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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18 (목)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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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905      
[삼국] 삼국 시대의 불교 (민족)
불교(우리나라 불교:삼국시대의 불교)

세부항목

불교
불교(인도불교)
불교(중국불교)
불교(우리나라 불교:삼국시대의 불교)
불교(우리나라 불교:통일신라의 불교)
불교(우리나라 불교:고려시대의 불교)
불교(우리나라 불교:조선시대의 불교 1)
불교(우리나라 불교:조선시대의 불교 2)
불교(우리나라 불교:근대의 불교)
불교(우리나라 불교:현대의 불교)
불교(참고문헌)

우리 나라의 불교는 인도나 중국 불교의 단순한 연장이나 퇴화가 아니다. 삼국 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육로 또는 해로를 통해서 만주 대륙과 한반도 등의 우리 민족 문화권에로 동류(東流)한 뒤, 우리 나라의 지역과 풍토 및 민족성 안에서 독특하게 전개되었다.

1. 전래

삼국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이다. 372년(소수림왕 2) 여름인 6월,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은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하였다. 이에 소수림왕은 사신을 보내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순도로 하여금 왕자를 가르치게 하였다. 2년 뒤인 374년에는 진나라의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로 왔다. 소수림왕은 그 이듬해 봄에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세우고 순도와 아도를 각각 그 절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 두 절은 우리 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절이다.

고구려에서 처음 받아들인 불교는 '인과적(因果的) 교리로서의 불교' 또는 '구복(求福)으로서의 불교'라 하는데, 이는 재래의 토속신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삼국 중에서 고구려가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여 새로운 관념형태를 형성함으로써, 삼국 중 가장 먼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형성의 기틀을 잡게 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391년(고국양왕 8)에는 영을 내려서 불교를 숭신(崇信)하여 구복하게 함으로써 불교를 더욱 장려하였다.

백제에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384년(침류왕 1)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晉)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서 서울인 광주(廣州)의 남한산으로 들어오자 왕은 그를 궁 안에 머물도록 하였고, 그 이듬해 10명의 백제인을 출가시켜 승려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뒤 160여 년이 경과한 성왕 때까지는 불교관계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다가, 526년(성왕 4)에 인도로부터 귀국한 겸익(謙益)을 맞이함으로써 크게 발전을 보았다.

신라의 불교 수용은 순탄하지 않았다. 신라가 고구려의 세력을 배경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로부터 묵호자(墨胡子)가 신라의 서북경지방인 일선군(一善郡:善山)에 들어와 모례(毛禮)의 집에 기숙하면서 불법을 전하였으며, 모례는 신라인으로서 최초의 신도가 되었다. 그때 중국의 사신이 향(香)을 가지고 왔으므로 묵호자가 나아가 분향예불(焚香禮佛)하는 법을 가르치고 공주의 병을 완쾌시킴으로써 신라왕실에서도 불교를 알게 되었으나 별로 신도를 얻지 못하였다.

그 뒤 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에서 아도(阿道)가 들어와서 불법을 전도한 뒤로는 신봉하는 자가 늘어났다. 신라에 왔던 아도는 고구려에 왔던 중국승 아도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아도라는 이름은 머리가 없는 자라는 뜻으로 삭발승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보고 있다. 그 뒤에도 신라왕실은 불교공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씨족중심 귀족들의 끊임없는 반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씨족적 기반을 억누르고 중앙 집권적 국가를 확립하고자 했던 왕실파(王室派)들은 법흥왕 중심으로 불교를 새 지배체제의 구축을 위한 정신적 지주로 삼아서, 왕법(王法)과 불법(佛法)을 동일시하고 부처의 위력을 왕의 위력으로 대치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520년(법흥왕 7)에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조직에 관한 정비를 일단락 지은 법흥왕은 527년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배불파(排佛派)를 제압하고 불교공인을 선포하였으며, 529년에는 영을 내려 살생을 금하도록 하였다.

이차돈이 순교한 지 7년 뒤에는 그가 절을 만들고자 했던 천경림(天鏡林)에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興輪寺)를 창건하였고, 법흥왕은 왕위를 진흥왕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승려가 되어 법공(法空)이라고 불렀다. 이때의 불교는 '선행수복(善行受福)으로서의 불교', '인과적 교리로서의 불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고구려의 경우처럼 토속신앙과 자연스럽게 혼합되었다.

2. 삼국 시대

[고구려의 불교]

(1) 전개

고국양왕이 불교를 신봉하라는 영을 내린 이듬해인 392년(광개토왕 2)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였고, 395년에는 진나라 승려 담시(曇始)가 교화를 위해 고구려로 왔다. 담시는 불교의 교리연구 및 설법의 이해에 필요한 경률(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왔고, 수계(授戒)를 베풀어 불제자가 되는 길을 트이게 함으로써 불교역사상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맞게 하였다.

498년(문자왕 7)에는 대동강변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으며, 576년(평원왕 18)에는 의연(義淵)을 중국 북제로 보내어 정국사(定國寺)의 법상(法上)에게 불기(佛紀) 및 중국의 불교전래 등 불교의 역사전개와 교학(敎學)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배우게 하였다. 그는 대승론서(大乘論書)의 저자 및 저술 연기(緣起), 그 저술이 갖는 영험 등에 관한 것을 자세히 배워가지고 돌아왔는데, 그가 관심을 가지고 새로 가져온 경론(經論)들은 후일에 신라의 학승들이 철학의 전거로 삼아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구려의 불교도 27대 영류왕 때에 들어온 도교의 득세로 말미암아 점차 빛을 잃고 말았다. 도교는 624년(영류왕 7)에 들어왔으며, 643년(보장왕 2)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당나라로부터 숙달(叔達) 등 8명의 도사와 ≪노자도덕경 老子道德經≫을 받아들인 뒤부터는 불교를 박대하였다. 사찰을 몰수하여 도관(道館)으로 삼았고 그때까지 불교인을 대우하던 자리에 도교인을 앉히는 등 불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하였다.

이 갑작스러운 변동에 불교인들 중에는 견디다 못해 외국으로 망명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특히 보덕(普德)은 이를 고구려 멸망의 징조로 여기고 여러 차례 조정에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당시 백제 땅인 완산주(完山州:全州)의 고대산(孤大山, 高達山)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그 뒤 고구려는 곧 멸망하게 되었다.

(2) 구법(求法) 및 전교활동

고구려의 승려가 외국으로 나가서 불교문화활동을 한 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중국으로 가서 구법활동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에서의 전교활동(傳敎活動)이다.

중국으로 가서 법을 구한 승려는 의연을 비롯하여 몇 명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고구려의 고승이었던 승랑(僧朗)은 장수왕 말년경에 중국으로 가서 삼론학(三論學)을 공부한 뒤 중국 삼론종의 종주(宗主)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삼론(新三論)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여 확립시켰다.

삼론종은 ≪중론 中論≫ㆍ≪십이문론 十二門論≫ㆍ≪광백론 廣百論≫의 삼론에 의거하여 반야중도사상(般若中道思想)을 강조한 종파로서, 승랑 이전까지는 삼론과 ≪성실론 成實論≫을 함께 취급하여 학적인 분리 및 연구가 없었으나, 승랑이 ≪성실론≫을 삼론과 완전히 분리시키고 새로운 학적 체계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중국인을 가르친 승랑이 중국불교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이 밖에도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서 유명한 수나라의 지의에게서 공부한 뒤 그곳에서 영이(靈異)와 기서(奇瑞)를 보이다가 세상을 떠난 파야(波若)와 중국승려인 스승과 함께 인도로 갔던 현유(玄遊)는 사자국(獅子國:스리랑카)에까지 가서 살았다고 전한다. 6세기 중엽 이래로 고구려의 왕실과 조정이 불교를 등한히하고 박해하는 태도를 노골화하자 많은 승려들은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일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던 고구려에서 그 뿌리를 제대로 펴지 못한 채, 거기서 길러진 고승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다른 나라에서 그 뜻을 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양원왕 때에 신라로 온 혜량(惠亮)은 찬란한 신라불교의 밑거름 구실을 하였다. 일본 포교에 힘쓴 고구려 승려들로서는 혜편(惠便)ㆍ혜자(惠慈)ㆍ승륭(僧隆)ㆍ담징(曇徵)ㆍ혜관(慧灌)ㆍ도등(道登)ㆍ도현(道顯) 등이 있다. 혜편은 584년에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의 요청으로 시바다쓰(司馬達)의 딸인 선신(善信)과 선장(禪藏)ㆍ혜선(慧善)을 가르쳐 출가시킴으로써 일본 귀족들의 존숭을 받았다. 그가 일본 최초의 비구니를 탄생시킨 것이다.

혜자는 595년 고구려의 승려로서 일본에 귀화하여 불교를 크게 진흥한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으며, 백제의 승려 혜종과 더불어 호코사(法興寺)를 창건하였다. 이 절은 뒤에 계속 많이 건너온 고구려와 백제 승려들의 거처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을 불교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또 담징은 유교의 오경(五經)에 통달해 있었을 뿐 아니라 공예ㆍ채색ㆍ지묵(紙墨)에도 능하여 일본미술사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혜관은 쇼토쿠태자가 창건한 강코사(元興寺)에 머물면서 반야중도사상을 천명하고 삼론(三論)을 강의하여 심오한 불교철학을 일본에 심어준 승려이다.

일본의 사서(史書)에는 큰 가뭄을 맞았을 때 혜관이 기우(祈雨)를 하여 큰비를 내리게 한 공로로 승정(僧正)에 뽑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등 역시 삼론종의 승려로서 일찍이 당나라로 들어가 길장(吉藏)으로부터 삼론의 뜻을 배운 뒤 일본으로 건너가서 우지강(宇治川)에 큰 다리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다리로서가 아니라 중생을 피안으로 건네준다는 종교적 의미로 일본 왕의 고사(古史)에는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말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도현은 칙명으로 다이안사(大安寺)에 머물면서 불법을 펴는 한편, ≪일본세기 日本世記≫ 등 몇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이 밖에도 적지 않은 승려들이 일본에 가서 활약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유학승을 보내어 고구려의 불교문화를 배워갔다.

[백제의 불교]

(1) 전개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150년 동안의 불교사 변천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뒤 526년(성왕 4)에 겸익(謙益)이 인도에 갔다가 돌아와서 율종(律宗)을 시작하였다. 겸익은 인도의 상가나사(常伽那寺)에서 범어(梵語)를 배우고 특히 율부(律部)를 전공한 뒤 인도승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범문(梵文)으로 된 율문(律文)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번역하여 72권으로 엮었으며,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은 그 율에 대한 소(疏) 36권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이는 인도로부터 직접 가지고 온 원전을 백제인의 손으로 번역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 있는 일이었으며, 백제불교가 계율주의적 경향을 띠게 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또한 541년(성왕 19)에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열반경≫ 등 경의 뜻을 풀이한 의소(義疏)와 공장(工匠)ㆍ화사(怜師) 등 불교문화와 관련된 인물들을 청하여왔다. 552년(성왕 30)에는 불교를 일본에 전하였는데 그 뒤 많은 승려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불교포교 및 예술의 발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599년(법왕 1)에는 왕이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려 민가에서 기르는 조류(鳥類)까지 놓아주게 하였고 수렵도구는 모두 불태우게 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승려 30명을 배출시켰으며 왕흥사(王興寺)라는 큰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법왕이 죽자, 아들 무왕이 즉위한 지 35년 만에 선왕의 뜻을 이어 완공하였다. 물가에 세워진 이 절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하며,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이곳에서 놀기를 즐겼다고 한다.

또한 무왕 때에는 익산에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였다. 무왕이 그의 비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용화산(龍華山)으로 가는 도중에 못 속에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왕비의 발원에 의하여 그 못자리에 이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지금도 그 절터에는 우리 나라 최대의 석탑이 남아 있어 당시의 웅대했던 모습을 알 수 있다. 무왕 때의 고승으로는 지금의 충청남도 수덕사(修德寺)에서 ≪법화경≫을 독송하면서 삼론(三論)을 연구했던 혜현(惠現) 등이 있었다.

≪주서 周書≫ 이역전(異域傳)에는 백제에 승려와 사탑이 매우 많았고 불교문화가 대단히 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자왕 때 백제가 멸망함에 따라 그 명맥은 끊어졌지만, 백제의 불교는 일본에서 찬란히 꽃을 피웠으며 현재에도 일본에는 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

(2) 전교 활동

백제 승려 중 해외로 유학한 승려는 겸익과 현광(玄光)이 있었다. 현광은 중국에 가서 혜사의 제자가 되어 ≪법화경≫ 안락행품(安樂行品)의 법문을 은밀히 받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증득한 뒤 귀국하여 고향인 웅주(熊州) 옹산(瓮山)에서 교화활동을 크게 펼쳤다. 그러나 백제불교의 해외활동 중 가장 손꼽히는 것은 일본에의 전교활동이다.

일본인들에게 불교를 처음으로 전래하여 준 이는 백제의 성왕이었다. 성왕은 일본의 서부희(西部姬)에게 달솔(達率) 사치계(斯致契) 등을 보내는 한편, 금동석가상 1구와 미륵석불, 번개(幡蓋), 경론(經論) 약간 권을 함께 보내었다. 그러나 일본의 군신들은 이를 믿고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소가노우마코숙이(蘇我馬子宿窟)만이 이를 존경하여 이시카와가(石川家)에 불전(佛殿)을 만들고 안치하였으나 불경과 불구들의 의미는 알지 못하였다.

그때 환속하여 하리마국(播磨國)에 와 있던 고구려의 승려 혜편(惠便)에 의해 발견되어서 그의 가르침을 받고 세 사람의 비구니가 출현하였으며, 소가노우마코와 시바다쓰 등의 불교신자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성왕은 554년에 담혜(曇惠)ㆍ도심(道深) 등 16명의 승려들을 일본에 보내어 교화활동을 하게 하였다. 557년(위덕왕 4)에는 또다시 경론과 율사(律師)ㆍ선사(禪師)ㆍ비구니ㆍ주금랑(呪禁朗)ㆍ불공(佛工)ㆍ사장(寺匠) 등을 일본으로 보냈다.

당시 일본은 쇼토쿠태자가 불교를 크게 숭상하여 각처에 큰 가람을 세우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토목(土木)ㆍ와공(瓦工) 등의 많은 공인이 필요하였다. 이들 백제인들은 난바(難波)의 대별왕사(大別王寺)에 머물면서 불교진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588년에는 불사리(佛舍利)와 승려ㆍ사공(寺工)ㆍ화공(怜工)ㆍ와장(瓦匠) 등을 일본에 보냈으며, 일본에서는 선신니(善信尼) 등의 승려들이 백제로 건너와서 3년 동안 계율을 배우고 돌아갔다. 이 때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승은 혜총(惠聰)ㆍ영근(令斤)ㆍ혜식(惠寔)ㆍ영조(聆照)ㆍ영위(令威)ㆍ혜숙(惠宿) 등이다. 이 백제의 승려들은 일본인 신도들에게 직접 수계의식을 집행하여 일본 승려의 탄생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601년(무왕 2)에는 삼론에 뛰어난 학자이면서 명의(名醫)이기도 하였던 고승 관륵(觀勒)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천문ㆍ지리ㆍ역서ㆍ둔갑(遁甲)ㆍ방술서(方術書) 등을 전하는 한편 불교문화진흥에 많은 공을 세웠다. 이 해에 일본에서는 승려가 도끼를 가지고 할아버지를 타살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에 승려들을 감독할 필요를 느껴 승정(僧正)ㆍ승도(僧都)ㆍ법두(法頭) 등의 직제를 마련하여 승려의 기강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 관륵은 승정, 고구려의 덕적(德積)은 승도, 백제의 연충(連充)은 법두가 되었다.

그 밖에도 일본의 자료에 의하면 담혜(曇慧, 일본에 간 해는 554년)ㆍ일라(日羅, 551년)ㆍ풍국(淵國, 587년)ㆍ혜미(慧彌, 609년)ㆍ법명(法明, 655년)ㆍ의각(義覺)ㆍ도장(道藏, 684년)ㆍ도령(道寧, 684년)ㆍ다상(多常, 690년)ㆍ원각(願覺, 690년)ㆍ원세(願勢, 690년)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인들의 생활 및 불교문화의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법상(法相)과 구사학(俱舍學)ㆍ삼론학(三論學) 등에 능했던 도장은 ≪성실론소 成實論疏≫ 16권을 찬술하였으며, 비구니 법명은 ≪유마경 維摩經≫을 독송하여 병자를 고쳤다고 한다. 백제의 승려들은 일본의 불교를 중흥하는 주춧돌 구실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문화의 원류(源流)를 우리 나라에서 찾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신라의 불교]

(1) 진흥왕대의 불교

신라의 불교는 법흥왕에 의해서 크게 발전하는 길이 개척되었으나, 불교를 진흥시켜 불교국가로 손색없는 기반을 닦아놓은 것은 진흥왕에 힘입은 바 컸다. 554년(진흥왕 15) 흥륜사의 낙성과 더불어 왕은 국민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국법으로 허락하였다. 549년에는 양나라로 유학갔던 각덕(覺德)이 최초로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550년에는 불교의 제반 업무를 관장하는 행정기구인 대서성(大書省)과 소년서성(少年書省)을 설치하였다. 이듬해에는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 승려 혜량을 승통(僧統)으로 삼고 그 밑에 비구승을 관장하는 대도유나(大都唯那)와 비구니승을 관장하는 도유나랑(都唯那娘)을 두게 함으로써 교단을 지도, 육성하게 하고 통솔을 용이하게 하는 체제를 확립하였다. 565년(진흥왕 26)에는 진나라의 문제(文帝)가 승려 유사(劉思)를 신라의 유학승 명관(明觀)과 동행하게 하여 불교 경론 2,700여 권을 전하였다. 이것은 신라의 불교계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한 일이다.

나날이 늘어가는 한역(漢譯)된 불교경전 중 중요한 문헌들이 곧 신라인들의 불교 이해를 돕게 된 것이며, 이때부터 신라에서는 본격적인 불교연구의 기틀이 잡히게 되었다. 당시 한반도 전체 불교계를 위해 유사와 명관의 기여는 대단히 막중한 것이었다. 또한 567년에는 14년의 공사 끝에 최대의 사찰이었던 황룡사(皇龍寺)를 비롯하여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의 두 절을 세웠고, 574년에는 이 황룡사에 장륙(丈六)의 불상을 안치하였다. 이 장륙불은 금동불상으로 3만5007근의 구리와 1만198푼의 금이 들었으며, 좌우의 두 보살은 철 1만2000근과 금 1만130푼이 들었다고 한다.

572년(진흥왕 33) 10월에는 팔관지법(八關之法)과 인왕백고좌회(仁王百高座會)를 열어 신라 최초의 불교 호국도량(護國道場)을 개설하였다. 승통 혜량의 지도 아래 7일 동안 베풀어진 팔관지법은 이때 전몰 장병의 위령제로 시작되었으나, 뒤에 민족의 축제인 팔관재(八關齋)로 바뀌게 되었다. 또 백고좌회는 원래 100명의 고승을 모아 불경을 강(講)하는 모임이다. 이때에 설법을 할 만한 100명의 고승이 이미 나타났었는지는 의문이지만 혜량과 그 밖의 몇 사람이 주동이 되어 경전을 강하는 일종의 연구적 모임이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576년에는 고승 안홍(安弘)이 중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불사리와 함께 ≪능가경 楞伽經≫ㆍ≪승만경 勝壇經≫ 등 완숙한 대승경전을 가지고 오는 한편,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체류하고 있던 인도승 비마라(毗摩羅)ㆍ농가타(農伽陀)ㆍ불타승가(佛陀僧伽)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신라에 온 최초의 외국승려이다. 왕은 이 해에 머리를 깎고 사문이 되어 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였으며, 왕비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살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진흥왕의 불교진흥책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국선(國仙)과 화랑도(花郎徒)의 창설이다. 화랑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지만 역사적인 자료를 통해서 정확하게 살펴보면, 신라불교문화를 진흥시킨 진흥왕이 불교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설치하였던 청소년 수양단체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는 진흥왕이 나라를 흥하게 할 목적으로 불교의 미륵사상(彌勒思想)과 이상국가사상인 전륜성왕사상(轉輪聖王思想) 등을 중심으로 해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체에서는 신라의 미륵을 상징하는 국선이 모든 무리를 통솔하고, 그 아래에 각각 소단체의 우두머리로 화랑이 있어서 자기 무리의 낭도(郎徒)들을 거느렸다. 또 낭도에는 일반 소년낭도와는 달리 한 사람의 승려가 낭도로 있으면서 국선을 보좌하였다.

이와 같은 화랑도의 불교적인 면을 뒷받침하는 많은 사료 중에서 미륵선화(彌勒仙花)와 화랑 김유신(金庾信)의 용화향도(龍華香徒) 및 진흥왕의 아들 동륜태자(銅輪太子)ㆍ금륜왕자(金輪王子)의 이름 등은 움직일 수 없는 대표적인 사실(史實)의 예증이다.

(2) 진평왕대의 불교

진흥왕의 뒤를 이은 역대 왕들도 그를 본받아 불교문화를 진흥시켜서 훌륭한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어 신라불교를 더욱 꽃피우게 되었다. 진흥왕의 뒤를 이은 진지왕 금륜은 진흥왕의 둘째아들로서 태자 동륜이 일찍 죽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폐위되자 동륜의 아들 진평왕이 579년에 즉위하였다.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白淨)으로서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인 백정왕(白淨王, 일명 淨飯王)에서 취한 것이고, 왕비도 석가모니의 어머니 이름을 그대로 취하여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하였다. 또한 진평왕의 아우 백반(伯飯)과 국반(國飯) 등도 인도 백정왕의 아우였던 백반왕 등의 이름에서 취한 것으로서, 이때의 왕실은 석가족의 왕명들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왕즉불(王卽佛)의 사상을 표시한 것으로, 그 뒤를 이은 선덕여왕의 이름 덕만(德曼)과 다시 그 뒤를 이은 진덕여왕의 이름 승만(勝壇)도 다같이 불교에 연원을 두고 있다. 특히 승만은 ≪승만경≫의 여주인공인 승만부인의 이름을 취한 것이다. 이 진평왕 때에는 원광(圓光)ㆍ담육ㆍ지명(智命) 등의 고승들이 활동하였던 시기이다. 지명은 585년(진평왕 7)에 진나라로 가서 18년 동안 공부한 뒤 귀국한 고승으로, 무엇보다도 계행(戒行)이 깨끗하기로 유명하였다.

진평왕은 그에게 대덕(大德)을, 나중에는 대대덕(大大德)의 계위를 주어 존경하였다. 또한 596년에 수나라로 들어가 유학을 하고 605년에 귀국한 담육은 지명과 견줄 만한 이 시대의 고승이었으나 그가 어떤 분야에서 활약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이 시대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고승은 원광이다. 그는 589년(진평왕 11) 중국에 가서 불법을 깊이 공부하고 교화활동 등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600년에 신라로 돌아왔다. 그가 남긴 큰 업적은 첫째, 대승의 경교(經敎)를 강설하여 대승의 법문을 펴고 크게 교화하였다.

둘째, 불교의 국가적 적응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608년에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수나라에 청병(請兵)하는 글인 걸사표(乞師表)를 써달라고 왕이 부탁하였을 때, 승려로서 자기 나라를 이익되게 하기 위해 남의 나라를 멸망시켜 달라는 글을 쓸 수가 없지만 신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백성의 도리로서 왕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걸사표를 써주었다.

셋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설한 점이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벗을 믿음으로 사귀고, 싸움터에 나가면 물러서지 말아야 하며, 살생은 가려서 하라는 이 세속오계는, 평생의 교훈이 될 만한 가르침을 청하는 귀산(貴山)과 취항(示項)에게 세속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일러주어 백성의 도리를 다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원광이 새로 제정한 것도 아니며 불경에 있는 말 그대로도 아니다. 그때까지의 신라 사람들에게 오래 내려오던 미덕들을 원광이 덕목화(德目化)하여 평생을 지킬 교훈으로 삼게 한 것이다. 그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베풀어졌고, 왕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3) 통일 전까지의 불교

진평왕 이후 신라가 반도를 통일하기까지인 632∼668년의 36년 동안에는 선덕여왕ㆍ진덕여왕의 두 여왕과 태종무열왕의 치세가 전개되었고, 마지막으로 문무왕이 그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선덕과 진덕의 두 왕은 여왕이었으나 그 속명(俗名)까지도 인도불교의 경전 속에 나오는 성녀인(聖女人)의 이름을 본떠서 지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독신자였다.

선덕여왕 때에 서라벌에는 분황사(芬皇寺, 634년)와 영묘사(靈妙寺, 635년) 및 황룡사의 9층탑이 조성되었고, 태종무열왕 때에는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 659년)가 창건되었다. 그 밖에도 금곡사(金谷寺)ㆍ법류사(法流寺)ㆍ원녕사(元寧寺)ㆍ통도사(通度寺)ㆍ수다사(水多寺)ㆍ석남원(石南院)ㆍ압유사(鴨遊寺)ㆍ실제사(實際寺) 등의 이름이 사기(史記)에 나타나 있다.

또한 664년(문무왕 4)에는 사람들이 함부로 불사(佛寺)에 재화(財貨)와 토전(土田)을 보시하는 것을 금할 정도였으므로, 이 시기의 신라불교는 백성들 사이에 보편화되어 있었고 매우 융성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승려의 수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634년(선덕여왕 5)에는 왕이 병으로 오래 누워 있었는데, 그때에 백고좌법회를 황룡사에서 열고 ≪인왕경≫을 강하게 하였으며, 승려 100명을 득도하게 하였다.

또 선덕여왕 재위기간에는 승려들이 중국으로 유학가는 일이 많았다. 이들은 귀국하여 신라불교의 전성기를 형성하게 되는데, 원효와 의상이 함께 당나라로 갈 것을 꾀한 일도 이때의 일이다. 원측(圓測)이 당나라 현장과 자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명랑(明朗)과 자장(慈藏)이 당나라로부터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크게 활약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또 당나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인도에까지 가서 구법(求法)을 한 승려들도 상당수에 달하였다. 인도의 나란타사(那蘭陀寺)에 머물면서 많은 불경을 읽고 깊이 연구하였으며, 본국으로 돌아오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70여 세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를 비롯하여 혜업(慧業)ㆍ현태(玄泰)ㆍ구본(求本)ㆍ현각(玄恪)ㆍ혜륜(惠輪)ㆍ현유(玄遊) 및 두 명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승려 등이 선덕여왕 때에 인도로 갔다고 전한다. 특히, 중국에서 교화활동을 하여 크게 명성을 떨친 뒤 귀국한 자장의 활동은 신라 불교를 재정비하고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중요한 업적은 첫째, 643년 (선덕여왕 12)에 귀국하면서 부처님의 바리〔鉢盂〕와 가사(袈裟), 사리(舍利)와 불경 400여 상자, 번(幡)ㆍ당(幢)ㆍ화개(花蓋) 등 법당을 장엄하게 꾸미는 물품을 가지고 와서 신라에 새로운 불교문화를 도입한 것이다.

둘째, 귀국한 뒤 대국통(大國統)이 된 그는 국내의 교단을 정비하고 승단(僧團)의 기풍을 쇄신하였다. 특히 보름마다 열리는 포살(布薩)을 엄격히 시행하고 겨울과 봄에 두 차례의 시험을 치러 잘못을 범함이 없도록 하였으며, 순사(巡使)를 보내어 지방사찰들을 돌아보게 하는 한편, 불교의식을 장중하고 엄하게 지내도록 함으로써 정법(正法)을 지키고 보호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불교의 일대 번영을 초래케 하였다.

셋째, ≪화엄경≫을 비롯한 대승경론을 강하고 통도사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만들어 계법(戒法)을 널리 폄으로써 국민의 대다수가 불교를 신봉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넷째, 호법(護法) 및 호국의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켰다. 불법을 신봉하고 널리 펴기 위한 호법의 불사로서 자장은 양산의 통도사와 오대산의 수다사, 태백산의 석남원, 원녕사ㆍ태화사(太和寺) 등 많은 절을 세웠다. 특히 오대산을 문수도량으로 설정하여 불국토신앙(佛國土信仰)의 대중화를 꾀하였다.

호국의 불사 중 대표적인 것은 왕에게 청하여 황룡사에 9층탑을 건립한 일이다. 그는 신라를 둘러싼 9개국의 침략을 막아 삼국을 통일하고 신라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상징으로 높이 225척의 이 탑을 건립하였다. 또한, 이 시대에는 일반대중들의 생활 속에 뛰어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불교를 골고루 전파한 선각자적인 고승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고승으로 혜숙(惠宿)과 혜공(惠空), 그리고 대안(大安)을 들 수 있다.

혜숙은 승려이면서도 일찍이 국선의 낭도로 있다가 안강의 적선촌(赤善村)에 살면서 왕도 중심의 귀족적인 불교의 범주를 벗어나서 시골사람들에게 불법을 알리고 서민을 교화하였다. 혜공은 본래 미천한 태생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신이한 행동이 많아 주인인 귀족으로부터 성인의 대우를 받았으며, 출가한 뒤에는 혜공이라 이름하였다. 그는 당시 승려들과는 달리 귀족적인 위치와 웅장한 절을 버리고 이름없는 작은 절에 살면서 매일 마을의 골목 거리를 다니면서 대중을 교화하였다.

허름한 옷에 삼태기를 등에 지고는 초부ㆍ목동이나 뒷골목의 건달, 술주정꾼들이나 가난한 서민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가까이 하였다. 서민교화의 선구자였을 뿐 아니라 학덕도 당대에 뛰어난 고승으로 일찍이 원효가 저술을 할 때 언제나 혜공을 찾아 물었다고 하며, 옷이 물에 젖지 않는 등 서민들 사이에 깊이 파고 들 수 있었던 이행(異行)이 많았던 고승이었다.

또한 본래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대안은 항상 특이한 모습으로 장터거리에 살았다. 언제나 동발(銅鉢)을 마주 치며 “대안 대안(大安 大安)”을 외치고 돌아다니면서 서민을 교화하였으므로 대안성자(大安聖者)라고 불렀다. 대안과 원효는 스승과 제자처럼 지낸 사이였다고도 한다. 이 시대의 불교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삼국통일의 주축이 되었던 화랑도와의 관계이다. 그때의 화랑도 속에는 승려들이 속해 있어 그들의 정신적 교육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화랑 출신의 장군들은 그 신앙에 의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하였다.

화랑들과 함께 있었던 실제사의 승려 도옥(道玉)은 655년(태종무열왕 2) 백제와의 싸움에서 화랑 김흠운(金欽運)이 전사하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건대 위로는 술업(術業:수행)을 잘 익혀서 본래의 성품을 회복하고, 다음으로는 도용(道用:포교)을 일으켜서 남을 이익되게 하라 하였으나, 내가 상문(桑門:승려)의 용모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 선(善)도 취할 수 없다. 차라리 종군하여 살신(殺身)함으로써 보국(報國)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리고는 승복을 군복으로 갈아 입은 뒤 이름을 취도(驟徒)로 바꾸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659년에는 한산주에 장의사를 세워 전사한 화랑들의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또한 15세에 화랑이 되었던 김유신은 그와 함께 하는 무리들을 용화향도라 하여 불교정신에 입각한 새 시대의 주인공들을 길렀을 뿐 아니라, 전쟁중에도 깊은 신심(信心)을 잃지 않았다. 661년 고구려와 말갈의 합병군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공격하여 성의 함락이 눈앞에 다다랐을 때, 김유신은 “사람의 힘이 이미 다하였다. 강조(降助:신이 내려와 도와 줌)를 얻을 수밖에 없다.” 하고 불사(佛寺)에 이르러 단을 만들고 기도를 올렸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진으로 떨어지며 우뢰와 비가 하늘과 땅을 진동하였고, 고구려병들은 포위망을 풀고 달아났다고 한다.

또 김유신이 왕명을 받들어 당나라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에 쳐들어갈 때 현고잠(縣鼓岑)의 수사(岫寺)에 이르자 며칠 동안 행군을 멈추고 재계(齋戒)하고 정성껏 불공을 올린 뒤 행군을 계속하였다. 그는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을 그대로 소유한 전형적인 화랑이었다. 통일 전야의 신라에는 밀교(密敎)가 들어와서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632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635년에 귀국한 명랑(明郞)은 밀교를 최초로 신라에 들여온 승려이다.

통일 후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하려는 기세가 엿보일 때, 명랑은 밀교의 비법을 써서 당나라 군사를 무찔렀고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많은 고승들과 왕실을 중심으로 한 재가 신자들의 노력으로 신라적 불교 토착화가 이루어졌고, 통일 후 불교의 황금 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기영>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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