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09-01 (토) 21:47
분 류 사전1
ㆍ조회: 1010      
[조선] 산림 (두산)
산림 山林

조선 중기 민간에서의 학문적 권위와 세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참여한 인물들.

조선 시대에 고위 관인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길은 원래 문무 과거(科擧)를 통하는 것이고, 그 밖에 조상의 공덕에 대한 혜택인 음직(蔭職)을 받거나 개인의 수양·학덕을 인정받아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었지만, 거기에는 까다로운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사림파가 정치를 주도한 이후 학자와 정치가의 구분이 사라지고 학문적 이념과 정치적 명분이 결합된 정도가 깊어짐에 따라, 정치 일선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연마하여 높은 수준에 도달한 인물들은 과거에 매달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높은 정치적 권위를 지닐 수 있었다.

16세기 말 선조대에 이미 성혼(成渾)·정인홍(鄭仁弘)이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 중 정인홍은 광해군대에 이이첨(李爾瞻)이 정치를 주도하는 데 가장 유력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제도로 성립된 것은 17세기 전반 인조대였다. 1623년 무력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음으로써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필요가 큰 인조와 서인 세력은 곧 성균관에 사업(司業:종4품)을 설치하여 김장생(金長生)·장현광(張顯光)·박지계(朴知誡)를 임명하였다.

산림 우대 정책은 더욱 진전되어 1646년에는 세자 교육을 맡은 시강원에 찬선(贊善:정3품 당상관)·익선(翊善:종5품, 뒤에 進善으로 바꿈)·자의(諮議:종7품)를 설치하였고, 효종대에는 성균관에 제주(좨주의 잘못 - 운영자 주)(祭酒:정3품 당상관)를 두었다. 그리하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권시(權諰) ·허목(許穆)·윤휴(尹鑴)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이현일(李玄逸)·권상하(權尙夏) 등이 임명되어 파격적 대우를 받으며 국가 운영 및 국왕과 세자의 교육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인조·효종 연간에 숭명 사상(崇明思想)과 북벌론(北伐論)을 적극 지지하며 정권을 합리화하였으며, 강한 학연을 바탕으로 각 당의 영수가 되어 예송과 같은 경우에는 직접 전면에 나서서 정쟁을 이끌었다고 평가된다. 그 시기 이들의 중요성은 "열 정승이 한 왕비만 못하고 열 왕비가 한 산림만 못하다"는 말 속에 담겨져 전해질 정도이다. 그러나 정치 체제 전체를 고려할 때 산림은 국왕과 사족의 상호 관계 속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지방에 기반을 둔 사족은 조선 중기에 서로 붕당을 통한 경쟁을 하면서도 국왕에 맞서 자기들의 주도권을 강화해 가는 정치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군주 체제라는 강한 틀 속에서 많은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사림파의 체제 재편이 일단락된 인조대에 이르러 사족의 정치 주도권이 크게 성장한 상태에서도 그들이 내세우는 친명 반청 정책과 내수사 폐지론 등은 국왕과 그 측근 세력의 반대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인조의 아버지를 국왕으로 추숭하는 것은 사족의 거의 일치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뜻대로 귀결되었으며, 소현세자가 죽은 뒤 그 적자(嫡子)가 있는데도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는 반대 의견을 개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한 한계 속에서 사족이 택한 하나의 방법은 국왕으로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높은 권위를 지닌 인물을 여러 가지 명분을 들어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국왕 및 그 주변 세력에 대하여 사족의 입장을 강력히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산림이 본격적으로 등용된 시기가 사족 일반과 국왕간의 대립이 크게 나타난 시기였으며, 효종이 관인의 빗발친 요구에 못 이겨 산림을 불러들였지만 그들과의 흔쾌한 협력보다는 입장의 차이가 더욱 부각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국왕의 권위에 맞서 사족을 대표한다는 기능은 현종대에도 계속되었으나, 중세적 군주 체제가 계속되는 한 근본적인 제약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특히 17세기 말 숙종대에는 사족의 자체 대립이 심화됨에 따라 붕당 지도자로서 정쟁의 전면에 나섬으로써 본래의 의미가 점점 약화되었다. 그뒤 18세기 영조·정조대와 그 이후로도 명목은 계속되었으나, 탕평책을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사족 세력을 누른 국왕에 의해 위상이 크게 격하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윗글 [조선] 훈구파 (두산)
아래글 [조선] 사림 (두산)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40 사전1 [조선] 무오사화 (두산) 이창호 2001-09-01 996
39 사전1 [조선] 사화 (두산) 이창호 2001-09-01 3048
38 사전1 [조선] 훈구파 (두산) 이창호 2001-09-01 1029
37 사전1 [조선] 산림 (두산) 이창호 2001-09-01 1010
36 사전1 [조선] 사림 (두산) 이창호 2002-08-06 981
35 사전1 [조선] 붕당정치 (두산) 이창호 2001-09-01 1646
34 사전1 [조선] 붕당 (두산) 이창호 2002-10-15 1033
33 사전1 [조선] 향약 (두산) 이창호 2002-05-05 1232
32 사전1 [조선] 서원 (두산) 이창호 2002-04-22 1442
31 사전1 [조선] 조선시대의 과거 (두산) 이창호 2001-09-01 1105
1,,,29129229329429529629729829930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