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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6-25 (화) 00:06
분 류 사전1
ㆍ조회: 6940      
[조선] 조선 시대의 경제 2 (민족)
조선(1)(경제) 조선 시대의 경제 2

세부항목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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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2)(연구사)
조선(2)(참고문헌)

(에서 계속)

3. 상업과 수공업

[상업]

조선 시대의 상업 형태는 서울의 시전(市廛)과 난전, 중기 이후 각 지방에 개설된 장시(場市) 및 상설 점포 외에 보부상(褓負商) 등의 행상, 그리고 후기에 등장한 도고(都賈)와 명ㆍ청ㆍ여진ㆍ일본과의 국제 무역 등이었다. 시전의 설치는 태종 때부터이다. 즉, 정부에서 서울 종로거리에 행랑(行廊)이라는 관설 상가를 만들어 상인에게 점포를 대여하고 그들로부터 행랑세라는 점포세와 좌고세(坐賈稅)라는 상세(商稅)를 징수하였다. 이들 시전은 궁중과 관부의 수요를 조달하는 대신, 상품 독점판매의 특권을 얻은 어용 독점상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7세기 전반기부터 이들 시전 중 수요가 가장 많은 명주ㆍ주단ㆍ면포ㆍ모시 등의 직물과 각종 종이류 및 어물류 등 여섯 가지 품목의 상점이 가장 번창했는데, 이들을 육의전(六矣廛)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 서울에는 상인이 점차 늘어나 시전 상인과는 별도로 관청의 허가 없이 장사하는 난전이 등장하였다. 이에 대응해 처음에는 육의전에만 난전을 금하는 권한을 주었으나, 나중에는 모든 시전에게도 난전을 금하는 권한을 주었다. 난전 중에는 보잘것없는 상인이 많았지만, 더러는 시전상인과 맞설만한 부상도 있었다.

시전상인이 정부와 결탁한 독점상점이라면, 난전은 양반층과 결부된 상업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난전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정부는 1791년(정조 15)에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 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에 난전을 금하는 특권을 없애버렸다.

지방에서 발달한 장시는 15세기 후반에 전라도 지방의 큰 가뭄이 계기가 되어 시작, 16세기 중반에는 충청도ㆍ경상도에까지 전파되었다. 17세기 말에는 정부에서 장시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는데, 18세기 전국의 장시는 약 1,000개소에 달하였다. 장시는 5일마다 정기적으로 서는 5일장이 일반적 형태였고, 지역마다 교역권이 형성되어갔다.

행상은 대개 소량의 상품을 짊어지고 각지의 장시나 민가를 돌면서 소매하는 보부상을 말한다. 보부상은 다시 상품을 보에 싸서 행상하는 봇짐장수 또는 항아장수라 불린 보상과, 상품을 지게에 짊어지고 행상해 등짐장수라 일컬어진 부상으로 구별되었다. 보부상의 조직은 일종의 협동조합과 같은 것으로 상호간의 규율을 중히 여겼다. 이 보부상은 물론 상인들의 조직이었지만, 비상시에는 정부에서 전령 혹은 치안의 일을 거들게 하기도 하였다.

후기 상업 활동의 특징 중의 하나는 도고의 활동이었다. 대동법의 실시로 공납이 없어지자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은 공인을 통해 조달되었다. 공인은 주로 시전상인이나 경주인ㆍ공장(工匠) 등에서 나왔다. 공인은 자기 자본으로 물품을 사서 납품한 뒤에 대가를 받는 결제 방법으로, 동일 상품을 대량으로 거래하는 도매상으로 성장하면서 상업자본을 형성해갔다.

도고 중 경강상인은 경기도ㆍ충청도 연안 일대를 활동 무대로 했고, 송상은 거의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지방의 장시에서는 여각(旅閣) 또는 객주(客主)라는 도매상이 보부상을 상대로 창고업ㆍ운수업ㆍ숙박업ㆍ대부어음 등의 다양한 형태로 자본을 형성해갔다.

끝으로 국제무역은 중국ㆍ여진ㆍ일본과의 사이에 행해진 관무역 외에는 사신의 내왕에 따르는 약간의 사무역이 허용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의주ㆍ중강(中江)이나 봉황성(鳳凰城)의 개시무역(開市貿易)과 후시무역(後市貿易)이 발달하였다. 일본과도 왜관무역(倭館貿易) 외에 밀무역도 성하였다. 중국과의 무역에는 의주의 만상(灣商), 평양의 유상(柳商), 개성의 송상 등이 활약하였다. 일본과의 무역에는 동래의 내상(萊商)과 개성의 송상이 활약했는데, 이들 외국무역의 주도권은 송상이 쥐고 있었다. 무역상들은 많은 자본을 축적하여 거부가 된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역관들도 끼어 있었다. 당시 국제무역의 주요 상품은 인삼과 은이었다.

[수공업]

조선 시대 수공업은 초기에는 관장제(官匠制)이다가 중기 이후 사장제로 바뀌었다. 관장제란 공장이 관부에 예속되어 물품을 생산하는 제도를 말한다. 즉, 중앙의 공조와 그 밖의 여러 관아에 소속된 장인을 경공장, 지방의 도와 군현에 소속된 장인을 외공장이라 하였다.

공장의 신분은 양인과 공천(公賤)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기 소속기관에 정원수대로 등록되어 물품 생산에 종사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중앙에는 30개의 관아에 2,800여 명의 공장이 예속되어 129종의 물품을 만들었고, 지방에는 3, 500여 명의 공장이 27종의 물품을 만들어냈다.
경공장 중에는 사기ㆍ철물ㆍ무기ㆍ직물 등의 장인이 가장 많았고, 외공장 중에는 지물ㆍ돗자리ㆍ궁시(弓矢)ㆍ목기ㆍ칠기 등의 장인이 가장 많았다. 장인들은 작업장에서 관의 수요에 따라 각기 책임량을 생산해야 했고, 품질과 규격에 엄격한 규제를 받았다.

장인이 작업에 응하는 것은 공역(公役)에 속하는 것이므로 대개는 무상이었다. 공장 중 일반 공장을 감독하는 극히 소수의 인원에게는 잡직인 체아직이 주어졌다. 공장이 공역 이외에 사적으로 영위한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세금을 내야 하였다. 공장들은 예속된 관아나 세력자들로부터 책임량 이상의 제품을 강요당하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자유로운 수공업 발달의 저해 요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장인들이 관공장을 피해 도망하게 되어 16세기 초부터 관공장제 수공업은 쇠퇴하고 그 대신 사장제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17,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관아의 재정 부족으로 관장제 수공업제는 거의 없어지고, 다만 자기ㆍ제지ㆍ화폐ㆍ주조ㆍ무기 제조 등 특수 분야에서만 관장제가 지속되었다. 후기에도 관장과 사장의 구분은 있었으나, 이 때는 관장도 임금기술자가 되었고, 사장은 임금기술자가 되거나 다른 장인을 고용, 직접 제품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은 대동법의 실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대동법 실시 이후 수공업자와 공인과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수공업의 생산 의욕을 크게 자극, 수공업계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공장의 일부는 아직도 관아에 예속된 임금기술자로 남아 있기도 했으나, 그 대다수는 자유수공자가 되어 상업자본가에게 임금기술자로 고용되거나 독자적인 수공업자가 되어 제품을 생산, 판매하기도 하였다. 특히 유기와 칠기 등의 분야에서 매뉴팩처가 발달하였다.

[화폐]

조선 전기에는 화폐 유통이 저조해 교역의 매개에는 주로 미ㆍ포가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401년(태종 1) 사섬시(司贍寺)를 두어 저화(楮貨)의 유통을 꾀했고, 세종 때에는 조선통보(朝鮮通寶)라는 동전을 주조, 저화와 병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화폐 정책에도 불구하고 미ㆍ포는 여전히 유력한 유통 수단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면포가 가장 대표적인 유통 수단이 되었으며, 저화는 자연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로 화폐가 필요하게 되고, 정부에서도 경제정책상 화폐가 필요해졌다. 그리하여 1678년(숙종 4)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동전이 발행되면서 17세기말 경에는 동전이 전국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화폐의 유통은 전국 각지의 물산을 상품화시켜 상거래를 촉진시켰다. 따라서 이후 상품의 매매나 임금의 지불, 각종 납세 등에도 화폐를 사용하게 되었다.

4. 교통과 통신

[교통]

국내 교역이 대부분 장시나 행상에 의존해 있던 만큼, 도시와 도로의 발달은 더디었다. 지방에는 관아를 중심으로 극히 작은 행정적 소도시가 있을 뿐이었고, 이런 소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길이 있을 뿐이었다.

육상 교통에는 보행 아니면 고작 기마나 가마가 사용되었다. 물화의 수송에는 인력과 우마가 이용되었을 뿐, 민간에는 수레도 보급되지 않았다. 수로에서는 판선(板船)이 많이 이용되었다.
관용교통 수단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역(驛)이었다. 주요 도로에는 대개 30리 정도의 거리마다 역을 두고 역마를 배치, 공문을 전송하였다. 그리고 공무 여행자에게 역마를 제공하며, 그 밖에 진상이나 공납의 수송을 담당하게 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전국 41개도(道)의 도로에 540여 개의 역이 있었다. 각 도에는 찰방(察訪)을 두어 이를 관장하게 하고, 각 역에는 역장ㆍ역리(驛吏)ㆍ역졸 등을 두어 역의 관리와 공역(公驛)을 담당시켰다. 역은 삼남 지방에 가장 조밀하게 분포되었는데, 대개는 각 읍 인근에 소재하였다. 역마 이용자에게는 그것을 인가하는 증표로 마패(馬牌)를 발급하였다. 관료의 품계에 따라 차등을 두어 마패에 동원할 수 있는 마필수를 새겼다. 마패 발급은 중앙에서는 상서원(尙瑞院), 지방에서는 감사와 병사가 하였다.

고관이나 공무 여행자의 숙식에 대비, 지방 관아에는 관(館) 또는 객사 (客舍)라는 숙소를 두었고, 요로마다 원(院)이라는 일종의 관영 여숙을 설치하였다. 원은 사용자가 극히 제한된 까닭에 점차 퇴폐해간 것이 많았다. 사용으로 여행하는 민간인은 점(店) 또는 주막이라는 사설 여숙을 이용하였다.

세미(稅米)를 서울로 운송하는 데는 조운(漕運)이라는 수상 운송수단을 이용하였다. 이를 위해 조운 수로의 요지에 조창(漕倉)을 두어 인근의 세미를 집결시켰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세미는 국경의 군량 보급과 사신의 접대 경비에 충당하기 위해 그 도에 보관하고, 나머지 전국의 세미는 조운을 통해 서울로 운송되었다. 조운의 운영은 조선 초기에는 관영이던 것이 중기 이후로는 민영으로 바뀌었다.

[통신]

조선 시대 대표적인 통신 수단은 봉수(烽燧)였다. 이는 변방의 긴급한 사항을 중앙이나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적 목적의 통신망이었다. 대략 수 십리 간격으로 마주 바라보이는 산봉우리를 잇는 봉수대 또는 연대(烟臺)에서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내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주요 봉수선은 서울을 중심으로 함경도의 경흥, 경상도의 동래, 평안도의 강계와 의주, 전라도의 순천 등 다섯 곳을 기점으로 하고 서울의 목멱산(木覓山: 남산)을 종점으로 연결되었다. 중앙에 보고된 신호는 병조가 이를 주관해 승정원에 보고하는 체계였다. 위의 다섯 간선 외에도 보조선이 조직되어 있었고, 국경 지대에는 각 초소로부터 본진으로 연결된 것도 있었다.

<이재룡>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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