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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10-04 (목) 22:57
분 류 사전1
ㆍ조회: 901      
[조선] 공법 (두산)
공법 貢法

조선 전기 토지에 대한 세금 제도.

본래 중국 하(夏)나라 때 시행된 것으로, 농민 한 사람에게 토지를 50무(畝)씩 지급하고 그 중 10분의 1에 해당하는 5무의 수확량을 세금으로 거둔 정액세제였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기 세종이 처음으로 토지의 세금을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정액 세법의 원리를 적용하였다. 1427년(세종 9)부터 그 시행 문제를 논의하여 1444년(세종 26)에 가서야 하나의 세제로 확정되었고, 지역별로 점차 시행하여 1489년(성종 20)에야 전국에 걸쳐 실시하였다.

본래 해마다 일정한 액수를 거두는 정액세로 구상되었으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해마다 농사 형편을 감안하여 세금을 차등 징수하도록 함으로써 중국의 공법과는 그 성격이 달라지게 되었다. 1388년(고려 우왕 1년)에 과전법을 실시하면서 전국의 토지를 세 등급으로 나누고, 세금을 부과하는 기준이 되는 면적인 1결의 토지세를 수확량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30말로 정하되, 추수기에 관원이 직접 논밭에 나가 수확량을 보고 세금 액수를 감면해주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실시하였다.

이때만 해도 아직 논밭을 놀리지 않고 매년 경작하는 연작법(連作法)이 전국적으로 보편화되지 못하고, 한 해 경작한 뒤에는 지력이 회복될 때까지 놀렸다가 다시 경작하는 휴한법(休閑法)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또한 농업 생산력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았으므로 해마다 달라지는 농사 상황을 살펴 세금 액수를 확정하는 것은 세금 징수에 앞서 이루어져야 할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관원이 부정 행위를 자행하였고, 이를 지양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토지세를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게다가 14∼15세기 이래 농사 기술이 발전하여 땅을 놀리지 않고 매년 농사지을 수 있게 되어 같은 면적의 토지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양이 훨씬 많아졌으므로, 이 부분을 중앙 정부의 재정으로 흡수할 필요가 있었다.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면서 15세기 중반을 전후한 시기에 수령의 권한이 강화되고 면리가 정비되어 전세 수취의 실효를 기할 수 있게 된 것도 봉건 국가의 주요한 재정 수입의 하나인 토지세 제도를 개혁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리하여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하는 책임을 맡은 말단 관리인 아전과 지방의 유력자에 의한 착취와 부정을 막아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고 국가가 세금을 거두는 과정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토지세를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방안이 강구되었다.

1427년(세종 9) 국왕이 당하관의 과거 시험 문제로 불안정한 당시의 농업 생산력 아래에서도 이 제도를 무리없이 시행할 수 있는 방안을 물었다. 1430년 호조에서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폐지하고 모든 농지에 대하여 1결마다 10두씩 거두는 완전한 정액 세제안을 마련하였다.

이 안에 대하여 중앙의 관료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17만여 명의 의견을 물으면서 공법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농사가 자연 조건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금을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것은 과세 형평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이 시안은 폐기되었다.

1436년(세종 18) 영의정 황희(黃喜) 등이 공법절목(貢法節目)을 마련하여 토지 생산력의 차이에 따라 전국의 토지를 도별로 세 등급으로 나누고, 다시 각 도의 토지 등급을 종래의 토지 대장을 근거로 하여 셋으로 나누고, 답험손실법을 실시할 때의 관례와 국가 경비를 참고로 하여 세액을 정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이 일을 추진할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였다.

이듬해(1437년) 7월 공법절목의 구체적인 시행 요목을 마련, 공포하여 경작하지 않고 묵힌 경우, 한 집의 경작지가 전부 재해를 입은 경우, 홍수로 농토가 물에 휩쓸려간 경우 등에 농민이 신고하면 수령의 심사를 거쳐 세금을 면제해주도록 하고, 논밭의 지목이 변경되어도 새로 토지를 측량할 때까지는 본래의 토지 대장대로 세금을 거두도록 하였다. 이로써 지역적인 토지 생산력과 토지의 비옥도를 함께 고려한 정액 세법의 골격이 대강 갖추어졌다.

그 해부터 시행하기로 결정되었으나 실제로 실시되지 못한 데에는 흉년 탓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의 생산력 수준과 수취 구조 아래서는 일반민들이 경제적인 잉여를 전혀 얻을 수가 없었던 데 있었다.

1440년(세종 22) 전국 토지의 등급을 재조정하고, 토지가 기름진 상전 ·중전은 토지 생산력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 관례대로 같은 액수를 거두고, 토지가 메마른 하전만 차등을 두어 토지 1결마다 12말 내지 20말씩 거두게 하였다. 아울러 묵힌 땅과 재해를 당한 토지에 대한 세금 감면의 범위를 크게 늘렸다. 그 해 토지가 가장 기름진 경상 ·전라도에 이 안을 적용하였고, 그 다음해에 충청도에 시행하였다.

그런데 그 면적이 매우 적은 상전 ·중전의 경우에는 토지세의 최고 액수가 종래의 30말보다 가벼운 20말이어서 그만큼 부담이 가벼워졌으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농업 생산력이 매우 불안정한 하등전의 경우에는 12말 내지 17말을 징수함으로써 세금 부담량이 전보다 많아져 대다수 소농민 경제가 피폐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1443년(세종 25) 7월 경상 ·전라 ·충청도의 하등전의 1결당 세액을 2말씩 줄이는 임시 조치를 하였다. 그 해 11월 앞서 마련한 세제안을 일부 수정하여 상전 ·중전은 그대로 둔 채 하등전만 다시 세 등급으로 나누어 결국 토지의 비옥도를 다섯 등급으로 구분하는 5등 전품제와 해마다의 농사 형편은 아홉 등급으로 나누는 연분 9등제를 골격으로 하였다.

또한 14∼15세기 이래 농업 생산력이 크게 변동하였으므로 수확량에 따라 과세 단위인 결의 면적을 정하는 종래의 결부제를 그대로 실시하기 위해서는 토지를 다시 측량하여야 하지만, 막대한 경비와 노력이 필요할 뿐더러 토지의 등급을 조정하고 결부를 산출하는 과정에서 관원의 자의성이 개입할 여지가 현저한 점을 고려하여 비교적 객관적으로 명백한 면적 단위인 경묘제(頃畝制)로 조정하였다.

세액도 경상 ·전라 ·충청도의 토지세를 1결마다 상전 ·중전은 1말씩, 하전은 4말씩 줄였다. 이러한 내용의 수정안을 마련한 직후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진양대군(晋陽大君)을 도제조로, 하연(河演) ·정인지(鄭麟趾) 등을 제조로 임명하여 세제 개혁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444년(세종 26) 6월에 토지의 비옥도와 그 해의 농사 형편을 다함께 고려하는 내용의 새 세제안을 마련하였다. 앞서의 경묘법이 폐지되고 다시 같은 수확량을 낼 수 있는 면적을 과세 단위로 하는 결부제로 환원하되, 이제까지처럼 농부의 손마디 길이를 근거로 한 자로 토지를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정확한 주척(周尺)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토지가 비옥한가 메마른가에 따라 6개의 등급으로 나누고, 다시 그 해의 농사의 풍흉에 따라 9개의 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조정하여 1결당 20두에서 4두까지 차등있게 내도록 하였다. 행재소(行在所)에서 가까운 충청도 청안현(괴산군 청안면)을 표본으로 골라 이 세법을 적용하여 토지 생산력과 토지 등급 구분을 위한 기준을 정하여 그 해 11월에 전제상정소에서 최종적으로 토지를 기름진가 메마른가에 따라 여섯 등급으로 나누고(전분육등법 田分六等法), 다시 그 해의 농사 형편에 따라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 세액에 차등을 두어 거두는 것(연분구등제 年分九等制)을 골자로 한 세법을 완성하였다.

토지세 부과의 기본 단위인 1결의 수확량을 400말로 보아 그 20분의 1에 해당하는 20말을 1결의 세액으로 정하되, 그 해의 농사 형편을 읍을 단위로 아홉 등급으로 나눠 20말에서 4말까지 차등을 두어 징수하도록 하였다. 농사짓지 못하고 묵힌 땅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제하되, 땅을 놀리지 않고 매년 농사지을 수 있는 토지인 정전(正田)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재해를 입은 토지에 대한 세금의 감면은 10결 이상일 때만 허용해주도록 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세법안이 《경국대전》 호전 수세조에 실렸다. 이와 같이 오랜 논의 과정을 거쳐 확정된 새로운 토지세법은 토지를 측량하여 그 땅이 기름진가 메마른가에 따라 여섯 등급으로 나누는 작업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실시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은 기름진 토지가 많아서 비교적 유리한 남부 지방에서부터 시작되어 새로운 세법이 공포되면서 바로 남부 지방의 6개 고을, 그 중에서도 이미 토지 등급 구분이 끝난 충청도 청안과 비인에 먼저 적용되었고, 곧이어 광양 ·고산 ·함안 ·고령 등 나머지 4개 고을에 토지의 등급을 구분하는 작업과 함께 시행하였다. 1450년에는 전라도에 실시하였고, 10여 년이 지난 1461년(세조 7)에 경기도, 그 이듬해에 충청도, 다음해에 경상도에 시행하였다.

토지가 메말라서 한 해 농사지은 다음에는 일정한 기간 동안 놀려야 하는 땅이 많은 북부 지역은 지역민의 반대가 심하여 개간 사업을 벌여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이룬 뒤에야 실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법이 확정된 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471년(성종 2)에 황해도, 1475년에 강원도, 1486년에 평안도에 실시하였고, 1489년(성종 20) 함경도에 시행하였다.

세법이 확정되어 시행되기 시작한 후 거의 40년의 기간이 걸려서야 전국적으로 통일된 토지세 부과 체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시행된 세법안은 세금 액수를 일정하게 고정시키려 한 본래의 구상을 크게 고쳐 지역마다의 생산력 차이와 기후 변동을 흡수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불안정한 농업 생산력 수준과 많은 양반 사대부층의 반대를 감안하여 새로운 세법 시행 이전과 같이 그 해의 농사 형편을 고려하여 세액을 조절하는 답험손실을 규정함으로써 엄격한 의미의 정액 세제와는 달라지게 되었다. 이 점이 봉건 국가의 가장 주요한 재정 수입의 하나로 여러 계층, 그 중에서도 특히 토지를 많이 소유한 지배 계층의 이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토지세 제도를 개혁했으면서도 결국 개혁의 의의를 상실하게 되는 중대한 결함으로 작용하였다.

새로운 세법은 운영 과정에서 현실적인 역관계를 바탕으로 농민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즉, 양반층 ·지주층의 신분상의 이익이 관철되어 토지의 등급을 책정할 때 힘있는 지주의 땅은 비옥하더라도 대개 5,6등으로 매겨지고, 힘없는 농민의 메마른 땅은 실제보다 높게 등급이 매겨지기 일쑤였다. 또한 지주층은 자신의 부담을 농민에게 전가시켰으며, 풍흉의 등급을 매기는 연분법도 읍 또는 면을 단위로 하였으므로 기름진 토지와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자에게는 매우 유리하였지만 상대적으로 메마른 토지를 소유한 농민은 재해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세금을 면제받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토지가 적은 자나 메마른 땅을 가진 자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수세제의 합리화를 표방하면서 실시된 공법이 현실적으로 갖는 의미는 이러한 것이었다. 게다가 전분육등법과 연분구등법은 그 내용이 복잡하여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고, 16세기에 이르러서는 토지 등급과 연분이 거의 무시된 채 저율(低率)의 세액이 적용되다가 결국 17세기에 가서 영정법(永定法)으로 법제화되었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야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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