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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7 (수)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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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7750      
[고려] 고려의 제도 (민족)
고려(제도) 고려의 제도

세부항목

고려 역사 개관
고려의 성립과 발전 1
고려의 성립과 발전 2
고려의 제도
고려의 대외 관계
고려 문화
고려의 역사적 성격
고려 시대 연구사
고려 시대 참고문헌

1. 지배 체제

[중앙 정치 제도]

고려의 중앙 정치 제도는 성종 때 마련된 삼성 육부의 정부 조직을 기간으로 하였다. 이전까지는 궁예의 관제를 답습해 광평성(廣評省)·내봉성(內奉省)·순군부(徇軍部)·병부(兵府)를 기간으로 한 정치 제도를 실시했으나, 집권 체제가 확립된 성종 때 비로소 당나라 제도에 따른 삼성체제(三省體制)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정치 제도는 당나라 제도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송나라 제도와 고려의 독자적인 제도가 섞여 있었다.

삼성 육부는 당나라 제도를, 중추원·삼사(三司)는 송나라 제도를 채용한 것이다. 반면 도병마사·식목도감(式目都監)은 고려 자체의 필요성에서 생긴 것이었다. 이와 같이, 고려의 정치 제도는 세 계통으로 구성되어 독특한 정치 체제와 권력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정치기구의 중심이 된 것은 삼성 육부의 조직이었다. 삼성은 원래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상서성(尙書省)을 말하지만, 고려에서는 중서성과 문하성이 합해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이라는 단일기구를 이루고 최고 정무 기관으로 재부(宰府)라 일컫게 되었으며,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수상이 되었다.

중서문하성의 관원은 2품 이상의 재신(宰臣 : 省宰·宰相)과 3품 이하의 성랑(省郎 : 郎舍·諫官)으로 구성되었다. 재신은 백관을 통솔하고 국가정책을 의논, 결정하는 일을 보았고, 성랑은 간쟁(諫諍)과 봉박(封駁)·서경(署經)의 임무를 맡았다.

상서성은 같은 삼성의 하나이지만 실제는 중서문하성에서 결정된 정책을 실행하는 실무 기관에 불과했고, 그 장관인 복야(僕射)의 지위도 낮았다. 상서성에는 육부가 예속되어 각각 국무를 분담했는데, 이·병·호·형·예·공의 순서로 고려의 독자적인 구성이었다.

육부에는 각각 정3품의 상서(尙書)가 장관이 되었지만, 수상은 이부, 아상(亞相 : 二宰)은 병부 등 재신이 육부의 판사가 되었다. 이것도 상서성이 중서문하성에 예속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당나라의 육부는 각기 사사(四司)의 속사(屬司)가 달려 모두 24사의 조직을 이루고 있었으나, 고려의 육부는 각각 단사(單司)의 간단한 조직이었다. 다만 이부에 고공사(考功司), 형부에 도관(都官) 등 두 속사가 있을 따름이었다.

중서문하성과 함께 고려의 중요한 정치기구는 중추원이었다. 중추원은 중서문하성의 재부에 대해 추부(樞府)라고 불려, 함께 재추 또는 양부의 이름을 가지는 권력기구를 이루었다. 중추원의 관원도 이원적으로 구성되어, 2품 이상의 추밀(樞密, 즉 樞臣)이 군기(軍機)를 관장했고, 3품의 승선(承宣)은 왕명을 출납하는 비서 기능을 가졌다.

고려의 양대 정치기구인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양부 재추들이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회의, 결정하는 합좌 기구(合坐機構)가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이었다. 도병마사는 대외적인 국방·군사 관계를 관장했고, 식목도감은 대내적인 법제·격식 문제를 다루는 회의 기관이었다.

이 밖에 중요한 관부로 시정(時政)을 논집(論執)하고 백관을 규찰, 탄핵하는 어사대(御史臺)가 있었다. 어사대는 중서문하성의 성랑과 함께 대간(臺諫) 또는 성대(省臺)라고 불려 국왕에 시종해 언관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특히, 대간은 서경의 권한이 있어 왕권의 전제성을 규제하는 기능을 가졌다.

정치 제도는 중앙 집권적인 조직으로 되어 왕권에 유리하였다. 특히, 육부가 국왕에게 직접 상주하는 제도는 국왕으로 하여금 정부 기구를 통할하는 권한을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정치 권력이 양부 재추에게 집중되고, 이들 재추는 문벌 귀족들이 독차지하고 있었으며 대간의 간언·서경도 이들 귀족 관리들의 커다란 권한이었다. 이것은 고려의 정치 제도가 국왕과 귀족 사이의 권력의 조화 위에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지방 제도]

지방 제도는 군현 제도를 기간으로 해서 중앙에서 외관을 파견하는 중앙 집권적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건국 초기에는 지방에 수령이 파견되지 못하고, 호족들의 자치에 일임되고 있었는데, 성종 때 지방관의 설치를 보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지방에 외관을 파견한 것은 983년 12목의 설치를 시초로 하였다. 그 뒤 몇 차례의 개폐를 거듭하다가 1018년 지방 제도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전국에 약 5백개의 군현이 존재했지만, 모두 외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전기에 수령이 파견된 주현(主縣)이 130개인 반면, 그렇지 않은 속현은 374개나 되었다. 이들 속현들은 수령이 설치된 주현에 예속되어 중앙의 간접 지배를 받는 행정 조직을 이루었다. 즉, 중앙 정부에서 여러 군현 중 외관이 파견된 주현에 직첩(直牒)하는 행정 체계를 이루고, 이들 주현이 속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주현의 수가 많아 이를 일률적으로 통제하기가 곤란했으므로, 몇 개의 큰 군현을 계수관(界首官)으로 삼아 중간 기구의 기능을 띠게 하였다. 즉, 대개 14개가 되는 경(京)·도호부(都護府)·목(牧)이 계수관으로서 관내의 일반 군현을 통할해 향공(鄕貢)의 진상이나 외옥수(外獄囚)의 추검 등을 맡게 하였다. 그러므로 같은 군현이라 하지만 고려의 군현제는 계수관과 일반주현, 그리고 속현의 누층적 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속현에 대한 외관의 증파로 주현의 수가 많아지자, 지금까지의 계수관에 의한 허술한 군현통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중기부터는 계수관에 대신해 중앙 정부와 군현 사이의 중간 기구로 5도(五道)·양계(兩界)의 설치를 보게 되었다. 즉, 북부 지방에는 양계, 남부 지방에는 5도를 설치하고, 양계에는 병마사(兵馬使)를, 5도에는 안찰사(按察使)를 파견해 도내의 군현을 통할하는 상부 행정 구획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중간 기구가 지역에 따라 양계·5도로 구분되고, 다시 경기는 개성부(開城府)에 의해 통치되는 등, 전국을 삼원적인 지배 양식으로 차이를 두었다는 점은 속현의 광범한 존재와 함께 고려 지방 제도의 미숙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군현에는 그곳 지방 출신이 호장·부호장 등 향리에 임명되어 수령 밑에서 직접 백성을 다스렸다. 향리는 주현뿐 아니라 외관이 없는 속현이나 부곡에도 설치되었다. 원래 호족 출신인 향리는 조세·부역·소송 등 행정 사무를 맡았으므로, 비록 수령의 보좌역이지만 실권은 커서 백성을 침탈해 폐단이 많았다.

이에 향리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그 지방출신의 중앙 고관을 사심관으로 임명해 향리를 통제하게 하고, 또 그들 향리 자제를 기인으로 삼아 상경, 숙위하게 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따라서, 고려 시대의 향리는 지방 호족의 지위에서 점차 하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군사 제도]

중앙 집권적인 통치 체제는 군사 제도의 정비에도 나타났다. 초기의 자치적인 지방 호족의 사병은 집권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점차 국군의 일환으로 편입되었다. 이리하여 중앙에는 이군육위(二軍六衛)가 성립되고, 지방에는 주현군(州縣軍)이 편성되었다.

중앙군은 이군육위의 8개 부대로 편성되었다. 이군은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으로 구성된 국왕의 친위대로 근장(近仗)이라고도 했으며, 육위보다 우위에 있었다. 육위는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 등으로, 핵심 부대는 좌우·신호·흥위의 3위로서, 개경의 경비와 국경의 방어까지 담당한 경군의 주력 부대였다. 금오위는 경찰, 천우위는 의장, 감문위는 궁성문의 수위를 맡았다.

이군 육위에는 모두 45개의 영(領)이 있었다. 영은 1천명으로 조직되어, 고려의 군대는 모두 4만5천명이 되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결원이 많아 그보다 적었으며, 전쟁 때는 그 수가 증가해 오히려 이보다 많은 편이었다. 영은 병종(兵種)에 따라 보승(保勝)·정용(精勇)·역령(役領)·상령(常領)·해령(海領)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그 중 보승·정용이 핵심 전투 병종으로 주력 부대인 3위에 소속되었다.

이군육위의 부대장은 정3품의 상장군(上將軍)이었고, 종3품의 대장군(大將軍)이 부지휘관이 되었다. 이들 이군육위의 상장군과 대장군이 무반의 합좌 기관인 중방(重房)을 구성해 군사 문제에 관한 회의를 했는데, 가장 서열이 높은 응양군 상장군이 의장이 되어 반주(班主)라 칭하였다. 영의 부대장은 정4품의 장군으로 그들도 역시 합좌 기관인 장군방(將軍房)을 구성하였다.

이군육위의 경군은 처음에는 특정한 군반 씨족(軍班氏族)들에서 충당한 전문적인 직업 군인이었다. 그들은 군역을 세습하는 대가로 군인전을 받아 생활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군반제는 얼마 안되어 무너지고 대신 일반 농민으로 군인을 충당하게 되었다. 이것은 고려 군인의 질을 저하시켜 뒤에 특수 부대인 별무반(別武班)과 삼별초를 설치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지방에는 남부 5도의 주현군과 변경지대인 주진군(州鎭軍)으로 편성되었다. 5도의 주현군은 수령의 지휘 아래 치안과 방수 및 공역의 임무를 담당했는데, 이들은 일반 농민들로 구성되어 농사에 종사하면서 군역을 치렀다. 양계는 국경 지대였으므로 주진(州鎭)에 초군(抄軍)·좌군(左軍)·우군(右軍)을 중심으로 한 정규군이 주둔해, 예비군적인 주현군과는 다른 상비군적인 주진군을 이루었다.

[교육·과거 제도]

지배 체제를 운영하는 인적 자원을 양성, 공급하는 방법이 곧 교육·과거 제도였다. 중앙 집권적인 정치의 실행자로서 관료의 양성이 필요해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설치했고, 이곳의 출신자들을 과거를 통해 관리로 선발하였다.

고려는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삼았으므로 유교 교육을 받은 관리 양성이 필요하였다. 이미 태조 때 개경과 서경에 학교를 세웠지만, 992년 중앙에 정식으로 국자감(國子監)이 설치됨으로써 교육 제도의 기반이 확립되었다.

국자감은 당나라 제도를 채용해 설치한 일종의 종합 대학으로,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학(四門學) 및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으로 구성되었다. 국자학은 문무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의 자제가 입학하는 자격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유학을 교육하였다. 잡학인 율학·서학·산학은 8품 이하의 자제나 서인이 입학하였다.

이와 같이, 같은 국자감 안에서도 신분과 관품에 따라 각 분과의 입학 자격에 차이를 두었고, 또 유학이 우대된 반면 잡학이 천시된 것은 고려의 유교적인 귀족 사회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종은 지방 자제들에 대한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그들을 상경시켜 습업(習業)하게 하였다. 여기에는 성종의 중앙 집권화 정책에 따라 지방 호족을 중앙 관료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987년 경학박사·의학박사 각 한명씩을 12목에 파견해 지방 자제를 교육시켰다.

또 1127년 각 주에 향학(鄕學)을 세워 지방 교육 기관으로 삼게 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지방교육에 대한 열성으로 지방문화는 향상되었으며, 지방 호족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로 진출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들 교육 기관에서 유교적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과거를 보고 관리가 되었다. 광종은 훈신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과거제를 실시했는데,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이 관리로 등용됨으로써 고려 관료제의 밑받침이 되었다.

과거 제도는 제술과(製述科)·명경과(明經科)·잡과(雜科)의 셋으로 나누어졌다. 제술과는 시·부·송·책·논 등의 문학으로 시험하고, 명경과는 시·서·역·춘추 등 유교 경전으로 시험해 함께 문신을 선발하는 과거인데, 제술과가 보다 중시되어 우대하였다. 잡과는 의학·천문·음양 지리 및 율학·서학·산학 등 기술관 시험으로 그리 중시되지 못하였다.

무반을 선발하는 무과는 예종 때 실시했으나, 문반들의 반대로 폐지되었다가 고려 멸망 직전인 공양왕 때 비로소 실시되었다. 그러한 과거 제도는 문예를 존중하는 문신 위주의 선발 방법으로 무반이 멸시되고, 기술학인 잡학을 경시하는 풍조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과거 급제자 모두가 관리로 임명되는 것은 아니었다. 합격자에 비해 관직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과거합격의 성적과 그의 출신 문벌이 관직 임명에 작용되었다. 귀족가문의 급제자는 좋은 관직을 보임받았고 승진하는 데에도 유리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과거 외에 음서(蔭敍)가 있어 고관의 자제는 자동적으로 관리가 될 수 있었다. 5품 이상의 벼슬을 하면 그의 아들 하나는 관리로 들여보낼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었던 것이다. 이는 고려 귀족 제도의 밑받침이 되었고, 고려를 문벌을 중시하는 귀족 사회로 규정짓는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2. 사회 제도

[사회 신분의 구조]

고려는 신분 사회로서 가문에 따른 신분이 사회 계층을 구분하는 기본 조건이 되었다. 귀족이나 양인·천민 등 사회 계층의 구분도 신분 차이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이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인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지배층인 문벌 귀족들의 특권을 독점하기 위한 폐쇄적인 사회 정책은 신분 제도의 엄격한 유지를 요구하였다.

고려의 사회 계층은 지배층인 귀족·하급 관리와 피지배층인 양인·천민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네 개의 계층은 세습되는 신분제로 인해 그 사이의 구별이 엄격하였다. 이와 같이, 신분제도는 네 계층이지만, 그 가운데 귀족이 제일 신분으로 국가의 정치적 권력을 독점했기 때문에, 고려를 귀족사회로 일컫게 된 것이다.

귀족은 최고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왕실을 정점으로 문벌이 좋은 일부 특권 신분으로 이루어졌다. 양반 관료가 문반·무반의 관직을 차지했으나, 귀족이란 그들 품관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들 관료 중 문벌이 좋고 고위 관직에 오른 일부 특권층만을 가리켰다. 음서와 공음전시(功蔭田柴)의 특권이 5품관 이상에게 부여되었으므로, 그들 고관은 귀족층에 포함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다만, 문반이 우대되고 무반은 천시되어 귀족은 문반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무반은 그 일부만이 귀족층에 포함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귀족이란 단순한 관직의 고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출신 문벌에 따라 결정되었으므로, 비록 관직이 낮거나 임명되지 않았더라도 벌족 가문의 자손은 대대로 귀족 신분의 대우를 받았다.

같은 지배층이지만 귀족에 포함되지 못한 중간 계층으로 하급 관리가 있었다. 문·무반 6품관 이하의 실무적인 사무를 보는 관료와, 중앙 각 관서의 서리, 무반의 하급 장교, 그리고 궁중의 잡일을 맡는 대표적인 남반(南班)이 포함되었다.

지방의 토착 세력인 향리도 역시 지방관을 보좌하는 지배 기구의 말단 조직의 일원으로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들 하급 관리는 국가의 정치 권력을 잡은 귀족에 대해 실무적인 행정을 담당한 사람들이었다.

양인은 일반 주·부·군·현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을 보통 백정(白丁)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국가에 대해 조세·공부·역역(力役)의 부담을 지니고 있었다. 그 밖에 상인과 수공업자가 농민보다 천시되었지만, 역시 양인에 속해 공역(貢役)의 의무를 갖고 있었다. 그들 양인층은 국민의 주류가 되었고, 그 가운데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가장 천시된 신분은 천민 계층으로 천민과 노비로 구성되었다. 천민은 특수 행정 구역인 향(鄕)·부곡(部曲)·소(所)에 사는 사람들로 일반 주현에 사는 양인보다 천시되었다. 그밖에 육지의 교통 요지에 설치된 역(驛)과 숙박시설인 관(館), 그리고 수상의 교통요지에 설치된 진(津)의 주민들도 모두 천민으로 여겨졌다.

천민 중에서도 사회의 최하층에 놓여 가장 천대를 받는 계층이 노비였다. 국가에 속하는 공노비는 궁중이나 관청에서 잡역에 종사하였다. 사노비는 귀족 등 사인(私人)이나 사원의 소유로, 직접 주인집의 종으로 살면서 잡일을 돌보는 솔거 노비(率居奴婢)와, 주인과 따로 살며 농업에 종사하면서 주인에게 신공을 바치는 외거 노비(外居奴婢)가 있었다.

특히, 외거노비는 주인의 토지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토지도 경작하고, 나아가 자신의 토지까지도 소유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독립경제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노비 이외에 유기장이나 수렵 등의 천업에 종사하는 화척(禾尺 : 揚水尺)과 광대인 재인(才人) 등도 천민에 속하였다.

한편 사회신분이 세습되는 엄격한 신분 제도와 함께, 사회 계층의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천민 집단인 향·부곡·소가 일반 주현으로 승격해 그 주민들이 양인화되어갔고, 외거노비 가운데 재산을 늘려 신분적으로 양인으로 상승하는 자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특히 주목되는 것은 향리 출신들이 과거를 통해 문반 관리로 진출한 점이었다. 이들 향리의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해 관리에 등용되고, 능력에 따라 고위 관직에 승진하면서 신진관료가 되었다.

그들은 폐쇄적인 귀족 사회를 개방시키고 보수적인 정치 풍토를 쇄신하는 구실을 담당하였다. 이들 신진 관료도 몇 대가 계속되면 다시 귀족 가문으로 승격하게 되었지만, 이 향리 세력은 언제나 중앙의 혁신적인 신흥 관리의 공급원이 되었다.

그밖에 군인에서 장교로 진급하는 예가 많았으므로, 일반 농민이 군인을 통해 무반으로 진출함으로써 신분 변동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사회 정책]

국민의 대부분은 농민들이었는데, 이들의 생활은 대체로 가난하였다. 그것은 농민들에 대한 국가의 수취가 가중했기 때문이었다. 농민은 자기 농토에서는 국가에 10분의 1의 조를 내면 되었지만 공전에서는 수확량의 4분의 1을 내었고, 사전에서는 2분의 1이라는 높은 조세를 바쳐야 하였다. 또한, 공부·역역의 부담을 지녀 국가에 의한 수취가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관리들의 불법적인 가렴주구로, 농민들은 양반 관리나 향리들에 의해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귀족 권력자에게 토지를 빼앗기는 일이 많았다. 자기의 민전을 빼앗긴 농민들은 타인의 토지를 경작하는 전호(佃戶)로 전락하거나, 고향을 떠나 유민이 되었다.

이러한 농민의 몰락은 국가 경제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농민의 토지이탈로 국가수취의 세원이 감소되고, 농업 생산 위에 성립된 경제 기반이 동요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중앙 정부는 권농 정책을 써서 농업을 장려하고 농민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성종 때부터 국왕이 원구(珤丘)에서 기곡(祈穀)의 예를 행하고 적전(籍田)을 친히 갈아 농사의 모범을 보이며, 사직(社稷)을 세워 지신과 오곡의 신을 제사지낸 것은 이러한 권농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성종은 지방관에게 영을 내려 농기에는 농민을 잡역에 동원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면재법(免災法)을 만들어 수해·한재·충해·상해로 전답의 피해가 4할 이상인 때는 조를 면하고, 6할 이상인 때는 조·포, 7할 이상인 때는 조·포·역을 모두 면제하도록 하였다. 또 고리대를 억제하고자 경종 때 미·포의 이자율을 정했었는데, 성종은 본전인 모(母)와 이자인 자(子)가 서로 같은 액수에 달하면 그 이상 더 이자를 취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성종은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태조 때부터 설치된 빈민 구제 기관인 흑창 제도(黑倉制度)를 보다 확장해 각 주부(州府)에 의창(義倉)을 베풀어 미곡을 저장했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게 하였다. 또한 개경·서경과 12목에 물가 조정 기관인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해 곡식과 베의 값이 내렸을 때 사들였다가 값이 오르면 싸게 내어파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이밖에 빈민과 여행자의 구호를 위한 제위보(濟危寶)가 설치되었고, 서울 동서에 구료 기관으로 대비원(大悲院)이 마련해 무의탁자를 치료 부양하게 하였다. 또한 혜민국(惠民局)을 두어 빈민에게 약을 지어주도록 하였다.

3. 경제 제도

[토지 제도]

토지 제도는 전시과 체제를 기본으로 해 지배층을 중심으로 토지가 분배되었다. 전시과는 문무 백관으로부터 부병·한인에 이르기까지 무릇 국가의 관직이나 직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지위에 따라 전토와 시지(柴地)를 차등있게 나누어주는 토지 제도를 말한다. 즉, 고려는 관인이나 군인의 국가에 대한 봉사의 반대급부로서 전시과를 마련한 것이다.

919년 역분전(役分田)을 분급하였다. 이것은 후삼국 통일 후의 논공행상적인 토지 급여로 조신·군사에게 관계(官階)의 고하를 논하지 않고 그 사람의 성행(性行)의 선악과 공로의 대소에 따라 토지를 차등 있게 나누어준 것이었다.

이 역분전을 기반으로 976년(경종 1) 처음으로 전시과가 설정되었다. 이는 단일적인 기준에 의한 일원적인 구성이 못되고, 자삼·단삼·비삼·녹삼 등의 4색공복을 기준으로 8개의 표에 따른 다원적인 구성이었다. 또한 여기에는 관품 이외에 인품까지도 고려하는 미숙한 것이었다.

이 전시과가 998년 하나의 체계로 정비되고, 관직의 고하에 따라 1과에서 18과로 나누어 토지를 분급하게 되었다. 종래 막연한 인품이라는 기준이 지양되고 관직의 고하를 기준으로 삼은 것은 관료 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때 산관(散官)은 현직보다 몇 과를 낮추어 급여하게 규정한 것은 역시 현직주의의 표현이며, 또 무관이 같은 품계의 문관에 비해 적은 전시를 받게 된 것도 문신 귀족 사회의 면모를 나타낸 것이었다.

전시과는 1076년에 이르러 재편성되었다. 이 때 18과로 나누어 전시를 지급한 것은 전과 다름이 없으나, 각 과의 토지액수가 감소되고, 산관은 아예 지급대상에서 제외되어 현직만 해당되었으며, 문관에 대한 무관의 차별대우가 시정되었다. 문종 때의 전시과는 몇 차례의 개정 끝에 이룩된 최종적인 형태로 토지 제도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전시과는 직역에 대한 반대 급부로 관리들에게 지급한 토지였으므로, 토지 자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토지의 조를 걷는 수조권을 준 것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수조권은 문종 때 이르러 직역에 종사하는 현직 기간에 일시적으로 수여했을 뿐, 관직을 그만두면 국가에 반납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거두어들이는 수조도 직접 수취하지 못하고 국가에서 대행했으므로, 전시과의 과전에 대한 관리의 사적 지배는 약하고 국가의 공적 지배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공음전시과는 전시과에 비해 사적 지배가 농후했는데, 본래 국가에 대한 공훈이 큰 공신에게 지급했던 것으로, 문종 때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지급하게끔 제도화되었다. 공음전시과는 전시과와는 달리 자손에게 세습이 허락되었다. 이는 5품 이상의 고관 자제에게 음서의 혜택을 준 것과 함께 관인 신분의 보호를 위한 시책이고, 귀족 사회의 성립 기반이 되었다.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 공음전시를 수여한 것과 대응해, 6품 이하 관리의 자제에게는 한인전(閑人田)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자손이 없는 하급관리와 군인유가족에게는 구분전(口分田)을 지급해 생활대책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직역을 부담하는 향리·군인·악공·공장 등에게도 토지를 지급하였다. 향리에게 분급한 외역전(外役田)과 군인에게 지급한 군인전 등이 이러한 직역에 대한 대가였다.

이밖에도 왕실의 경비에 충당하기 위한 내장전(內莊田)이 있었다. 내장전은 장(莊) 또는 처(處)라 불려 특정한 행정구획을 이루고 관리되었음이 특색이다. 중앙과 지방의 각 관아에는 공해전(公力田)이 지급되어 경비를 충당하게 했고, 사원에는 사원전이 소속되어 있었다.

[민전]

토지제도는 왕실이나 관청 등 공공기관이나 직역을 담당한 관리·향리·군인들에게 토지를 지급한 전시과체제를 근간으로 했으나, 실제로는 일반농민의 소유 토지인 민전이 전국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경작하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이 토지는 농민사유의 민전으로 매매가 가능하였다. 고려왕조는 이러한 민전을 공전(公田)이라 하고 농민으로부터 수확의 10분의 1을 조로 거두었다.

농민은 조를 납부함으로써 현실적으로 그들의 사유에 속하는 개별적인 보유지를 국가로부터 법제적으로 공인을 받았다. 이들 민전에서 나오는 조와 농민이 부담하는 역을 통해 나라의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민전이 세력 있는 귀족들에 의해 겸병되어 농장화했는데, 이것은 농민층의 분해를 가져오고 국가수입의 원천을 두절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귀족 정치기에 진행되어 농민은 토지에서 이탈해 유민화되고 국가의 재정도 감소되어갔다.

[토지 소유 관계]

토지 제도는 소유관계에 따라 공전과 사전으로 구분된다. 왕실 소속의 내장전이나 관청의 땅인 공해전과 같은 국·공유지는 공전에 속했고, 일반국민이 소유한 민전은 사전이라 하였다.

그러나 국민의 사유지도 국가에 수확의 10분의 1을 조세로 납부했으므로 공전이라고도 불렀다. 이것은 모든 토지가 국유라는 관념에서 나온 것으로, 민전은 소유권상으로는 사전이지만 수조권상으로는 공전인 셈이었다.

그리고 직역을 담당한 관리·향리·군인 등에게 반대급부로서 토지를 분급했는데, 그것은 민전의 수조권을 준 것이었다. 이들 과전이나 공음전, 그리고 향리전·군인전 등은 사전이라 일컬어지나, 실은 토지의 소유권을 준 것이 아니고, 다만 민전에서 국가에 납부하는 조세의 수조권만을 이양받은 데 불과하였다. 민전의 소유자로서는 국가에 바치는 10분의 1의 조세를 대신 관리·향리·군인에게 납부했을 따름이었다.

원래 토지국유제란 고대로부터의 왕토사상에서 나온 산물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사적 지배가 강하였다. 가령, 과전은 세습이 허용된 것이 아니었으나, 현실적으로 그 아들이 다시 관리가 됨으로써 세습적으로 보유하게 되었다. 특히 공음전은 법제적으로 자손에게 상속이 허용된 영업전(永業田)으로 사유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향리의 외역전과 군인의 군인전도 역의 세습에 따라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는 영업전이었다. 더욱이, 공전이라 일컬어지는 민전의 실체가 일반농민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사유지였음은 고려 시대 토지 소유 관계의 실상을 말하는 것이다.

[수취 제도]

경제적 기반이 된 수취제도는 토지제도와 연결되어 성립되었다. 고려는 농업을 주축으로 한 자연 경제였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수입은 대체로 토지를 매개로 농민들로부터 수취한 것이었다. 국가에 대한 농민들의 부담은 보통 조세·공부·역역의 세 가지로서, 그것이 고려왕조의 주요 재원이 되었다.

조세는 토지를 통해 수취하는 제도였다. 국가는 토지를 소유한 국민으로부터 일정한 수취율의 조세를 받아들였다. 사유지인 민전의 소유자는 10분의 1의 조세를 국가에 납부하였다. 여기서 공전인 경우는 직접 국고에 들어가 국가의 재원이 되었고, 만약 거기에 과전이나 공음전이 설정되었을 경우 수조권자인 관리에게 귀속되었다.

민전을 소유하지 못한 영세농민은 전호로서 귀족·양반 관리의 광대한 사전이나 왕실 소속의 토지 및 국가 공유지를 소작하였다. 귀족·양반 관리도 자기의 사전을 노비들을 시켜 직영도 했지만, 전호제 경영을 할 때는 병작으로 수확량의 2분의 1을 받아들였다. 반면 왕실의 토지나 공해전·둔전의 공전에서는 4분의 1을 내게 했으나, 그러한 토지는 척박한 곳이 많았기 때문에 전호의 실질적 부담은 사전의 2분의 1과 별 차이가 없었다.

공부는 지방에서 포나 토산물 등 현물을 납부하는 수취 제도였다. 공부에는 매년 일정한 공물을 바치는 상공(常貢)과,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임시로 공납하게 하는 별공(別貢)이 있었다.

상공은 미리 정해진 공물의 종류와 액수를 각 주현에 할당해 매년 헌납하게 하였다. 그에 따라 주현은 이 공물을 각각 집집마다에 배분해 수취하였다. 그때 가호는 인정의 다소로써 편성된 호제의 등급인 9등호에 따라 차등 있게 징수하였다. 그러나 상공보다도 임시적인 별공에 따른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심해 공부는 농민들의 부담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천민 집단인 향·부곡에 사는 주민들도 토지의 조세를 납부했는데, 소는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거주지였으므로 그들이 헌납하는 제품도 일종의 공부라 할 수 있었다.

역역은 국가가 국민들의 노동력을 수취하는 제도였다. 16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는 정(丁)이라 하여 입역의 의무를 가졌다. 대체로 역역이란 성곽의 축조, 관아의 영조, 제방의 축조, 도로의 개수 등 토목공사에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역역도 공부와 같이 인정의 다소에 따른 호제의 등급에 따라 징수했으므로, 공부와 역역은 때에 따라 공역(貢役)으로 결합되기도 하였다.

<변태섭>

출전 : [디지털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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