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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4 (수) 20:24
분 류 사전1
ㆍ조회: 2926      
[고려] 광종 (민족)
광종(光宗)

925(태조 8)∼975(광종 26). 고려 제4대 왕. 재위 949∼975. 이름은 소(昭), 자는 일화(日華). 태조의 아들이며, 모후(母后)는 신명순성왕태후 유씨(神明順成王太后劉氏)이고, 정종의 친동생으로 정종의 선위를 받아 왕이 되었다. 비는 대목왕후 황보씨(大穆王后皇甫氏)와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林氏)이다.

광종은 제2대 혜종, 제3대 정종에 비해 여러 면에서 대조되었다. 우선 재위 기간도 혜종이 2년, 정종이 4년보다도 긴 26년이었다. 그리고 혜종과 정종은 각각 박술희(朴述熙)와 왕식렴(王式廉)으로 대표되는 다른 강력한 세력 기반에 의지해 왕권을 부지하였으나, 광종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쌓아 왕권을 확보하는 데 힘썼다.

광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끈기 있고 정력적으로 노력해 큰 성과를 거둔 왕이었다. 그의 치적은 즉위년∼7년, 7년∼11년, 11년∼26년 등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시기에는 왕권 강화와 관련되는 시책은 단행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내의 정치 정세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성종대에 최승로(崔承老)는 상소문에서 “광종의 8년 동안의 다스림은 가히 삼대(三代 : 夏·殷·周)에 견줄 만하다.”고 격찬할 정도였다. 또한, 중국 왕조와 밀접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내외의 정책을 통해서 새 국왕으로서의 지위 및 그 정치적 기반을 닦아나간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 시기에는 호족 세력의 제거와 왕권 강화에 필요한 제도적인 조처를 취하였다. 956년에 노비의 안검법(按檢法)을 세웠으며, 958년에 과거 제도를 시행하였고, 960년에는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조처들로 호족 세력은 반발하였으나, 이에 대해 철저한 탄압을 강행하였다. 956년부터 왕권 강화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중국 후주(後周)의 쌍기(雙冀)의 등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쌍기는 후주에서의 왕권 강화책의 경험을 고려 사회에 살려보고자 했으며, 광종에게 왕권 강화책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보좌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쌍기를 중용한 같은 해에 노비 안검법을 세운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렵다.

셋째 시기에는 왕권 강화책에 반발하거나 장애가 되는 호족 세력에 대해 피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960년에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보고하자, 광종이 이들을 귀양보내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 이후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기회를 얻어 충량한 사람을 모함하고,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며, 자식이 그 부모를 참소였다. 감옥이 항상 가득차서 따로 가옥(假獄)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죄없이 살육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고 하였다.

왕권 안정에 대한 집념은 매우 강렬해 호족 세력은 물론 골육과 친인(親姻)에 대해 자기에 대한 적대 행위의 가능성을 항상 경계하고, 한번 의심이 가면 살육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혜종과 정종의 아들마저 비명에 죽게 하였다.

958년부터 실시된 과거 제도와 독자적으로 육성한 군사력인 시위 군졸은 문무 양면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 기반이 되었다. 이와 같은 기반을 배경으로 정치적 적대 세력을 과감하게 숙청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호족을 비롯한 정치적 적대 세력의 반발도 거세어 보다 광범위한 세력 기반 구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963년에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이곳에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해 각종 법회와 재회를 개설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 정책을 펴나간 것은 이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귀법사의 승려 균여(均如)·탄문(坦文) 등을 통해 호족 세력에 반발하는 일반 민중들을 포섭하고, 개혁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세력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왕권 강화책을 추진한 결과, 태조 이래 열세에 놓여 있던 왕권을 호족 세력보다 우위에 올려놓게 되었다. 그리고 ‘광덕(光德)’·‘준풍(峻淵)’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수도인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명명하였고, 만년에는 ‘황제(皇帝)’라는 호칭까지 사용하였는데, 여기에서 왕권 강화에 대한 의지와 집념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국가 체제도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히게 되었지만, 이와 동시에 왕권의 한계성도 나타났다.

첫째, 중앙 정부 중심으로서 왕권 또는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는 침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호족 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였지만, 그것이 호족 세력의 완전한 굴복과 왕권의 일방적 승리는 아니었다. 그가 죽고 경종이 즉위한 초에 대대적인 반광종 운동이 일어난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광종은 왕권 강화책 이 외에도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밖으로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활발한 외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고, 안으로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여러가지 시책을 펴기도 하였다.

968년에는 혜거(惠居)를 국사로 삼고, 탄문을 왕사로 삼음으로써 고려의 국사·왕사 제도의 단서를 열었다. 또한, 국방 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영역을 서북과 동북 방면으로 더욱 확장시키는 동시에, 거란과 여진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의 치적은 뒤에 고려가 새로운 국가 체제와 정치 질서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여기에 그의 치적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시호는 대성(大成)이며, 능은 헌릉(憲陵 : 지금의 경기도 개성 狄踰峴)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時代史(金庠基, 東國文化社, 1961), 韓國史-中世篇-(李丙燾, 乙酉文化社, 1961), 高麗光宗硏究(李基白編, 一潮閣, 1981), 高麗光宗朝의 科擧制度問題(金龍德, 中央大學校論文集 4, 1959), 高麗初 科擧制度의 導入에 관한 小考(姜喜雄, 韓國의 傳統과 變遷,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73), 豪族과 王權(河炫綱, 韓國史 4, 국사편찬위원회, 1974), 高麗光宗代의 專制王權과 豪族(金杜珍, 韓國學報 15, 1979).

<하현강>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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