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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8 (일)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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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7528      
[조선] 한국의 근세 사회 (민족)
한국(근세사회) 조선 시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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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건국된 뒤에는 왕권이 강화되고 국왕 중심의 집권 체제가 확립되어갔다.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건국의 주체가 되었던 여말의 신흥 사대부들은 새 왕조의 양반 관료(兩班官僚)가 되어 유교 정치의 이념을 구현하는 데 진력하였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민족 의식이 고취되고 부국 강병이 매우 강조되었다. 그 결과 세종 때에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되는 등 민족 문화가 발흥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4군(郡)ㆍ6진(鎭)이 설치되어 영토가 확장되었다. 건국 후 80여 년이 지난 15세기 후반에는 ≪경국대전≫이 반포되어 통치 조직과 사회 구조 등 국가 체제가 완성되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양반이었다. 양반은 관리가 되어 정치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이 높고 경제력이 강하며 또한 문화의 주인공으로서 조선 사회를 이끌어가는 최고의 사회 계층이었다. 이들이 지배층으로서의 특권을 향유하고 세습적으로 이어나가면서 신분적인 배타성이 강화되어 조선 사회는 양반ㆍ중인ㆍ양인ㆍ천민으로 구별되는 엄격한 신분 구조가 정착되었다.

이러한 양반 사회는 고려의 문벌 귀족 사회에서 일보 전진한 것이었다. 조선의 양반은 고려 후기에 대두한 신흥 사대부의 후신으로 가문의 후광보다는 자기 자신의 실력을 중요시하였다. 이들로 구성된 문반ㆍ무반의 관리는 전제 왕권의 정치적ㆍ행정적 실행자로서 관료적 성격이 강하였다. 또한, 고려의 문벌 귀족이나 권문 세족에 비해 훨씬 많은 가문이 조선의 양반으로 진출하고 있는 것은 지배층의 확대를 의미하여 사회 발전의 일면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에는 농업 생산력이 크게 발달하고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가 보다 진전되어 양인 자작농(良人自作農)이 많아져 전체적으로 농민의 지위가 상승하였다. 그리고 천민들이 양인화하고 있었다. 그 단적인 예로 향ㆍ소ㆍ부곡 등 천민집단의 특수 행정 구역이 소멸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지배층의 확대와 양인ㆍ천민 지위의 상승은 사회 신분면에서의 발전이었다.

이 밖에도 사상계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고려 후기에 수용되었던 주자학이 조선에 들어와 정치 이념으로 채용되었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규범이 되었다. 이는 고려시대에 훈고학적(訓鈐學的)인 유교와 불교 신앙이 병립해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의 성립은 정치ㆍ경제ㆍ사회ㆍ사상 등 모든 면에 걸쳐 커다란 발전을 수반했기 때문에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교체를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환으로 보는 것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의 중앙 정치 기구는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를 골간으로 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는 왕권의 강화에 따라 육조 직계제(六曹直啓制)가 확립되어 실제 정무를 담당한 육조의 권한이 강했고 의정부는 국왕의 자문 기관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ㆍ홍문관(弘文館) 등 삼사(三司)가 국왕에 대한 간쟁(諫爭)과 관리들에 대한 감찰(監察)을 담당하였다. 심사 관원들은 언관(言官)이라 하여 특별히 중시되었다. 지방은 경기ㆍ충청ㆍ경상ㆍ전라ㆍ황해ㆍ강원ㆍ함경ㆍ평안 등 8도(道)로 나누고 아래에는 부(府)ㆍ목 (牧)ㆍ군(郡)ㆍ현(縣)을 두었다.

조선 왕조의 토지 제도는 고려 말에 제정된 과전법(科田法)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과전법은 경기의 토지만을 전직ㆍ현직 관리들에게 수조권을 지급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15세기말에 이르면 이를 둘러싼 양반 관리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전주(田主)와 전객(佃客)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어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국가에서는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해 토지의 지급 대상을 현직 관리로 제한하거나 관수관급제 (官收官給制)를 실시해 전주가 농민으로부터 직접 수조하는 것을 지양했지만 이러한 제도 역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관리들에게 수조권을 지급하는 제도는 점차 소멸했고, 그에 대신해 양반 관리들에 의한 사적 소유지의 확대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국초부터 시작해서 ≪경국대전≫ 체제로서 일단 정비된 조선의 제도ㆍ문물은 16세기에 한 차례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제도의 붕괴 또는 질서의 해이가 아니라 당시의 발전적인 경제 변동을 반영하고 있었다.

16세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유통 경제가 자못 활성화하였다 그것은 지방의 장시(場市)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이러한 경제 변동에 편승해 소수의 훈신(勳臣)ㆍ척신(戚臣) 등 권세가들이 권력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였다. 이들 훈척 계열은 고려 말 조선 건국에 참여했던 신흥 사대부의 후손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세조의 즉위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당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토지를 집적해 농장을 확대하는 등, 온갖 비리적 수단을 동원해 사리를 취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기고 유망하거나 권세가의 농장에 들어가 소작농인 전호(佃戶)로 전락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농민들의 부담에 의해 유지되던 공납제(貢納制)와 부역제(賦役制) 등 국가의 재정 제도가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농장의 확대와 공납제ㆍ부역제의 붕괴로 말미암아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져 각지에서 도둑이 창궐하였다. 황해도에서 일어난 임꺽정〔林巨正〕의 난이 대표적인 예이다.

16세기 사회 변동에 편승한 훈척 계열의 특권적인 비리 행위를 비판하면서 새로이 등장한 정치세력이 바로 사림파(士林派)였다. 이들은 고려 말에 역성 혁명을 반대했던 신흥 사대부의 후손들이다. 조선 왕조 개국 초기에는 관직 참여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지방의 중소 지주(中小地主)로서 유향소(留鄕所) 등을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 사림파가 성종 때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해 주로 언관직에 포진해 훈척 계열을 공격하였다. 수세에 몰린 훈척 계열 쪽에서 사림파에 대한 정치적 보복으로서 일으킨 것이 사화였다. 사화는 연산군 때부터 4차에 걸쳐 일어나 그 때마다 중앙에 진출해 있던 사림파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잇따른 사화에도 불구하고 사림파는 지방에서 서원과 향약 보급 운동을 통해 세력을 결집하고 더욱 신장시켰다. 결국 16세기 후반의 선조 때에 이르면 훈척 계열이 도태되는 가운데 정계의 주류를 이루어 사림 정치를 구현하기에 이르렀다. 사림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구체제, 즉 훈척 정치의 척결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강ㆍ온의 대립이 나타나 동인과 서인의 분열이 일어났다. 종전의 훈척 계열과 사림 세력의 대립이 사림 내부에서 붕당을 이루어 대치하는 양상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이후로도 정치적 사안에 따라 사림의 분화가 거듭되어 선조 때에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17세기 말에 이르러 숙종 때에는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였다. 이러한 정치 형태를 ‘붕당 정치(朋黨政治)’라 한다. 붕당 정치는 사림 내부의 엄정한 자체 비판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림에 의한 성리학적인 정치 운영의 형태였다. 또한 붕당 정치는 정치적 주장을 달리하는 붕당의 공존을 전제로 하는 상호 비판 체제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발전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붕당 정치가 싹트고 있을 무렵, 16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변동에 따라 임진왜란과 정묘ㆍ병자 호란이 발발하였다. 임진왜란의 경우, 초기에는 전쟁 준비의 부족으로 패배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점차 수군의 승전과 각지에서 일으킨 의병의 활약 및 명(明)의 원병으로 전세를 만회해 왜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왜란 후에는 전쟁 중에 줄곧 주전론을 펴던 북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서인에 의한 인조 반정으로 북인 정권이 붕괴된 후로는 이후로는 서인과 남인이 공존하는 가운데 본격적인 붕당 정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때 성립된 서인 정권은 중국의 명ㆍ청 교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두 차례의 호란을 자초하였다.  항전 끝에 결국 청(淸)에 항복해 종속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청에 대한 적개심과 문화적 자부심에서 소중화 의식(小中華意識)이 대두했고, 더욱이 청을 공격하자는 북벌론이 제기되어 실제로 준비되기까지 했으나 실행되지는 못했다.

장기간에 걸친 왜란과 호란은 16세기 이래 해이해지던 조선의 통치 체제를 결정적으로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 중이나 전쟁이 끝난 뒤에 문란해진 통치기구 및 수취 제도를 개편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통치 기구에 있어서는 비변사(備邊司)의 기능이 확대되어 종래 의정부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군사 제도에 있어서는 종전의 오위제(五衛制)가 무너지면서 훈련도감(訓鍊都監)ㆍ총융청(摠戎廳)ㆍ수어청(守禦廳)ㆍ어영청(御營廳)ㆍ금위영(禁衛營) 등 오군영 체제(五軍營體制)로 개편되었다.

수취제도의 개편도 있었다. 우선 전세(田稅)를 개편해 풍흉에 관계없이 1결(結)당 미(米) 4두(斗)로 세액을 고정하였다. 공납제에 있어서는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해 특산물을 현물 대신 미(米)로 통일해 토지 1결당 12두씩을 내도록 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동시에 세제의 합리화를 꾀하였다. 군역제에 있어서는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해 종래 농민들이 1년에 2필(匹)씩 내던 군포(軍布)를 1필로 감했다.

17세기 이후의 이러한 체제 개편은 이 시기의 경제 발달과 사회변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경제 발달은 우선 농업 부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이앙법(移秧法)의 보급은 노동력을 절감시키고 생산량은 배가하는 효과를 거두어, 근면한 일부 농민들이 경영규모를 확대하고 부를 축적해 지주로 성장하였다. 이들을 경영형 부농(經營型富農)이라 한다.

이들은 이른바 광작(廣作)을 행해 수확을 증대시키거나 또는 당시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바탕으로 한 상업적 농업 경영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경영형 부농의 등장은 지주제의 변동을 초래해 지주와 전호와의 관계가 지배ㆍ예속 관계에서 벗어나 점차 경제적인 관계로 변질되어갔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은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인구가 급증하고 농민의 계층 분화가 심화되어 비농업인구의 도시 유입이 현저해지면서 상업은 더욱 발달할 수 있었다.

당시 상업 활동의 중심은 대동법의 실시와 더불어 나타난 공인(貢人)과 전국적인 장시의 발달에 힘입어 성장한 강상(江商)ㆍ송상(松商)ㆍ만상(灣商)ㆍ내상(萊商) 등 사상(私商)들이었다. 이들은 특정 물품을 대량으로 취급해 독점적 도매상인 도고(都賈)로 성장해 점차 상업 자본으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수공업과 광업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먼저 수공업에 있어서는 종래의 관영 수공업이 쇠퇴하고 사영 수공업이 성장하는 추세였다. 광업에서는 광산의 운영에 있어서 상업자본가인 물주가 시설과 자금을 투자하고 광산개발에 경험이 있는 덕대(德大)가 광산을 경영하는 방식이 나타났다.

이는 종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서 자본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경영형 부농의 농업 경영이나 새로운 광산 경영에 필요한 노동력은 주로 임노동(賃勞動)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의 이러한 경제 변동은 또한 사회 계층의 분화를 초래해 종래의 신분제를 붕괴시켰으니, 농민층과 양반층의 분해 및 노비제의 해체 등이 그 실상이었다.

이 시기의 농민층의 분해는 특히 소작지의 보유 관계를 둘러싸고 일어난 것이 특징이다. 한편에서는 경영의 합리화를 통한 경영형 부농이 성장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빈농(貧農) 및 무전 농민(無田農民)이 발생해 유망하거나 임노동자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분해 현상은 양반층의 경우에도 심각해 실세한 양반들이 잔반(殘班)으로 몰락하였다. 이들 잔반은 자영농 또는 소작 전호가 되거나 상업ㆍ수공업으로 전업해 생계를 꾸려나갔다.

한편, 노비와 양인들이 각각 양인ㆍ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키고, 서얼(庶孽)과 중인이 점차 신분적 차별에서 벗어남으로써 지배신분층은 격증하고 피지배 신분층은 격감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처럼 종래의 신분적 지배ㆍ예속 관계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가운데, 노비제 역시 붕괴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나타난 사회 경제적 변동은 종래의 사 (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의 직분적 사회구성 위에서 기능하고 있던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였다. 주자학에 대한 비판은 결국 18세기에 이르러 실학(實學)의 발생으로 귀결되었다.

실학의 중심 과제는 조선 후기 사회의 제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우선 농업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유형원(柳馨遠)ㆍ이익(李瀷)ㆍ정약용(丁若鏞) 등은 주로 농민층의 입장에서 현실의 토지 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유수원(柳壽垣)ㆍ홍대용(洪大容)ㆍ박지원(朴趾源)ㆍ박제가(朴齊家)ㆍ이덕무(李德懋) 등에 의해 상공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특히 이들은 중상론(重商論)과 함께 청의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으므로 북학파(北學派)라고 한다.

19세기에 들어서면 실학은 현실적인 개혁론보다는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학풍은 김정희(金正喜)에 이르러 일가를 이루었다. 이들은 청의 고증학(考證學)을 받아들여 객관적인 학문 연구의 태도를 정립하여, 역사학과 지리학ㆍ금석학(金石學)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실학 사상은 정약용과 김정희의 제자들에 의해 초기 개화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니, 이는 곧 실학 사상 안에 근대지향적인 성격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이와 같이 사회 경제 부문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고, 그것은 분명히 근대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면에 있어서는 인조 반정 이후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던 붕당 정치의 원리가 점차 퇴색함으로써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채 퇴보하고 있었다.

현종 때에는 두 차례의 예송(禮訟)으로 서인과 남인의 세력 관계가 역전되었고, 뒤이은 숙종 때에는 세 차례의 환국(換局)을 거치면서 상대 붕당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가해지면서 공존을 전제로 하는 붕당 정치의 원리가 무너졌다.

이에 영조와 정조는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꾀하기 위해 치열한 정쟁을 억제하려는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해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붕당 정치의 말폐를 근본적으로 제거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간의 대립을 억누르고 있는 것에 불과하였다.

붕당간의 세력 균형도 실제 이루어지지 못해 탕평 하에서도 노론의 우세가 두드러졌다. 노론 일당전제의 가능성은 영조ㆍ정조의 강력한 왕권 아래서는 드러나지 못하다가, 정조 이후 왕권이 약화되자 세도정치라는 더욱 파행적인 정치 형태로 나타났다. 세도 정치란 특정 가문이 정권을 독점하는 형태로서 정권의 사회적 기반을 결여했을 뿐 아니라 붕당 정치의 완전한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세도 정치는 경제ㆍ사회의 모든 부문에 있어서 극심한 부패를 야기시켰다. 그 집약적 표현이 전정(田政)ㆍ군정(軍政)ㆍ환곡(還穀) 등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었다. 삼정의 문란은 표면적으로는 수령ㆍ아전의 횡포와 그 운영상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조선 후기의 조세 수취가 신분제와 지주-전호제에 바탕하여 이루어졌다는 데에 있다. 조선 후기의 경제 변동 속에서 몰락해가고 있던 농민들은 삼정의 문란으로 더욱 궁핍해졌다. 몰락 농민 가운데 일부는 유망하거나 도둑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민란으로 발전하였다.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비롯해 1862년(철종 13)에는 진주 등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정부에서는 무력을 동원해 농민들을 토벌하기도 하고 삼정의 운영을 개선해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민란은 개항 이후까지도 줄기차게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농민들의 주체적 항쟁은 조선의 양반 사회를 결정적으로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민간에서는 비기(秘記)ㆍ도참(圖讖) 등 예언사상이 유행했고, 천주교가 들어와 유포되었으며, 동학(東學)이 창도되었다. 주로 농민 등 핍박받는 피지배층 사이에서 열렬히 신봉된 새로운 종교들은 당시 빈발하던 민란에 혁명적인 기운을 불어넣는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변태섭>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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