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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0-07 (월) 20:42
분 류 사전1
ㆍ조회: 279      
[조선] 북학 (민족)
북학(北學)

관련항목 : 실학

17,18세기에 청나라에서 발흥한 학문을 우리 나라에서 본받아 문물제도를 개혁하고자 한 학풍. 일명 이용후생지학(利用厚生之學)이라고도 한다.

용어의 기원은 ≪맹자 孟子≫의 〈등문공장구 圻文公章句〉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남쪽에 위치한 초(楚)나라 사람인 진량(陳良)이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道)를 흠모해, 북으로 중국에 유학해서 용화변이(用華變夷)를 꾀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북학’이란 미개한 종족이 중화 문명의 선진성을 인정하고 그와 같은 문명한 나라가 되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18세기의 북학파들도 청조 문명의 선진성을 직시하고 겸손한 태도로 그것을 배우자는 뜻으로 북학을 주장한 것이었다. 청조의 학술은 명말청초(明末淸初)에 일어난 일련의 개혁적인 실학자들의 학술사상을 말한다.

이들의 학술사상은 청조의 강압정치 속에서 점차 개혁적인 이론으로 계승되지 못하고 고증학(考證學)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들이 내세운 개혁사상은 민족 의식·민본 의식·현실개혁 의식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들은 육부(六府 : 水·火·金·木·土·穀), 삼사(三事 : 正德·利用·厚生), 삼물(三物 : 知·仁·聖·義·忠·和를 내용으로 하는 六德과 孝·友·睦·姻·任·恤을 내용으로 하는 六行과 禮·樂·射·御·書·數를 내용으로 하는 六藝를 말함.)을 근간으로 하는 실학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의미의 북학은 1778년(정조 2)에 펴낸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 北學議≫에서 비롯되었다. 북학은 연행사행(燕行使行)을 통해 전래·소개되어 북학수용론으로 전개되었으며, 당시 실학의 한 측면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연행사행이 남긴 기행문으로는 박제가의 ≪북학의≫,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연기 湛軒燕記≫ 등이 있으며, 청조문물의 문견을 토대로 한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 耳溪集≫, 유득공(柳得恭)의 ≪냉재집 冷齋集≫,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 등의 저술물이 나왔다.

북학의 발흥은 양난 이후의 국내 사정에 근거하고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왜란·호란을 겪은 뒤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구빈(救貧 : 빈곤을 구제함)과 부국책이었다. 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은 주로 향촌에서 기층민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민생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해결책으로 중농적 실학자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북학파는 이들 중농적 실학자들과는 달리 상업 중시와 대외 무역론을 전개하면서 새로운 기술 도입과 생활 개선을 제창하였다.

북학파가 제창한 대표적인 내용은 용거(用車 : 수레의 이용)·용벽(用枓 : 벽돌의 이용)의 이점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가난의 원인으로 각 지역의 생산물이 운반 수단의 결핍으로 나타난 결과로 보았다.

즉, 주위의 자연적 풍요에도 사회적 빈곤이 보편화된 것은 유통·교류가 제대로 행해지지 못한 데 있다고 보고, 수레의 활용을 주장하였다.

삼국 시대부터 사용되어 온 수레가 활용되지 못한 것은 지리적 조건으로 길이 험하고 마소의 수효가 적으며, 그 제작 기술의 미숙으로 보고, 치도·목축법과 더불어 수레의 제작 기술을 중국에서 배워 올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벽돌의 이로움도 강조하였다. 벽돌의 이용은 주택·성곽·누대·분묘·구거(溝渠)·제언(堤堰)·창고 등 토목 건축에 광범위하게 이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벽돌은 비용이 적게 들고, 사용하기 쉬우며, 지구성·외형미 등에서 뛰어나 구빈·부국책의 첩경으로 보고, 조벽기술(造枓技術 : 벽돌을 굽거나 만드는 기술)의 도입을 제창하였다.

북학은 여기에서 더욱 발전해 중국에 전래된 서양의 과학기술과 자연과학도 아울러 배울 것을 주장했으며 농업 분야에서도 새로운 의견을 제창하였다.

또한, 이들은 농기구의 개량, 관개 시설의 확충, 상업적 농업의 장려, 영농 기술의 도입 등을 제시하면서 토지제도의 개혁, 세제 개혁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농업 진흥책을 역설하였다. 1798년에 박제가가 올린 〈진북학의소 進北學議疏〉는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북학론은 19세기 후반에 문호 개방과 개화파 형성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실학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北學議, 熱河日記, 湛軒集, 耳溪集, 冷齊集, 靑莊館全書, 實學硏究入門(歷史學會, 一潮閣, 1973), 洪大容의 實學思想(千寬宇, 서울大學校文理大學報 6-2, 1958 ; 近世朝鮮史硏究, 一潮閣, 1979), 貞否 朴齊家硏究-朴齊家의 生涯-(金龍德, 中央大學校論文集 5, 1961), 貞否 朴齊家硏究-朴齊家의 思想-(金龍德, 史學硏究 10, 1961), 淸代學術과 阮堂(全海宗, 大東文化硏究 1, 1963), 燕巖 朴趾源의 經濟思想(宋柱永, 亞細亞硏究 10-1, 1967), 朴齊家의 經濟思想(李成茂, 李海南博士華甲紀念論叢, 1970), 實學者의 商業觀-迂書를 中心으로-(姜萬吉, 韓國史硏究 6, 1971 ; 朝鮮後期 商業資本의 發達, 高麗大學校出版部, 1973), 實學과 開化思想의 聯關問題(金泳鎬, 韓國史硏究 8, 1972), 北學派의 實學思想-洪大容의 科學精神과 朴趾源의 實用精神-(琴章泰, 精神文化 10,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1), 北學思想의 形成과 그 性格-湛軒 洪大容과 燕巖 朴趾源을 中心으로-(유봉학, 韓國史論 8, 서울大, 1982), 貞否 朴齊家의 經濟思想-商業觀을 中心으로-(洪德基, 湖南文化硏究 13, 1983), 朴齊家의 通商開國論(李相泰, 南都泳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太學社, 1984), 朝鮮後期 實學硏究의 問題占과 方向(池斗煥, 泰東古典硏究 3, 1987), 18·19세기 大明義理論과 對淸意識의 推移(유봉학, 한신대논문집 5, 1988), 朝鮮後期 實學思想의 硏究東向과 展望(趙珖, 何石金昌洙敎授華甲記念史學論叢, 1991), 洪大容哲學의 再認識-朝鮮實學再評價의 한 作業-(류인희, 東方學志 70, 1991), 18세기 후반 朝鮮知識人 朴趾源의 對外認識-熱河日記에서 본 乾隆年間의 中國-(崔韶子, 韓國文化硏究院論叢 61-1, 1992).

<김용덕>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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