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09-07 (금) 17:44
분 류 사전1
ㆍ조회: 750      
[조선] 북인 (두산)
북인 北人

조선 중기의 정파.

16세기 후반에 성립된 동인으로부터 남인과 함께 분파되었다. 1588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이용하여 동인을 숙청하였다가 곧 실세한 서인에 대해, 정인홍(鄭仁弘)·이발(李潑) 등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배격과 유성룡(柳成龍) 등의 공존의 입장이 대립하였고 이들이 각기 북인과 남인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학통상으로는 동인이 이황(李滉)과 조식(曺植) 및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던 중 이황의 제자들이 주로 남인이 된 데 비해 북인은 조식 및 서경덕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주전론(主戰論)을 펼친 명분을 바탕으로 연소한 신진들의 지지를 모아 전란 후 정국을 주도하였지만, 전란 후유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현실 정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바탕으로 대북(大北) 대 소북(小北), 대북내에서의 골북(骨北)·육북(肉北) 등으로 분파가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서인과 남인에 비해 복잡한 학통도 한 원인이 되었다. 몇 차례의 부침을 겪은 끝에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피해를 극복하는 데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학통상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정인홍이 시도한 이언적(李彦迪)과 이황 배격[晦退辨斥]이 실패로 돌아간 후, 선조의 적자(嫡子)이자 국왕의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선조비(宣祖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축출하려는 정책을 펴면서 서인과 남인을 크게 배격하였다.

그것이 결국 자기 입지를 더욱 좁히는 결과로, 무력을 동원한 서인의 광해군 축출[仁祖反正]로 정계에서 숙청되었다. 그 후 남이공(南以恭)·정온(鄭蘊) 등이 인조대 정치에 참여하였으나 정파로서의 의미는 소멸되었고 일부 인물들은 남인과 행동을 함께하였다.

사상은, 정통 주자성리학과 거리를 둔, 조식을 스승으로 하였던 데 나타나듯이, 서인 및 남인과 어느 정도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었으나, 명(明)이 후금(後金)과의 싸움에 군대를 동원하라고 요구하였을 때에는 광해군과는 달리 대개 출병에 찬성하는 등 사대 명분론 등에서는 다른 사림들과 입장을 함께하였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야후! 백과사전]
   
윗글 [조선] 북인 (한메)
아래글 [조선] 서인 (두산)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50 사전1 [조선] 서인 (한메) 이창호 2001-09-07 1084
49 사전1 [조선] 동인 (한메) 이창호 2001-09-07 949
48 사전1 [조선] 북인 (한메) 이창호 2001-09-07 819
47 사전1 [조선] 북인 (두산) 이창호 2001-09-07 750
46 사전1 [조선] 서인 (두산) 이창호 2002-10-16 1082
45 사전1 [조선] 동인 (두산) 이창호 2001-09-01 986
44 사전1 [조선] 동서 분당 (두산) 이창호 2002-10-15 970
43 사전1 [조선] 을사사화 (두산) 이창호 2001-09-01 679
42 사전1 [조선] 기묘사화 (두산) 이창호 2001-09-01 979
41 사전1 [조선] 갑자사화 (두산) 이창호 2001-09-01 1167
1,,,29129229329429529629729829930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