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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17 (일) 22:20
분 류 사전1
ㆍ조회: 2685      
[고려] 김부식 (디지털한국학)
김부식(金富軾)

■ 1075-1151
■ 고려의 학자, 정치가
■ 자는 입지(立之)
■ 본관은 경주(慶州)
■ 호는 뇌천(雷川)
■ 시호는 문열(文烈)

▶  1. 가계와 정계진출
▶  2. 묘청의 난 진압
▶  3. 삼국사기 편찬
▶  4. 문학가 김부식
▶  5. 참고문헌

1. 가계와 정계 진출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태조에게 귀의하여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에 임명되었다. 그뒤 김부식 4형제가 중앙 관료로 진출할 때까지의 생활기반은 경주에 있었다.

그의 가문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근(覲)때부터였다. 그는 13, 14세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의 슬하에서 자랐으나, 4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 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다.

4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였다 하여 그의 어머니는 훌륭한 어머니로 매년 정기적으로 임금이 내려주는 곡식을 받았다. 더구나 4형제 중 부식과 둘째형 부일(富佾), 동생 부철(富轍) 3형제는 당시 관직 중에서 가장 명예스러운 한림직(翰林職)을 맡아 남들의 부러움을 샀고, 어머니 또한 포상되었으나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1096년(숙종 1)에 과거에 급제하여 안서 대도호부(安西 大都護府)의 사록(司錄)과 참군사(參軍事)를 거쳐, 직한림(直翰林)에 발탁되었다. 이후 20여년 동안 한림원 등의 문한직(文翰職)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켰고, 한편으로 예종·인종에게 경사(經史)를 강(講)하는 일도 맡았다.

그는 자신이 공자·맹자의 학문을 종지로 받든다고 표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교 윤리의 실천을 주장하였고 유교 이념의 실현에 노력한 유학자였다. 즉, 이자겸이 인종 초년에 왕의 외조부 겸 장인으로서 참람한 행위를 하고, 예에 어긋난 일을 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또, 《삼국사기》의 사론에서 유교적 이념의 제시를 보여 주었으며, 예종·인종 때의 강경(講經)에서도 유교적 이념을 강조하였다.

정치가로서의 활동은 이자겸의 난을 거치면서 재상으로 승진한 때부터 관직에서 은퇴한 1140년(인종 18)까지에 이루어졌다. 이자겸이 제거된 직후에 두번째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때 사신 파견의 목적은 송나라 고종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시 송나라와 금나라의 정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 입수의 목적이 곁들여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를 감지한 송나라의 반대로 수도까지는 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돌아왔다. 이자겸 일파의 정계 축출로 인하여 승진이 용이해져 1130년 12월에는 정당문학 겸 수국사(政堂文學兼 修國史)로 승진되어 재상이 된 뒤 다음해 9월에는 검교사공참지정사(檢校司空參知政事)로, 그 이듬해 12월에는 수사공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 中書侍郎 同中書門下平章事)에승진하였다.

2. 묘청의 난 진압

이즈음 묘청(妙淸)일파가 서경 천도설(西京 遷都說)을 주장하고 천도가 실현되지 못할 듯하자 난을 일으켰다. 이때 그는 중서시랑평장사로서 판병부사(判兵部事)를 맡고 있었는데, 원수(元帥)로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군(三軍)을 동원하였다. 그는 출정하기에 앞서 재상들과 의논하여 먼저 개경에 있던 묘청의 동조 세력인 정지상(鄭知常), 김안(金安), 백수한(白壽翰) 등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개경의 재상들은 조속한 반란 진압을 독촉하였으나, 1년 2개월 만에 반란군을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그 공으로 개경에 돌아오기도 전에 수충정난 정국공신(輸忠定難 靖國功臣)에 책봉되고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이부사(檢校太保 守太尉 門下侍中 判吏部事)에 승진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감수국사 상주국 태자태보(監修國事 上柱國 太子太保)의 직도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경에서 개선한 뒤 묘청의 난을 진압할 때 자신의 막료로서 전공을 세운 윤언이(尹彦)를 포상하기는커녕 탄핵하여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좌천시켰다. 그 이유는 그가 이전에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을 주장하였던 사건과 관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140년에 사면령이 반포되어 윤언이가 곧 중앙 정계로 복귀할 전망이 보이자 정치적 보복을 염려하여 세번이나 사직 상소를 올려 왕의 허락을 받았다.

3. 삼국사기 편찬

이 무렵 그의 형과 동생도 이미 죽었으며, 자신의 우익 세력이었던 정습명(鄭襲明)은 대간직에서 탄핵을 받아 퇴임하였으므로 그는 정치적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왕은 그를 도와줄 8인의 젊은 관료를 보내어 《삼국사기》의 편찬을 명하였으며, 그는 인종이 죽기 직전에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바쳤다.

그는 《삼국사기》의 편찬 체제를 스스로 정하였고, 이에 따라 참고직(參考職)의 조수를 시켜 사료를 발췌, 정리시켰으며, 사론은 자신이 직접 쓰기도 하였다. 그는 이 밖에도 인종 초년에 《예종실록》을 편찬하였고, 의종 초년에는 《인종실록》의 편찬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4. 문학가 김부식

또한, 문학가인 그는 한림원에 있을 때 그의 선배인 김황원(金黃元)과 이궤(李櫃)의 뜻에 따라 고문체(古文體) 문장의 보급에도 대단한 노력을 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육조풍의 사륙변려문체(四六騈儷文體)에서 당·송시대에 발전한 고문체를 수용하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중찬도 이러한 문체 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의 문집은 20여권이 되었으나 현전하지 않으며, 그의 많은 글이 《동문수 東文粹》와《동문선》에 전하는데, 우리나라 고문체의 대가라 할 수 있다. 송나라 서긍(徐兢)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의 인물조에서 그를 “박학강지(博學强識)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학사의 신복을 받으니 능히 그 보다 위에 설 사람이 없다.”라고 평하였다. 만년에는 개성 주위에 관란사(觀瀾寺)를 원찰로 세워 불교수행을 닦기도 하였다. 1153년(의종 7)에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5.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文選
尹彦頤
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출전 : 디지털 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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