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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03 (일)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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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768      
[조선] 윤증의 사상 (고세훈)
역사인물 탐구 : 대통합의 정치가 명재 윤증 전환기 사상

고세훈 <시사월간 WIN 기자>

WIN / 통권 32호 1998년 2월호

임란·호란 이후 민심통합 절감
경직된 지배 이데올로기 배격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조선시대의 사상을 관념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理)가 먼저인가 기(氣)가 먼저인가 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인 문제로 해가 지고 달이 기운 것으로 여긴다.

때론 이가 먼저면 어떻고 기가 먼저면 어떤가 라는 냉소주의가 현대인들의 뇌리에 깃들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상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진공 속에서 존재하는 무형의 물질이 아니다.

지금부터 약 3세기 전 윤증(1629~1714년)이 살던 시대는 사회 전반적인 혼란기였다. 윤증이 태어난 인조 7년(1629)은 2년 전 일어났던 정묘호란(丁卯胡亂)의 참상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하지만 정묘호란은 시작에 불과했다. 윤증이 아홉 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국토가 유린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윤증은 병자호란으로 어머니를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청군에게 잡혀 고초를 맛보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즉 양란(兩亂)이 준 영향은 윤증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이란 국가가 그 영향으로 휘청거렸다. 왜란 전 1백70만 결에 달했던 농지 면적이 임란 후에는 3분의 1 수준인 54만 결로 줄어들었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전염병이 횡행했다. 광해군 때 허준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한 것은 기근과 질병이 횡행하는 참담한 현실에 대한 현실적 대응이기도 했다.

양란은 조선사회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현재 한국의 지배이념이 자본주의이자 자유민주주의라면 조선의 지배이념은 성리학이었다. 남송의 주희(朱憙)가 집대성한 성리학은 사대부의 입장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학문이었다. 양란은 바로 사대부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한가 라는 의문을 제기한 계기가 됐다.

그나마 선조의 뒤를 이어 집권한 광해군 때의 북인정권은 실리적인 개혁정책을 펼쳐 나갔다. 북인의 종주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다른 주자학자들이 이기론(理氣論)을 가지고 다툴 때 이를 공리공담으로 일축하고 스스로 밭을 갈며 인격 도야에 일생을 바친 프래그머티스트였다.

서인들은 광해군과 북인정권의 이런 개혁정책들을 성리학적 지배체제에서 일탈한 사도(邪道)로 보았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등거리 외교는 명에 대한 의리를 버리고 소리(小利)를 좇는 행위였고, 인목대비를 내쫓고 영창대군을 죽인 것은 인륜을 저버린 패륜(悖倫)으로 보맘年?것이다.

율곡 이이의 제자들인 서인들은 반정(反正)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세웠다. 쿠데타로 장악한 권력은 자신들이 무너뜨린 정권의 모든 것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 서인정권은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를 명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고 「청을 배격하고 명과 가까이 지내는」 배청친명(排淸親明) 외교정책으로 전환했다. 그것이 주자학에서 말하는 명분론에 합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명분을 뒷받침할 힘이었다. 정통으로 자부하는 중국의 남송이 오랑캐라 멸시했던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무릎을 꿇은 것처럼 인조정권도 여진족이 세운 후금, 곧 청나라에 무릎 꿇고 말았다.

인조는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신하의 예를 취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볼모로 끌려갔다. 겨우 임진왜란의 상흔이 아물어 가는가 싶었는데 백성들은 또다시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었다. 청군의 말발굽이 농토를 휩쓸었고 백성들은 다시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렸다. 이런 현상은 조선의 지배층에게 반성을 요구했다.

조선 성리학의 두 대가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다. 퇴계 이황이 주희의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한 인물이라면 율곡 이이는 이를 조선화시킨 사상가ㆍ정치가였다.

율곡은 시대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율곡이 바라볼 때 임란 직전의 조선은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한 경장기(更張期)였다. 그는 각종 개혁정책을 주창했다. 잡다한 공납을 쌀로 통일해 받자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과 경제정책을 관할하는 경제사(經濟司)의 설치 주장 등이 이런 개혁정치의 예다.

예론 통해 사회체제 확립하려는 지배층

하지만 사상적인 면에서 율곡은 그의 개혁사상을 이을 인물을 길러내지 못했다. 율곡의 학통을 이은 인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꼽는다. 하지만 김장생은 이이의 현실개혁적인 이학(理學)사상을 본받지 않고 예학 쪽에 치중한 학자였다.

김장생이 지은 『상례비고』(喪禮備考)나 『가례집람』(家禮輯覽)은 당시 예학의 거봉이었던 송익필의 『가례주해』(家禮註解)의 바탕 위에서 저술된 책들이라 할 수 있다.

김장생이 예학에 집착한 것은 예학이 양란 이후 무너지는 사회기강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학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맹자가 말한 예는 사양하는 마음이다. 즉 자기 욕심을 버리고 분수를 지키는 것이 예의 마음이다.

양란 이후 조선 농민들은 양반 사대부들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깨닫고 마음속으로는 그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양반들의 입장에서 농민들이 사대부를 넘보는 것은 분수를 넘는 일이었고 예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성리학이 예학으로 흐른 것은 무너지는 사회 기강을 예로써 다시 잡으려 한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양란 이후의 사회적 혼란들이 예학의 힘만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들은 아니었다. 사회적 혼란은 당면 현안이 해결돼 안정되어야지, 예를 강조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로 조선 중후기 사대부의 사상사가 예학으로 흐른 것은 당시의 시대적 과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당시 조선사회가 요구하는 사상은 주자학의 절대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사상, 상대성을 인정하는 융통성 있는 사상이었다.

주자학적 절대주의에 반발하는 흐름들

주자학적 절대주의 체제로 사회혼란을 수습하려는 방안에 대해 사대부 사회 내부에서 반발하는 흐름도 있었다. 윤휴가 주희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 이런 흐름의 하나다.

조선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注)일 것이다. 『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대학』(大學)에 주희가 주(注)를 달아 놓은 책이다. 즉 『사서집주』는 공자나 맹자의 사상에 대한 주희의 해석이다. 주희의 이 해석 자체섟?조선시대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하나의 「성전」(聖典)이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면 「유학을 어지럽힌 적」이란 뜻의 「사문난적」(斯門亂賊)으로 몰렸다. 이런 주희의 해석에 반기를 든 인물이 바로 남인 학자인 백호(白湖) 윤휴였다. 윤휴는 주희의 학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주희와 대등한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경전을 해석했다.

윤휴가 주희와 다르게 경전을 해석하자 당시 주자학의 대표학자 송시열은 발끈해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사문난적으로 몰린다는 것은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윤휴 또한 자신의 사상적 확신에 의해 주희의 학설을 비판했으므로 물러서지 않았다.

송시열이 자신을 사문난적으로 공격하자 윤휴는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이 안단 말인가? 주자는 내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이길 것이다』라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윤휴의 학설은 주자학이 지배이념인 조선에서 위험한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비판하고 나선 격이었다. 윤휴가 자신의 학설을 철회하지 않음으로써 이 문제는 당시 지식인 사회의 커다란 현안이 되었다.

많은 사대부들은 송시열의 위세에 눌려 윤휴를 비판했지만 윤휴를 옹호한 일부 사대부도 있었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가 그런 인물이었다.

윤선거가 윤휴를 옹호하자 송시열은 윤선거도 비판했고 그 결과 저명한 서인학자들 사이에 강경에 있는 황산서원(黃山書院·죽림서원)에서 회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윤선거가 윤휴를 지지한 것은 단순한 개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주자학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자기 반성이었다. 즉 주자학 유일사상 체계로는 더이상 사회를 이끌고 갈 수 없음을 자각한 일부 지배층이 사상면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주자학 절대주의를 신봉하는 송시열과 주자학 상대주의를 인정하려는 윤선거의 입장 차이는 회니시비(懷泥是非)라 불리는 조선시대 유명했던 한 논쟁으로 표출된다. 싸움의 한 당사자인 송시열이 충청도 회덕(懷德)에 살았고 다른 당사자인 윤증이 충청도 이성(泥城·현 논산시 노성면)에 살았기에 두 사람의 거주지 지명 첫글자를 따서 회니시비라고 불렀다.

회니시비는 표면적으로는 윤선거가 사망한 후 아들 윤증이 송시열에게 비문집필을 부탁한 데서 비롯됐다. 송시열은 비문집필은 수락했지만 대신 아주 불성실한 비문을 지어 보내는 것으로 주자학에서 일탈했다고 판단한 윤선거의 삶을 격하했다.

송시열은 자신이 직접 비문을 짓지 않고 박세채가 지은 행장에 따라 생전의 행적과 관직을 기술한 후, 「박세채가 극진한 행장을 지었기에 나는 옮기기만 하고 짓지는 않았다」(述而不作)라고 덧붙여서 비문을 끝맺었다.

박세채가 윤선거의 생애를 극찬했으므로 자신은 새로 짓지 않고 박세채의 행장에 따라 옮기기만 했다는 조롱이다. 이는 윤선거의 생애에 관한 모독이었다.

송시열의 비문에 감정이 섞여 있다는 사실은 그가 윤선거가 죽었을 때 보낸 제문(祭文)을 보면 명백해진다. 비문 집필을 의뢰받기 4년 전인 현종 10년(1669) 윤선거가 죽었을 때 송시열은 극진한 제문을 보내 조상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천지가 어지러운데 별 하나 밝았고
연꽃으로 옷 입고 난초로 띠를 하니 맑아 때가 없도다.」

「별·연꽃·난초」 등으로 윤선거의 삶을 극찬했다. 사실 송시열과 윤선거는 같은 스승 밑에서 수학한 40년지기 친구였다. 서로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이였다. 하지만 송시열은 윤증이 윤휴의 제문도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뒤 송시열은 「윤씨 부자는 역시 윤휴와 관계를 끊지 않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주자학자 송시열에게 윤휴는 사문난적이었다. 윤휴와 교제하는 윤선거 부자 또한 주자학자가 아니라는 의심을 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불성실한 비문을 지어 보낸 것이다.

이런 내용의 비문을 부친의 무덤 앞에 세워 놓을 수 없었던 윤증은 여러 차례 긴 편지를 송시열에게 보내 비문을 고쳐 줄 것을 요청했다.

심지어 숙종 2년(1676년)에는 송시열이 유배된 경상도 장기(長耆)까지 찾아가 비문을 고쳐 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송시열은 몇군데 지엽적인 글자를 고치는 시늉만 했을 뿐 원뜻은 조금도 손보지 않았다.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았는 데도 비문을 고쳐 주지 않는 송시열을 윤증은 속으로 원망했다.

하지만 비문을 고쳐 주지 않았다고 스승인 송시열을 드러내 놓고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사제의 연을 끊는 데까지 발전했다.

윤선거 공박하는 강화도사건 재론

이런 와중에 송시열과 그 문도들은 강화도 사건을 재론하고 나섰다. 윤선거의 친구들과 부인이 죽었는 데도 윤선거 혼자 살아남은 것은 의를 저버린 비겁한 행위라는 비판이었다. 회니시비가 격화된 것이다. 같이 순절하기로 한 친구들이 죽고 부인까지 자결했는데 혼자 강화도를 빠져나온 윤선거의 행적은 명분론이 횡행하던 당시 분명 비판받을 소지가 있었다.

윤선거 자신은 효종에게 상소를 올려 성이 함락된 상태에서 그냥 죽기보다는 남한산성에서 농성하고 있는 와병 중의 부친 윤황을 만나고 난 뒤에 죽기 위해 강화도를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강화도사건을 가장 뼈아프게 여긴 인물은 다름아닌 윤선거 자신이었다. 그는 강화도 사건 이후 벼슬과 재혼도 단념한 채 독신으로 고향에서 학문과 후학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강화도 사건에 대해 근신하는 자세로 평생을 바쳤던 것이다.

강화도 사건에 대한 송시열측의 비판은 한마디로 말해 왜 죽지 않고 살아 남았느냐는 것이다. 강화도 사건에서 약 3백50여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윤선거의 행적에 대한 비난은 50보 도망간 사람이 1백보 도망간 사람을 비난하는 자기 모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윤선거처럼 강화도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나 송시열처럼 남한산성에서 살아남은 사람 모두 마찬가지 입장이다. 치욕적인 역사에서 살아남은 사람 모두 함께 져야 할 한 시대의 부채지 남한산성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강화도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비판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은 아니라 생각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문문제와 강화도사건에 대한 회니시비는 당시 사회 지배층이 정권을 지켜 가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됐다. 주자학 절대주의 체제에 반기를 든 상대주의 세력에 대한 정치공세였던 것이다.

강화도 사건에 대한 송시열측의 비판이 정치공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송시열이 일찍이 강화도사건에 대해 한여석(韓汝碩)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

「강화도 사건은 내가 항상 너그럽게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사문난적 논쟁, 예송 논쟁 등이 발생하면서 「너그럽게 생각」하던 강화도 사건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좋은 재료로 변질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사회를 바라보는 세계관의 차이를 둘러싸고 두 세력은 확연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즉 송시열 중심의 노론(老論)과 윤증 중심의 소론(少論)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노론은 주자학을 절대시한 반면 소론은 상대주의적 자세를 취했다. 또한 노론이 이상주의적·명분론적 정치을 지니고 있었다면 소론은 현실주의적·실질적 정치관을 갖고 있었다.

이 당시 노론이 얼마나 명분론적인 정치관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으로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둘러싼 논쟁을 들 수 있다. 삼전도 비문이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한 자리에 세운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현 서울시 송파구 소재)를 말한다.

서인, 소론과 노론으로 갈리다

이 비문을 작성한 사람은 이경석(李景錫)이었다. 이경석이 삼전도 비문을 쓴 이유는 그가 친청파였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그의 직책이 문한을 담당했던 예문관 제학(提學)이었기 때문이었다. 직책상 할 수 없이 맡은 악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종 12년(1671) 이경석이 사망했을 때 송시열과 그 문도들은 그가 생전에 삼전도 비문을 찬술한 것을 비판하고 나섰다.

노론의 이경석 비판에 소론은 분개했다. 소론 남구만의 항변은 이에 대한 소론측의 입장을 잘 나타낸다.

「삼전도 비문은 청나라에 항복한 상황에서 조정의 누구라도 지어야 할 글이었다. 신하들이 짓지 않으면 인조임금 자신이라도 지어야 했을 글이다.」

남구만의 항의처럼 삼전도 비문은 윤선거의 강화도 사건과 마찬가지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자 패전국의 시대적 부채이지 비문을 짓지 않아도 좋을 직책에 있었던 인사가 비문을 지을 직책에 있었던 인물을 비난할 수 있는 소재는 아니었다.

이경석이 김자점같은 친청파였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경석은 친청파가 아니라 북벌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청나라에 체포되어 사형 위기에 처했다가 인조가 막대한 뇌물을 조사관들에게 주어서 겨우 목숨을 건진 반청파였다.

그는 의주 백마산성에 구금돼 있었다. 청나라 임금은 이경석을 「조선 조정에 영원히 등용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석방을 허락했던 대표적인 반청인사였다. 이런 이경석을 삼전도 비문을 썼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것은 본(本)은 저버린 채 말(末)에만 집착하는 정치공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경석의 비문에 대한 논쟁은 소론인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에 대한 공세의 성격도 있었다. 박세당은 윤증의 매형인 박세구(朴世垢)의 형이었다. 박세당은 삼전도 비문 논쟁 때 송시열을 거침없이 비난했다.

그가 만년에 『사변록』(思辨錄)을 지어 주희의 견해를 비판하고 윤휴처럼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세우자 노론은 그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박세당은 관직이 삭탈되고 유배가는 도중 죽고 말았다.

윤증이 영수로 있던 소론은 노론측의 이런 명분론적 정치행위에 비판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윤증은 예송논쟁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예론을 가지고 서로 싸운 지 10년이 넘었다.

혹 서인들이 옳고 남인들이 그르며, 혹 남인들이 옳고 서인들이 그르다 한들 무슨 큰 차이가 나겠는가? 내가 3년복이 맞고 1년복이 틀리다는 견해를 바꾸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은 이미 결정이 되었는 데도 서로 공격하여 끝없는 화를 만들고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아주 작은 복제에 관한 의논 한가지일 뿐이니 그 모양이 얼마나 우습고 괴이한가?」며 통절해 했다.

윤증이 숙종 7년 작성한 「신유의서」(辛酉擬書)에는 송시열이 이끄는 허구적인 명분론적 정치행위에 대한 더욱 강한 비판이 담겨져 있다.

「선생(송시열)이 대의(大義·북벌)를 주창하던 초기에는 인심을 각성시키고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했으나 대의가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자 아무런 실상이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이 때문에 내정(內政)과 국방(國防)을 튼튼히 해 청나라에 설욕하려는 기도가 실효를 거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고작해서 선생의 작위가 높아진 것과 명성이 넘쳐 흐르는 것뿐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 노론의 정치행위에 대한 비판이었다. 윤증은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남인에 대해 무자비한 정치보복을 감행하고, 주자학 절대주의를 통해 체제 강화에 힘쓰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윤증은 이 글을 송시열에게 보내기 앞서 박세채에게 보여주었다. 박세채는 그 내용이 지나치게 강경하다며 보내지 말라고 충고했다. 윤증은 이 충고에 따라 송시열에게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박세채의 사위이자 송시열의 손자인 송순석(宋淳錫)이 이를 박세채의 집에서 몰래 가져다 송시열에게 줌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본 송시열은 대노했다. 「반드시 윤증이 나를 죽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유의서」는 단순히 송시열에 대한 개인적 비판이 아니라 송시열의 정치행태에 대한 비판이자 윤증 자신의 독자적인 정견을 명확히 한 글이다. 윤증의 이런 정치관에 젊은 서인들이 대거 동조하여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서인이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윤증 중심의 소론으로 갈라지자 노론은 윤증을 스승을 배신한 배사(背師)인물로 몰았다. 하지만 이 또한 노론의 정치공세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윤증의 가장 큰 스승은 송시열이 아니라 아버지 윤선거였기 때문이다.

윤증은 어려서 가학(家學)으로 학문을 시작해 윤선거가 사망하는 42세 때까지 아버지에게 사사했다. 송시열은 한때의 스승이었지만 아버지는 자신에게 몸과 학문을 준 평생의 스승이었다. 윤선거와 송시열의 틈이 벌어져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을 때 윤증이 아버지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를 택한 행위를 배사로 몰아세운다면 윤증이 아버지를 버리고 송시열을 택했을 때는 아버지를 버린 패륜이 되는 것이다.

양명학은 당시 용납되지 않던 「불온사상」

조선사상사에는 외주내왕(外主內王), 혹은 양주음왕(陽主陰王)이라는 특이한 용어들이 존재한다. 겉으로는 주자학자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양명학자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등은 양명학자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속마음을 숨기고 양명학을 주장했던 인물로는 이광사(李匡師)·이긍익(李肯翊) 등이 있다. 윤증은 외주내왕적인 인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윤증은 조선의 대표적 양명학자인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로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불운한 처지를 위로하고 학문적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외주내왕은 주자학 절대주의 시대가 만든 굴절된 철학용어요 정치용어다. 사문난적으로 몰렸던 윤휴의 비참한 종말이 윤증으로 하여금 양명학을 공개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막았는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신중하고 내성적 성격이었던 윤증은 부친과 같은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꺼려했을 것이다.

윤휴와 박세당이 주희와 다른 해석을 했다 하여 사문난적으로 몰린 판에 주자학 자체를 비판하는 양명학을 표방했을 경우 어떤 대우를 받을지는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양명학은 인식과 실천이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문이었다. 즉 지행합일(知行合一)이다. 물론 성리학이 실천을 경시하는 학문은 아니지만 성리학은 변화하는 사회현상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천을 강조하는 학문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고 할 수 있다.

또 성리학이 양반 지주의 입장에서 세상을 해석했다면 양명학은 보다 농민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해석했다.

윤증보다 20세 연하였던 정제두는 평택 현감으로 있던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남인정권이 들어서자 벼슬을 내놓고 안산(安山)으로 내려가 칩거하며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이곳에서 노성에 칩거한 윤증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다.

윤증의 신중한 성격은 양명학에 대한 자세에서도 나타난다. 윤증은 정제두에게 숙종 25년(1699)에 보낸 편지에서 「예전의 사우(師友)들과 함께 보았던 양명학 서적들을 지금은 버렸는지 아닌지 알 수 없소」라고 적고 있다.

이는 윤증이 사우들과 함께 양명학 서적들을 읽어 보았다는 유력한 증거다. 그리고 양명학 서적들은 오늘날의 「불온서적」으로 여겨져, 보고 나면 없애 버리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겉으로는 성리학자를 자처했다.

숙종 30년에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과연 내가 주위 사람들을 양명학으로 빠뜨려 성리학으로 돌아올 수 없게 하였다면 어찌 후세의 책망을 면할 수 있겠소?』

정제두는 숙종 35년(1709) 안산을 떠나 강화도의 하곡(霞谷)으로 이주했다. 그는 여기에서 조선 양명학의 본산인 강화학파(江華學派)를 형성시킨다. 만약 그가 강화도가 아닌 서울에서 양명학을 연구했다면 그 또한 윤휴나 박세당 같은 운명에 처해졌을 것이다.

적어도 강화도에 칩거한 그의 양명학이 정권에 위험시되지 않았기에 온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제두가 강화로 이주하자 정쟁에서 패배했거나 당쟁의 화를 피해 이광명(李匡明)·신대우(申大羽) 등 소론계 인사들이 강화로 이주해 와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강화도는 주자학 절대주의가 횡행하던 조선에서 유일하게 학문적 자유가 숨쉬는 공간이었다. 윤증이 칩거한 충청도 노성과 정제두가 칩거한 강화도 사이에 오갔던 편지는 절대주의 시대에 조선 학문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가느다란 끈이었다.

출전 : WIN 1998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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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8 사전1 [조선] 윤증의 사상 (고세훈) 이창호 2002-11-03 1768
2987 사전1 [조선] 회니본말 (한메) 이창호 2002-11-03 981
2986 사전1 [조선] 회니본말 (민족) 이창호 2002-11-03 997
2985 사전1 [조선] 영조의 생애와 발자취 2 (이덕일) 이창호 2002-11-03 1680
2984 사전1 [조선] 영조의 생애와 발자취 1 (이덕일) 이창호 2002-11-03 3202
2983 사전1 [조선] 영조의 균역법 실시 (정연식) 이창호 2002-11-03 1942
2982 사전1 [조선] 영조의 탕평정치 (박광용) 이창호 2002-11-03 1990
2981 사전1 [조선] 송인명 (한메) 이창호 2002-11-01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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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