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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03 (일)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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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946      
[조선] 영조의 균역법 실시 (정연식)
화합·용서의 휴머니스트 영조 / 경제개혁정책

정연식(鄭演植)<서울여대 사학과 교수>

WIN / 통권 33호 1998년 2월호

「양반·평민 모두 균등한 세금 물리겠다」
평민 세부담은 반감, 양반에도 과세 추진

우리는 현재 IMF의 구제금융체제에 들어갔다. 「경제신탁통치」라고도 부르는 이 치욕을 맞이하여 국제사회에서 우리 국민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지고, 경제선진국 진입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불황으로 인한 기업의 부도사태와 아울러 심각한 물가고까지 가세하여 너나 할 것 없이 살림살이가 너무 어려워진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개혁을 단행해야 하며, 또 그 개혁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 거센 난국을 맞아 정치지도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고, 또 국민들은 어떠한 각오로 난국을 헤쳐 나갈 것인가?

약 2백50년 전에 있었던 균역법 시행은 이러한 의문과 과제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작금의 상황이 우리나라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외환위기로 인한 것이라 한다면, 18세기 조선의 국민경제의 파국은 군역으로 인한 것이었다.

균역법·IMF체제는 모두의 「고통감수」 요구, 서로 닮음꼴

하지만 현재의 상황과 조선시대의 상황은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은 내용상 일치하는 부분이 매우 많다. 그것은 정부와 국민 모두의 내핍과 부분적인 희생·불편함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과감한 개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18세기 전반기에 농가경제를 몰락시키고, 국가재정을 멍들게 한 것은 군역(軍役)이었다. 조선 후기의 군역은 조선 전기와는 달리 일반 양인만이 부담하는 것이라서 「양역」(良役)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대부분의 군역은 실제로 군대에 가는 것이 아니라 군대에 가는 대신 연간 1인당 베나 무명 2필을 내는 것이었다. 즉 일종의 세금이었던 것이다. 이 세금이 농가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군역은 명분상으로는 16세부터 60세까지의 모든 양인 신분의 남자들에게 부과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모든 고을에 일정한 책임량이 할당돼 있었다. 따라서 실제 장정 수가 그보다 많건 적건간에 부과된 일정량을 납부해야 했다. 그러므로 어떤 고을에서 몇 사람이 죽거나 세금을 감당 못해 도망하면 그 사람이 부담했던 군역을 누군가가 대신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부담을 인척에게 떠넘긴 것이 족징이요, 이웃에게 떠넘긴 것이 인징이요, 떠넘길 사람도 없어 죽어서도 면제받지 못한 것이 백골징포요, 군역을 질 사람이 모자라 어린아이에게까지 부과된 것이 황구첨정이다.

18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폐해는 때로는 극단적인 병리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1719년 천안에서는 20여명분의 족징을 당하고 있던 사람이 집에 불이 났는데도 뛰쳐나오지 않고 그대로 앉아 죽음을 택한 사건이 있었고, 1734년 광양에서는 두 사내아이가 자신들이 남자로 태어나 부모들이 군역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 성전환을 시도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밖에도 군역부담을 모면하기 위해 같은 핏줄을 나눈 사람들까지도 죽고 죽이는 패륜적인 사건까지 일어났다. 현종 때에는 족징을 두려워한 친척들이 합세하여 군역을 지고 있던 일가족 일곱명을 모두 살해한 비정한 사건이 터졌고, 경종 때에는 사촌이 군포를 내지 못해, 자신이 대신 족징을 당하자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사촌을 도적패거리라고 무고하여 죽이려다가 발각된 일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사람들은 아들 낳기를 원치 않았고 낳아도 기르려 하지 않았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백성들의 삶이 이렇게 어려운데 나라 재정이 튼튼할 리 없었다. 더구나 군역은 국방과도 관련된 문제였다. 그러므로 정부로서도 팔짱만 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여러 가지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이 대두됐다. 즉 양인 장정에게 부과되는 군역을 완전히 없애고 다른 방법으로 군역세를 징수하려는 방안이 제기된 것이다. 세금을 양인장정에게 부과할 것이 아니라 가호마다 일정액을 납부하게 하자는 호포론(戶布論), 토지에다 별도의 세금을 부과하여 해결하자는 결포론(結布論), 남녀를 막론하고 인구수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자는 구포론(口布論), 세금을 내지 않고 놀고 있는 장정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자는 유포론(遊布論) 등등 갖가지 방안이 대두됐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계층간의 이해관계에 얽혀 결론을 맺지 못한 채 근 2백년을 끌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조의 나이 57세 때인 1750년(영조 26)에 이르러 조정은 비상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연초부터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만연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기근으로 걸식을 하며 떠돌아다니고 있었고,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줄을 이어 그해 여름까지 30만명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이렇게 사망자가 속출하면 누군가가 다시 그 군역을 대신해야 했으므로 인징·족징이 만연하게 마련이다.

전염병으로 30만명 사망한 비상사태

조정으로서는 비상조치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관료는 고액 화폐를 찍어내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은 너무도 분명하였다. 영조는 양역변통에 착수하였다.

영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군역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특히 호포의 시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군역은 양인만이 부담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따라서 일반 평민과 양반이 모두 나라의 세금을 부담하는 세상을 이루려 한 것이다.

그는 호포를 「호대동」(戶大同)이라 불렀다. 「대동」(大同)이란 유교에서 공평한 이상사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호에 세금을 부과한다면 그것이 바로 대동의 세상이라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양반들도 상당수는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데 호포를 부과한다면 사대부들의 마음이 흔들릴까 우려하고 있었다.

이때 호조판서 박문수가 영조의 의중을 헤아리고는 호포제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박문수는 「군역을 없애고 호포를 부과한다 하더라도 그 부담이 매우 적을 것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국가재정을 총괄하는 호조판서의 말이었으니 영조의 귀가 솔깃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조정은 세자가 대리청정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양역변통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으므로 영조가 직접 앞장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영조는 곧 양역변통에 착수하기로 하고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사람들의 견해를 직접 들어보기로 하였다. 영조는 한창 더운 여름날 서울의 사대부 및 평민과 아울러 지방에서 올라온 군사들을 창경궁 홍화문 앞에 불러 모아놓고 친히 홍화문에 행차하여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호전이 편하다고 답하였다. 호전은 호포와 달리 베 대신에 돈으로 거두는 것이다.

대리청정 시기였지만 군역문제는 직접 챙겨

영조는 용기백배하여 곧 호전을 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비변사에서 실제로 계산하여 본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군역을 폐지할 경우 가호당 부과되는 돈은 박문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몇 배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영조는 매우 실망했다. 심지어 「박문수의 말을 굳게 믿었는데 아무래도 속은 것 같다」고 심회를 토로할 정도였다.

그러나 영조는 빼든 칼을 도로 집어넣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에는 상황이 급박했고, 또한 근 2백년을 끌어온 양역변통 문제를 언젠가는 마무리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대신들과 비변사 당상관들에게 비변사에서 숙직하면서 대책을 강구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한달이 지나도록 속시원한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영조는 1750년 7월19일 명정전에서 여러 대신과 중신들을 모아 놓고 우선 2필을 1필로 감하는 단안을 내렸다. 논의가 시작된 지 두달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2필을 1필로 줄일 경우 그 재정결손을 무엇으로 보충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았기 때문이었다. 영조는 그 대책을 강구하도록 명을 내리고 「만약 대책을 세우지 못한다면 나를 다시 볼 생각을 하지 말라」고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였다.

군포를 1필로 줄일 경우 그 대책은 자명하였다. 재정지출을 줄이고 새로운 수입원을 찾아내는 것이다. 우선 지출을 줄이기 위해 영조는 스스로 자신의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는 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지방에 부임해 있는 관리들이 왕에게 바치는 예물 성격의 진상(進上) 월령미(月令米)를 모두 균역청(均役廳)으로 돌리게 하였다. 균역청은 군포를 1필로 줄여서 생긴 재정결손 부분을 채울 재원을 모아들이기 위해 신설된 기관이다.

한편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에게 내핍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했다. 조정에서는 긴축재정을 단행하였다. 국가 재정 규모를 줄이기 위해 여러 기구들이 축소 개편되었다.

예컨대 남한산성의 총 관리자인 수어청(守禦廳)의 대장 수어사는 서울의 군영에 있었는데 그를 광주유수(廣州留守)를 겸하게 하여 광주에 나가 있게 하였다. 한편 북한산성의 총 관리자인 총융청(摠戎廳)의 대장 총융사는 경기병사를 겸하게 하였다. 관찰사와 수령들이 임지에 가족을 데리고 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렇게 하여 재정비용을 줄이고 녹봉 지출도 줄일 수 있었다. 국방 경비도 대폭 삭감되었다. 병조와 서울에 있던 군영의 군사를 약 3만명 줄였다. 경상도의 긴요하지 않은 방어시설 일곱 군데를 혁파하여 9천명의 군사를 줄였고, 이밖에도 각 지방의 군사 7천명을 줄여 도합 4만6천명 가량을 줄였다.

영조 먼저 내핍, 정부·왕실 조직구조 축소

한편 새로운 재정수입원을 찾아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영조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인척들을 포함하여 관료 및 사대부들에게도 내핍을 요구하였다.

당시 바닷가에 살고 있는 어민들에게는 어염선세(漁鹽船稅)가 부과되어 있었다. 이 세금은 어장, 고기잡이배, 소금 굽는 가마 등에 부과된 것인데 대부분 왕실이나 각 행정부서, 지방의 토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 세금을 거두는 기관을 일원화시켜 모두 균역청에 세금을 납부하게 하였다. 이는 결국 왕실·관공서·양반토호들이 장악하고 있던 수입을 모두 박탈한 것이다.

이러한 조처에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국왕의 직접적인 지배력과 영향력이 미치는 왕실과 관공서에서야 어쩔 수 없었지만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은 적지 않았다. 특히 양반토호들이 많았던 충청도 지역에서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지방수령들도 불만이 많았다. 어장에서 들어오는 수입이나 토지 대장에 올리지 않고 남겨둔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지방의 살림을 꾸려가는 데 쓰기도 하고 일부는 수령과 아전들의 수입으로 남겨두었는데, 이것들을 모두 색출하여 군포를 1필로 줄이는 데 쓰도록 하였다.

국가재정을 충실히 하는 데 쓰여야 할 세금 가운데 상당 부분이 개인을 살찌게 하는 데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이 부분에 수술을 감행하였다.

정부와 백성들의 새로운 각오와 희생만으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제대로 열매맺기 위해서는 우선 법령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했다. 당시 지방의 수령이나 권세가들이 중앙정부의 허락도 없이 서원이나 향교에 새로운 군역을 만들기도 하고, 군역에 규정된 인원 외의 사람들을 끌어들여 제멋대로 거두고 있었다. 이런 수입은 지방의 살림살이에 쓰이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수령과 아전들의 사적인 수입으로 소모되었다. 이것이 중앙 재정을 부실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었다.

영조는 이런 일을 막기 위해 미리 대대적인 사정작업을 단행하여 균역법이 시행되기 2년 전에 『양역실총』(良役實摠)이라는 책자를 간행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 책자에 규정된 것 이외에는 새로운 군역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또 기존의 군역에 적절한 인원을 할당하여 인원을 제멋대로 늘리지 못하게 한 것이다.

또한 법령의 구비와 아울러 제도가 합리적으로 운영되어야 했다. 예컨대 양인의 군포부담에 차등을 없앤 것이다. 예전부터 1인당 연간 군포 부담은 소속 기관에 따라 제각기 달라서 3필, 2필반, 2필, 1필 등으로 각양각색이었다. 들쭉날쭉하던 군포부담은 예전에 몇 차례의 조정과정을 거쳐 숙종조 중반에는 대개 2필로 정리되었지만, 지방에는 여전히 1필 정도를 내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말썽을 일으키고 있던 군역이 바로 1필을 내는 군역이었다. 이런 군역들은 앞서 말했듯이 지방의 수령들과 사대부들이 중앙정부의 허락 없이, 때로는 사사로이 징수하는 군역들이었다.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쉽게 하려고 일부러 부담을 가볍게 한 것이다.

영조는 이 기회에 군포 부담을 줄이면서 하나로 통일하는 두가지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균역법을 단행하면서 2필의 군역을 1필로 줄임과 아울러 모든 군역을 1필로 통일하라고 명하였다. 1필 이상을 거두는 것도 불가하지만 1필 미만을 거두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라의 세금은 모두가 똑같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조는 양역변통을 단행하면서 이 중차대한 정책을 독단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여론수렴을 통해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려 하였다. 그는 여러 지역과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불러모아 의견을 물었고, 직접 백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자 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은 2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6차에 걸친 광범위한 여론수렴으로 정책결정

처음 1750년 5월19일에 창경궁 홍화문에서 양역변통책을 물을 때는 서울의 사대부와 평민들, 그리고 지방에서 올라온 군사들 50여명을 불러모아 놓고 호전과 결포 중 어떤 것이 나은지 물었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호전이 편하다고 답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호조판서 박문수가 홍화문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왕이 호포를 시행하려고 하니 호포가 편하다고 대답하라고 미리 언질을 주어 여론을 조작하였다는 말이 전하기도 한다.

두번째는 군역 2필을 완전히 폐지할 경우 부담이 일반 가호에게 부과돼야 하므로 호당 부담이 적지 않을 것이 판명되자, 7월3일에 다시 홍화문에 행차하여 그렇다면 군역을 1필로 줄이고 나머지 부분은 호전을 징수하면 어떨지 유생과 평민·관료들에게 물었다.

세번째는 7월9일에 창경궁 명정전에서 요직 관리들을 모두 모아놓고 가호마다 일정액을 납부하는 호전과 토지에 별도의 세금을 부과하는 결포 중 어느 것을 시행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그러나 호전과 결포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우선 군역 2필을 1필로 줄이는 조처를 단행하였다.

2필을 1필로 줄인 후 이번에는 나머지 1필을 무엇으로 채우는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이듬해에 다시 여론조사가 시작되었다. 우선 1751년 6월3일에는 명정전에서 문신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하면서 대응책을 시험문제로 출제하였다. 그 다음날에는 같은 장소에서 음관(蔭官·조상 덕으로 벼슬하는 관리)과 무관들을 모아놓고는 방안을 물어보았다. 마지막으로 6월9일에는 명정문에서 지방에서 올라온 유생·아전 및 군사들에게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는 결전(結錢)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여기서 소액의 결전을 거두어 부족한 1필 부분을 부분적으로 채우는 안이 채택, 결정되었다. 토지에 새로이 결전을 부과한 것은 결국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라는 것이었다. 결전을 징수함으로써 부족한 재원의 약 반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렇게 2년 동안 모두 여섯차례의 여론 수렴과정을 거쳐 균역법은 마지막 끝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이런 광범위한 여론 수렴은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이보다 아주 오래 전에 한차례 이런 일이 있었다. 영조시대보다 약 3백20년 전, 세종이 왕위에 있을 때 토지에 부과된 전세(田稅)를 합리적으로 징수하고자 공법(貢法) 시행안을 마련하여 전국적으로 약 17만명에게 찬반을 물은 일이 있었다.

대상 인원에서는 공법에 대한 세종조의 여론조사가 양역변통에 대한 영조조의 것을 압도하지만 조사기간과 횟수에서는 영조조의 일이 세종조의 일을 능가하였다.

물론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왕이 중앙의 관료들이나 지방 수령들 및 유생들을 대상으로 의견을 구한 적은 적잖이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형식적인 일로 끝나고 말아 실제 정책에 반영되기 어려웠고, 또한 이런 일들은 모두 양반 사대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양역변통에서 일반 백성들의 목소리까지 모두 담아보고자 하였고 이를 일부 실행에 옮겼다. 영조가 꿈꾸었던 천하는 양반만을 위한 천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은 공법 이후 처음이었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다시 시행된 바 없었다.

균역법을 시행함으로써 군역에 의해 고통받던 농민들은 한 시름 덜 수 있었다. 국가재정도 어느 정도 충실해졌다. 든든해진 국가재정을 바탕으로 뒤이은 노비들의 처우 개선 등 몇가지 시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오랜 기간을 거쳐 준비된 균역법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균역법이 군역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득권 양반층의 반발 뚫지 못해 한계 드러내

균역법(均役法)의 「균역」이란 말은 말 그대로 역(役) 부담을 고르게 한다는 것으로서, 나라의 백성에게는 어느 누구에게나 세금과 부역에 차등을 두지 않는다는 이상적인 왕정의 이념적 지표를 한마디로 뭉뚱그린 것이었다.

영조는 이 「균역」의 이념에 가장 합당한 것으로 호포제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호포를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 호포를 시행하면 사대부들도 베를 내야 하고 그러다가는 사대부의 인심을 잃어 나라가 흔들릴 것이라는 여러 사람의 주장에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분과 무관하게 세금을 부담하는 호포제는 시행되지 못하고 다만 평민들의 군역은 모두 1필로 통일하게 하였다. 모든 양인은 똑같이 1필을 부담한다는 의미에서 영조는 이를 「1필대동」(一疋大同)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는 불완전한 대동일 수밖에 없었다. 양인들만이 지는 군역 1필은 그대로 남게 되었고 나머지 1필 부분이 여러 군데로 분산되어 부과되었다. 군역 문제의 뿌리가 뽑히지 않은 것이다.

영조는 균역법을, 당쟁을 막기 위한 탕평(蕩平), 청계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매년 청계천을 준설하게 한 준천(濬川) 등과 함께 자신의 치세에 이룬 3대 업적, 또는 4대 업적 중의 하나로 자부하고 있었다. 균역법은 만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지켜야 할 규범으로 천명되었다. 균역의 방침을 어기거나 이미 결정된 사실에 대해서 비방하는 일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동안 군역문제는 수그러들고 일반 평민들도 군포 부담이 반으로 줄어들어 잠시 힘을 펼 수 있었다.

그러나 군역의 폐단은 영조 만년에 이르러 다시 부상되었다. 아무리 법을 강화해도 법의 틈새를 파고드는 제반 폐단을 막을 수 없었다. 구조적 모순은 국왕의 의지와 운영의 개선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중앙정부의 명령이 지방에서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예전의 구태가 재현되고 새로운 문제가 야기되었다. 경제 문제는 정치나 법의 논리로는 해결될 수 없었던 것이다.

여론 수렴과정에서도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도 문제지만 개혁은 어차피 모든 계층을 만족시켜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영조가 여론수렴 과정에서 접할 수 있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서울의 양반들이었다. 이들의 정치적 발언권은 이미 숙종조 이래로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평소에는 군역에 관한 한 세금을 한푼도 내지 않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평민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호전을 내라거나 결전을 내라 하면 찬성할 까닭이 없었다. 이미 반발은 예견된 일이었다. 영조는 이들의 반발로 인한 위험부담을 감수하기를 꺼렸다.

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영조는 자신이 뚜렷한 실정을 행한 일도 없는데, 즉위한 지 겨우 4년이 지난 1728년에 난데없이 사대부들이 이인좌의 난을 일으켜 큰 충격을 받았다. 영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사대부들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호포를 시행하고자 하면서도 끝내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적 불안은 경제 개혁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균역법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농민들의 삶을 어느 정도 펴게 하고, 국가재정을 충실하게 하였지만 그 성과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균역법이 지니고 있던 한계성은 기득권층의 저항을 정면으로 헤쳐나가는 적극적인 개혁의 문턱을 완전히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영조에게 전근대사회의 울타리를 무너뜨리라는 것은 당시로서는 지나친 요구였다. 그는 과단성 있는 정치지도자였으며, 특히 민생문제의 해결에 그 누구보다도 강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던 국왕이었다. 그랬기에 그나마 균역법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사진설명

① 서울 종로구 소재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영조가 친히 이 문 앞에서 균역법 시행을 위해 여론조사를 실시할 정도로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② 균역청에서 논의된 제반사항 및 왕복문서 등을 수록한 책 均役廳騰錄. 현존하는 것은 충청도의 균역법 관련 내용뿐이다.

③ 1750년(영조 26) 영조는 창경궁 명정전에서 여러 대신들을 모아놓고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감하는 결단을 내렸다. 명정문을 통해 들여다본 明政殿.

④ 청주 읍성 안에 있던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營門. 영조는 균역법을 시행하면서 자신이 솔선해서 쓰임새를 줄이는가 하면 군사조직 개혁을 단행해 지출을 최소한으로 하도록 명했다.

■ 사진설명

① 균역법을 직접 주관한 관료 洪啓禧가 1751년(영조 27) 편찬한 均役事實. 영조가 대리청정 중인 사도세자에게 균역법 제정의 경과와 결말을 알리기 위해 편찬을 명한 것이다.

② 1743년(영조 19) 각 도별로 호구수와 양역의 수를 조사한 책 『양역실총』. 조선 후기의 양역수와 양역의 배정방법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출전 : WIN 199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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