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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3 (화)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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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6973      
[고려] 고려의 성립과 발전 1 (민족)
고려(성립과 발전) 고려의 성립과 발전 1

세부항목

고려 역사 개관
고려의 성립과 발전 1
고려의 성립과 발전 2
고려의 제도
고려의 대외 관계
고려 문화
고려의 역사적 성격
고려 시대 연구사
고려 시대 참고문헌

1. 귀족 사회의 성립과 발전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

신라 후기에는 몰락한 중앙 귀족과 토착적인 촌주 출신, 그리고 지방의 군사적인 무력을 가진 군진세력(軍鎭勢力) 등이 지방 호족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농민 반란을 배경으로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9세기 말 이들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상주 지방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죽주(竹州 :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竹山)의 기훤(箕萱), 북원(北原 : 지금의 강원도 원주)의 양길(梁吉), 지금의 전라도지방의 견훤 등이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룬 것이 견훤과 궁예였다.

견훤은 원래 상주의 호족 출신이었다. 신라의 작은 부대장〔裨將〕이 되어 세력을 키우다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이끌고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다시 완산주(完山州 :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에 진격해 그곳을 근거로 900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궁예는 신라의 왕족으로 몰락한 가문 출신이었다. 처음에 양길의 부하가 되어 강원도 일대를 경략하고 세력이 강성해지자, 양길을 넘어뜨리고 송악에서 자립해 901년에 고려를 건국하였다.

이에 신라와 함께 백제·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는 후백제·고려(후고구려)가 정립해 후삼국 시대가 나타나게 되었다. 신라는 진골 왕족의 권력 다툼에 휩싸여 경상도일대만을 지배하는 상태였으나, 견훤과 궁예는 전제 군주로서 전라도 일대와 중부 지방에서 커다란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왕건은 본래 혈구진(穴口鎭)을 비롯한 해상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궁예의 휘하에서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 방면으로부터 후백제지역을 공략해 진도·금성(錦城 : 지금의 나주)을 점령한 것은 그러한 해상 활동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국호를 '고려'라고 한 것은 궁예와 같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종래의 구 신라에 대한 혁명적인 새 왕조건설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듬해 국도를 철원에서 그의 출신지인 송악으로 옮겼다. 그가 건국 초의 불안정한 시기에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송악 지방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기반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신라는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외부의 후백제 침략으로 국운이 쇠퇴해 935년(경순왕 9) 고려에 귀부하였다. 그것은 927년 견훤이 신라의 국도를 침략해 경애왕을 죽이고 노략질할 때, 왕건이 신라를 도와 견훤과 싸워준 친신라정책이 주효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려는 전 왕조인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함으로써 정통 왕조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후백제는 이미 934년 운주(運州 :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에서 고려 태조군에게 패배해 웅진 이북의 30여 성을 빼앗기는 타격을 받았다. 또한 이듬해 부자간의 불화로 견훤이 아들 신검(神劒)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한 내부적 분열을 틈타 태조는 936년 대군을 이끌고 신검의 군대를 선산에서 대파해 그의 항복을 받아 후삼국의 통일을 보게 되었다.

[호족 통제 정책]

태조가 통일 왕조를 이룩했으나 중앙의 통치력이 전국적으로 미치지 못하였다. 지방에는 반독립적인 호족들이 분립해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태조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이었다. 처음에는 호족 세력을 회유해 자기 기반 안에 흡수하려 하였다. 미처 확고한 세력을 마련하지 못한 고려 왕조로서는 독자적 세력을 가진 호족들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혼인 정책을 썼다.

즉 태조는 정주 유씨(貞州柳氏)·평산 박씨(平山朴氏)·충주 유씨(忠州劉氏) 등 전국의 20여 호족들과의 정략적인 혼인을 하였다. 또한, 호족들에게 왕씨성(王氏姓)을 주어 한집안과 같은 관계를 맺은 것도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호족 세력의 통제에도 노력하였다. 우선 태봉의 관제를 답습해 여러 정치 기구를 설치하고, 많은 호족을 중앙 관리로 등용해 관료의 지위로 전환시켰다.

또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아 중앙 통제력이 미치지 못했으므로 대신 지방 호족들에게 호장·부호장 등의 향직을 주고 그 자제들을 뽑아 인질로 서울에 머무르게 하는 기인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개국공신이나 고관들에게 자기 출신 지역의 부호장 이하의 향직을 임명하고, 지방의 치안 통제를 책임지는 사심관을 삼아 지방을 통제하였다. 태조가 호족들에게 관계(官階)를 수여하고, 토성(土姓)을 분정(分定)한 것도 지배 질서 안에 편제하려는 의도였다.

한편 태조는 만년에 신하로서 지켜야 할 규범으로 ≪정계 政誡≫ 1권과 ≪계백료서 誡百寮書≫ 8편을 지어 중외에 반포하였다. 이 두 책은 중앙 관료와 지방 호족들에게 군주에 대한 신하의 도리를 일깨워 중앙 집권화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으려 한 것이었다. 또한, 자손들에게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만들어 군주로서 지켜야 할 교훈을 남긴 것은 이에 대응한 것이라 하겠다.

[집권화 정책]

호족들의 존재로 인해 불안정했던 왕권은 태조의 죽음과 함께 표면화되었다. 945년(혜종 2)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광주(廣州)의 호족 ‘왕규(王規)의 난’이 일어났다. 두 딸을 태조의 15비와 16비로 들여놓은 왕규는 혜종의 두 아우 요(堯 : 뒤의 정종)와 소(昭 : 뒤의 광종)를 꺼려 혜종에게 거듭 상소했으나 듣지 않자. 그는 외손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고자 하였다. 이에 혜종은 불의의 변을 두려워해 사람을 의심하고, 갑사(甲士)로써 신변을 호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가 즉위 2년 만에 병으로 죽자, 서경의 왕식렴(王式廉) 세력과 결탁한 요가 왕규를 제거하고 정종이 되었다.

그러나 왕권의 불안정은 계속되어 이들 도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 그들의 세력 기반인 개경을 벗어나기 위해 서경 천도를 추진했으나 갑자기 병으로 죽음으로써 실현되지 못하였다.

고려의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된 시기는 광종 때부터였다. 광종은 즉위 후 온건한 방법으로 호족 세력을 무마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꾀해 기반을 세우고 서서히 호족 세력의 억제수단을 마련하였다. 우선 956년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호족들의 많은 노비가 해방되어 그들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이 약화되었고, 반면 양인을 확보하게 되어 국가의 수입이 증가하였다. 958년 후주(後周)의 귀화인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도를 실시해 신진 관리를 채용하였다. 이로써 개국 공신 계열의 훈신이 타격을 받고 대신 새 관료를 밑받침으로 한 왕권의 강화를 보게 되었다.

이어 960년 백관공복(百官公服)이 제정되어 모든 관리의 복색을 계급에 따라 자삼(紫衫)·단삼(丹衫)·비삼(緋衫)·녹삼(綠衫)의 네 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계층의 편제는 왕권 확립의 표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호족들의 불만이 커지자 광종은 숙청 작업에 나서게 되었다. 960년 대상(大相) 준홍(俊弘),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 개국공신 계열을 무자비하게 죽여 왕권의 확립을 꾀하였다.

이러한 의지는 광덕(光德)·준풍(峻豊) 등의 독자적인 연호 사용과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라 했으며,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데도 나타난다. 이러한 시책에 의해 건국 초의 불안정한 왕권이 안정되고 중앙 집권화가 진전되었다.

[국가 기반의 확립]

고려가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마련하고 국가 기반이 확립된 것은 성종 때였다. 광종이 중앙 집권 체제 확립의 기반을 마련했지만 그것은 완전한 것이 못되었다. 광종이 죽고 경종이 975년 즉위하자 개혁 정치의 주역들이 제거되고 반동 정치가 행해졌다. 그러나 중앙 집권화 정책은 경종 때도 계속되었다. 일부 보수 세력이 정치의 대권을 행사했지만 그들 개국공신 계열의 세력은 약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중앙 집권 정치의 표현은 976년 전시과의 제정으로 나타났다. 전시과의 실시는 중앙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고 동시에 그들을 중앙 집권 체제 안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려 초기의 중앙 집권화 정책은 성종에 이르러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성종은 최승로(崔承老)의 보필을 받아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고 당나라 제도를 받아들여 내외의 정치제도를 정비하였다. 982년 중앙관제를 제정해 집권정치를 실행할 수 있는 정치적 기구를 마련하였다. 이어 983년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해 처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특히, 12목의 설치로 지방의 자치적인 향호(鄕豪)가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 향직이 개정되어 당대등(堂大等)이 호장(戶長)으로 바뀌고, 병부(兵部)가 사병(司兵), 창부(倉部)가 사창(司倉)으로 개칭되었다. 이는 이들 호족들이 지방관의 보좌역인 향리의 지위로 격하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방의 자치적인 호족들을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 밑의 향리로 떨어지게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중앙관료로 등용해 집권체제 안에 흡수하였다. 즉, 호족의 자제들을 뽑아 개경의 학교에서 유학하게 하고 그들을 과거를 통해 관리로 임명하였다. 지방호족들이 교육정책을 통해 유교적 교양을 지닌 중앙관료로 전신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는 확립되어갔다.

[귀족 사회의 발전]

성종 때 확립된 중앙집권체제는 현종을 거쳐 문종 때 이르러 완성을 보게 하였다. 물론 성종부터 현종에 이르는 시기에 세 차례의 거란 침입과 그 뒤 여진족의 압력에 시달렸지만, 내부적으로 국가체제가 더욱 정비되어 귀족사회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성종 때 삼성육부와 중추원·삼사가 설치되었는데, 목종 때 여러 잡서(雜署)가 증설되고, 현종 때 도병마사가 성립되어 중앙관제의 정비를 보게 되었다.

또한, 성종 때 성립된 지방제도도 1018년에 정비되어 경기(京畿)가 설치되고, 군현제가 완성되었으며, 주부군현의 향리의 수가 정해졌고, 육위(六衛)가 형성되었다. 목종 때 다시 이군(二軍)이 설치됨으로써 중앙군제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 시기에 경제제도도 정비되었다. 경종 때 처음 제정된 전시과는 998년 18과로 구분된 전시과로 개정되고(개정전시과), 1024년 자식 없는 군인의 처에게 구분전이 지급되고, 1049년 양반공음전시법(兩班功蔭田柴法)이 제정되었다.

1054년 세 등급으로 나누어진 전품제(田品制)가 실시되고, 1069년 양전(量田)의 보수(步數)가 정해졌으며, 1076년 최종적인 갱정전시과로 고쳐지면서 경제제도의 정비를 보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사회구조가 정착되어 귀족사회가 발달하게 되었다. 즉, 국가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사회적인 지배세력이 정착되어갔는데, 이들은 문벌을 중요시하는 귀족의 신분이었다. 이러한 귀족사회는 문종 때에 이르러 절정기를 맞았다. 이 때 고려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 걸쳐 황금기를 이루었다.

2. 무신 정권의 전개

[귀족 사회의 동요]

고려의 귀족 사회는 문종 때 전성기를 이루어 이후 한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문벌귀족들은 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했으며, 관직에 따른 전시과나 공음전 외에 사전을 받고, 특히 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겸병을 통해 막대한 사전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정치권력과 경제력의 특권적 확대는 이를 둘러싼 귀족 사이에 내부적 분열을 일으키고 치열한 자기항쟁을 불러일으켰다.

귀족사회의 모순으로 시작된 지배세력 사이의 상호분쟁은 전통적인 문벌귀족에 대한 지방출신의 신진관료세력과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인주 이씨(仁州李氏) 등 보수적인 집권세력에 도전하는 지방향리출신의 신진관료가 대두해 서로 대립하였다. 그 구체적 사건이 인종 때 일어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었다.

이자겸의 난은 이자겸 일파가 지방출신 신진관료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정치적 책동이었다. 이자겸은 인종에게 두 딸을 왕비로 들여 권세를 잡고, 마침내 인종을 폐해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이에 1126년 김찬(金粲)·안보린(安甫鱗) 등 국왕의 측근세력이 이자겸을 제거하려 거사하였다. 이들은 문벌귀족에 반대해 왕권을 옹호하려는 세력으로 신진관료들과 맥락을 같이하는 무리들이었다.

그러나 이 거사는 이자겸의 일당인 척준경(拓俊京)의 군사행동으로 실패하였다. 그 뒤 이자겸은 인종을 가두고 살해하려고 하는 등 횡포를 다했으나, 내부의 분열로 이자겸이 축출되어 제거됨으로써 인주 이씨는 몰락하였다. 따라서, 이 사건은 귀족사회가 붕괴되는 발단이 되었다.

묘청의 난은 개경의 문벌귀족에 대립하는 지방신진세력의 반항운동이었다. 이자겸의 난 때 궁궐이 불타 개경은 황폐되고 분위기는 어수선했으며, 밖으로 금나라에 사대의 예를 취하게 되어 백성들이 실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외의 정세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개경의 문벌귀족을 넘어뜨리고 새로운 혁신정치를 꾀하려 한 것이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정지상(鄭知常) 등 서경세력이었다.

묘청 등은 개경의 지덕은 쇠하고 서경의 지덕은 왕성하므로 서경에 천도하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고, 금나라도 항복하며, 해외의 모든 나라가 조공을 바칠 것이라 하였다. 이들은 서경의 명당자리라는 곳에 대화궁(大花宮)을 짓고, 칭제(稱帝)·건원(建元)을 내세우며 금나라 정벌까지 주장하였다. 이것은 당시 풍미하던 풍수지리설을 이용해 사대적인 개경의 문벌귀족정치를 벗어나 서경에서 자주적인 혁신정치를 실행해보려는 것이었다.

묘청의 서경천도론은 문벌정치로 약화된 왕권의 부흥을 꾀한 인종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김부식(金富軾)을 대표로 한 개경파 문벌귀족들의 반대로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묘청 등은 1135년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칭했는데, 여기에서도 그들의 자주적인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묘청군은 김부식이 이끈 관군에게 토벌되어 1년 만에 진압되었다.

이와 같이, 두 난은 일단 수습되기는 했지만, 귀족사회의 모순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귀족사회는 그 근저로부터 동요되고 점차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무신의 반란]

고려의 귀족사회는 1170년에 일어난 무신란에 의해 붕괴되었다. 무신란의 발생 요인은 기성문벌귀족과 신진관료 사이의 대립으로 인한 귀족사회 내부의 모순에 있었다. 그러나 무신란의 직접적인 동기는 귀족정권의 대무신 정책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

고려는 양반제도를 만들어 문반과 무반을 하나의 관계체계 안에 일원적으로 편성하고, 법제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숭문천무정책(崇文賤武政策)으로 무반에 대한 차별이 심하였다.

귀족은 문반직에 있는 자들로만 구성되어 정치권력을 차지했고, 심지어 군대를 지휘하는 병마권까지 장악해 무반은 다만 문신귀족정권을 보호하는 호위병의 지위로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양반이라 하는 법제적 지위를 근거로 삼고 거란·여진과의 전쟁을 기회로 현실적인 세력을 축적해나갔다. 1076년에 개정된 전시과에서 무반에 대한 대우가 좋아지고, 1109년 무학재(武學齋)가 설치된 것은 그것을 반영한 것이었다. 귀족정권의 천무정책에도 불구하고 무반의 실질적인 지위의 상승이 무신란을 일으켜 무신정권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문신귀족정권에 대한 군인들의 불만은 무신봉기의 한 요인이 되었다. 고려의 군인들은 일반 농민층으로 충당되었다. 그런데 문반귀족의 대토지겸병으로 농민들은 토지를 잃었으며, 군인전마저 문신들에게 빼앗겨 불만이 컸다. 이러한 군인들의 불만이 무신들의 불평과 결합되어 귀족정권타도에 동원되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요인들에 의해 1170년 무신란이 폭발되었다. 태평호문의 군주라 일컬어진 의종이 문신들과 함께 보현원(普賢院)에 놀러갔을 때, 호위한 무신 정중부·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을 폐한 뒤 왕의 동생인 명종을 옹립하였다. 이들 무신들은 스스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잡아 무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렇게 보면, 무신란의 발생과 무신정권의 출현은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고, 문신귀족정치의 누적된 모순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귀족사회는 붕괴되고 무신정권이 성립되어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무신란은 고려시대사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신 정권의 교체]

무신 정권은 1270년 임연(林衍) 부자가 몰락할 때까지 꼭 1백년간 계속되었다. 그 동안 무신들은 초월적인 권력을 가진 무인집정을 정점으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독점하였다. 무신정권기는 크게 형성기, 확립기, 붕괴기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형성기는 정중부의 집권 이후 1196년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李義旼)을 제거할 때까지의 명종시대를 말한다. 이 기간은 아직 무신정권의 기반이 확립되지 못해 무인집정의 지위(무신정권의 제1인자)가 불안정하고, 무신정치는 무반세력의 집합체인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실행되던 시기이다.

따라서, 종래의 문반세력의 반항이 일어나고, 무신상호간에도 치열한 정권다툼이 전개되었다. 1173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이 의종복위운동을 일으켜 거병했으나 실패했는데, 이것은 무신정권에 대한 문신세력의 반항이었다. 이듬해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동북면 지방민의 불만을 이용해 정중부정권의 타도를 부르짖고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역시 진압되었다.

또한, 무인집정 사이에도 내분이 일어나 정권이 자주 교체되었다. 1171년 이의방이 이고를 주살하고, 1174년 정중부가 이의방을 제거해 정중부가 단독으로 정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정중부도 1179년 장군 경대승(慶大升)에게 살육되었고, 1183년 경대승이 병사하자 이의민이 집권했지만, 그도 1190년 최충헌에게 숙청되고 말았다.

최충헌은 과단성 있는 전제정치로 무신정권의 안정을 꾀해 우(瑀)·항(沆)·의(洑)에 이르는 4대 62년간의 최씨정권을 지속시켰다. 이 기간이 바로 무신정권의 확립기였다.

이 때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막대한 사병을 조직해 무력기반으로 삼고, 광대한 토지를 점유해 경제력을 형성하는 등 자체적인 권력기반을 확립해 전형적인 무신정권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것은 형성기의 무인집정에 비해 커다란 변화였다.

최충헌이 명종과 희종을 폐하고, 신종·희종·강종·고종을 세우는 등 마음대로 국왕을 폐립하는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한 것도 독자적인 권력기반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때는 형성기와는 반대로 일반무인들의 옹호가 필요 없게 되어 오히려 무반과 중방을 억압하고 문신을 보호하는 역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1258년(고종 45) 최의가 김준(金俊)·임연(林衍) 등에 의해 제거됨으로써 4대에 걸친 최씨정권도 무너지고 무신정권은 붕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처음 김준이 무인집정이 되어 정권을 잡았으나, 1268년 임연에게 빼앗기고 다시 아들 임유무(林惟茂)에게 전해지는 사이에 점차 약화의 길을 걸었다.

김준·임연 부자 등도 무인집정의 지위를 표시하는 교정별감이 되어 무인정치를 계속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독자적인 집정기구와 무력장치로서의 사병집단, 그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기반이 약화되고 무인집정의 지위도 불안해졌다.

이와 같이, 김준·임연 정권은 자체기반이 약화되어 스스로 무너지는 내부적 요인이 있었지만, 이를 붕괴하게 한 결정적 요인은 밖으로부터의 압력이었다.

당시 몽고의 간섭이 무신정권의 존속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몽고는 항몽의 주동자인 무신정권의 붕괴를 꾀했고, 고려 국왕도 무인정치로 거세된 왕권의 회복을 바랐으므로 양자는 결합되어 임씨정권을 타도하려 했던 것이다.

1270년 몽고세력의 옹호를 받으며 귀국하고 있던 국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를 명했으나, 임유무가 이를 듣지 않자 홍문계(洪文系)와 송송례(宋松禮) 등이 삼별초를 움직여 그 일당을 제거하였다. 이에 왕정은 복구되고, 무신정권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농민·천민의 봉기]

무신란 뒤에는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문신계의 반항과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무인상호간의 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계속 일어났음이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농민과 천민의 봉기는 양반관리들의 정치적 반란과는 달리 사회적·경제적 모순에 대한 하층계급의 반항이었으므로 ‘민란’이라 할 수 있다. 무신란으로 정권을 잡은 무인들이 토지를 겸병해 민전을 빼앗고, 지방관리의 가렴주구로 농민의 생활이 곤궁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무신정권기의 민란은 명종·신종 때의 30년간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무신정권 형성기인 명종 때와 최충헌의 독재정치가 자리잡지 못한 신종 때는 통제력이 약했으므로 민란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민란은 처음 서북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 지역이 개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특수한 군사지대였으므로 제일 먼저 무신정권에 대한 반항을 일으킬 수 있었다. 1172년 서북계의 창주(昌州)·성주(成州)·철주(鐵州)의 세 고을 주민이 수령의 탐오와 주구에 반항해 민란을 일으켰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 때도 많은 농민이 참가했고, 조위총의 난이 평정된 뒤에도 나머지 무리들이 계속해 1179년까지 민란을 일으켰다.

서북계의 서적(西賊)과 더불어 남부지방에서도 남적(南賊)이라 불리는 민란이 발생하였다. 같은 민란이지만 서적이 국방지대의 군사적 조건 위에서 봉기했다면, 남적은 농민생활의 불안에서 일어난 순수한 농민반란이었다.

남도의 민란은 1176년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가 일으킨 이후 크게 번져나갔다. 이들은 한때 공주를 함락시키고 관군을 무찔렀으나 정부의 회유책으로 항복했으며, 이듬해 다시 봉기해 충청도의 거의 모든 군현을 점령했지만, 정부의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망이·망소이의 난'은 농민을 주체로 하면서도 소(所)에서 일어난 점에서 농민반란과 함께 부곡(部曲) 천민의 신분해방운동이 복합된 것이라 하겠다.

그 뒤 1182년 충청도의 관성(管城 : 지금의 옥천)과 부성(富城 : 지금의 서산)에서 수령의 탐학에 반항해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다. 또 전주에서 군인과 관노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가장 대규모의 민란은 1193년에 시작된 경상도일대의 남적이었다.

이 때 김사미(金沙彌)는 운문(雲門 : 지금의 청도)에서, 효심(孝心)은 초전(草田 : 지금의 울산)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서로 공동전선을 펴서 그 세력이 경상도 전역에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밀성(密城 : 지금의 밀양)싸움에서 정부군에 패해 7천여 명이 죽음으로써 마침내 진압되고 말았다.

또 1199년(신종 2) 명주(溟州 : 지금의 강능)에서 일어난 민란이 확대되어 삼척·울진까지 함락시키고, 동경(東京 : 지금의 경주)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서 서로 합세하였다. 이듬해 진주에서 공사노비의 반란이 일어나고, 합주(陜州 : 지금의 합천)에서 부곡민의 반란이 일어나 서로 연합전선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경상도 일대의 민란은 마침내 1202년 경주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의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이 때 경주 주민들은 신라의 부흥을 내세우고 운문산과 울진·초전의 반란군과 연합해 기세가 자못 강성하였다. 그러나 최충헌의 과감한 토벌로 이듬해 평정되었다.

무신 정권기에는 농민의 봉기와 함께 천민·노비들의 반란도 있었다. 망이·망소이의 난은 농민과 천민의 반란의 연합된 형태였다. 천민과 노비 등 천민계층은 중앙통제력의 약화를 기화로 신분 해방을 꾀해 봉기하였다. 천민반란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1198년 개경에서 일어난 사노 만적(萬積)의 난이었다.

만적은 공사노비들을 모아놓고 “무신란 이후 공경대부가 천례(賤隷)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우리들도 최충헌과 중신들을 죽이고 천민에서 해방되면 공경장상이 될 수 있다.”고 외치고 대규모의 반란을 획책했는데, 중도에 발각되어 진압되고 말았다. 노비·천민은 농민과 같은 피지배층으로 시달림을 받았으므로 함께 결합해 민란을 일으켰는데, 특히 이들은 천민신분에서의 해방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농민봉기와 차이가 있다.

명종·신종 때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민란은 모두 진압되고, 최충헌의 강력한 독재정치로 무신정권이 안정되자 그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그러나 무신정권기의 민란은 그 역사적 의의가 결코 적지 않았다.

무신 정권은 민란의 평정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농민을 위한 시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난민을 위로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권농(勸農)을 하고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며 조부(租賦)를 감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농민과 천민의 반란이 신분 사회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즉, 무신란 이후의 민란은 귀족중심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탈피해 새로운 사회체제로 넘어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것은 고려사회의 발전에 큰 구실을 하였다. (계속)

<변태섭>

출전 : [디지털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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