활 속에서 피어나는 이야기와 그들의 감정을 표현한 노래가 그것이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나라도 처음에는 씨족이 중요한 단위를 이루다가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서 부족 단위의 체계를 가지게 되었고, 철기시대를 맞으면서부터는 연맹국가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것이 마침내는 왕권을 확립한 고대국가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많은 이야기도 쌓이게 되고 정감이 노래로 화한 것도 많았을 것이다. 이 중에는 특히 지방 촌장이나 부족장의 이야기들이 시조설화로 남기도 하고, 제전 때 불렸던 노래가 시가로 승화하기도 하였다. 이른바 이것들이 민족의 고유소(固有素)를 간직한 값진 문학유산들이다.

그러나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강력한 왕권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선진문물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기록을 위한 문자라는 도구가 없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그들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역사를 기술하여야 하고, 비(碑)를 세워야 하고, 국제간에 외교문서가 작성되어야 하며, 군신간에 의사를 교환하자면 문자가 필요하였다. 여기에서 불가피하게 한자와 한문을 수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강력한 왕권체제의 유지를 위하여 사상적 논리체계가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전래의 무격사상(巫覡思想)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왕권을 중시한 중앙집권으로 결속하기에는 부적당한 것이었다. 이에 왕즉불(王卽佛)을 표방한 불교를 도입해서 새로운 사상체계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실은 문학세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첫째, 불교의 설화문학과 시가를 낳게 하여 문학을 한층 세련되도록 하였다. ≪삼국유사≫ 등에 나타난 설화나 향가가 그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불경 등이 주석되고 교리가 보급됨에 따라 문학사상이 심화되고 문장이 세련되어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비문 등에서 그러한 명문장을 대할 수 있다.

다음으로 한국 한문학에 변이를 가져오게 하였던 요인으로 유교의 이입을 들 수 있다. 특히 신라 중대는 유교정치사상을 표방한 시기였다. 그들의 교육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강수(强首)의 이야기에서 밝혀지는데, ≪효경 孝經≫·≪곡례 曲禮≫·≪이아 爾雅≫·≪문선 文選≫ 등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문선≫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한문학의 양식을 39가지로 질서정연하게 안배하여 후대의 문학수업에 뚜렷한 전범이 되었다.

당시의 문사들도 이 책을 통하여 한문학의 틀을 이해하고, 또 모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대의 한문학이 정제된 틀을 갖춘 문집을 생산할 만한 수준은 못 되었던 것 같다. 이는 신라 말기의 최치원(崔致遠)에서나 기대될 일이었다. 그러나 중대에 유가경전과 ≪문선≫이 존중됨으로써 비문 등에 부각된 문장의 투가 훨씬 세련되게 나타났음을 볼 수 있다.

상고시대 한문학 중에서 꽃을 피운 시기는 신라 하대였다. 그것은 왕실의 붕괴와 육두품(六頭品) 출신의 진출과 관계가 있다. 이들 육두품의 출현으로 한문학의 저변이 확대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이들 중의 상당수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기에 중국의 한문학을 빠른 속도로 수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이전에 〈여수장우중문시 與隋將于仲文詩〉나 〈태평송 太平頌〉, 그리고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 속에 4수의 시가 있지만 이들은 거의 실용성, 즉 정치적 소용에 의하여 생산된 것이 대부분이었고, 본격적인 한시의 발달은 두드러지지 못하였다.

이에 비하여 하대에 이르게 되면 오언·칠언 같은 금체시(今體詩)에까지 한시가 보편화되기에 이른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육두품 출신들이 문학활동의 주체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 중에서도 특히 최치원의 업적은 특기할 만하다. 우선 한문학양식을 고루 갖춘 ‘문집’을 최초로 출현시켰다는 점이 큰 공로로 인정된다. 그의 저작인 ≪계원필경 桂苑筆耕≫의 자서에는 ≪계원필경≫ 1부 20권, ≪중산복궤집 中山覆慣集≫ 5권,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5수 1권(五首一卷), 57언 금체시(五七言今體詩) 100수 1권(百首一卷), 잡시부 30수 1권 등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20권뿐이다. 최치원 이전까지의 한문학 유산을 정리해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삼국시대 각 국가별 한문학의 유산을 살펴보면 고구려의 경우, 한시체의 시가로 유리왕의 〈황조가 黃鳥歌〉,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가 있다.

신라의 경우는 여러 편의 향가를 제외한 한시체의 시가로 가락국의 〈구지가 龜旨歌〉와 진평왕 때의 〈비형사 鼻荊詞〉가 있고, 그 밖에 진덕여왕의 작품으로 되어 있는 〈태평송〉과 원효(元曉)의 〈몰부가 沒斧歌〉 등이 있다. 백제는 실제로 남아 있는 작품이 없고 향곡(鄕曲)으로 6편의 곡명만 전할 뿐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와서는 설요(薛瑤)의 작품이라는 〈반속요 返俗謠〉가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고, 설화계의 작품으로는 설총(薛聰)의 〈화왕계 花王戒〉가 전한다. 그리고 최치원이 남긴 많은 시편과 산문들 중에서 〈격황소서 檄黃巢書〉가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 밖에 지증왕 때의 신하인 김후직(金后稷)의 〈간렵문 諫獵文〉도 한문학의 시대현실을 잘 반영해 주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문학적인 성격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것들로서, 원효의 〈법화경종요서 法華經宗要序〉와 같은 많은 불교문자들이 생산되었고, 그와 더불어 보조선사창성탑비문(普照禪師彰聖塔碑文) 등 비문도 여러 편 남아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무렵에 정치적으로 필요했던 외교문자로 문무왕의 〈답설인귀서 答薛仁貴書〉와 같은 편지글, 통일신라 말기에 최승우(崔承祐)의 〈대견훤기고려왕서 代甄萱寄高麗王書〉도 보인다. 그런데 이 시기에 있어서 안타까운 사실은 중요한 작품들이 상당수 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 花郎世紀≫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이상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상고시대의 문학은 소·서·표·비명 등 정치현실과 결부된 글들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실용문이지 현대개념의 문학의식에서 출발한 글들은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신라 하대로 내려오면서 당나라에 유학갔던 학생들에 의하여 문학의식의 성장을 목격할 수 있는 본격적인 한시문학이 꽃피기 시작했다. 요컨대, 상고시대라는 긴 세월은 한국 한문학의 준비기라는 데 의의가 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정치사적으로 크게 4기로 나누어 특징지을 수 있다.

제1기는 현종대까지 약 120년간이다. 이 기간의 정치담당층은 신라 말기의 육두품 출신과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지방호족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체제를 보면, 건국 초기에는 호족연합정권 성격이 짙었으나, 광종과 성종을 고비로 중앙집권체제로 개혁이 적극 추진되어 현종 때 마무리되었다.

이 동안에 여러 가지 소용돌이가 있었지만 이 중에서도 인재등용방식인 과거제도의 추진과 학교의 설립 등이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더구나 고려 한문학의 융성이라는 측면에서 고무적인 시기였다고 할 것이다.

제2기는 무신정권이 설 때까지의 70년간으로 이 시기는 비교적 화평했을 뿐만 아니라 역대의 왕들이 직접 문학에 참여하고 문사들을 애호했던 관계로 문운(文運)이 크게 융성했던 시기였다.

제3기는 권신과 무신이 권력을 독점했던 약 150년간이다. 더구나 외침과 내란으로 국정에 소요가 가장 많았고, 문사들이 호된 시련을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인들의 횡포로 많은 문사들이 죽고 수난을 당한 것은 사실이나, 살아남은 문인들은 색다른 현실체험을 할 수 있었고, 또 산간에 묻혀 문학에만 전념할 수 있었으므로 전대에 볼 수 없었던 밀도 있는 작품들이 생산되었다. 그와 더불어 문학양식의 측면에서도 다채로운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제4기는 무신정권이 끝나고 난 뒤 약 1세기 동안을 지칭한다. 이때는 이미 국기(國紀)가 해이해지고 원나라의 노골적인 간섭으로 자주성이 상실되어 가던 때였다. 그러나 고려 말엽에 오게 되면 성리학의 수입에 따른 신진사대부 계층이 출현하여 새로운 내용의 한문학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끝내 고려는 멸망하고 말지만 성리학을 토대로 한 학풍의 진작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개화, 결실할 수 있도록 바탕을 구축했던 것이다.

그러면 위에서 언급한 개괄적인 논의를 염두에 두면서 그 동안 어떤 문사들이 어떠한 작품을 남겼는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사≫ 홍유조(洪儒條)를 보면 홍유의 수는 480명에 달하는데, 이들이 고려사회를 지도해 나갔던 계층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작품을 남긴 문장가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자료가 불완전하지만 현존하는 자료를 통하여 검토해 보면 몇 편의 작품을 썼던 사람까지 합쳐 보아야 190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

최해(崔瀣)의 〈동인문서 東人文序〉와 최자(崔滋)의 〈보한집서 補閑集序〉, 그리고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 東人詩話≫·≪동문선≫ 등에 열거된 인물들은 대개가 문사이거나 승려들이 중심이 된다.

이 시기에 생산된 문집의 실상을 살펴볼 때, 비교적 문집 본래의 체재와 내용을 온전히 갖춘 것으로는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과 이곡(李穀)의 ≪가정집 稼亭集≫, 그리고 이제현(李齊賢)의 ≪익재집 益齋集≫ 정도이다.

그리고 문집의 형태로 현재 전해오는 것들은 조선시대에 후손들에 의하여 수집, 정리되어 단편적으로 구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들은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편집, 간행한 ≪고려명현집 高麗名賢集≫에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문집의 이름만 전할 뿐 누대에 걸친 전란으로 소실되거나 인멸된 것들도 수십 종에 이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김극기(金克己)의 ≪김거사집 金居士集≫과 이인로의 ≪쌍명재집 雙明齋集≫이다.

이와 같은 문집들의 서문이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어 그 체재와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고려는 호국불교가 성행되던 시기였으므로 고승들의 문집 간행도 있었을 것이나, 현전하는 것은 의천(義天)의 ≪대각국사문집 大覺國師文集≫과 같은 몇 종뿐이다.

다음으로 고려시대 문학이 가지는 배경적 특성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풍(文風)이다. 고려 건국의 성격이 지방의 호족과 신라 육두품 계열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신라의 제도를 당분간 그대로 수용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신라 말기의 문사들도 그대로 창작활동을 지속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들 문사들도 만당시대(晩唐時代)의 유학생들이었으므로 만당의 문풍에 영향받아 그것을 재현하게 된다. 시풍이 그렇고 문체에 있어서도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 그렇다. 적어도 광종 이후까지는 이 문풍이 지속된 듯하다. 그러다가 당송풍이 중기를 넘어서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소동파(蘇東坡)를 추종하는 열기는 대단하였다.

둘째, 과거식문(科擧式文)과 순문학의 관계이다. 광종대에 인재등용방식으로 실시된 과거제도에는 명경과와 진사과가 있었다. 전자는 ≪역≫·≪서≫·≪시≫·≪춘추≫라는 경서로써 시취(試取)하였고, 후자는 의(疑)·의(義)·시·부·표·책·논·잠·명·송 등 전통적인 한문학 양식으로 시취하였다. 이 중에서도 진사과에 많은 비중이 주어지자, 종래의 ≪문선≫ 중심의 문학경향을 탈피한 창작문학이 발달되어 많은 문사들을 배출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폐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식의 문장이란 개성이 발현된 순문학이 아니고 시인 경우에는 공령시(功令詩)요, 산문인 경우에는 과문육체(科文六體)라 하여 일정한 공식에 고사를 대입하는 등의 형식놀음이었다. 그래서 ‘배우지설(俳優之說)’이라 하여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활 방편으로 과거에 응시는 하였지만 종국에 가서는 그러한 경지를 탈피하여 순문학으로 복귀하는 것이 고려 문사들의 기본태도였다. 이는 그들이 불후의 문학이야말로 돈이나 벼슬을 능가하는 것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중기 이후의 문사들은 개성적인 문학세계를 개척하여 한문학의 깊이를 한층 심화시켜 갔던 것이다.

셋째, 새로운 문학양식을 들 수 있다. 최치원의 문집에서 이미 다채로운 문학양식이 안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지만, 고려에 와서 사(辭)·부(賦)와 비평양식이 등장하고 설화문학이 전개되며 가전체문학(假傳體文學)이 창작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사·부는 과거시험에 부과되었던 관계로 그 발달이 촉진되었다 할 것이다.

김부식의 〈아계부 啞鷄賦〉·〈중니봉부 仲尼鳳賦〉, 이규보의 〈몽비부 蒙悲賦〉·〈방선부 放蟬賦〉·〈조강부 祖江賦〉, 그리고 이인로의 〈옥당백부 玉堂栢賦〉·〈홍도정부 紅桃井賦〉, 최자의 〈삼도부 三都賦〉, 이색(李穡)의 〈관어대소부 觀魚臺小賦〉 등을 손꼽을 수 있다.

다음은 비평의 등장이다. 이규보의 ≪백운소설 白雲小說≫, 이인로의 ≪파한집 破閑集≫, 최자의 ≪보한집 補閑集≫, 이제현의 ≪역옹패설 饑翁稗說≫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송대의 비평방식을 도입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 시란 무엇이냐 하는 새로운 문제의식에서 빚어진 것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본격적인 비평문학으로 볼 수 있는 점보다는 시화나 잡록의 성격을 짙게 풍기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제시했던 저서들은 모두 시를 문제의 대상으로 다룸으로써 한국비평문학을 열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다음은 설화문학과 가전체를 들 수 있다.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사전류(史傳類)에 드는 양식들이다. 사전에 대한 의식은 이미 삼국시대에도 있었지만 이를 좀더 구체화해서 ≪삼국사기≫가 나오고 ≪삼국유사≫가 나온 것은 한국문학사상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가전체의 출현은 기교나 의인적 수법의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해 주었다.

넷째, 문학사상적인 측면에서의 불교와 유교의 심화를 들 수 있다. 먼저 불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의천·원감(圓鑑)·나옹(懶翁)·보우(普雨) 외 수많은 시승(詩僧)들의 배출도 괄목할 만한 것이지만, 지눌(知訥)·혜심(慧諶)·나옹·보우 등으로 이어지는 선종(禪宗)의 심법(心法)은 고려문학사상을 깊이 있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유교의 경우도 재도적(載道的) 문학의 태동을 보게 하였고, 유가 경전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나 이야기들이 문학의 기층에까지 파고들어와 내용이 더욱 깊이를 가지게 하였다. 특히, 고려 말에 대두된 성리학은 후대의 도학적 문학세계를 형성하는 데 근간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고려기는 충실하게 한문학의 골격을 정비하고 그 기초를 다지고 익혀서 기틀을 완성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신라의 국가체제는 골품제로, 고려는 귀족국가로 각기 특징지을 수 있다면 조선은 양반관료국가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의 통치체제는 15세기에 일단 완성되고 16, 17세기에 이르게 되면 붕당(朋黨) 또는 공론정치로 발전하게 된다.

다시 18세기에 오면 억눌려 왔던 민중들의 의식이 고양됨으로써 양반관료체제는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어서 서구문물이 유입됨에 따라 19세기에는 이른바 근대화라는 복잡한 물결 속에 빠져 들어가게 되어 한문학이 퇴색일로를 걷게 된다. 이렇게 500년 세월 동안 발전해 온 한문학을 몇 단계로 구분하여 그 개략적인 특징들을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 건국 초에서부터 15세기까지는 조선시대 한문학의 정비기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정치가 주자학을 이념체계의 핵심으로 하여 체제정비를 논리화했던 것처럼, 문학도 재도지문(載道之文)으로써 이론적 체계를 수립한 것이다.

둘째, 16세기는 붕당정치가 발전하던 시기로 사화(士禍)와 같은 몇 차례의 파국을 경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선비들은 산림 속으로 은거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어 학문의 취향도 사변적이요 형이상학적인 방향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문학 역시 심성 도야나 법자연(法自然)의 경지를 서정화한 내용들이 많아진다.

셋째, 17세기로 접어들면 16세기의 관념적 문학세계가 비판되고 자아의 각성과 실증성이 고조되어 정감적이고도 개성적인 문학관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을 겪고 난 뒤의 자성론(自省論)의 문학적 발로라 하겠다.

넷째, 18, 19세기는 17세기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현실인식이 보다 강화되고 있다. 이른바 실학운동이 그것이다. 종래의 학문체계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현실을 고발하며 사소한 사물에서까지도 이용후생을 도모했다.

이러한 사상은 다시 근대를 지향하면서 발전해 갔지만 결국은 국권의 상실과 함께 한문학의 운명도 다하게 되고 서구문학의 이입에 따라 주도적 자리를 그에게 넘겨주고 만다.

이와 같은 큰 흐름을 겪으면서 5세기에 걸친 조선시대의 한문학은 그 어느 시대에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많은 문학유산을 남기게 되었다. 현재 각종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의 수가 1만8000여 종에 이르고 있는데, 앞에서 언급한 삼국·고려의 미미한 저작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조선시대에 양산된 것이다. 조선시대 한문학의 발달배경이나 성격 등에 관하여 간략하게 언급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풍(詩風)이다. 흔히 당시풍(唐詩風)이니 송시풍(宋詩風)이니 하여 시풍을 논하는 것이 당대의 경향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시대별로 구획해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같은 시대라 할지라도 작자의 기호에 따라서 취향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작이란 그 사람의 재능이나 영감에 따라서 우열이 결정되는 것이지 어느 시풍을 따르고 있느냐가 평가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시대풍조는 대체로 고려 중기에서 조선시대 선조대까지는 송풍이 유행했다고 하면, 그 뒤부터는 성당(盛唐)의 두보(杜甫)나 이백(李白)의 시풍이 우세하였다 할 수 있다.

선조 때의 문신인 심수경(沈守慶)도 ≪견한잡록 遣閑雜錄≫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선비로서 옛시를 공부하는 자들이 모두 한퇴지(韓退之)와 소동파를 읽었다. 그러던 것이 근년에는 선비들이 한·소는 격이 낮다고 읽지 않고 이백과 두보의 것을 취하여 읽는다.”라고 한 것이 있다.

이는 선조대에 시풍이 바뀌어 가고 있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송시풍으로 가장 명성이 높았던 시인으로는 성종·명종 연간의 박은(朴誾)·이행(李荇)·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박상(朴祥)·신광한(申光漢)·성현(成俔)·황정욱(黃廷彧)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선조 이후에 성당시법으로 이름난 사람으로는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백광훈(白光勳)으로, 이들을 세칭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한다.

둘째, 문학사상의 배경으로서 유교와 불교와의 관계이다. 조선조의 정치이념은 유교를 표방했기에 문학도 유교를 기반으로 발전해 갔던 점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불교의 배척을 위한 이론이 정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정도전(鄭道傳)의 〈불씨잡변 佛氏雜辨〉과 〈심기리편 心氣理篇〉이 그것인데, 이는 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신숙주(申叔舟)·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김수온(金守溫)·강희맹(姜希孟) 등의 합세로 더욱 강조되어 유교적 문학론을 체계화하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즉, 삼재론적(三才論的)인 체계 속에서 문학을 관도(貫道) 내지 재도적(載道的) 측면에서 이해하도록 하는 이론이었다.

이에 맞서서 기화(己和)는 ≪현정론 顯正論≫을 저술하여 유가들의 편견을 공박하고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하지만 유교가 시대의 한 큰 흐름이고 보면 조선시대 500년은 그 흐름이 주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분명한 것은 비록 〈불씨잡변〉이라 하더라도 불교의 근본까지는 비판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정도전이나 기화의 이론에서 상통하는 것은 불교든 유교든 그 근본은 일치한다는 견해인 것이다. 다만 그것의 형이하학적 측면이나 운영의 측면에서 공박이 오간 것뿐이다. 따라서 불교와 유교는 끝까지 그 뿌리만은 건재할 수 있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기에 유교나 불교의 조화론은 끈질기게 이어졌고, 작품세계 안에서도 그러한 요소들이 자주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유불도의 합일론’은 유명한 것이지만, 묵암(默菴)·연담(蓮潭)·인악(仁岳)·침굉(枕肱) 등의 명승들은 오히려 허심탄회하게 유교까지 연구하였고, 거꾸로 노수신은 거유(巨儒)이면서도 ‘유불양교의 이동설(異同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요컨대, 표면상의 물결과는 달리 우리 나라 사상이나 문학세계의 근저에는 어쩔 수 없이 유불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밖에 노장사상(老莊思想)이 문학세계에 끼친 영향도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동양의 대자연의식(對自然意識) 안에는 항상 노장적인 무위사상(無爲思想)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산수자연을 노래한 허다한 시가들에서 이러한 자연관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도학(道學)과 사장(詞章) 간의 문제이다. 도학과 사장의 대립과 논쟁은 고려시대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나,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고려 말기의 정권교체를 둘러싼 의견대립과정이 그 연원이 된다.

즉, 안유(安裕)를 시작으로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등이 도학 쪽에 속한다면, 이색·이숭인(李崇仁)·권근 등은 사장 쪽에 가깝다. 양쪽 다 유가선비들인 점은 사실이나 문학을 경시하느냐 옹호하느냐 하는 차이에서 그렇게 불리고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유가들은 대체로 문학을 옹호한 쪽에 속했기 때문에 재도를 바탕으로 한 문학론이 성립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종대에 이르러 도학과 사장이 서로 충돌하게 되는데, 그 진원은 김종직(金宗直)의 문도(門徒)에서 찾을 수 있다. 이학(理學)을 주로 공부했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과 사장을 주로 하였던 김일손(金馹孫)·남곤(南袞)·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 등의 대립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때만 하여도 사장 쪽이 우세하였다. 그러다가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趙光祖)가 등장하면서 양자간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수차례에 걸친 사화의 결과 선비들이 상당수 희생되고 사회의 기강이 크게 흔들리게 되자 중종은 성리학의 진흥을 통하여 사회질서를 확립하려 하였다. 이에 사장을 억누르고 경학을 존중하게 되자 재야에 있는 도학자를 중용하기에 이른다.

이때 조광조가 등용되어 중종의 의도대로 치군택민(治君澤民)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천하기 위하여 사장학을 배격하기를, 사장은 위학(僞學)이요 사장을 하는 사람은 부화경박(浮華輕薄)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윽고 왕에게까지 시부를 짓지 말도록 하고, 신하들이 시를 지어 올리는 것조차 금하게 하였다. 여기에 동조한 인물들이 바로 김정국(金正國)·김정(金淨)·김구(金絿)·윤자임(尹自任) 등이다.

이와 같은 도학파들의 움직임은 기존의 사장파들에게 커다란 위협을 느끼게 하였고 급기야는 남곤 일파가 반기를 들고 나서게 되니, 그 반론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사대교린(事大交隣)에 시가 절대 필요하다는 실용성, 둘째 사장과 경학은 하나이니 둘 중에서 하나를 편벽되게 폐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조광조의 강경론에 비해서는 다소 온건한 논조이다.

유학은 범할 수 없는 정치이념이자 당시 식자 계층으로서는 부동의 문학사상의 배경이었으며, 또 조광조가 시부 폐지를 주장했다고 해서 쉽사리 시부가 자취를 감출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성리학의 수준향상으로 인하여 시의 세계가 더 각성된 모습을 띨 수 있었고 심화된 내용의 시가 나타날 수 있었다. 도학 계열의 시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넷째, 산림문학(山林文學)과 사실주의문학을 거론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이나 유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문학에도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즉, 관념론적 사유에 바탕을 둔 것과 경국(經國)에 바탕을 두는 것이 그것이다.

16세기 성리학자로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은 서로간에 다소의 차이는 발견되지만 모두가 사변적인 관념시를 쓴 것은 동일하다. 이러한 종류의 시들은 한없이 깊고 본원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이에 비해서 사회현실을 중시하여 사실주의적 경향에 가까운 시를 쓴 사람도 있게 되었으니, 그 좋은 예로 실학시대 인물 중의 하나인 정약용(丁若鏞) 같은 이를 들 수 있다.

물론 두 유형을 두고 우열을 논할 수 없으나 사변적인 시가 깊이를 다져 준다면, 사실주의적인 시는 그 폭을 확장시켜 준다는 데 각기 장점이 있다. 결국 인류문화란 사유의 깊이와 현실인식의 폭, 이 양자가 조화되어 발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서경덕 계열의 시인이 없어서도 안되고 정약용 계열의 시인 역시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섯째, 문학양식의 발전이 어떠했는가 하는 점이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모든 문학이 발전한다는 것은 정한 이치이겠지만, 조선시대 한문학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설의 출현과 비평 및 악부의 발달이다.

먼저 소설은 종래 한문문집에서 보인 전지류와 역사서에서 나타나는 열전과 확연한 구분을 짓기가 매우 어렵다. 다만 소설은 전지류나 열전에 비하여 부연과 과장과 웃음이 동원되어 이야기로서의 흥미가 한층 고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작자의 상상력이 동원되어 다소간의 허구성과 결구를 맺는 특이한 기법 등이 가미되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작품을 예로 들자면, 우선 조선 초기에 양산되고 있는 골계류(滑稽類)의 재미있는 이야기로서, 강희안(姜希顔)의 ≪촌담해이 村談解蓬≫와 서거정의 ≪골계전 滑稽傳≫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서사적 결구를 갖추고 있는 초기적 작품으로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 金鰲新話≫가 있다.

몽유록(夢遊錄) 계열의 작품으로 심의(沈義)의 〈대관재몽유록 大觀齋夢遊錄〉과 임제(林悌)의 〈원생몽유록 元生夢遊錄〉이 있다. 또한, 임제의 작품으로 의인화 수법이 사용된 〈화사 花史〉와 〈수성지 愁城誌〉가 있으니 고려시대의 가전체문학이 여기서 다시 재현되고 있음을 본다.

중기에 오게 되면 대부분 전(傳) 계열의 한문소설이 생산되고 있는바, 허균(許筠)의 〈남궁선생전 南宮先生傳〉을 비롯, 몇 편의 전이 있고, 그 밖에 정태제(鄭泰齊)의 〈천군연의 天君衍義〉와 조성기(趙聖期)의 〈창선감의록 彰善感義錄〉 등도 유교적 교훈을 바탕으로 창작된 중요한 작품들이다.

그러다가 후기에 이르게 되면 실학의 거목인 박지원(朴趾源)에 의해 새로운 차원의 한문소설이 창작된다. 그는 〈허생전 許生傳〉·〈양반전 兩班傳〉 등과 같은 조선 후기의 세태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해 내고 있다.

다음은 비평 분야이다. 한문학 양식 중에서 자유로운 형식의 하나가 바로 비평 혹은 만록(漫錄)이다. 이것은 까다로운 격식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역사서술의 규범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즉, 무형식을 요구하는 형식이라 하겠으니, 고려 중기나 말기에도 몇몇 문인들에 의하여 관심표명이 있었지만 조선시대에 보는 것과 같이 활발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문학비평만을 전문적으로 다룬 것도 있으며, 그 밖의 견문을 붓 가는 대로 담아낸 이른바 만록류도 있다. 만록류에는 문학비평이나 인물비평 혹은 역사비평 등이 혼합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 중요한 저작들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초기의 비평은 서거정의 ≪동인시화≫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으니, 이는 곧 전조(前朝)의 문학유산에 대한 비평을 주로 하고 있는 순수비평서라 할 수 있다. 중기에는 허균의 ≪성수시화 惺馬詩話≫가, 그리고 후기에는 홍만종(洪萬宗)의 ≪소화시평 小華詩評≫이 각각 제대로 정리된 비평서라 하겠다.

그리고 만록 내지는 잡기류의 저작으로 ≪대동야승 大東野乘≫이나 ≪패림 稗林≫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수십 종을 헤아린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초기에는 서거정의 ≪필원잡기 筆苑雜記≫나 성현의 ≪용재총화 弁齋叢話≫가 있고, 중기에는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 松溪漫錄≫과 그보다 조금 뒤에 나온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 西浦漫筆≫ 등이 있으며, 후기에서 한말에 걸쳐 상당한 수효의 만록·잡기류가 계속 쓰여졌으니 황현(黃玹)의 ≪매천야록 梅泉野錄≫을 손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밖에도 백과전서적인 저서들도 많이 나와 문학과 관계되는 것을 포함하여 사회 전반의 문제를 정리해 놓고 있다. 이수광(李邈光)의 ≪지봉유설 芝峰類說≫이나 이익(李瀷)의 ≪성호사설 星湖僿說≫이 이에 해당된다.

또한 만록이나 잡기류와 그 성격이 꼭 일치하지는 않지만 수필문학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 견문록과 같은 기행문도 소홀히 다룰 수 없다. 중국이나 일본에 외교사절을 수행하고 돌아온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글 중에는 문학적으로 우수한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해행총재 海行摠載≫나 ≪연행록선집 燕行錄選集≫ 등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은 악부의 발달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악부가 크게 발달하지 못하다가 후기에 와서 얼마간의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이제현이 속가(俗歌)를 칠언으로 한역하여 소악부(小樂府)라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해동악부(海東樂府)라는 명칭까지 출현하면서 우리의 역사와 풍습을 담은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김종직의 〈동도악부 東都樂府〉, 심광세(沈光世)의 〈해동악부〉, 이익의 〈성호악부 星湖樂府〉, 정약용의 〈탐진악부 耽津樂府〉, 이학규(李學逵)의 〈영남악부 嶺南樂府〉, 그리고 김려(金錤)의 〈사유악부 思蓬樂府〉등이 있다. 이러한 악부들은 일반적인 한시가 개인의 서정세계를 추구하는 데 비해 우리 나라의 역사·풍물 등 한국적 정서를 노래한 점에 가치가 있다.

<최신호>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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