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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8-25 (일) 21:34
분 류 사전1
ㆍ조회: 21479      
[조선] 임진왜란 난중의 사회상 (민족)
임진왜란(난중의 사회상)

세부항목

임진왜란
임진왜란(배경)
임진왜란(전쟁의 발발)
임진왜란(의병의 활동)
임진왜란(수군의 활약)
임진왜란(조·명군의 반격과 휴전 성립)
임진왜란(정유재란)
임진왜란(난중의 사회상)
임진왜란(결과)
임진왜란(참고문헌)

왜란 중에 조선 군민의 가장 큰 괴로움은 식량난이었다. 명나라 원군이 조선땅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식량난이나 군량미 부족 보다도 왜군과 맞서 싸울 전투 병력이 더 절실히 요망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원군이 들어온 뒤에는 훈련된 병력의 부족 보다도 군량미의 부족이 더 무겁고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명나라 군사가 내원할 때는 병력만을 보낸 것이 아니라 무기 등 군수 물자와 군량미도 함께 보내왔다. 그런데 군량미는 명군에 의해 그들의 진영까지 운반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만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명군의 급식을 위한 조선측의 군량미 조달은 적기에 공급되기가 어려웠다.

군량미의 수송은 육로와 해로 두 길을 택하였다. 명군이 내원한 이래 1594년(선조 27) 8월 일단 본국으로 철수하기까지의 기간은 주로 육로로 수송하였다.

이를 위해 싸움에 나갈 수 없는 사람이나 부녀자 및 각처의 의병이나 의승군을 동원하였다. 또 수복 지역의 소나 말은 물론, 왕의 호위병과 동궁의 행차를 따르는 군인 중 말을 소유한 자도 차출하여 군량미 운송에 나서게 하였다.

해로는 정유재란으로 명군이 두번째 내원하면서부터 많이 이용하였다. 정부는 이를 위하여 각처에 산재한 선척을 징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궁가(宮家)나 내수사(內需司)의 배를 빙자하여 거절하는 예가 많아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민력이 다하여 전선을 만들 수 없는 형편에서 운량선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의주에 쌓아둔 명나라 군량미를 육로나 해로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많은 난관이 있었다. 운송 도중에 많은 양이 소모되었고, 인력이 부족하고 수송 수단도 원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명나라에서 보낸 양곡으로 명군을 급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족량을 국내에서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 정부는 국내 양곡을 조선 관군 보다는 명군에게 우선적으로 배분하였다. 그러나 국내 양곡을 조달하는 데는 애로가 컸으며, 민간인의 희생이 수반되었다. 군량을 충당할 수 있는 길은 전세와 곡물작미·노비신공작미·모속(募粟)·무속(貿粟)·둔전소출 등이었다. 이 중에서 정부의 필요 경비를 제한 나머지는 모두 군량으로 충당되었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전세는 경작할 종자가 없는데다가 전쟁으로 인구 감소에 따른 경지 면적의 감축으로 격감되었다. 납속 사목(納粟事目)에 의한 모곡(募穀)은 신분 상승의 길을 열어주기는 했으나 모속 관료의 비행으로 관(官)으로 납부되는 양은 많지 않았다.

난중의 민중의 생활은 더욱 궁핍하여 인상살식(人相殺食 :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음)의 끔찍한 상황까지 연출되었다. 왜란 전에 170만 결이던 전국의 경지 면적이 54만 결로 감소된 것도 노동력의 감소에 큰 원인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각처에서 크고 작은 반란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 1594년 송유진(宋儒眞)의 난과 1596년에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가장 두드러진다.

왜란 초기 산발적인 소요는 신분 해방을 위해 일어났다고는 해도 불만을 느껴온 지배층에 대한 우발적이며 비조직적인 행동이었다. 또 이러한 행위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왜적의 세력권 안에서 발생했고 직접 왕정의 전복을 겨냥한 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송유진·이몽학의 난은 규모나 조직 면에서 양상이 판이하였다. 주모자들은 정면으로 현 왕권을 타도하고 새 국가를 수립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또한 두 반란은 왜군이 화의를 조건으로 이미 남쪽으로 철수해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충청도 지역이 중심이었다.

이런 점에서 임란 초기 감사나 수령들의 수탈이나 혹사에 불만을 품었던 민중이나, 왜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바라만 보다가 흩어지는 수신(帥臣)들을 증오한 농민들의 이반과는 성격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이들 두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사회에 던진 충격은 대단히 컸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피지배층에게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가 군공이나 납속을 통하여 주어지기는 했으나 난국 타개가 목적이었으므로 그 문이 넓지는 않았다.

임진란 초기에 의병 활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대부분 지배층이어서 그 밑의 의병들은 전공이 표면에 드러나기 어려웠다. 그나마 의병이 해체되자 한가닥 신분 상승의 기회마저 끊어졌다.

납속의 길도 쉽지는 않았다. 정부에서 발표한 납속 사목은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아사 상태에 처한 양민들로서는 납속으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반란의 주도자가 의병 활동하던 사람이 아니면 납속의 임무를 띠고 활약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많은 시사를 준다고 하겠다.

전쟁에는 많은 인명의 손실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는 전란을 통해 많은 것을 터득하고 배우게 된다. 송유진과 이몽학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전란을 통하여 많은 것을 깨달은 피지배층의 가담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한편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에 끌려들었다가 죽음을 당한 이산겸(李山謙)과 김덕령(金德齡)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당시 사회적인 추세로 보아 중앙 정부가 반적의 입을 빙자해서 고의적으로 만든 사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이산겸과 김덕령은 끝까지 의병 활동을 하여 중망이 높고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이들을 처형한 것은 그들이 의병 세력의 기반을 믿고 혹 동요되는 민심을 이용하여 반란이라도 획책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취해진 조처였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이장희>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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