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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0-04 (금) 22:41
분 류 사전1
ㆍ조회: 6410      
[공예] 자수 1 (민족)
자수(刺繡)

박쥐문침장. 자수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자수방석.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버선본보. 자수박물관 소장. 상용보 중의 하나이다. <자수박물관 제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베갯모.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베개의 양 끝에 조그마한 널조각에 수놓은 헝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자수복주머니.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자수붓주머니.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자수 사조룡왕세자보. 왕, 왕세자, 왕세손의 용포와 왕비, 세자빈, 세손빈의 대례복에 달았던 흉배. 자수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수목문수보. 혼례용보로 주로 쓰이는 수보의 가장 대표적인 문양은 나무로 복락기원과 관계가 깊다. 자수박물관 제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자수 수십장생안석침.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자수 수저집. 숟가락과 젓가락을 넣는 주머니. 자수박물관 소장. 복과 장수를 상징하는 문자나 문양을 수놓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자수 심동신금관조복. 조선 후기의 문신 심동신이 입었던 운학금환수. 대대와 함께 달려 있는데 홍색 전에 청, 황, 백의 3색으로 운학을 수놓았다. 중요민속자료 제2호.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 민속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자수 쌍호흉배. 무관 당상관용 흉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자수 오조룡왕비보. 자수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자수 왕비방석. 자수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자수사계분경도. 4곡병 중 가을. 자수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자수요. 56×174cm.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엄비가 청주 민가로 피신하였을 때 사용하던 이불과 요를 집주인에게 고맙다고 하사하였는데 그 후 집주인이 이불 겉감과 요 뒷감을 뜯어서 판 것이라고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자수 흉배. 조선시대에 백관이 입는 상복의 가슴과 등에 가식하던 사각형의 학 장식 문양. 문관용.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화문수보. 자수박물관 소장. 꽃과 열매를 수놓은 길조 문양의 보자기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자수 활옷.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소장. 겉길에는 연화, 모란, 봉황, 원앙.나비와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의 문양과 인간의 소망을 표현한 문자를 수를 놓은 가례 때 착용하던 조선시대의 여자 예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자수의 기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바탕천에 여러 가지 색실로 무늬를 수놓아 장식하는 공예미술. 자수는 인류가 동물의 모피나 식물의 껍질과 잎 등을 원시적 재봉용구로 꿰매고 엮어 옷을 지어 입었던 선사시대에 기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고기나 짐승의 뼈 등으로 만든 바늘로 짐승의 가죽을 꿰매어 옷을 해입는 등의 원시단계에서 점차 문명이 발달되어 옷감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금속바늘이 출현하면서 자수가 시작되었다.
즉, 인류생활이 점차 문명화되면서 옷이나 직물제품에 계급 표시 등을 목적으로 장식 또는 자수를 도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수는 직물의 표면을 장식하는 조형예술로 발전되고, 각 민족의 생활환경·풍습·신앙 등에 따라 독자적 양식을 이루고 있다.

우리 나라의 자수 역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시대의 변천에 따라 우리 민족의 미적 특질을 표현해왔다. 자수는 길쌈·바느질 등과 함께 바늘 한땀한땀의 정성을 통해 일상생활 곳곳에 섬세한 솜씨로 아름다움을 가꾸워왔으며, 아울러 민족의 정서를 그 속에서 꽃피웠다.

[역사]

(1) 선사시대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흙이나 돌로 만든 방추차(紡錘車)와 크고 작은 뼈바늘·돌바늘 그리고 바늘집 등이 출토되고 있다. 이와 같은 방적용구와 재봉용구가 출토됨으로써 그 당시에 이미 직조와 바느질을 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뒤이어 철기시대에 이르러서는 철로 만든 농기구가 등장하여 농업이 현저하게 발달되었다. 이에 섬유재배기술이 발전되고 직물생산이 증대되었다. ≪삼국지 三國志≫와 ≪후한서 後漢書≫ 등을 보면, 이 무렵의 우리 나라에서는 마(麻)와 뽕나무를 재배하고 누에고치를 길러 면포(綿布)를 비롯하여 마포(麻布), 그리고 합사(合絲)하여 짠 교직물(交織物)인 겸포(慨布)도 생산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직물의 발달은 자수발달의 기본요건이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부여인은 외국에 나갈 때에 증(繒)·수(繡)·금(錦)·계(距)로 지은 옷을 즐겨 입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수는 금은색사(金銀色絲)로 수놓은 비단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자수는 훼손되기 쉬운 재료의 성질 때문에 이 시대의 유물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이 없어 그 실상을 알 수는 없으나 당시 지배층의 신분과 계급을 나타내는 표시로 옷이나 깃발, 수레 등에 자수로 장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삼국시대

이 시대에는 생산도구와 생산기술이 전반적으로 발달되어 생산력이 향상되었다. 이에 방직기계도 개량되고 직조술도 발전되어 직물의 종류가 증가되고 품질도 좋아졌다. 따라서, 옷이나 각종 직물제품에 자수장식도 성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수에 관한 문헌이 희소하고 자수유물도 아직 발견된 예가 없어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 1973년에 발굴된 경주 천마총(天馬塚)의 출토 유물 중에서 옷자락에 금사(金絲)로 수놓은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 진덕여왕이 650년(진덕여왕 4)에 손수 비단〔錦〕을 짜서 여기에 오언(五言) 〈태평송 太平頌〉을 수놓아 당나라 고종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친당외교 선물로 제작된 〈태평송〉자수는 5언 20행으로 도합 100여 자의 한자가 수놓인 대작이다. 그 내용은 고종의 치적을 칭송하는 의례적인 것이었다.

〈태평송〉의 수가 시사해주는 바는 첫째로 일찍부터 자수품이 국가간의 친분을 표시하는 외교상의 증여품으로 큰 공헌을 했다는 점이다. 둘째로 여왕이 손수 비단을 짜서 수를 놓았다는 기록은 당시 귀족에서 일반평민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어릴 때부터 습득해야 하는 가사기술로서 바느질·길쌈·염색 등과 함께 자수를 중요시했다는 사실이다.

자수는 이 시대에 발달된 각종 문물과 함께 일본에 전해져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사실은 ≪일본서기 日本書紀≫와 일본자수교과서 자수연표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340년경에 백제의 왕이 옷을 짓는 여공인 진모진(眞毛津)을 일본으로 보냈는데, 그가 일본 자수의 시조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또, 고구려의 가서일(加西溢)이 만들었다는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 일본 국보, 奈良 中宮寺 소장)은 고구려풍의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인동문(忍冬文) 및 연화문(蓮花文) 등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의장(意匠) 요소와 같은 점이 많아 고구려와 백제의 자수기법이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3) 통일신라시대

이 시대에는 삼국의 문화적 특징이 융합되고 집성되어 찬란한 문화의 황금기를 누렸다. 자수 역시 크게 발달된 것으로 보이나 작품을 통한 연구는 불가능한 실정이다. 다만 ≪삼국사기≫ 잡지(雜志)를 보면, 옷은 물론 가마나 말안장, 일상용품에 이르기까지 자수로 장식되었고, 불교자수도 상당히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자수에 관한 기록을 정리해 보면 먼저 834년(흥덕왕 9년)에 복식금령(服飾禁令)이 내려져 골품(骨品)에 따른 직물사용의 종류를 규정하였다. 예를 들면, 당시 고위신분인 진골녀(眞骨女)의 경우 겉옷〔表衣〕과 속옷〔內衣〕·바지〔袴〕·버선·신발 등에 계(距)와 수놓은 비단〔繡錦〕을 사용하지 못하게 규제하였다.

이같은 금령이 시행된 것으로 보아 당시 귀족사회에 팽배해 있던 사치성에 의해 고급직물과 자수에 대한 수요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옷감 외에도 안장언치〔鞍術〕와 안장자리〔鞍坐子〕 및 발〔簾〕에도 ‘수놓은 비단’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특히 진골과 육두품은 자수병풍의 사용을 금했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악(祭祀樂)에 보면, “807년(애장왕 8)에 사내금(思內琴)을 연주할 때 무척(舞尺) 4명은 푸른색 옷, 금척(琴尺) 1명은 붉은색 옷, 가척(歌尺) 5명은 채색옷을 입었는데, 이들은 수(繡)부채를 들고 금루대(金縷帶)를 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비록 단편적인 기록이지만 이를 통해 당시의 복식 및 생활자수가 귀족사회에 보편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불교가 크게 일어나 많은 귀족들이 다투어 절에 토지를 비롯하여 불상(佛像)·불구(佛具) 등을 시주하였다. 이같은 물자낭비를 막기 위해 애장왕은 새로 절 짓는 것을 금하고 수리만을 허용하였다. 또, ‘금수(錦繡)’로 불사(佛事)하는 일도 금하였다. 이는 법당의 장식에까지 고급비단과 자수가 쓰였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에 ‘수초상(繡肖像)’에 관한 기록이 있다. 즉, 886년에 헌강왕이 죽자 그의 비 권씨(權氏)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며, 왕을 추모하여 왕의 초상을 수놓아 불국사 광학장 강실 벽면에 안치하였다. 같은 해 정강왕이 즉위하자 그의 비 김씨(金氏)는 돌아가신 부모를 추모하여 석가상(釋迦像)을 수놓은 번(幡) 1정(幀)을 같은 강실에 헌정하였다.

두 작품은 당시 그림과 자수로 가장 유명했던 비구니 원해(圓海)의 솜씨라고 한다. 당대의 문인 최치원(崔致遠)은 이 석가상에 대해 “……천에 물들여 바느질하니 마치 아지랑이가 끼듯 슬기어린 구름이 나부끼듯 허공에 높이 걸려 빛나는 공덕을 더욱 화창하게 드러내도다.”라고 찬하였다.

중국에서는 역사상 걸출한 자수작가의 이름이 ≪열녀전 烈女傳≫에 올라, 그들의 이름이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해 우리 나라의 사서에는 거의 언급된 바 없다. 원해는 옛 문헌에 나와 있는 우리 나라의 유일한 자수작가이다. 1172년 고려의 명종이 광학장에 들러 헌강왕의 수초상(繡肖像)에 예를 올린 사실로 보아 원해의 작품은 오랫동안 보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시대에 길쌈과 염색, 바느질 등의 일을 전담하던 여러 공방(工房)이 있어 직물공예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자수와 관련되어 있는 공방을 보면 〔표 1〕과 같다. 먼저 금전(錦典)·모전(毛典)·마전(麻典)·기전(綺典) 등은 각 해당 직물을 짜던 곳인 듯하다. 조하방(朝霞房)은 조하금(朝霞錦) 등의 비단을 짜던 곳으로 보인다. 이 비단은 당나라에 수출하였다.

그리고 홍전(紅典)과 소방전(蘇芳典)과 같은 염료를 제조하고 염색을 맡은 기구를 둔 것으로 보아 염색법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듯하다. 이러한 염색법의 발달은 자수의 기본재료인 직물과 실에 다양하고 미묘한 색상을 연출할 수 있게 하는 주요 요인이 되는 것이다.

(4) 고려시대

실물을 통한 고려자수 전반에 걸친 고찰은 어려운 형편이다. 고려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수사계분경도 刺繡四季盆景圖〉(보물 제653호)와 〈기호산신도 騎虎山神圖〉 및 기타 몇몇 박물관과 절에 소장된 소수의 작품이 전해온다.

따라서, ≪고려도경 高麗圖經≫과 ≪고려사≫ 등의 문헌의 곳곳에서 보이는 자수관계의 기록에 의해 추론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이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고려시대의 자수양식을 편의상 복식자수(服飾刺繡)·기용자수(器用刺繡)·감상자수(鑑賞刺繡)·불교자수로 나누어 개관해본다.

① 복식자수 : 귀족층의 복식 사치가 심하여 당국에서는 이같은 사치풍조를 없애기 위해 자주 금제조처를 취하였다. 1034년(덕종 3)에는 “모든 신하는 아내가 금봉(金鳳)비녀를 머리에 꽂지 못하게 하고, 수놓은 비단은 찢어버리고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라.”는 금령을 내린 바 있다.

10년 후인 1043년(정종 9)에는 경외(京外)의 남녀 백성이 용봉(龍鳳)문양을 비단에 수놓거나 금박장식하는 것을 금하였다. 또한, 1144년(인종 22)에는 사치가 심하여 내외(內外) 공사(公私)의 옷에는 반드시 금수(錦繡)를 사용하고 그릇에는 옥(鈺)을 사용하므로 이를 근절시키라는 왕명이 있었다. 이같은 몇 가지 사실로 미루어 당시의 복식자수가 섬세하고 세련됨이 지나쳐 사치한 귀족취향의 장식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도경≫ 왕복조(王服條)에 보면 “고려 왕은 상복(常服)을 입을 적에는 높은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소매가 좁은 엷은 황색의 포(袍)를 입고 자주색 나(羅)로 만든 넓은 허리띠를 두른다. 허리띠 사이사이에는 금사(金紗)와 벽사(碧紗)로 수를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비와 귀부인은 그림 또는 자수 문양으로 장식한 붉은색의 옷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또한, 왕을 호위하는 친위군은 대개 오색의 꽃이나 새 문양을 수놓은 비단옷을 입었고, 허리띠에 오색의 꽃을 수놓아 장식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군복에까지 자수가 장식된 점으로 미루어 귀족이나 일반평민의 복식에도 자수장식이 성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② 기용자수 : ≪고려도경≫에 보면, 자수장식을 한 각종 궁중 의물(儀物)과 기명(器皿)이 〔표 2〕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③ 감상자수 : 고려자수에서 주목할 사항은 미적 감상을 목적으로 제작된 감상자수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고려도경≫ 공장조(供張條)에 보이는 ‘수도(繡圖)’가 바로 감상자수이다.

그 설명을 보면 “붉은색 바탕에 초록색으로 테를 둘렀고, 오색사(五色絲)로 산화(山花)·희수(戱獸)를 수놓았는데 그 정교함이 수막(繡幕)을 능가한다. 화죽(花竹)·영모(翎毛)·과실 따위도 수놓았는데 각기 생기가 있다. 고려의 습속에는 장막을 10여 폭 칠 때마다 수도 하나씩 걸어 사이를 띄운다.”라고 하였다.

그 수요 범위가 넓어서 장막뿐만 아니라 내방(內房)이나 거실 등의 실내에도 보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자수미(刺繡美)의 완상을 목적으로 한 감상자수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자수의 영역이 확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④ 불교자수 : 불교는 전시대에 이어 국가와 왕실의 흥륭을 꾀하는 호국신앙으로 육성되었고 여성의 생활에도 깊이 스며들어 생활습속화되었다. 이에 어느 시대보다도 각종 용도의 불사용(佛事用) 자수가 번성하였다.

당시 상당수의 화승(畵僧)이 불사용 그림에 참여했던 점을 감안할 때, 불교자수에 전념하던 승려와 비구니 및 여신도가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일본 등지에 남아 있는 고려 불화의 양과 질로 미루어 불교자수도 이에 비견됨에는 틀림없다. 다만 현존작품이 거의 없어 앞으로의 발굴을 기대하고 있다.

에 계속

<허동화>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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