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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8 (일)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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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6006      
[고려] 한국의 중세 사회 (민족)
한국(중세사회) 고려 시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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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지방에는 독자적인 군사력과 경제적 기반을 가진 호족들이 존재해 중앙의 통치력이 전국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고려왕조는 중앙 집권화 정책을 추진해 지방의 호족들을 통제하는 동시에 중앙 관리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태조 때에는 호족들과의 혼인 정책을 비롯해 호족들에게 관계(官階)를 수여하고 토성(土姓)을 분정(分定)하고 기인 제도(其人制度)ㆍ사심관 제도(事審官制度)가 실시되었다. 광종 때에는 과거제도(科擧制度)를 처음으로 도입해 신진관료를 채용하는 한편 과감한 개혁정치로 호족세력을 억압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고려 왕조가 건국된 지 약 50년이 지난 성종 때에 이르러서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가 마련되고 국가의 기반이 확립되었다. 이때 최승로(崔承老)에 의해 유교 정치 이념이 채택되고 당의 제도를 모방한 중앙 정치 기구가 마련되었으며, 처음으로 지방관이 파견되어 지방의 호족들을 통제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호족들은 중앙 집권 체제에 편입되어 중앙의 관리로 전신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방에 남아서 향리(鄕吏)로 격하되어갔다.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과 동시에 사회적인 지배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주로 지방호족 가운데 중앙의 관리로 진출한 계열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그 자신뿐 아니라 자손들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고위 관직에 올라 문벌 귀족(門閥貴族)으로 발돋움하였다. 이들 문벌 귀족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막대한 토지를 점유해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사회적으로도 제1신분으로서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면서 고려사회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

또한, 이들은 왕족을 비롯한 귀족 상호간에 폐쇄적인 통혼권(通婚圈)을 형성해 귀족신분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 향리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끊임없이 신진 관료로 진출했고, 그 가운데 일부는 새로운 귀족 가문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려 사회는 소수의 문벌 귀족이 지배 세력이 되어 폐쇄적인 귀족 사회를 이루고 있었으나, 신라의 진골 체제에 비해서는 훨씬 개방적이었다. 신라에서는 극소수의 진골 귀족만이 정권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비해 고려에서는 비교적 폭넓은 귀족가문이 존재해 보다 개방적인 사회로 발전했던 것이다. 또한 혼인이나 과거를 통해 새로운 귀족 가문으로 성장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는 고려 사회가 고대적인 신라 사회에 비해 확실히 일보 전진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성종 때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된 이후 문종 때에 이르러 정치 제도를 포함한 각종 제도와 문물이 완성되었다. 고려의 중앙 정치 제도는 당의 제도를 채용한 3성(省)ㆍ6부(部)가 중심이었다. 여기에 송(宋)의 제도를 본떠 중추원(中樞院)과 삼사(三司)가 설치되고 고려의 독자적인 기구로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식목도감(式目都監)이 두어져 세 계통의 정치 기구들이 운영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중추원의 종2품 이상 관원을 재추(宰樞)라 하여 이들이 국가의 중대사를 협의, 결정하는 등 정치 운영의 중심이었다. 이들 재추직은 문벌귀족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6부가 국왕에게 직주(直奏)하는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국왕에게 정부 기구를 통할하는 권한을 가지게 하였다. 이렇게 보면 고려의 중앙 정치 제도는 국왕과 문벌 귀족 사이의 권력의 조화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의 지방 제도는 군현 제도(郡縣制度)를 근간으로 하여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중앙 집권적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중기 이후로는 중앙 정부와 군현 사이의 중간 기구로서 양광(楊廣)ㆍ경상(慶尙)ㆍ전라(全羅)ㆍ서해(西海)ㆍ교주(交州) 등 5도(道)와 북계(北界)ㆍ동계(東界)의 양계(兩界)가 설치됨으로써 지방 제도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지는 않아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군현, 즉 속현(屬縣)이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 속현은 지방관이 파견된 인근의 주현(主縣)을 통해 중앙정부의 간접적인 통제를 받았다. 이는 당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가 불완전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군현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는 향(鄕)ㆍ소(所)ㆍ부곡(部曲) 등 특수 행정 구역이 존재했는데, 이들 속현과 향ㆍ소ㆍ부곡 등은 점차 소멸해가는 추세에 있었다.

고려의 토지 제도는 전시과 제도(田柴科制度)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시과란 모든 관리로부터 향리ㆍ군인ㆍ한인(閑人)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직역(職役)을 담당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지위에 따라 토지를 차등있게 나누어 준 제도이다. 그러나 토지 그 자체를 준 것이 아니라 그 토지에 대한 수조권(收租權)을 지급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토지는 백정(白丁)이라 불리는 일반 농민들이 조상 대대로 이어받아 소유하고 있는 민전이었다. 전시과는 이 민전 위에 설정되어 농민들이 국가에 내게 되어 있는 조세를 수조권자에게 위임한 것이었다.

일반 농민들은 국가에 대해 조세ㆍ공부ㆍ역역 등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조세는 토지를 소유한 국민이 국가 또는 수조권자에게 납부하는 것으로, 고려 시대의 수조율은 생산량의 10분의 1이 원칙이었다. 이 밖에 공부는 지방에서 포 (布)나 토산품 등 현물을 납부하는 것이고, 역역은 16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를 정(丁)이라 하여 이들로부터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정치ㆍ경제 제도가 완비된 위에 고려 귀족 사회는 산업이 발달하고 학술이 진흥되며 귀족 문화가 융성하는 등 11세기의 전기간에 걸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귀족 정치의 전개는 점차 귀족 사회 내부의 모순이 축적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문벌 귀족들은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탈점으로 토지를 집적해나갔다. 이러한 정치 권력과 경제력의 특권적 확대는 이를 둘러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야기하였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이자겸(李資謙)의 난 (1126)과 묘청(妙淸)의 난(1135)이었다. 이 두 반란은 일단 수습되기는 했지만 이로부터 고려 귀족사회는 그 근저로부터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일어난 무신란(武臣亂, 1170)으로 고려 귀족사회는 결정적으로 붕괴되었다. 문신 중심의 귀족 정치에서 무신들은 차별대우를 받는 가운데서도 거란 및 여진과의 전쟁이나 이자겸ㆍ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지위를 상승시켜가고 있었다. 여기에다 문벌 귀족들의 토지 탈점에 대한 일반 군인들의 불만이 쌓여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되어 무신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귀족 사회는 붕괴되고 새로이 무신 정권이 성립되어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남으로써, 무신란은 고려사의 흐름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무신 정권은 그 형성기에는 집권 무신간의 치열한 정권 다툼이 전개되었으나 최충헌(崔忠獻)의 집권과 함께 수습되고 정권의 기반이 확립되었다. 최씨 정권은 최고 집정부로서 교정도감(敎定都監)을 두고 국가의 서무(庶務)를 관장했으며, 정방(政房)을 두어 관리들에 대한 인사를 처리하였다. 사병 집단으로서 도방(都房)을 더욱 확대해 독자적인 무력 기반을 마련했고, 국가의 공병(公兵)인 야별초(夜別抄) 역시 사병처럼 이용하였다.

이러한 정치 기구와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토지를 겸병해 막대한 경제력을 축적하였다. 정국이 안정되자 최씨 정권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학문적 소양과 행정 실무의 능력을 고루 갖춘 문신들을 다시 기용하였다. 이 때 등장한 문신들을 ‘능문능리(能文能吏)의 새로운 관인층’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주로 지방의 향리 출신으로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람들이었다.

무신 집권기에는 12세기 이래 지배층의 토지 탈점에 의한 사회 경제적 모순에 저항하는 농민ㆍ천민들의 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무신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문신 귀족들의 토지 탈점과 과중한 수탈로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기고 유망(流亡)하는 현상이 적지 않았고 때로는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무신란 이후에 집권 무신들에 의한 토지 탈점이 더욱 심해진 데다가 무신들간의 권력 싸움으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부곡민이나 노비 등 천민들의 신분 해방을 위한 봉기도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ㆍ천민의 봉기는 최충헌의 집권과 함께 무신 정권의 강력한 진압으로 그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란(民亂)은 귀족 중심의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탈피해 새로운 사회 체제로 넘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최씨 정권이 확립되어 있던 시기에 고려는 몽고의 압박을 받아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1231년부터 1259년까지 약 30년 동안 6차에 걸쳐 몽고의 침략을 받았다.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육지의 백성들을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게 하여 몽고에 대항하였다. 특히 각지에서 고려의 일반민들이 몽고군과 용감히 항전하였다. 그러나 항전을 고수하던 최씨 정권이 붕괴되자 강화가 성립되었다. 그 뒤로도 김준(金俊)ㆍ임연(林衍) 등에 의해 무신 정권이 계속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몽고의 군사적 압력에 의해 붕괴되었다.

삼별초(三別抄)는 몽고와의 강화에 반대해 진도와 제주도를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로써, 고려는 약 100년간에 걸친 무신 정권이 종식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몽고족이 건국한 원(元)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원간섭기에는 고려의 관제가 격하, 개편되었고, 지방에는 원의 관부가 설치되어 일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였다. 그 밖에도 경제적 수탈이 매우 심해 큰 고통을 당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주권은 엄연히 존속하였다. 비록 정동행성(征東行省)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형식적인 존재에 불과했고, 고려의 국내 정치는 자주적으로 수행되었다.

당시 고려의 지배 세력은 권문세족(權門世族)이라 불리는 계층이었다. 이들은 무신 집권기와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새로이 형성된 사회 세력이다. 무신 집권기에 부상한 무신 세력, 원과의 관계를 통해 대두한 세력, 그리고 고려 전기 문벌 귀족 가운데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권문세족은 대체로 친원적인 성향을 띠었고, 도당(都堂: 都評議使司)을 중심으로 정치 권력을 장악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대토지 소유자로서 농장(農莊)을 경영했다. 이들은 고려 전기의 문벌 귀족과 비교할 때 그 성분부터가 전혀 달랐다. 문벌 귀족이 가문 자체의 권위로써 귀족적 특권을 누렸음에 비해, 이들은 현실적인 관직을 통해 정치 권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관료적 성격이 농후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이러한 권문세족에 대한 새로운 세력이 또다시 대두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흥 사대부 계층(新興士大夫階層)으로 무신 집권기에 등장한 ‘능문능리’의 새로운 관인층의 후신으로 이들은 지방의 향리 출신으로 원간섭기에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리로 진출했으며, 보수적인 권문세족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특히, 이들은 원으로부터 성리학(性理學)을 수용하여 새로운 정치이념을 마련하였다. 이와 더불어 중국의 선진적인 강남 농법(江南農法)을 받아들여 농업생산력을 발달시켜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였다.

신흥 사대부의 정치 활동은 1298년(충선왕 즉위년)의 개혁 정치와 충목왕 때 정치도감(整治都監)의 활동에서 보이듯이, 주로 권문세족의 토지 탈점 등 불법 행위를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개혁 정치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들은 원과 결탁된 권문세족의 반발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 공민왕이 중국에서 원이 쇠퇴하는 틈을 이용해 대대적인 반원 개혁을 추진했고, 결국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하였다. 부원배들을 제거하고 원이 점령하고 있던 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를 무력으로 탈환했으며, 원의 간섭으로 변형되었던 관제를 고려 전기의 3성ㆍ6부 체제로 복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돈(辛旽)을 기용해 권문세족을 제거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신흥 사대부의 세력도 점차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권문세족이 공민왕을 죽이고 우왕을 옹립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신흥 사대부는 이성계(李成桂) 등 신흥 무장 세력과 결탁하여 마침내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여 정권을 잡았다. 이후 사전 개혁(私田改革)을 단행, 권문세족을 도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사전 개혁은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켰고, 이 때 새로이 성립한 토지 제도가 과전법(科田法)이었다. 정권을 잡은 신흥 사대부 내부에서 새 왕조를 개창하려는 역성혁명파(易姓革命派)와 고려 왕조를 유지한 채 폐단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려는 온건파가 대립하다가, 결국 역성혁명파가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왕조를 개창하였다.

<변태섭>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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