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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05-13 (일)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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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438      
[고려] 귀족 (한메)
귀족 貴族 nobles

문벌이나 지위가 높고 봉건적인 특권을 가진 사람들. 주로 봉건 시대에 있어서 대대로 특권을 누리던 지배 계급을 가리킨다.

[유럽]

일반적으로 대규모의 세습적 토지 소유를 경제 기반으로 하여, 육체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신분을 가리킨다. 이들은 탁월한 군사적 역할과 고귀한 혈통에 의해 배타적 문벌을 형성하고 국가의 정치적 지도면에서도 큰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는 BC 8∼BC 6세기 왕정(王政)에서 민주정(民主政)으로 가는 과도기에 귀족정(貴族政)이 실현됐다. 아리스토이(aristoi;귀족)란 <가장 흘륭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기본적 미덕은 용기이다. 그러나 철제(鐵製)무기의 도입에 따른 중장 보병 전술(重裝步兵戰術)의 보급이나 화폐형태로 된 부(富)의 비중 증대 등 사회적 변화에 따라 귀족 지배는 점차 붕괴되어 갔다.

로마에서도 왕정에 이은 공화정기(共和政期)에 제(諸)씨족을 기반으로 하는 출생귀족(出生貴族;patricii)의 지배를 볼수 있는데, 그 정치적 거점은 원로원(元老院)이었다. BC 3세기 귀족과 평민과의 신분 투쟁 후 구귀족(舊貴族)의 자리를 대신한 신귀족(新貴族), 이른바 새로운 형태의 관직귀족(官職貴族;nobilis)이 형성되어서 집정관 등 국가의 최고기관을 차지했다.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의 세력은 제정(帝政)하에서도 존속하여 황제가 직접 귀족계급을 신설하기도 했으나 AD 2세기 이후 대토지소유제(大土地所有制)의 변질에 의한 사회의 구조변화에 따라 전통적인 귀족지배의 원리는 힘을 잃게 되었다.

공화정하에서는 이미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는 기사(騎士) 신분이 형성되어, 이 신분이 원로원귀족으로 이어지는 유력한 계층으로서 국영 사업이나 징세 청부(徵稅請負)를 독점하여 그 재력(財力)으로 제정 후기에 큰 힘을 발휘했다.

<중세>

고대 게르만 사회에서는 초기의 자유인인 농민·전사(戰士)의 공동체가 토지 소유 관계의 변동을 통해 점차 해체되고, 농민과 구별되는 군사적인 귀족신분이 여러 부족의 지도층이되었다. 그 권력기반은 토지 및 농민에 대한 지배로서, 이것이 후에 영주제(領主制)로 발전한다.

프랑크왕국의 발전에 따라 고래의 혈통귀족과는 달리, 종사 제도(從士制度)라는 군사조직에 매개되면서 국왕에 대한 근무에 의거한 새로운 귀족신분이 형성되어 쇠퇴하는 구귀족을 동화·흡수해 갔다. 이 종사 제도와 은대지 제도(恩貸地制度)의 결합에 의해 국왕을 정점으로 하고, 귀족 상호간의 인격적 성실 관계가 뒷받침이 된 봉건 제도가 생겼는데, 이것이 중세 유럽의 정치적 질서의 골격이 되었다. 따라서 귀족의 서임(敍任)은 국왕의 권리에 속한다는 관념도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12세기에는 이러한 봉건 영주(封建領主)로서의 귀족, 즉 넓은 의미의 기사신분이 속인문화(俗人文化)의 담당자가 되어 이른바 기사도(騎士道)의 황금시대가 나타났다. 또한 가톨릭교회의 성직자계층제도(聖職者階層制度)는 봉건사회의 한 구성요소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주교를 비롯한 교회 통치의 지도부는 사실상 귀족에 의해 점유되고 있었다.

한편, 국왕이나 제후(諸侯)가 직할령(直轄領)을 관리하기 위해 창설한 가신(家臣)이라는, 본래 부자유한 신분의 관리층(層)도 그 근무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상승하여 기사신분으로 합류되어 갔다. 그 결과, 13세기 이후 많은 지역에서 귀족의 내부에 계층 분화가 진행되어, 큰 영지(領地)를 소유한 고급귀족과 이 고급귀족에게 봉사하는 하급귀족으로서의 좁은 의미의 기사신분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영국의 나이트(knight), 프랑스의 슈발리에(chevalier), 독일의 리터샤프트(Ritterschaft), 에스파냐의 이달고(hidalgo) 등이 이 새로운 기사신분이다. 또한 12·13세기 이후로 자치 도시가 발전하자, 시민 공동체의 내부에서도 부유한 상층 계급의 여러 문벌이 폐쇄적인 <도시 귀족>층을 형성하였다. 이 지배층은 동업 조합(同業組合)의 수공업 시민을 시정(市政)으로부터 밀어냈고, 이탈리아 도시 공화국 등에서는 귀족정(貴族政)의 통치자가 되었다.

<근세>

중세 말기 이후, 농민의 자립화가 영주 경제(領主經濟)를 위협하는 가운데, 국왕이나 영방군주(領邦君主)에 의한 관료제(官僚制)적인 집권국가의 건설이 진행되었는 한편 화포(火砲)의 도입에 의한 전술 변화가 일어나자 귀족, 특히 하급 귀족층의 세력은 두드러지게 약해졌다.

영국과 같이 기사신분이 일찍부터 지주화(地主化)하여 새로운 경제 사정에 순응하는 지방 명망가(地方名望家)로서의 신사 계층을 형성한 점을 제외하면, 르네상스시대에서 절대주의시대에 이르는 궁정정치(宮廷政治)의 발전은 일반적으로 귀족의 도시 집주(都市集住)를 촉진시켰다. 또한 군주 국가의 상비군이나 관료 기구의 지도부에서 생활의 길을 찾는 귀족도 늘어갔다.

그러나 프로이센·폴란드·헝가리·러시아 등 동구 제국(東歐諸國)에서는 근세로 접어들면서 귀족영주에 의한 농민지배가 오히려 강화되어 사회 구조에 후진성을 더해 주었다. 서구제국(西歐諸國)에서는 이에 반하여 귀족의 영주권이 점차 단순한 지대징수권(地代徵收權)으로 축소되었는데, 프랑스나 독일같은 영주재판권·면세권(免稅權)이 여전히 특권으로 존속한 나라에서도 그 정치적인 자립성은 빼앗기고 있었다.

다만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등과 귀족신분의 작위 서열(爵位序列)은 왕권에 강하게 의존하는 가운데 오히려 엄격화되어 부르주아가 재력(財力)으로써 귀족으로 출세하는 등 사회의 귀족주의적인 성격은 구제도(舊制度) 엘리트층의 큰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 귀족적 엘리트 개념은 후진 국가들에서는 19세기가 되어서도 근대시민사회의 발전을 어느 정도 제약한 것이 사실이다.

<유럽귀족의 문화사·사상사적 의의>

전성기의 <기사도>는 성직자에게 지워진 중세 전기문화를 대신하는 속인(속어)문화의 등장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전사(戰士)의 미덕과 그리스도교 신앙이 예절·자기규율, 또는 이상화된 사랑의 정념속에 융합되어 있었다.

르네상스와 인문주의는 그 자체가 새로운 시민계층의 생활의식을 표현하는 것이었으나, 이탈리아·프랑스·영국 등에서 궁정(宮廷)이 문예의 중심이 됨에 따라 B.카스틸리오네의 《정신론(廷臣論)》에 묘사된 것과 같은 우아한 문인귀족의 이상(理想)이 일반화되었다. 그와 동시에 귀족 및 기사신분의 군사적 기능이 약화됨에 따라 귀족의 자질에서 정신적인 요소가 전보다 더욱 강조되었다.

절대주의 시대의 궁정 문화 밑에서는 인격의 도야(陶冶)를 목표로 하는 고전적 교양의 존중과 나란히 신분과시용 심벌로서의 미술이나 음악의 보호와 조성이 귀족들간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일반적으로 당시의 신분사회에서는 시민이나 성직자도 가치의식에서 귀족에 동화하는 경향이 있은 반면 정치로부터 벗어난 사적(私的)인 생활영역 안에서는 귀족의 <시민화>가 진척되었다.

이렇게 되어 17·18세기의 프랑스의 <살롱>에서 볼 수 있듯이 신분의 벽을 넘어 지적이며 미적인 사교생활을 통해 새로운 자유 사상의 싹이 트고 있었다. 지방자치나 의회제도가 발달한 영국에서는 귀족이나 신사계층이 잇달아 정치생활을 지도했으나, 프랑스를 비롯하여 군주정(君主政)이 강화된 나라들에서는 귀족은 몽테스키외의 이른바 <중간권력>으로서 사상적으로 <자유>의 옹호자 역할을 맡아 시민적인 계몽주의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프랑스 혁명 때의 자유주의 귀족의 활동이 바로 그것이며, 19세기에 들어서 낭만주의의 조류 속에 이 전통이 계승되었다. 그러나 문예에서 시민적인 사실주의 특히 자연주의의 등장은 귀족들이 오랫동안 맡아온 문화사적 역할의 결정적 상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엘리트로서의 귀족의 역사적 의의는 대체로 군주정치의 쇠퇴, 공업화의 진전, 기술문명의 발달과 함께 과거의 것으로 변해갔다.

[중국]

중국의 귀족은 육조(六朝)시대부터 수(隋)·당(唐)대에 걸쳐 명가(名家)·고문(高門)·의관족(衣冠族) 등이라고 불렸으며 높은 관직을 세습적으로 차지하고 정치를 점유함과 동시에 사회나 문화면에서도 지도적 역할을 하여 중국의 중세 사회를 특징지은 상급 문인 관료층(文人官僚層)을 말한다.

귀족은 후한(後漢) 말의 혼란기에 향리사회(鄕里社會)의 구제(救濟)나 질서유지에 진력한 지방의 명망가(名望家)가 발전한 것이었다. 국정(國政) 운영에서 이들 명망가의 협력이 불가결했던 점, 지역사희에서도 권력 기구와의 중간역할을 특정가문에서 구한 점, 또한 9품 관인법(九品官人法)이 출신성분을 중시하여 관리임용을 했던 점 등에서 관료가 되는 가문의 특정화와 문벌의 층서적(層序的) 고정화가 진행되어 문벌에 따라 관리의 임명에 차별을 두는 문벌 귀족제(門閥貴族制)가 성립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귀족은, 사회적 신분으로서의 문벌·교양·도덕성 때문에 여론에 의해 국정에 종사하도록 요구받게 되는 사대부(士大夫)들에게 본래의 그 자격이 부여되었다. 토지나 재산의 유무는 물론, 무인 영주(武人領主) 등이 귀족의 필수 조건이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누리는 특권에는 그에 알맞는 의무가 따른다고 하는 규범의식이 강해 대장원(大莊園)이나 고리대(高利貸)를 하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영리사업 등에는 손대지 않고 공무에만 전념하여 청렴한 생활을 한 귀족이 적지 않았다.

왕조의 교체에도 선양방식(禪讓方式)을 취하도록 하여 신왕조 하에서의 제권리를 확보함과 동시에 왕조의 흥망을 넘어 사회질서를 유지하여 분열과 혼란의 시대에 연속성과 통일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문벌제의 진전에 따라 문벌을 뽐내는 오만한 태도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보신보가(保身保家) 의식이 강해졌다.

문벌에 어울리지 않는 임관(任官)의 거부나 동일 가문(同一家門)내에서의 통혼(通婚)은 그 일례이며, 정무(政務)를 속사(俗事)로 경멸하고 문학·청담(淸談)이나 불교·도교에 몰두하거나, 실제로 관직에 있으면서 정신적 충족만을 구하는 조은(朝隱)을 이상으로 삼기도 했다.

따라서 귀족의 문약화(文弱化)와 타락이 극심하여 세인의 비난을 샀다. 이와같은 실무기피나 퇴폐는 한편으로는 서민출신의 측근을 총용(寵用)하는 황제전제정치(皇帝專制政治)를, 다른 한편으로는 귀족체제하에서 억압받고 있던 불만 계층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특히 후자는 지방의 명망가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던 만큼 귀족이 받은 충격은 커, 그때까지의 문벌의존의 자세에서학문과 도덕성에 기초한 사대부 본연의 모습으로 자기혁신할 필요를 통감하게 했다. 양(梁)나라 때의 학교·시험제도의 정비도 국가 체제의 강화를 지향하는 황제, 자기혁신을 도모하는 귀족, 신흥 명망가 등 3자(者)의 공통 의견에 기초하였다.

문벌귀족제의 전개가 두드러졌던 남조(南朝)에서도 북조(北朝)와 같이 문벌 편중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 이와 같은 조류에 입각해 수·당의 과거 관료 제도(科擧官僚制度)가 성립되었다. 귀족적 교양과 개인적 재능의 겸비를 추구한 이 신귀족 체제(新貴族體制)하에서 귀족의 사회적 세력은 더욱 강화되어 정치적인 우위를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안사(安史)의 난(亂)을 맞자, 계보(系譜)를 편찬하여 전통을 과시하면서 신흥세력의 권력과 재력(財力)을 목적으로 혼인(재혼)을 거듭하는 등 존명을 꾀했는데 몰락을 면할 수는 없었다.

[한국]

고대 국가로 성장한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의 성립과 함께 생각할 수 있다. 고구려는 1세기 이래 왕위의 부자상속을 확립하게 되었는데,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전환되어 갔다. 백제는 3세기경 통일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고 4세기에 와서는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를 완성시켰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뒤늦은 5세기경에 이르러 왕위의 부자상속제와 중앙 집권화를 위한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들 삼국의 지배신분층은 귀족이었으며, 왕족은 최고의 귀족이었다. 고구려의 귀족제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수상인 대대로(大對盧)가 있으므로 이를 선출할 수 있었던 신분층이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신분층은 왕족과 왕비족이 중심이 되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왕족은 계루부(桂婁部)의 고씨(高氏)였으며, 왕비족은 절노부(絶奴部)의 명림씨(明臨氏)로서 왕족 다음가는 귀족신분층이었다. 이들 밑에는 형(兄)으로 불리거나 사자(使者)로 호칭되는 관등(官等)에 취임할 수 있는 일정한 귀족신분층이 존재했다.

백제의 귀족은 왕족인 부여씨(夫餘氏) 외에 사(沙)·연(燕)·협·해(解)·진(眞)·목(木)·백 등 8성(姓)이 있었다. 국가의 주요한 관직은 왕족이나 왕비족인 진씨나 해씨가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 중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귀족 제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신라의 골품제도(骨品制度)이다. 골품제도는 신분의 존비(尊卑)에 따라 정치적 출세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특권과 제약이 부여되던 제도였다. 골품은 성골(聖骨;大元神統)·진골(眞骨;眞骨正統)과 6두품(六頭品) 이하 1두품(一頭品)에 이르는 차등적인 신분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최고의 지위는 성골이 차지하였다.

성골은 김씨 왕족 중에서도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골품이었으나 7세기경에 이르러 소멸하였으며, 그후에는 진골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성골과 진골의 구별은 모계(母系)에 의하였으며 모계가 왕비족인 박씨(朴氏)일 경우에만 성골로 인정되었다.

진골 다음가는 귀족으로는 6두품·5두품·4두품이 있었다. 삼국 시대에는 귀족들에게 식읍(食邑)·녹읍(祿邑)·사전(賜田)과 같은 많은 토지가 주어졌다. 식읍이나 녹읍은 토지에서 생산되는 곡물에 대한 수조권(收祖權)뿐만아니라,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노역(勞役)에 동원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또한 국가로부터 조(租, 곡물)도 지급받고 있었으며 상당수의 노비도 소유할 수 있는 존재였다.

9세기경에 이르러 신라에서는 진골 귀족의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중앙귀족의 정치적, 사회적 권위가 약화되어 갔는데 이러한 혼란을 틈타 지방 호족(豪族)이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들 호족 세력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지배층 세력으로 연결되었으며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 역시 송악(松嶽)의 호족 출신이었다.

따라서 고려의 귀족 중 상당수는 이들 호족이 차지하였다. 또한 호족 이외에 신라 6두품 계열의 귀족들도 고려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이 두 계열에 의하여 형성된 고려의 귀족은 신라의 골품 귀족에 비하면 훨씬 더 개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가문과 문벌을 매우 소중히 여겨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나, 원래 호족이었던 때의 출신지를 본관(本貫)으로 칭했다. 이때의 대표적 귀족 가문으로서는 인천(仁川) 이씨·안산(安山) 김씨·파평(坡平) 윤씨·해주(海州) 최씨·경주(慶州) 김씨 등을 들 수 있다.

고려는 이러한 문벌귀족, 즉 문반관료(文班官僚)에 의해 운영되어 갔는데 이 귀족제도를 유지하는데 뒷받침이 된 것은 공음전시(功蔭田柴)였다. 문반과 아울러 무반(武班) 역시 고려 전기에는 같은 지배 신분층에 속해 있었으나, 신분상으로는 차이가 있어 훨씬 덜 존중되었다. 이러한 불균형이 깨어진 것은 12세기 말 무신정권의 출현 이후부터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귀족이란 사실상 양반(兩班)을 의미한다. 양반이란 조선 왕조를 통치해 온 상급 지배 신분층(支配身分層)의 통칭으로 이는 원래 관제상의 문·무반을 지칭했으며 상급 지배신분층을 나타내는 데에는 양반이란 용어 외에 사대부(士大夫)·사족(士族)과 같은 명칭이 함께 사용되었다.

이들 귀족들은 정치의 담당자였으며 사회조직도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받기 위한 방향에서 편제되었다. 이 특권에 의하여 이들은 정치적 관료가 되거나 관료 예비군으로 행세할 수 있었는데 경제적으로는 토지 소유자로, 사회적으로는 지방 사회의 지배자로 행세하였다.

조선 초기에 확립된 양반 제도를 비롯한 조선 왕조의 신분 체제는 임진왜란과 병자 호란을 겪고 난 이후인 조선 후기에 이르러 크게 무너져 양반의 경우에는 계층분화가 일어나 소수의 집권양반과 다수의 몰락양반의 출현이라는 현상을 보게 되었다. 이들 집권양반은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세도 가문(勢道家門)과 같은 일종의 폐쇄 집단을 형성하였고 비합법적인 과폐(科幣)마저 자행하였다.

신분 제도의 개혁은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갑오경장(甲午更張)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 진행되어 오던 이들 신분체제의 붕괴 현상을 합법화하고 추인(追認)하였다. 그러나 갑오경장에서 신분 제도의 포기를 공적(公的)으로 선언했다 하더라도 일시에 바뀐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제(日帝)의 침략이 노골화됨으로써 이들 구신분질서는 그들의 통치정책에 역이용되어, 한일합방(韓日合邦) 직후 일제는 구(舊)한국의 황실과 친일파 관료들에게 작위(爵位)를 내려 주고 세비(歲費)나 은사공채(恩賜公債)를 지급해 줌으로써 일제강점 하에서 새로운 귀족층을 형성시켰다.

1923년부터 시작된 형평 운동(衡平運動)은 이러한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의 진행 과정중에 신분제적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일어난 민중 운동이었는데 이들 민중들의 노력의 결과 신분 제도와 그 관념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45년 광복과 더불어 신분 제도는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되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전근대적 신분제도의 청산과 함께 양반계급도 한국내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할 수 있다.

<나웅찬>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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