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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03 (일)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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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011      
[조선] 영조의 탕평정치 (박광용)
화합·용서의 휴머니스트 영조 / 인사탕평정치

박광용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WIN / 통권 제33호 1998년 2월호

당파 가리지 않고 인재등용
정파간 살육전 막고 대화합 시도

영조는 우리나라 18세기 본격적인 정치개혁인 탕평정치를 처음으로 추진한 임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탕평정치는 1728년 「나쁜 임금을 몰아내고, 좋은 임금을 세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국적인 무장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난(무신난)의 충격이 있은 직후인, 1729년(영조 5)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탕평정치가 실시되던 당시의 정치 개혁 노선은 「붕당을 타파한다」는 표어로 대표된다. 당시 노론·소론·남인 당파의 상쟁은 「서로 역적으로 몰아세워야만 분이 풀리고, 색목이 한번 나누어지면 ……가까운 친척이라도 서로 상대하지 않는」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군주도 이 소용돌이 속에서는 조연에 불과했다. 군주가 「너희들은 군주를 너희 당의 당수 정도로 생각하느냐」하며 화를 내자, 그들은 한결같이 「군주를 군자의 당으로 끌어들이라는 것은 주자의 가르침입니다」라는 편파적인 답변을 하곤 했다. 이런 정치 때문에 사회 곳곳에서 여러 가지 관계망과 조직들이 전반적으로 붕괴된 결과 국가사회가 파탄지경에까지 내몰렸다.

영조는 자신의 탕평정치 추진의 근거를 「위치가 변하지 않는 북극성 같은 군주와 그 주위를 회전하는 뭇별 같은 신하와 백성들」이라는 군주론으로 설명하기를 좋아하였다. 군주는 「북극성과 같다」는 이 설명은, 군주는 불변의 절대적 지위를 가진 반면 뭇별들은 서민과 사대부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곧 이런 강력한 통치자론을 바탕으로 붕당의 타파를 제도 개혁과 실제 사업으로 뒷받침한 것이 영조의 탕평정치였다.

「탕평」의 정치이념은 중국사에서는 이상적 정치원칙론으로만 존재했다. 중국사에서 실제 정치 이념으로 한 세기에 걸쳐 적용된 경우는 없다. 곧 탕평론은 18세기 조선정치 현실에서만 실제로 적용된 독자적인 정치이념이다.

「탕평」이란 「정치는 크게 중립적이고 지극히 바르게 해야 한다」(大中至正) 또는 「정직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슬로건이다. 이를 달성하려면 통치자인 군주는 편가르기 현상, 좋아하고 싫어함이 지나친 현상, 일관성 없이 자꾸 뒤집히는 현상 등등 사회를 혼란시키는 뿌리깊은 관행과 풍속을 없애 버려야 했다. 이는 사회 일반에 퍼져 있는 나쁜 무리를 제거하고, 아첨이 통하는 사회 기풍을 바꾸어야 가능하다. 이상이 바로 동양의 고전인 『서경』(書經) 「홍범」(洪範)편에 쓰여 있는 「탕평」의 이념이었다.

강력한 통치자론 바탕, 붕당타파·제도개혁 시도

1683년 박세채(朴世采)는 위와 같은 원칙적인 탕평 이념을 조선 현실에 맞추어 재해석하여, 새로운 정치운영론으로 제시하였다. 박세채는 정치·정책의 판단에서 그것이 「옳았는가, 아니면 아주 글렀는가」로 가리는 시비론(是非論)은 권력을 쥐고 흔든 간신과 그들에게 붙은 무리 등 정치인의 도리를 벗어난 자들에게만 통용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붕당(당파) 사이에는 이런 시비론을 써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붕당은 사리와 분별이 있는 사대부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을 따져서는 안되고 「누구는 우수하고 누구는 조금 열등하고」를 가리는 우열론(優劣論)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열론에 따라 인재를 골라 쓰는 것이 현실적으로 바르고 정직한 정치, 곧 탕평정치라는 것이었다.

박세채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정치상황을 반영한다. 당시 왕실의 척신 계열들은 정탐과 조작의 정치 곧 공안통치를 기도했다. 그리고 공안통치로 인한 재앙은 붕당간의 살육전으로 번져가는 등 심각한 대립 양상을 띠었다. 박세채의 주장은 이러한 상황의 타개책으로 제시됐다.

박세채가 시비론을 부정한 것은 곧 남송의 주자(朱子)가 제시한 「붕당간의 의리와 인재를 분별(分別)한다」는 기본원칙을 부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분별론이 반대당을 모조리 제거하는 근거로 쓰인 때문이었다. 그 대신 박세채가 우열론을 긍정한 것은 선조대의 이이(李珥)가 제시한 「붕당간의 의리와 인재를 조제(調劑·절충)한다」는 기본원칙을 채택하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이의 주장을 조선적 정치현실의 특성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곧 「탕평」 정치는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시비(是非)의 차원에 머물러 있던 당시 정치 현상을 실제적 우열(優劣)의 차원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그래야 한 당이 집권했을 때 반대당을 모조리 숙청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구축되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를 시비의 차원으로 끌고 가지 않고 우열의 차원으로 이끌어감으로써 반대당에서도 인재를 골라 쓸 수 있다. 이러한 인재등용책으로 대표되는 정치운영 방식이 「탕평」정책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운영 방식은, 박세채 이후에도 당파간의 살육전이 무려 40년이나 계속되고 전국 규모의 무장반란을 겪은 후에야 영조에 의해서 비로소 현실 정치에 수용되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면서 첫번째 과제로서 「붕당 타파」를 내세웠다. 하지만 붕당 사이의 끝없는 쟁투로 인한 재앙은 「붕당을 타파한다」는 슬로건 정도로 해소될 만큼 간단하지는 않았다.

당시 지식인들은 당쟁이 대체로 3단계를 밟아 악화되었다고 보았다. 처음에는 정치원칙(義理)에 대한 당파간의 의견 차이의 싸움(是非曲直 문제)으로 시작하였는데, 다음 단계에서 문벌과 지역간의 이해관계의 싸움(利權 문제)으로 번졌고, 마침내는 원수 간의 생사를 건 싸움(殺伐 문제)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탕평」이란 결국 이 세가지 요인에서 비롯된 얽히고 설킨 사회 모순을 해결하자는 정치적 방략이었다. 해결 순서는 대체로 그 역순을 밟았다. 첫 단계로는 우선 원수간의 싸움판인 살육전은 무조건 중지시켜야 했다. 그래서 「붕당 타파」를 내세워서 송시열과 윤증의 시비, 사대부의 여론과 공론에 대한 시비 등 시비 논쟁 자체를 금지하였다.

의견차이→문벌간→ 이해관계→원수 사이의 싸움으로 발전

다음 단계로는 문벌·지역간의 이해관계를 재조정해야 했다. 그래서 「우열 조제론」, 이른바 인사탕평책을 내세워 관직 배분에 균형을 기하려 하였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정치 원칙, 곧 의리의 대립을 해소해야 했다. 그래서 한단계 높은 차원에서 정치원칙을 절충·재창조(調劑)하는 「학문 정치」를 실시하려 하였다. 이중 첫째와 둘째 단계는 영조에 의해서, 그리고 셋째 단계는 영조를 이은 정조에 의해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요즈음 우리 사회도 정치생명을 건 시비 논쟁, 계층적 분열과 지역적 분열, 도덕과 인심의 타락, 원칙이 일관성없이 뒤집히는 현상 등등, 17세기 말∼18세기 초 당쟁시절의 정치·사회적 병폐와 유사한 현상들이 만연해 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탕평정치를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이다.

영조 탕평책의 기본방식이자 대표적인 특징은 당파를 안배해서 추천하고 임명하는 인사정책이었다. 이른바 출신 지역이나 출신 학파(학교)를 안배한다는 「인사탕평책」 방식에서 출발하되, 시비를 가려 인재를 쓰는 분별론을 부정한다는 대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분별론에 입각하면 일당이 집권했을 때 반대당은 전혀 기용할 수 없어 당파가 일진일퇴하게 되는 정국 상황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열을 가려 인재를 쓰는 대화합의 정국을 지향하고 있었다. 영조는 자신의 인재등용 방식을 헌 재목과 새 재목을 잘 골라서 집을 짓는 방식에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이는 구시대 인물(당파인)이든 신시대 인물(탕평인)이든 실제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을 가려 쓴다는 것이었다.

암행어사로서 민생문제 해결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소론 강경파 박문수(朴文秀) 같은 사람이 이 시기가 낳은 인물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쟁을 싫어하는 온건한 정치인(이른바 완론), 즉 싸움꾼이 아닌 사람들을 주로 골라서 쓰는 것이 영조년간 인재등용의 더 중요한 원칙이었다. 소론 온건파 조현명(趙顯命)이나 노론 온건파 원경하(元景夏)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조현명은 탕평정치의 가장 적극적인 추진자로서, 충돌을 마다않는 원칙론보다 현실적인 차선책이 실제로는 현명할 수도 있음을 특히 잘 보여 주었다. 그는 자신의 재주를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당론에 쓰지 않고, 문제를 살펴서 해결해 낼 수 있는 인물을 각 당에서 골고루 등용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썼다. 당시 사람들은 이 방안을 호대쌍거(互對雙擧)라고 이름붙였다. 호대쌍거는 온건한 인물을 중심으로 사람을 추천하되, 보통 추천하는 3인을 반드시 당파별로 안배해서 올리게 하고, 한 부서에 반드시 다른 당파의 인물과 한 조를 이루어 업무를 관장하도록 선발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새 재목과 헌 재목 잘 골라 집 지어야

원경하는 「정치적으로 잘 다스려진 시기」라는 의미의 치세(治世)는 60% 정도의 군자와 40% 정도의 소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군자들이 소인을 보고 격노하지 않고 이들의 원한을 사지 않는다면 소인이 가진 재주까지도 국정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북송의 정이천(程伊川) 같은 성리학자도 개인적으로 60∼70% 정도의 군자라면 쓸 만한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원경하처럼 소인도 재주가 있다면 함께 등용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앞서 말한 조현명 역시 정치적인 탕평정책과 사회적인 대동정책은 함께 간다고 생각하였다. 균역법을 추진할 때, 일반민의 세금을 균등하게 하는 것이나, 정치적으로 탕평을 추진하는 것이나, 모두 다 함께 같아진다는 대동(大同)정책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림정치에서 「군자」란 사대부만을 지칭한다. 따라서 대동정책 등은 사대부만으로는 정치가 제대로 운영될 수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주자 붕당론의 허상, 원칙론적 적용이 가지고 있는 비역사성을 날카롭게 지적했던 것이다.

오늘날 사례와 비교해 보면, 정부나 정당 등에서 지역을 안배하여 뽑아야 한다는 이른바 인사탕평책 방식이 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호대쌍거론은 제도로서 철저하게 규정한 인물안배책이었다. 요즈음 거론되는 인사탕평책이 실제로 제도화되지는 않은 채 권력나누어먹기 차원에서 일시적·미봉적으로 이루어진 인물안배책이라 한다면, 이는 영조년간의 제도화된 인사탕평책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봐야 한다.

정치적 관료제보다 실제 사업을 강조하는 직업적 관료제를 강화하거나, 이러한 우열론에 입각한 인재등용 방식은 계속 전개될 정치난국의 해결과 통일사업 추진에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

정치 이데올로기적 잣대만으로는 실제 필요한 사업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진정 필요한 사업을 통해 보수든 진보든 경제 회생에 필요하고 통일사업에 열심인 인재들을 묶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잘못된 경제 성장의 방향을 바로잡아야 하고, 분열된 민족의 통일을 달성해야 하며, 그 기초로서 진정한 민주화를 향해 나가는 정치생활 수준의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비론 차원의 인물 평가 방식을 우열론의 차원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통치권자의 개인적 성향에 관계없이, 보수적 인물과 진보적 인물에게 일어나는 시비 문제를 함께 제거하여 대등한 힘과 기회를 마련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사실 기본적인 정치력에 속한다. 문화 개방, 세계적 보편성과 민족적 고유성을 창조적으로 결합시키는 문화건설 문제 등은 하루빨리 모든 문제를 정치 이데올로기적 시비론의 차원에서 벗어나 실제 사업에 입각한 우열론 차원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현재는 자유롭게 토론하고 정치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상황이 요구된다. 곧 진정한 「탕평」국면, 전면적이고 제도화된 인사탕평책을 통한 민주·민족적 역량의 극대화가 요구된다.

영조 인사탕평책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당파 소속인을 안배하는 방식뿐 아니라, 실제 사업을 통해 탕평파를 결집시켜 가는 방식에 있었다. 영조는 원칙을 따져 탕평파를 결집시키기 보다는 실제 국가적 사업을 매개로 해서, 대립하고 있는 각 당파의 인물을 서로 친하게 만들어 나갔다. 영조의 탕평정치는 크게 4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중 제2기, 3기가 바로 영조의 탕평정치가 가장 잘 실현된 시기였다. 이에 반해 제1기는 탕평 준비기, 제4기는 외척정치로 변질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제1기는 1729년(영조 5) 탕평 표방 직후부터 1739년(영조 15)까지의 시기다. 이 시기는 우선 당파를 화합시키기 위하여 노론·소론·남인 당파 소속 정치인들을 이리저리 안배해 쓰는 데 노력하였다.

정치구조 개혁·사회적 大同사업

제2기는 1740년(영조 16)부터 1749년(영조 25)까지. 이 시기는 정치구조 개혁을 통하여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중심으로 탕평파를 결집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정치구조 개혁은 국가관료 추천권을 가진 이조전랑 제도(吏郞)의 개혁과 국가의 역사를 쓰는 권한을 가진 사관 제도(翰林)의 개혁이 중심이었다. 곧 16세기 이래 계속돼 왔던 사림정치를 상징하는 이른바 청요직을 없애 버린다는 개혁이었다.

이 정치구조 개혁은 소론 강경파 유수원이 제안하고 소론 온건파이자 탕평파의 지도자인 조현명이 적극 추진함으로써 달성되었다. 청요직 제거의 정신은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하위직을 없애고 모든 관료를 근무연한에 따라 차례차례 승진하게 하여 엄격한 위계질서를 세운다는 관직서승제(官職序升制)에 있었다. 이 제도는 황제전제권이 강력했던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 제도의 기본정신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제까지 이조전랑이 장악했던 중간 실무관료인 당하관(정3품 이하) 이하를 추천하는 권리(通望權), 자신의 후임자를 상급자의 간섭 없이 스스로 추천하는 권리(自薦權), 언론을 담당하는 관료(言官)들 사이에 의견차가 있을 때(避嫌) 이에 대한 시비를 판정하는 권리(處置權)를 모두 이조의 상급자인 이조판서·참판·참의에게 귀속시켰다.

또한 국왕의 좌우에서 인품·풍속, 모든 정책결정 사항을 기록하고 평가하는 역사기록자인 예문관 한림제도에도 변화가 있었다. 한림제도에서는 과거 상급자의 간섭을 일절 받지 않고 현직사관의 만장일치와 하늘에 고하는 예식만을 통하여 후임자를 뽑던 관행을 없애 버렸다. 대신 상급자와 하급자의 복수추천을 거치고, 국왕 앞에서 시험을 보아 국왕이 최종 선발하도록 했다.

이후 이들 청요직 관료가 장악했던 하급관료 지휘통솔권은 재상(장관)들에게로 돌아갔다. 또한 이들이 반영하던 사림의 여론인 공론(公論)도 고위관료가 아니면 제대로 반영할 수 없게끔 제도가 바뀌어 버렸다. 곧 하급관리가 상급관리를 견제하던 사림정치를 끝내겠다는 결정이었다.

강경파에서 온건파 전향자 포섭

제3기는 1750년(영조 26)부터 1762년(영조 38)까지의 시기다. 이때는 대동정책으로 불리는 민생 관련 사업을 통하여 강경파에서 온건파로 전향한 인물 등을 포섭하여 새로운 탕평파를 결집하던 시기였다. 영조가 자랑한 4대 사업 중 백성에게 큰 부담이 된 세금제도인 군포법을 균역법으로 개혁(均役)했고, 수도인 도성의 하천을 정비(濬川)한 도성 정비사업이 추진되었다. 균역법은 소론 온건파 조현명과 노론 강경파에서 온건파로 변신한 홍계희(洪啓禧)에 의해, 도성 정비 사업은 노론 온건파이자 외척인 홍봉한에 의해서 발의되고 추진되었다.

균역법 실시는 당시까지 많은 폐단을 불러일으켰던 세금제도의 구조조정 작업이었다. 균역법은 이론적으로는 모든 백성에게 균등하게 세금을 부과한다는 정신에서 출발하였다. 「균」(均)은 곧 「모두 같게 한다」(大同)는 뜻이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양반과 평민을 구별하지 않고 세금을 내게 하자는 호포제(戶布制)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영조 역시 자신도 군주가 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군포를 내야 하는 것인데 사대부라고 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신하들을 면박 주기도 했다. 그런데 영조는 먼저 원칙을 세우고 나서 개혁하는 방식이 아니라 운영방식을 먼저 바꾸고 나서 개혁을 추진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즉 평민이 내는 군포 2필을 반으로 줄이는 결정을 먼저 내리고, 이어 부족액을 채우는 방식을 차례차례 강구해 나갔던 것이다.

도성 정비사업은 도성의 중앙을 흐르는 청계천을 준설하는 준천사업을 통해서 추진되었다. 이는 또한 도성수비체제와도 연관이 있었다. 도성수비체제를 재정립함으로써 도성민을 새롭게 편제했던 것이다. 당시는 서울 인구의 급증으로 겨울용 땔감의 사용량이 급증하였다. 이 때문에 서울 주변의 산이 헐벗으면서 토사가 청계천에 퇴적되어 비가 조금만 내려도 청계천이 범람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서울 인구가 급증한 원인은 1730년을 전후하여 「유이민은 본 고향으로 돌려보낸다」는 규정을 「서울 정착을 허용한다」는 규정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유민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노동력을 팔며 살아갔는데, 이들 중 다수는 청계천 주변에 무질서하게 집을 짓고 살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59년 준천사라는 새로운 관청이 설치되었다. 다음 해 봄부터 청계천에 대한 대대적인 준설사업이 실시되었고, 돌로 축대를 쌓는 작업을 끝으로 청계천의 물길이 바르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청계천 주변의 유민거주지를 포함한 불법적 주거지도 대폭 정비되었다. 즉 도성정비사업은 도시화에 따라 발생하는 새로운 사회문제에 적극 대처하려는 노력이었다.

영조는 이 시기에 서민적 통치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 영조는 18세(1712)부터 28세까지 10년 이상을 일반 백성들 속에 섞여 살았으므로, 백성들의 심성이나 생활방식을 직접 겪어 알고 있는 것을 장점이자 자랑으로 여겼다.

군주가 된 후에도 불시에 옛날 살던 집으로 나가서 이웃 백성들과 거지들을 모아 음식을 같이하기를 즐겼다. 겨울에는 아무리 춥더라도 갓옷을 걸쳐 입지 않았다. 평생 얇은 옷과 거친 음식을 즐긴 것이 늙어서 큰 병 없이 장수하는 비결이라고 신하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특권층 사대부들이 어려서부터 걸어 다니려 하지 않고 교자나 말을 타려 들기 때문에 보통사람들과 걸음걸이에서부터 표가 난다거나, 우리나라는 그런 사대부들이 망칠 것이라는 등, 문벌을 자랑하는 양반들을 비웃어 그들의 심사를 뒤집어놓은 경우도 많았다.

제4기는 1763년(영조 39)부터 1775년(영조 51) 정조 대리청정 직전까지다. 이 시기는 외척·노론당을 중심으로 하는 세칭 탕평당을 통하여 정국을 운영했다.

결국 영조는 결단력을 보여 주는 강력한 군주권의 건설에 힘을 쏟았고, 온건파를 중심으로 권력을 배분하면서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부조직 개편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실제 사업과 제도개혁을 핵심사업으로 추진하였다. 반면에 그 후계자인 정조는 치밀하게 어버이같이 보살핀다는 온화한 군주권을 내세웠다. 또 정치원칙을 강조하는 강경파를 중심으로 권력을 배분하면서, 학문정치로 뒷받침되는 정부조직 개편을 추진하였다.

말년에 외척정치로 변질되는 등 한계 노정

지금의 조정기가 실제 개혁사업이 필요한 시기인지, 아니면 개혁의 원칙을 반성하면서 재출발하는 보다 장기적인 전망이 필요한 시기인지의 판단은 과거보다 오늘날이 훨씬 더 어렵다. 사회발전으로 인한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과 지표들이 전근대사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국민의 요구와 최고 지도자 자신의 스타일을 잘 고려하여 결단을 내려야 한다. 「문민정부」처럼 지도자 한사람을 바꿈으로써 진보적 원칙(전망)의 마련과, 보수적 실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는 생각과 시도는 결국 두마리 토끼를 한번에 다 잡겠다는 것이다. 이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문민정부」는 국민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는 것이다.

영조는 숙종과 숙빈(淑嬪)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숙빈 최씨는 보통 중간 계층에서 뽑는 궁녀 출신도 아니고, 궁녀가 부리는 종인 무수리 출신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록』에는 이런 사실이 기록돼 있지 않다.

영조는 어머니 핏줄로만 보면 사대부나 역관보다도 미천한 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숙빈 최씨는 영조에게 항상 조심스럽게 처신하도록 훈계했다고 한다. 이러한 열등감 때문인지 영조는 자신의 자녀들을 혼인시킬 때는 한미한 가문을 가급적 피하고, 심복하는 신하 중에서 전통 있는 문벌가문 출신만을 골라 혼인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 점은 노년기 영조의 정치가 파행화된 근본원인이 되었다. 특히 노년에 들어설수록 정치적 판단이 혼란스러워졌고 지나친 행동이 많았다. 예컨대 사도세자를 공식적인 재판 절차없이 뒤주에 가두어 죽인다든지, 수시로 3정승을 한꺼번에 갈아치워 버린다든지 하는 경우가 잘 말해 준다. 같은 사람에 대한 평가가 왔다갔다 하면서 처벌과 사면을 밥먹듯이 되풀이한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영조 말년에는 군주의 감정 변화를 잘 알아채는 능력을 가진 척신들만이 제대로 권력에 붙어 있을 수 있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곧 영조 말년의 정치는 외척 신하들만이 신임을 얻어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결국 최종적인 승리자는 외척당이었지 노론당도 소론당도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도 성균관대학교 입구에는 8세가 된 사도세자의 입학을 기념하여 세운 탕평비가 서 있다. 하지만 이 탕평비는 영조 중반 이후 외척당과의 갈등으로 일어난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 때문에 기념비가 아닌 추모비가 되어 버렸다. 이는 원칙과 중심이 흔들리는 정치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그렇다고 해도 영조의 탕평정치가 실패하였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영조의 후계자인 정조 역시 정치 이데올로기적 시비론보다 실제 사업에 대한 우열론으로 인재를 등용하며, 붕당의 영향력을 없앰으로써 집권관료제를 재정비한다는 탕평정치의 선택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이다.

영조는 집권 중반까지는 싸움꾼이 아니라고 스스로 타이르는 한편, 당쟁을 싫어하는 온건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인사탕평책을 바탕으로 개혁정치를 밀어붙였다. 곧 영조처럼 권력 장악과 방어에 민감한 정치가는 사회변혁기에는 큰 일을 해내기도 한다. 하지만 권력이 안정되거나 판단력이 흐려지는 시기에는 심각한 사태를 초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권력을 장악한 자일수록 자신의 개인적 성품을 쉽게 고치기 어렵다. 이를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는 것이 측근정치 및 척신정치를 배제하는 학문정치로의 길이기도 하다.

영조는 결국 말년에 자신의 정치스타일을 반성했다. 그 때문에 후계자인 정조를 학문정치를 지향하는 훌륭한 군주로 키워냈던 것이다.

■ 사진설명

① 성균관대 정문으로 들어가 좌측에 있는 탕평비와 비각. 1742년(영조 18) 영조가 친필로 써서 세운 비석으로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성균관 학생들에게 당쟁에 휘말리지 말도록 부탁한 내용이 적혀 있다.

② 대구 동구 중대동 팔공산 내 파계사의 암자인 聖殿庵. 영조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이 암자는 숙종이 하사(1696년)했으며, 현판도 숙종이 직접 써주었다고 한다. 성철 스님이 이 암자에서 수행했고, 현재는 哲雄 스님이 19년째 수행하고 있다.

③ 사도세자(장조)와 혜경궁 홍씨(헌경황후)를 합장한 隆陵(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소재). 사도세자의 죽음은 노론·소론 당쟁의 희생물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눈보라와 푸른 하늘이 어울려 절경을 이룬 융릉은 최근 선정한 화성8경 중 하나로 꼽힌다.

④ 대구 팔공산 소재 파계사에 있는 祈永閣. 성전암과 함께 숙종 때(1696년) 건립됐으며, 성종·숙종·영조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 사진설명

① 강화군 강화읍에 소재한 남문 옆에 세워진 노론 영수 閔鎭遠의 송덕비. 영조는 노론 영수인 민진원과 소론 영수 이광좌의 손을 맞잡고 화해를 종용했으나 성공은 못하고 말았다.

② 당쟁으로 인해 희생될 뻔했던 영조가 자신의 등극의 정당성을 기록한 책 『闡義昭鑑』. 1721년(경종 1)부터 1755년(영조 31)까지 「신임사화」 「임인옥사」 등 당쟁에 관련된 사건들을 기록했다.

출전 : WIN 199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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