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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09-01 (토) 18:43
분 류 사전1
ㆍ조회: 1654      
[조선] 붕당정치 (두산)
붕당정치 朋黨政治

과거에 관료들이 서로 파벌을 이루어 정권을 다투던 일.

당쟁(黨爭)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당대(唐代)에 우이당쟁(牛李黨爭)이 있었고, 송대(宋代)에는 신법(新法) ·구법(舊法) 양당의 큰 충돌이 있었다. 명(明)나라 때에는 유림(儒林) 출신인 동림파(東林派)와 환관(宦官)의 세력과 결탁한 비동림파 사이에 치열한 정치 싸움이 벌어졌다.

한국에서는 지방별 이해 관계, 학문의 계통에 따른 견해차, 연령 ·직위의 고하(高下)에 따른 시국관의 차이 등에서 서로 입장을 같이하는 인물들끼리 집단을 형성하여 그에 반대되는 집단과 대립 ·반목하기 시작한 것이 당쟁이다.

원래 유학(儒學)은 고려 말에 백이정(白燎正)이 원(元)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한 이후,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이 그 대종(大宗)을 이루어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조광조(趙光祖) 등에게 계승되었다. 따라서 이들 성리학도들은 조정의 신진 세력으로 부각하게 되었고, 이미 육조(六曹)에 자리잡은 중앙의 귀족들과는 매사에 대립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림파로 결집하여 적극적인 혁신의 뜻을 품고, 부패한 기성세력에 대하여 맹렬한 공격을 시작하자 이 공격에 대항할 만한 이론을 가지지 못한 훈구파(勳舊派)인 중앙귀족들은 국왕을 통하여 그들의 반대파를 탄압하였다. 이러한 대립현상은 곧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어서 갑자(甲子) ·기묘(己卯) ·을사사화(乙巳士禍)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였다.

사화의 원인과 사정은 각각 다르다 하여도 본질적으로 그것은 신 ·구세력 간의 대립이고, 진보와 보수 세력 간의 투쟁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사화의 타격 속에서도 성리학은 깊이 연구되었고, 서원(書院)의 발달과 함께 유명한 학자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한편 문벌 귀족의 과도한 권세에 불안을 느낀 국왕은 왕권의 신장을 위하여 점차 이학파(理學派), 즉 성리학도와 손을 잡게 되어, 선조 초기에는 마침내 정권이 사림파(士林派)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사림파가 훈구파의 탄압인 사화(士禍)를 극복하고 선조대(宣祖代)에 권력을 장악한 후에, 그들 사이에 붕당(朋黨)이 분기되어 자체 경쟁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사림파의 정계 장악으로 관직에 오를 자격자는 많아졌으나 관직은 한정되어 있어 필연적으로 당파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익(李瀷)은 《곽우록(藿憂錄)》의 <붕당론(朋黨論)>에서 “이(利)가 하나이고 사람이 둘이면 곧 2개의 당(黨)을 이루고, 이가 하나이고 사람이 넷이면 4개의 당을 이룬다”고 하였다.

붕당 대립의 직접적인 발단은 1575년(선조 8) 이조전랑직(吏曹銓郞職)을 둘러싼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반목에서 비롯되었다. 전랑직은 그 직위는 낮으나(정5품) 인사권을 쥐는 직책으로, 판서(判書)나 국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공의(公議)에 부쳐서 선출하였으므로 관료들 간의 집단적인 대립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東人)은 허엽(許曄)이 영수(領袖)로 있었고,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西人)은 박순(朴淳)이 영수가 되어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하여 서인을 공격하였으나, 동인은 다시 서인에 대한 강온(强穩) 양론으로 갈라져 강경파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파되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서인 ·남인 ·북인의 삼색(三色)이 형성되었다.

남인은 우성전(禹性傳) ·유성룡(柳成龍)이 중심이 되었고, 북인은 이발(李潑) ·이산해(李山海) 등이 중심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남인 유성룡은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실각되자 북인 남이공(南以恭)이 정권을 잡게 되어 남인은 몰락하였다.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宣祖)의 후사 문제(後嗣問題)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져 대립하다가, 대북파가 옹립하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을 장악하고, 소북파를 일소하기 위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모함 ·살해하는 한편, 외척인 김제남(金悌男)과 그 일족을 처형하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陵陽君:仁祖)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천하는 서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 수십 명이 처형되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다.

서인이 집권하는 동시에 남인 이원익(李元翼)이 입상(入相)하게 됨으로써 남인이 제2의 세력으로 등장하여 숙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서인과 남인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즉, 효종이 즉위하자 서인 김자점(金自點)은 역모로 실각하였으나 같은 서인인 송시열파(宋時烈派)가 등장하여 서인의 집권은 현종(顯宗) 초까지 계속되다가 현종 즉위 후 효종의 모후(母后) 조대비(趙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놓고 서인의 주장인 기년설(朞年說:1주년설)과 남인의 주장인 3년설(2주년설)이 대립하는 이른바 기해복제문제(己亥服制問題)가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尹鑴) 사이에 벌어진 예학논의(禮學論議)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당론으로 전환되면서 양파는 여기에 정치적 운명을 걸었고,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妃)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喪)을 당하자 다시 복상문제가 터져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고 서인은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하여,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 때,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이들을 청남(淸南) ·탁남(濁南)이라 불렀다.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專橫)이 심하여 집권한 지 몇 년 만에 쫓겨나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였고(경신대출척 庚申大黜陟),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재등용되었다. 그러나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과 윤증(尹拯)을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갈리었다.

그러던 중 1689년(숙종 15) 서인이 물러나고, 송시열이 사사(賜死)되는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에는 왕에 의하여 남인이 다시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로는 노론 ·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숙종의 후사 문제로 인한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노론의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등은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蕩平策)’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탕평책의 반작용으로 대간(臺諫)의 기능은 크게 위축되고, 언로(言路)는 모든 시비와 공격이 당쟁 완화라는 명분으로 억제되어, 앞 시기의 긴장과 혈기가 풀리는 반면 공리주의(功利主義) ·이기주의의 새로운 시대 풍조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탕평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권세는 주로 노론의 수중에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대립은 1762년(영조 38) 임오사건(壬午事件), 즉 사도세자사건(思悼世子事件)을 둘러싸고,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시파(時派)와 세자의 실덕(失德)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金龜柱) 중심의 벽파(僻派)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남인과 소론도 시 ·벽으로 분파되었다. 이 시 ·벽파의 대립은 사도세자의 문제를 분쟁의 표면 구실로 삼아 대립하게 되었고, 또한 남인의 시 ·벽파는 당시 전래하기 시작한 가톨릭을 믿는 신서교파(信西敎派)와 반서교파로 분열되었다.

정조 때에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남인의 세력이 왕에 의하여 적극 옹호 ·신장되어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과 같은 남인 시파의 명사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순조(純祖)가 즉위하면서 노론의 벽파가 대거진출하여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을 일으켜 사학일소(邪學一掃)라는 명목 아래 많은 시파의 가톨릭교인이 변을 당함으로써 당쟁의 한 변형이 연출되었다.

특히 시 ·벽의 대립으로 인한 가톨릭교의 박해는 서학도(西學徒) 내지는 실학자(實學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인을 말살시켜 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이 서학이나 실학에 전념하게 된 이유는 숙종 때의 갑술환국(甲戌換局) 이래 남인은 대개 폐족원국(廢族怨國)의 무리가 되어 과거(科擧)를 위한 유학(儒學)이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조선 중 ·후기 정치의 큰 특징이 붕단간의 대립에 있었으므로 붕당정치는 그 시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된다. 그러나 더 나아가 국왕의 위상과 역할을 깊이 이해하려는 연구 흐름도 나타나고 있으며, 붕당정치 대신 ‘사림정치’라는 개념으로 조선 중 ·후기의 정치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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