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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03 (일)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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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203      
[조선] 영조의 생애와 발자취 1 (이덕일)
화합·용서의 휴머니스트 영조 / 생애와 발자취

WIN / 통권 33호 1998년 2월호

이덕일<月刊중앙 WIN 기획위원> / 고세원<月刊중앙 WIN 기자>

출생·등극과정의 컴플렉스 딛고
민심·민생안정 주력한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영조대왕의 발자취를 따라 길을 나선 지난해 12월8일엔 세상의 모든 추악함을 감싸안으려는 듯 함박눈이 정성스럽게 내렸다. 이 눈 속에 감춰질 추악함은 IMF 한파요, 지역감정의 깊은 골이었다. 아니 그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속에 견제장치 없이 커져만 가는 불신의 삭막함이었다.

눈발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우리의 추악함과 불행을 빨리 감싸 희게 씻어 주려는 듯이. 하늘은 사심없이, 지역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함박눈을 안겨주고 있었다.

영조대왕은 출장 기간 내내 우리에게 「하얀 눈」을 보여주었다. 계속되는 하얀 눈을 보고 이것이 「서설이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취재팀이 처음 찾은 곳은 대구 파계사(把溪寺)와 그 암자인 성전암(聖殿庵)이었다. 이곳에는 영조의 탄생설화가 전해진다. 「임란·호란 이후 조선사회는 극도로 혼란했다. 지방관리들의 수탈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국법으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았던 사찰에 대한 수탈은 극심했다. 파계사의 주지였던 용파(龍波) 스님은 임금을 만나 관리들의 비리를 막아 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한양에 올라갔으나 조선사회는 승려의 도성 출입을 법으로 금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숭례문(남대문) 앞에 초막을 짓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스님은 물장수로 연명하며 임금을 만나려 노력했다. 하지만 3년이 되던 해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짐을 싸고 있었다. 그런데 임금이 보낸 관리 한 사람이 와서 대궐로 가자고 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관리를 따라나섰다. 당시 숙종 임금이 스님을 부른 이유는 꿈 때문이었다. 숙종의 꿈에 숭례문 앞에서 용이 승천하더라는 것이다. 숙종은 당시 오래도록 아들을 보지 못해 노심초사하던 시기였다. 결국 숙종은 스님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기도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용파 스님은 자신이 백일기도를 할 테니 임금께는 대신 대구 지방의 지방관 수탈을 막아 달라고 부탁했다. 약속을 들은 용파스님은 친구인 금강산의 농산(聾山) 스님에게 도움을 청해 같이 기도하기로 했다. 기도를 하던 농산 스님은 아무리 찾아봐도 임금으로 탄생시킬 인물이 없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결국 농산 스님 자신이 숙종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다고 결정했다. 그러고는 머리와 발바닥이 가려워서 견딜 수 없다고 하며 입적했다」

머리와 발다닥이 가려웠던 것은 52년 동안이나 임금 자리에 있으려니 왕관과 버선·신발을 벗지 못해서였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스님이 영조로 환생했다는 설화

이 설화는 영조가 그만큼 큰 인물이며, 어렵게 태어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의 오른팔에 용의 비늘 같은 무늬가 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설화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숙종은 파계사에 토지를 내리고 성전암을 하사했으며 편액까지 써주었다.

성전암은 파계사에서 가파른 산길을 30여분 정도 걸어올라야 했다. 헉헉대다가 길게 내리쉬는 숨길에 나뭇가지에서 쉬고 있던 눈이 허공으로 흩어져날렸다. 상당히 높은 곳에 자리한 성전암에는 그야말로 살을 에는 겨울 칼바람이 정신을 명징하게 일깨웠다. 암자의 건물들 지붕에는 눈이 알맞게 쌓여 고즈넉한 산사의 전형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는 조선 왕조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선 재위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었다. 또한 왕위 등극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겼으며, 재위 중 커다란 반란을 겪는 등 순탄치 않았다. 당파간의 싸움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영조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했다. 출생과 등극의 컴플렉스를 극복했고 당파간의 불협화음을 지극한 노력으로 조정해 나갔으며, 민생 안정을 위해 균역법·하천정비·서적발간 등의 정책을 실행했다. 그 결과 안정된 왕권과 사회를 손자인 정조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솔선수범하는 서민대통령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파계사와 연관된 영조의 탄생설화는 어떻게 보면 영조의 콤플렉스의 소산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 영조는 미천한 신분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임금이었지만 어머니는 대궐에서 청소일을 하던 천민인 무수리 출신이었다. 그러니 출생에 대해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의 출생을 미화할 필요성도 있었을 것이다.

영조가 태어난 1694년(숙종 20)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민감한 시기였다. 조선 전 기간을 통틀어 당쟁이 가장 치열했다. 그해 서인(西人),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서인의 한 갈래인 노론(老論)은 반대당인 남인(南人)을 꺾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환국(換局)이란 정권교체를 뜻하는 조선시대 정치용어인데 영조(당시는 왕자 금)가 탄생한 해에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이때 장희빈 소생의 여섯살 위 이복형 균은 이미 세자로 책봉돼 있었다.

숙종 때는 조선의 정쟁이 당파의 입장에 따라 임금을 선택하는 지경까지 심각해졌는데 당시 남인은 세자 균을 지지했고 노론은 새로 태어난 금을 지지했다. 왕자 금, 훗날 영조는 이렇게 운명처럼 태어날 때부터 당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태어난 해 발생한 갑술환국에서 그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서인과 손잡은 숙빈 최씨는 숙종의 총애를 이용, 왕비 장씨와 남인을 모해했다. 즉 왕비 장씨가 질투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으며 집권 남인들이 서인들을 제거하려 한다며 숙종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그 결과 남인들이 축출당하고 세자의 생모인 장희빈은 국모의 자리에서 쫓겨나 빈으로 강등됐다.

이후 서인가의 여인인 숙종비 인현왕후가 장희빈 대신 다시 국모의 자리에 올랐고, 이후 남인들은 계속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왕자 금이 일곱살 때인 1701년에는 노론의 공세에 밀린 세자의 생모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당했다. 장희빈이 죽자 그녀의 소생인 세자 문제가 자연히 정국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이런 일련의 사태들은 왕자 금에게 전혀 다른 상황을 가져왔다. 세자의 생모를 죽인 노론으로서는 세자의 등극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세자가 임금이 되었을 경우 연산군처럼 폐비의 한을 복수하겠다고 나올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숙종 또한 장희빈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 경우 조정에 피바람이 불 것을 우려했다.

결국 숙종과 집권 노론은 세자를 폐하기로 합의했다. 숙종 재위 말년인 1719년(숙종 43·기해년)에 숙종과 노론의 영수 이이명이 만난 기해독대(己亥獨對)는 노론과 숙종의 이런 정치적 계산이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독대는 조선에서 엄격히 금지돼 있었다. 반드시 사관과 승지가 배석하여 기록하는 게 법이었다. 말하자면 정치 행위의 공개를 법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공개할 수 없는 정치행위란 뒤가 구린 것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서 독대를 금지시킨 것은 최소한 임금은 밀실정치·공작정치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현재 선진국에서 제도화된 정치의 공개화 원칙과 일치한다. 독대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현재 한국의 정치풍토는 개혁의 대상이라 할 것이다.

숙종과 이이명이 소론의 격렬한 반발을 무릅쓰고 기해독대를 단행한 이유는 세자를 폐하고 연잉군 금을 세자로 책봉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왕위를 연잉군 금에게 넘기려던 숙종과 노론의 밀약은 반대당파인 소론과 남인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숙종은 이미 만 58세의 고령이었으며 병들어 있었다. 목숨을 걸고 저지하는 소론에 맞서 병약한 몸으로 이처럼 거대한 정치행위를 감행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기해독대 다음해 숙종은 승하했다. 이때부터 연잉군의 운명은 풍랑 속에 휩쓸리게 된다.

소론 임금 경종, 노론 세제 연잉군

숙종 사후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 균이 즉위했다. 그가 바로 경종이다. 노론은 경종을 끌어내는 데 정치운명을 걸었다. 경종이 어머니의 복수를 단행하기 전에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려야 자신들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노론은 경종에게 후사(後嗣)를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하지만 경종은 후사로 삼을 아들이 없었고 병약했다. 아들 없는 경종에게 후사를 빨리 결정하라는 재촉은 결국 그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후사로 삼으라는 정치적 압박이었다.

경종은 집권 노론의 요구에 밀려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했다. 2대 임금 정종의 동생 방원(태종)과 12대 인종의 동생 환(명종)만이 왕세제로 책봉되었을 정도로 세자(世子) 아닌 세제(世弟)는 비상한 상황에서나 있을 수 있는 요구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연잉군은 4번이나 세제책봉을 사양해야 했다. 그만큼 노론·소론의 세제책봉 다툼이 격렬했다.

연잉군을 세제로 만드는 데 성공한 노론은 대궐의 가장 어른인 대비 인원왕후 김씨를 한밤에 찾아가 세제 책봉을 승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대비 김씨 또한 노론의 요구를 거부할 힘이 없었다. 그녀는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을 이은 「3종혈맥」(三宗血脈)은 연잉군밖에 없다는 이유로 세제 책봉을 승인하고 말았다. 그때 경종의 나이는 34세고, 연잉군의 나이 28세였다.

세제책봉에 성공한 노론은 한발 더 나가 세제에게 정권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이른바 「세제대리청정」 요구다. 경종은 마지 못해 이를 승인했으나 30대 초반의 임금에게 정권을 내놓으라는 이 무리한 요구는 반대당인 소론의 반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일경(金一鏡)을 중심으로 한 소론 강경파는 노론의 세제대리청정 요구를 역모로 규탄하면서 공세를 취했다. 이에 밀린 노론은 정권에서 밀려났다.

정권을 빼앗긴 노론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자칫 역모로 몰려 당이 없어질지도 모를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노론의 우려대로 소론은 목호룡(睦虎龍) 고변사건, 즉 임인옥사(壬寅獄事)를 만들어 노론을 공격했다.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 임인옥사의 주요 내용이다. 이 고변은 기해독대의 주인공 이이명을 비롯해 김창집(金昌集)·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 등 노론 4대신과 기타 노론 인사 50여명을 죽음으로 몰고갔다.

이때 작성된 역모사건 조사보고서를 「임인옥안」(壬寅獄案)이라 하는데 문제는 여기에 세제 연잉군의 이름이 괴수(魁首)로 올라 있는 것이었다. 세제 연잉군의 이름은 그의 부인인 서씨의 조카 서덕수(徐德修)가 범죄사실을 불면서(供招) 나왔던 터였다. 서덕수는 역적으로 규정돼 사형당했다. 역모에 관련된 종친은 어김없이 사형시킨 나라가 조선이었다.

경종 죽음을 둘러싼 유언비어 떠돌아

연잉군 또한 사형 위기에 몰렸으나 그는 무사했다. 경종이 이복동생인 그를 지극히 사랑한 덕택이었다. 때로 경종은 친히 동궁(東宮)까지 걸어가 문 밖에 서서 『우리 아우의 글 읽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왔네』라고 말했을 정도로 연잉군을 사랑했던 터였다.

소론은 세제 연잉군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와 경종의 접촉을 철저하게 막았다. 세제가 경종을 문안하러 가는 것도 금지당했다. 또한 소론은 경종에게 양자를 들여 그를 후사로 삼으려 했다. 만약 입적된 경종의 양자가 후사가 된다면 연잉군의 앞길에는 비참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제는 그런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재위 4년 2개월밖에 안된 경종이 서른여섯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도성과 지방에는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경종의 시신을 직접 본 경종의 전 부인 단의왕후 심씨의 아우 심유현(沈維賢)은 『내가 급한 부름을 받고 들어가 보니 임금의 얼굴빛은 여전하신데 환관 한 사람이 곁에 서 있고 대신이 들어와서 초혼(招魂·혼을 부름)하기를 청하더군』라고 말했다.

경종이 아무 병 없이 갑자기 죽었다는 말이었다.

소론은 영조와 노론이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했다. 심유현과 관계가 깊던 군사 이천해(李天海)가 의릉(懿陵·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릉)에 행차하는 영조의 어가(御駕) 앞에 뛰어들어 큰소리로 외친 것은 소론의 이런 믿음이 표출된 것이었다. 그의 말이 얼마나 심했던지 영조는 사관에게 그 말을 기록하지 말도록 명했다. 『영조실록』에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不忍之言)고 기록된 것은 이 때문이다.

당시 상황에 비추어 추측하면, 「선왕을 독살한 역적놈들아」라는 취지의 말을 했을 것이다. 영조는 무려 22차례에 걸쳐서 이천해에게 압슬형(壓膝刑·깨진 사금파리를 바닥에 놓은 후 무거운 돌을 무릎 위에 올려 놓는 형벌) 등을 가했으나 이천해는 끝내 불복하고 죽어갔다. 경종의 죽음에 관한 흉흉한 소문들은 이천해 사건을 계기로 전국에 더욱 널리 퍼졌다.

이는 영조 즉위의 정통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노론측에서는 「선왕(경종)이 병이 있었던 사실을 밝혀 놓아야 이런 흉한 말이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경종이 병 때문에 승하했다」고 전국에 반포했다. 그러나 상황은 이런 반포문으로 진정되지 않았다. 심지어 서울 한복판까지 경종이 살해당했음을 주장하는 대자보가 나붙기도 했다.

당시 경종의 죽음을 두고 퍼졌던 소문 중에는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란 말까지 있었다. 노론 영수 민진원이 귀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태인 다리 밑에서 여자 아이 한 명을 주워왔는데 노론 김춘택이 그녀를 범해 아이를 갖게 한 후 궁중에 들여보내 숙종의 총애를 받게 해 낳은 아이가 바로 영조라는 소문이었다.

국왕의 핏줄까지 당파적 입장에서 의심할 정도로 인심이 뒤숭숭했던 상황이었다. 이는 영조에게 평생을 두고 씻을 수 없는 부담이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淑嬪) 최씨는 앞서 말한 대로 궁궐의 청소를 맡은 무수리 출신이었다. 숙종이 재위 20년째 되던 34세에 태어난 영조는 비록 천인의 몸에서 났으나 나라와 숙종의 경사였다. 숙종의 세 정비(正妃)인 인경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 그리고 인원왕후 김씨 등은 한결같이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인현왕후와 인원왕후는 아들은커녕 딸도 낳지 못하는 석녀(石女)였다.

미천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콤플렉스 심각

14세에 임금이 된 숙종은 무려 16년간 아들을 낳지 못했다. 왕조국가에서 임금의 자리를 이을 후사가 없는 틈은 정치적 불안이 개입할 여지를 의미한다. 숙종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왕가를 둘러싼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숙종의 이런 불안을 씻어준 여인이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였으며 또 다른 여인이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였다.

그러나 숙종이 왕자를 끔찍이 아낀다 해서 천인 출신 어머니의 핏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궁녀에도 끼지 못하는 천한 무수리 출신임은 영조에게는 심각한 콤플렉스였다. 명문대가 사대부들이 득실대는 궁중에서 왕의 어머니가 천인인 사실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영조는 즉위 이후 이미 죽은 어머니의 위상을 높이려 힘겨운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효도의 감정이 앞섰겠지만, 곧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정치적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재위 15년 영조는 중종 반정 공신들에게 억울하게 쫓겨난 중종의 첫 부인 신씨(愼氏)의 위호(位號)를 복위시키면서 자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영조는 복위된 신씨의 묘를 배알하면서 전격적으로 어머니 최씨의 묘를 함께 배알했다.

신하들은 이 돌출행동에 놀랐으나 영조로서는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임이 다음 행보에서 드러났다. 최씨의 묘를 배알할 때 신하들이 소홀히 했다면서 영조는 진료를 거부했다. 신하들로 하여금 숙빈 최씨를 소홀히 대하지 못하도록 이른바 외곽을 치는 전술을 사용한 것이다. 영조 즉위 초는 정치적 불안이 잇따랐다.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소문이 끊이지 않는 데다 홍수와 가뭄이 계속됐다.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그 원인을 국왕에게 돌렸다. 당연히 영조가 선왕 경종을 독살했기 때문에 흉년이 든다는 소문이 퍼졌다.

정치적 위기를 맞은 영조는 인간적인 고민을 토로한다. 『실록』에는 「나라를 유지하는 것은 백성이고, 백성을 유지하는 것은 먹을 것이다. 근년 이래 각 도에 흉년이 드니 내 마음이 매우 슬프다」고 적고 있다.

영조는 제주도에 곡식을 배로 날라다 주는 등 민심을 안정시키는 한편 붕당·사치·음주의 3가지를 금하는 「계서」(戒書)를 반포했다. 그러나 영조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자파의 정권 장악에 열을 올렸다. 영조를 임금으로 만든 노론은 경종 때 소론에게 당한 복수를 하려고 했다. 즉 경종 때 노론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을 역적으로 몬 소론을 영조에 대한 역모로 처단하라고 주장했다.

자신을 역적으로 몬 소론 용서한 대화해 정신

영조는 비록 노론의 지지로 임금이 되긴 했으나 일단 즉위한 이상 특정 당파의 임금이 아니라 온 나라, 모든 당파의 임금이고 싶었다. 하지만 노론은 영조의 즉위를 도와준 자신들에게 정치적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영조는 이를 단연코 거부했다. 노론이 계속 소론을 제거할 것을 요청하자 영조는 「노론이 임금에게 사람을 죽이도록 유도한다」고 화를 내면서 정권을 소론 온건파에게 넘겨 주었다.

이런 와중에 이인좌(李麟佐)의 난(1728·영조 4년)이 발생했다. 이인좌의 난은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이 합세해서 일으킨 것이었다. 만약 영조가 소론 온건파에게 정권을 넘긴 상황이 아니라면 이 난의 여파는 훨씬 컸을 것이다. 노론이 계속 소론을 치죄하자고 공격하는 상황이었으면 소론 전체가 이인좌에게 가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인좌의 난이 진압되자 노론은 이를 또다시 소론 탄압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영조는 「지금 역변(逆變)이 당론(黨論) 때문에 일어났으니 지금부터 당론을 논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리겠다」고 선언하면서 반대로 탕평책을 시행했다. 그러면서 노론과 소론을 골고루 등용하였으며 두 당파를 화해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영조는 두 당파의 영수인 노론의 민진원(閔鎭遠)과 소론의 이광좌(李光佐)를 불러 두 사람의 손을 맞잡고 화해를 종용하기도 했을 정도로 두 당을 화해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기도 했다.

사실 탕평책의 정신은 영조로서는 간단하지 않다. 탕평책은 영조를 역적으로 몬 소론을 용서하는 대화해의 정신이었다. 영조의 즉위 전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들은 「임인옥안」을 작성 영조를 역적의 괴수로 올려놓았는데, 탕평책은 바로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동(大同)을 추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곧 영조가 무수리 출신 어머니 소생임과 등극시 경종을 독살했다는 모함 등 두가지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의 인격을 완성해 자기승리를 거두었음을 의미한다.

탕평책을 시행하는 대신 영조는 「임인옥안」을 무효로 만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위험한 물건」을 제거하려는 인간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영조 14년(1738)이 되던 해 자신의 처조카 서덕수를 신원하고, 그 3년 뒤에는 「신유대훈」(辛酉大朔)을 발표해 자신의 원죄에서 벗어났다. 「임인옥안」의 소각과 경종 초에 자신을 세제로 책봉한 것은 역모가 아니라 대비 김씨와 경종의 하교에 의한 정당한 조치라고 해석한 것이 「신유대훈」의 내용이었다. 이로써 왕위에 오른 지 무려 17년만에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역적의 혐의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나게 됐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강력히 추진한 탕평책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다. 「임인옥안」과 세제대리청정을 정당화함은 이를 역적으로 몬 소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영조 자신이 노론의 임금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셈이니 탕평의 정신에는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 영조가 아무리 탕평책을 추진해도 영조 정권의 본질은 노론 정권임을 자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영조가 자신의 족쇄를 풀기 위해서는 자신을 옭아맸던 당파(소론)를 이론적으로는 부정해야 하는 한계를 말해 주는 것이다. 영조 자신은 소론을 용서하고 싶고 현실적으로 용서한다 할지라도 노론측에서는 언제든 「세제대리청정」이 정당했음을 들어 소론 탄압에 이용할 수 있는 재료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정국에서 노론의 주도권은 강화되었고 여기에 대해 많은 반발이 일었다.

■ 사진설명

①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몹시 애석해 한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 융릉을 정성스럽고 화려하게 꾸몄다. 봉분을 정교한 연화문과 목단으로 새긴 병풍석으로 두르고 있다.

② 사도세자의 묘소인 융릉에 도열해 있는 무인석. 다소곳하지만 기풍을 잃지 않은 자세에 미소 띤 얼굴 표정이 편안한 느낌을 준다. 무인의 내면세계와 무인석을 만든 석공의 인품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③ 조선시대 왕가에서는 유일의 열녀 칭호를 받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열녀문(홍문). 현판 글씨는 정조가 직접 썼다.

■ 사진설명

①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위치한 화순옹주와 그의 부군 김한신의 합묘. 김한신은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다. 추사 고택 바로 옆에 있으며, 묘소 앞에는 사과나무 과수원이 펼쳐져 있는 한적한 곳이다.

②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자신이 궁중에서 겪은 일들을 저술한 회고록 『한중록』. 필사본은 14종이 발견됐으며, 국문본·한문본·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③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증손자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택(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소재). 안채와 사랑채·문간채·사당채를 갖췄으며, 전형적인 중부지방 「대갓집」 형태다.

(계속)

출전 : WIN 199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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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3 사전1 [조선] 영조의 균역법 실시 (정연식) 이창호 2002-11-03 1943
2982 사전1 [조선] 영조의 탕평정치 (박광용) 이창호 2002-11-03 1990
2981 사전1 [조선] 송인명 (한메) 이창호 2002-11-01 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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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