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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9 (월)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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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777      
[한국] 한국의 민속 신앙 (민족)
한국(한국의 민속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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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고대의 삼국 시대부터 이미 왕과 귀족, 평민과 노비로 상하의 위계질서가 규정된 신분제사회였다. 이와 같은 신분제사회에서는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신분에 따른 가옥·의복·생활용품 등의 사용에 대한 규제가 제도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규제는 시대에 따라 엄격히 시행되기도 했으나, 고려시대는 비교적 그 규제가 심하지 않아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도 귀족과 같은 의·식·주 생활을 영위하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모든 기능인들을 관청에 소속시키고 능력에 따라 관직도 주었으며, 이에 따른 급료도 지불하였다. 따라서 고려 시대의 장인들은 생활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고 수요자의 기호에 맞추어 공예품의 제작에 전념할 수 있었다. 왕실의 보호를 받았던 불교사원에서도 노비를 거느리고 많은 전답을 소유해 양민(良民)을 공호(貢戶)로 삼아 각종 수공업을 일으켜 사원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잉여품을 판매해 수익으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고려 시대에는 청자를 비롯한 나전칠기·청동 은입사 제품 등 우수한 공예품이 양산되었고 귀족공예적인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공예품의 수요자는 왕실, 왕실의 보호를 받았던 사원의 승려, 지배 계층이었던 귀족,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일부 상인들이었다.

조선 시대는 건국 초기부터 유교를 통치 이념과 도덕적 규범으로 삼았다. 사회의 지배계급인 양반들도 유교의 근검절약한 생활 태도로 새국가 건설 의욕에 불탔으며, 학문과 예술의 각 분야에 걸쳐 건전한 새탐구활동의 기틀을 잡았다.

조선 시대의 공업은 가내부업으로서의 수공업이 존재했을 뿐이다. 전문적인 공장(工匠)은 모두 각 관청에 소속시켜 지배계급의 위의를 갖추기 위한 장식품을 만드는 데 종사하도록 해 관청의 필요에 따라 의무적으로 일을 해야만 하였다. 장인들의 신분은 천민, 거란·여진 등에서 귀화한 집단부족, 관노(官奴)·사노(寺奴) 등으로 구성되었다. 장인들은 관청에 속했을지라도 여전히 하층민이었고, 신분의 상승을 가져오는 관직을 가지지 못했고 보수도 없었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제품을 생산했을 경우에는 별도의 공장세(工匠稅)를 납부하였다. 즉 이들은 노예노동 형태로 고용되었다.

그러므로 장인들은 자의적인 창작활동을 못 했으며, 양반계층의 주문제작에 응할 뿐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초기에는 민중산업이 발전될 수 없었다. 관에 소속된 장인들 중 결원이 생기면 중앙관서 소속의 노비나 지방에서 선발된 노비들로 충당함을 원칙으로 했으나, 과중한 노역과 잡부금을 피하기 위해 변방으로 도망하는 장인이 생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세종 때에는 일부 양인(良人)으로 결원을 보충하기에 이르렀다. 점차 양인의 수효가 늘게 되면서도 장인들은 노예노동 형태에서 어느 정도 향상된 지위를 얻게 되었다. 조선 시대의 지배계층인 양반들은 유교의 검소한 생활철학에 따라 근검절약했으며, 생활용품들도 사치하고 화려한 것은 피하고, 값싼 재료를 사용한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기물을 애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생활 용품들은 고려 시대의 완벽하며 정교한 아름다움을 지닌 공예품들에 비해 기교면에서 뒤떨어지나, 대신 검소하고 세련된 멋을 지니게 되었다. 양반계층의 이러한 취향은 서민생활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실제로 청렴결백한 양반과 일반 대중들의 생활기물들은 재료나 형태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물론 조선 시대에도 신분에 따른 각종 규제가 있었고 그 시행은 과거의 어떤 왕조보다 엄격하였다. 규제 내용은 가옥(대지 및 주택의 규모와 높이)·금은주옥(金銀珠玉)·금수능라(錦繡綾羅)·주칠(朱漆)의 사용금지 등 사치품에 한하고 있었다.

17세기에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의 두 차례 전란을 극복하면서 현실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정치·경제·군사 등 여러 면에서의 개혁이 추진되었다. 새로운 사회건설을 이상으로 한 실학이 일어나고 서민들의 자각이 커져 사회적 생산력의 증대, 금속화폐의 유통보급, 대외무역의 활발한 전개 등 자유상업이 발달하면서 관청수공업의 해체가 촉진되고 민간수공업이 발전하였다.

이러한 결과 18세기경에 장인은 물론 가내 수공업자들은 개량된 도구와 향상된 기술로 각종 기물을 양산해 사회각층의 수요에 충당하였다. 오랜 세월의 통치이념이었던 유교적 기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으나, 서서히 근대사회로 지향하는 데 기여하였다.

19세기의 순조·철종대에는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로 왕권은 약화되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되어 매관매직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양반사회의 기반은 흔들리고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해 조선의 전통사회는 그대로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신분에 따른 각종 규제는 폐지되었다. 그렇다고 이 때 사회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서민 대중들이 즐기던 세시풍속·민속공예·전통생활양식 등은 1910년의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급격히 밀려온 서구문화의 영향과 산업의 발달로 1960년대 이후 한국은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점차 전환되어갔다.

주택양식도 전통한옥에서 양옥집·고층아파트로 변모되어 갔고 농촌의 초가지붕도 주택개량사업이라는 정책 아래 모두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다. 서민들의 경제적 여건이 향상되면서 의·식·주 생활의 양식은 서구식으로 급격한 변화를 이루면서 모든 전통의 맥은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국가에서는 전통예술 94종목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그 중 전통기능보유 분야는 30종목으로 정하고, 이들 기능보유자를 보조금의 지급, 전수생의 육성, 제작품에 대한 판로 알선 등으로 보호육성하고 있다. 경제적 안정을 이룩한 1980년대 이후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전통문화 보호정책에 힘입어 조상들의 숨결이 밴 전통문화가 점차 한국인의 의식생활 저변에 확산되어가고 있다.

한국은 신석기시대 이래로 농경국가였으며 그 전통은 1950년대까지 이어져왔다. 한국은 샤머니즘 분포권에 위치하였다. 청동기시대의 다뉴세문경(多瞿細文鏡)·팔주령(八珠鈴)·세형동검(細形銅劍)들은, 요즘도 무당들이 사용하는 명두(明斗:巫靈의 상징물로서 직경 20㎝ 내외의 원형 놋제품)방울, 신칼들과 같은 종류로서 유구한 한국무속의 원형을 보여준다.

삼국 시대에 도입된 불교는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 시대에는 호국 불교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민간신앙으로 고구려의 동맹(東盟:10월에 지낸 제천의식)이 있었고, 고려 시대에도 국가적인 행사로서 팔관회(八關會:11월에 행하며 天靈·五岳·山川·龍神을 섬김.)가 거행되었다. 이러한 자연 숭배의 민간신앙 위에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도교(道敎)의 방술(方術)은 민간 신앙과 습합되어 민중들 사이에 깊게 자리잡았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 시대의 국가 제의를 폐지하고 불교와 민간 신앙들을 억압하고 유교 의례만을 내세웠다. 엄격한 유교 의례는 지배 계층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반면 일반 서민과 부녀자층에는 손쉽게 접근해 가족의 건강과 평안을 기구할 수 있는 민간 신앙이 깊게 침투되었다.

이러한 민간신앙은 조선 시대 동제(洞祭)의 원류가 되었으며, 세시풍속·생활용품·복식 등에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정초의 줄다리기, 달맞이, 영등제, 볏가리, 집안에 모시는 조상단지, 삼신신앙 등은 짚을 이용해 재앙을 막고 풍년과 복을 기원하는 신앙행위가 곁들여진 세시풍속이다.

정초에 닭그림이나 호랑이그림을 벽에 붙이는 것, 호랑이를 수놓은 어린아이의 굴레〔방한모의 일종〕나 복건, 호랑이 발톱으로 만든 노리개, 시집가는 새색시의 가마 위에 덮는 호피〔호랑이 껍질〕 또는 호랑이 담요, 또 종기·연주창·말라리아와 같은 당시의 의술로 치료가 힘든 병의 환부에 호랑이 그림을 붙이는 것 등은 모두가 벽사를 위한 민간신앙 행위이다.

새색시의 베개에 수놓은 원앙은 부부의 화합을, 혼례의식 때 둘러치는 모란병풍은 부귀를, 가구의 금속장식에 나타난 박쥐와 조바위〔부녀자의 모자 일종〕에 찍은 박쥐무늬는 복을 염원하는 기복부(祈福符)와 같은 것으로서, 이 역시 그 근원은 민간신앙에서 왔다.

요즘도 일부 사람들은 삼재(三災 : 물·불·바람의 세가지 재앙, 또는 난리·병·기근의 불길한 운세를 뜻하며 평생동안 12년을 주기로 생성되어 3년 동안 머물다가 나간다고 함.)가 들면 머리가 셋 달린 매 그림을 벽에 붙인다. 입학시험의 합격을 빌기 위해 소원성취부를 지니고, 호신(護身)을 위해서는 동자·십이지·불상부적 등을 몸에 지니는 것은 한국민족의 내면 깊이 뿌리내린 민간신앙에서 기인하고 있다. 장〔간장〕의 맛이 변하면 집안에 흉사가 난다고 믿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장독에도 금줄을 치고 집안의 번영을 상징하는 버선을 종이로 오려 붙였다.

남자아이의 나이가 10세, 여자는 11세에 제웅직성〔직성이란 사람의 행년을 따라 그의 운명을 맞는 별인데 제웅직성을 비롯해 土·水·金·日·火·計都·月·木의 아홉개 직성이 있다. 이 중 제웅직성이 가장 무섭다고 한다.〕이 들면 짚으로 제웅을 만들고, 제웅에 그 아이의 옷을 입히고 제웅의 머리에는 동전을 넣은 뒤 아이의 성명과 출생년의 간지를 적어 음력 1월 14일 저녁에 길가에 버려 그 해의 액을 막는다. 이러한 풍습은 1960년대까지 서울에서도 일부 행해지고 있었으며 지방에 따라서 최근까지 행해지는 곳도 있다.

남자아이 12세에는 수직성(水直星)이 들고, 13세에는 일직성(日直星), 15세에는 월직성(月直星)이 명궁(命宮)에 들며, 이러한 사람은 모두 재액을 만난다고 믿어 종이로 해와 달의 모양을 오려 나무에 끼워 지붕의 용마루에 꽂았다. 제웅은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에서 유래하였다.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것이며, 제웅직성이 든 사람 또는 앓는 사람을 위해 길가에 대신 버려져 액을 막는 주술 인형이다.

어린아이의 놀이나 노리개에서도 민간신앙의 벽사기능이 내재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겨울이 되면 어린아이들에게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호로(胡蘆) 세개〔청·홍·황의 3색으로 칠한다.〕를 채색끈으로 엮어 옷에 달아준다. 이것을 정월보름전날밤에 몰래 버림으로써 액을 막았다. 정초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연날리기를 한다. 대보름날이면 연에 액(厄)자를 쓰거나 송액(送厄), 송액영복(送厄迎福), 식구의 이름·나이 등을 적어 날리다가 저녁 무렵에 줄을 끊어버림으로써 그 해의 모든 재액을 연과 함께 멀리 보냈다.

민간 신앙 행위는 사람뿐 아니라 가축을 위해 행하기도 하였다. 정월보름날 아침 해뜨기 전에 동쪽으로 뻗은 나뭇가지를 꺾어 둥글게 엮어 개의 목에 걸어주며, 왼새끼〔짚을 왼쪽으로 꼰 새끼줄〕를 소의 목에 걸어주면 그 해에 개와 소는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하였다.

정월 보름 또는 정월 2·3일경에 시골에서는 장승을 세우기 위한 장승제를 지낸다〔지역에 따라 10월 초순에 행하는 곳도 있다.〕 아침 일찍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와서 장승을 깎기 시작한다. 보통 오후 2∼3시경이면 장승이 완성되며, 완성된 장승을 동네 어귀로 옮겨 세울 준비를 한다. 이 때 농기를 맨 앞에 세우고, 농기의 뒤로는 장승을 진 짐꾼〔동네사람〕이 따르며 그 뒤로 농악이 따른다. 4∼5시경에 장승세우는 일이 완료되면 다시 마을로 돌아와 장승제를 지낸다.

장승은 기록상으로 통일 신라 후기에 나타나고 있다. 마을 어귀에 세워 이정표로 삼고, 또 마을 수호신으로 여겼다. 장승 옆에는 나뭇가지 위에 새를 장식한 솟대를 세웠다. 솟대는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마을의 수호신으로 존재한다. 솟대는 청동기시대부터 세워져서 매우 오랜 역사를 지녔다.

목장승은 3년마다 또는 매년 새로 깎아 세운다. 남부지방 일부 지역에서는 돌장승을 만들어 영구적으로 세워 두는 곳도 있다. 이 돌장승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장승제와 장승세우는 의식은 일제 때 거의 단절되어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되었으나, 최근에는 여러 지역에서 시행되고 있다.

줄다리기는 풍년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세시풍속 놀이이다. 각 집에서 거두어 모은 줄을 장정들이 모여서 굵게 꼬아 긴 줄을 만든다. 마을 규모가 작으면 세 가닥을 합쳐 만든다. 규모가 큰 곳에서는 아홉 가닥을 꼰 것을 세 가닥씩 합해 그것을 다시 한 가닥의 굵은 줄로 만든다. 줄을 꼴 때에는 꼬는 사람, 꼰 줄을 잡아 당겨주는 사람 등 10여 명 이상이 함께 작업한다. 줄이 완성되면 남녀노소 모든 마을 사람들〔많으면 수백명〕이 동서의 두패로 나뉘어 줄을 당긴다. 끌려가지 않는 편이 이기며 이긴 쪽은 그 해에 풍년이 든다.

경상남도 동래지방에서는 줄다리기가 끝난 뒤 축하행사로서 들놀음(野遊)을 하였다. 이 들놀음은 가면을 쓰고 노는 농민들의 놀이이다. 가면극에는 관북형인 북청사자놀이, 서북형인 봉산탈춤·강령탈춤, 중부형인 양주별산대놀이·송파산대놀이, 남부형인 하회별신굿탈놀이, 통영·고성·가산 오광대놀이, 동래·수영 야류 등이 있다.

이 중 〈하회별신굿탈놀이〉는 고려 중엽 이후부터, 그 밖의 가면극들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면놀이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마을 주민들이며, 쓰고 노는 가면도 마을사람 중 솜씨 좋은 사람이 만들었다. 북청과 봉산·강령은 38선 이북에 위치해 있으나, 예전에 놀던 사람들이 일부 남하해 서울에 정착한 뒤 함께 남하한 고향사람들에게 전수해 계승되고 있다.

가면의 재료는 현재는 바가지〔匏〕와 종이가 주로 쓰이고 있으나 역사적으로는 종이와 목재가 많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하회별신굿 가면은 목재이다. 헝겊·짐승털·가죽·흙·대나무 등으로 만든 것도 있다. 가면의 색은 백색·적색(또는 朱色)·흑색·황색(또는 갈색)·청색 등 오방색이 주가 된다.

가면극에는 농악이 따른다. 내용은 벽사의식무(僻邪儀式舞)에 이어 파계승놀이, 양반에 대한 모욕, 남녀의 대립과 갈등, 서민 생활의 곤궁함 등을 보인다. 가면극은 비직업적인 연희자에 의해 계승된 반면, 직업적 유랑 연예인들인 남사당패는 농어촌으로 다니며 주로 장터에서 대중들에게 민중오락을 공연하였다. 이들은 양반집에 불려가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남사당의 연희내용은 농악·버나〔대접돌리기〕·살판〔땅재주: 익살과 재담을 섞어서 물구나무서기·병신짓 등 따위로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행하는 동작〕·어름〔줄타기〕·덧뵈기〔假面舞劇〕·덜미〔꼭둑각시놀음〕 등이다.

과거 한국민의 대부분은 농사를 주업으로 삼고 가정에서의 부업으로 수공업을 하였다. 주된 생산품은 직물이었으며, 이 밖에 농경생활에 필요한 각종 기구, 생활도구, 초고제품〔짚이나 풀을 이용해 만든 제품〕들을 자가생산하였다. 직물의 종류로는 삼베·명주·모시·무명이 있다. 삼베와 명주는 상고시대부터 있어온 긴 역사를 지녔다.

신라 시대 경주에서 부녀자들의 베짜기 경연이 있었음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직조는 일찍부터 여인의 전업임을 짐작하게 한다. 모시는 신라 때 한 노인이 건지산(乾芝山)에 약초를 캐러 갔다가 깨끗하고 늠름한 산풀〔山草〕이 있어 껍질을 벗겨보니 늘씬하고 보들보들해서 옷감짜는 데 이용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무명은 고려시대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그의 장인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경상남도 산청군 단성〕에서 재배에 성공했고, 문익점의 손자 래(來)가 물레를 고안해 제사법(製絲法)을, 손자 영(英)이 무명짜기를 시작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기록이 통설로 전해온다.

부녀자들이 짠 직물류는 의복·침구 등 가정의 수요에 충당하고 국가에서 조세로 부과하는 세포(稅布)로 납부하였다. 또 도시의 상점에 상품으로 보내지는 등 화폐의 대용으로서 상품교류의 기본을 이루었다. 여인들의 부업으로 생산된 직물류는 조선시대의 직물수요를 거의 충당할 정도로 그 생산량이 막대하였다. 왕실과 귀족계층에서 수요로 하는 무늬가 있는 고급직물들은 궁중과 공조 등에 소속된 방직장과 능라장(綾羅匠)이 생산했으며, 중국에서의 수입품도 사용하였다.

이 4종의 직물들은 전국적인 생산분포를 보이나, 특히 정교한 제품을 생산하는 지역이 있다. 무명은 경기도 고양, 경상북도 문경, 전라남도 나주가 유명하였다. 삼베는 전라남도 곡성·해남 지역과 함경도의 함흥·육진·길주·명천, 경상북도의 안동이 뛰어났다. 모시는 충청남도 서천 한산지방의 세모시가 특히 유명하며, 그 밖에 전라도의 진안·광주, 경상도의 영천이 알려져 있다.

모시와 명주실을 교직해 짠 춘포·춘주·춘사·항라 등은 한산지방에서 발달하였다. 명주는 평안도 전지역이 산지로 알려져 있다. 특히 뛰어난 제품은 성천·회양이며, 충청도의 영동, 함경도의 명천·덕천산이 유명하다. 이와 같은 수직기에 의한 직조는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섬유공장의 건설로 명맥이 단절되어 가고 있다. 국가에서는 이들 네 분야에 대한 기능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보호, 육성하고 있다.

한국 고대 복식의 기본형은 관모(冠帽 : 머리에 쓰는 것)·유(飜 : 저고리)·고(袴 : 바지) 또는 상(裳 : 치마)·대(帶 : 허리띠)·이(履 : 목 없는 신) 또는 화(靴 : 목 있는 신, 장화)이다. 예를 갖출 때는 이 위에 포(袍 : 두루마기)를 더 입었는데, 이는 한대성 의복, 즉 북방 호복계통의 의복을 나타내고 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당시의 의복이 잘 나타나 있다. 저고리는 직령〔곧은깃〕에 통수〔좁은 소매〕이며 허리 아래까지 내려간 긴 형태이다. 고름 대신 허리띠로 옷을 고정시켰으며, 깃·섶·도련·끝동에는 옷색과 다른 색으로 선(虜)을 둘렀다.

바지는 남녀 모두 겉옷으로 착용하고 있으며 통이 넓은 바지와 좁은 바지로 대별된다. 즉, 상류층은 넓은 바지, 하층인은 좁은 바지를 입고 있어 신분에 따른 차이를 보인다. 치마는 귀인 여자들이 입고 있었으며 치마 밑으로 바지가 보이는 모습도 있다. 길이는 발끝까지 닿는 긴 형태로서 잔주름이 잡힌 것, 길게 색동의 선을 댄 것 등이 있다. 두루마기는 저고리의 형태에 길이가 더 길며 품이 큰 것으로 허리에 띠를 둘러 여몄으며, 겉옷으로 입었다. 백제나 신라도 고구려와 동일한 복식문화였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남녀를 5계급으로 나누어 계급에 따라 옷감의 우열, 부수되는 장식품의 재질에 차이를 두었다. 통 넓은 소매, 허리띠 대신 앞가슴에 고름을 댄 형태가 나타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있었으나 고대복식의 기본형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음이 이 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土俑)에서 확인된다. 관리들의 복장은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金春秋)가 648년에 당나라의 장복을 받아오고 중국의 공복제도를 따르게 함으로써 중국화가 이루어지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개국 초에는 신라의 복식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러나 중국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건국된 뒤에는 관리의 계층별 공복 및 예복은 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남자의 평상복은 서민과 같은 바지·저고리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며, 여성의 치마·저고리도 공경대부로부터 사민(士民)·유녀(遊女 : 술집여자)에 이르기까지 동일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고려 시대의 복식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초기인 성종 때 백관들의 복제를 정비해 중국 명대(明代)의 제도를 따랐다.

다시 말하면 통일신라 이래로 조선 시대까지 왕실·백관 등 지배계급의 공복·예복 등은 중국왕조의 변천에 따라 변화되었으나 일상복인 남자의 바지·저고리, 여자의 치마·저고리는 큰 변화없이 계승되었던 것이다. 일상복은 왕실에서부터 서민층까지의 기본적인 옷에 관복·제복·예복을 덧입음으로써 신분에 따른 우위를 갖추었다.

어린아이들의 옷도 어른의 일상복과 동일하나 바지는 대소변을 보기에 편하도록 뒤를 튼 풍차바지이며, 저고리의 고름은 한끝을 길게 해 가슴에서 등뒤로 한번 돌려 앞에서 매었다. 이러한 기본복식은 계절에 따라 봄·가을에는 겹옷을, 여름에는 홑옷, 겨울에는 속에 솜을 넣거나 솜을 두어 누빈옷, 또는 갖옷〔털옷〕을 입었다.

한국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들은 염색하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옷감으로 옷을 해입었기 때문에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하였다. 이러한 것은 사치를 규제하는 요인 외에도 생활을 영위하기에도 급급한 서민들이 옷감을 물들이고 이에 따른 별도의 세탁을 해야 하는 등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 더 큰 요인이었다.

그러나 점차 양반 계층과 유사한 채색복식, 금수능라가 아닌 무명·명주·모시·삼베 등에 염색한 의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돌을 맞은 아기들이 입는 색동옷〔돌옷〕, 혼기를 맞은 처녀들의 빨간치마·노랑저고리, 혼례복인 신부의 원삼과 신랑의 관복, 혼례가 끝난 새색시의 홍치마·초록저고리 등이 있다. 생후 1년을 맞는 아기의 생일에 색동저고리에 보라나 분홍 등의 바지를 입히고 가슴에는 수 놓은 돌띠를 두르며 금박 입힌 복건(여자아이는 조바위)을 씌운다. 수와 금박 무늬는 수·복·강·녕·부·귀·다남 등의 수를 놓아 입혔다.

<강신표>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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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4 사전1 [한국] 한국 (민족) 이창호 2002-04-28 2801
2893 사전1 [불교] 보살 (민족) 이창호 2002-05-29 2786
2892 사전1 [조선] 붕당정치 (한메) 이창호 2002-10-15 2782
2891 사전1 [한국] 한국의 민속 신앙 (민족) 이창호 2002-04-29 2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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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