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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3 (화)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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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4950      
[고려] 고려의 역사적 성격 (민족)
고려(역사적 성격) 고려의 역사적 성격

세부항목

고려 역사 개관
고려의 성립과 발전 1
고려의 성립과 발전 2
고려의 제도
고려의 대외 관계
고려 문화
고려의 역사적 성격
고려 시대 연구사
고려 시대 참고문헌

1. 지방 호족 세력 시대

고려는 지방 호족 세력이 대두해 건국한 왕조인 동시에 그 뒤에도 지방 세력이 언제나 중앙 관리의 공급원이 되고 있었음이 특징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려는 바로 지방 세력의 시대라 해도 좋을 것이다. 호족 세력은 처음 고려 건국의 주역으로 중앙 정권에 크게 관여하였다. 그러나 왕조의 기반이 확립되자 중앙 집권화 정책에 의해 그들은 차차 중앙 관리로 편입되어 독립성을 상실해갔다. 이들이 곧 고려 귀족 가문이 되어 귀족 정치에 참여한 것이다. 지방에 남은 지방 세력도 그들의 자제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시켜 문벌귀족의 보수 정치에 도전하는 신진대사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그들 지방 세력은 후기에도 지배 세력인 권문 세족에 대립한 신흥 사대부가 되어 새로운 시대의 개혁을 주도하였다. 지방의 중소 지주인 유향품관(留鄕品官)과 향리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로 진출하고, 당시 높은 관직을 독점하고 막대한 농장을 겸병한 보수적인 권문 세족에 대립한 신진 사대부가 되어 개혁 정치를 주장하였다. 이성계의 혁명은 바로 그들 지방세력을 중심으로 한 신흥 사대부 계층의 승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지방 호족은 고려 건국의 주역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언제나 중앙의 보수적인 지배 세력에 대한 신진관료의 개혁 세력이 되었고, 마침내 조선 건국의 주역의 구실도 담당했다고 하겠다.

2. 귀족 사회의 성격

고려 사회의 성격을 귀족 사회로 보느냐 또는 관료사회로 보느냐에 대해서 양론이 있으나, 대체로 문벌을 중시하는 귀족 사회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인 듯하다. 고려는 지방 호족 세력에 의해 건국되었지만, 성종 이후 중앙 관리가 귀족화함에 따라 문벌 귀족 사회가 형성되어갔다. 그들 귀족은 중요 관직을 독점해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토지를 집적해 대토지 소유자가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도 문벌 귀족의 특권을 향유해 지배 계층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 상호간에 중첩되는 혼인 관계를 맺고 왕실과도 혼인해 외척 가문이 됨으로써 귀족 가문의 권위를 유지하였다.

이 때 관리가 되는 정상적인 길은 과거였으나, 음서제가 광범하게 실행되어 5품 이상 관리의 자제에게 과거를 보지 않고도 음직을 주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귀족사회의 제도적인 기반이 되었다. 또, 음서제와 결합되어 5품 이상 관리에게 공음전(功蔭田)이 주어졌다. 이것은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어 귀족제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안정으로 국력이 강성해지고, 경제적으로 국가 재정과 농민 생활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사회적으로 귀족을 정점으로 한 신분 제도의 확립을 보았다. 문화면에서는 귀족층의 주도로 유학·불교 및 미술 공예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귀족 사회는 그 자체의 모순성의 격화로 붕괴되었다. 관직과 토지를 둘러싼 귀족 상호간의 분쟁과, 특히 보수적인 문벌 귀족에 대한 지방출신인 신진관료의 대립은 귀족정치의 계속을 허용하지 않았다. 인종 때의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귀족 사회의 기반을 흔들리게 했고, 의종 때의 무신란과 무신 정권의 성립은 그를 붕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3. 발전적인 고려 사회

약 5백년간의 고려 왕조는 어디까지나 동적인 역사였고 발전하는 사회였다. 따라서, 고려 시대사를 이해하려면 평면적으로 정적인 역사로 보아서는 안되고, 항상 시간에 따라 발전한 사회였다는 시각에서 조명해야 할 것이다. 고려 왕조를 건국하고 정권에 참여한 세력은 호족들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기반이 확립되고 중앙 집권화가 진전됨에 따라 문벌 귀족 사회가 형성되었다. 호족 세력은 중앙 관리가 되어 집권 체제에 편입되거나, 자기 지방의 향리로 격하되어 초기의 자립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와 같이, 사회의 주도 세력이 지방 호족에서 중앙 귀족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고려사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1170년에 일어난 무신란과 그 뒤 1백년간 계속된 무신 정권은 귀족 사회 성립의 기반인 신분 체제를 전복시켜 새로운 사회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신란은 바로 고려 사회의 성격인 귀족 사회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신분 회로 넘어가는 분수령을 이루었던 것이다. 후기의 지배 세력은 무신 정권기와 그뒤의 대몽 관계를 통해 형성된 권문 세족이었다. 권문 세족은 가문의 권위를 중요시하는 종래의 문벌 귀족의 일면을 계승했으나, 가문의 후광보다도 현실적인 관직을 보다 중시하였다.

그것은 귀족 사회에서 관료 사회로 넘어가는 중간 존재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후기의 지배 세력인 권문 세족은 전기의 지배 세력인 문벌 귀족의 발전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권문 세족도 새로운 사회 계층인 신흥 사대부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후기에는 지방의 중소 지주인 유향 품관과 향리 출신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로 진출했는데, 그들은 권문 세족의 보수 정치에 대립해 개혁 정치를 내세웠다.

충선왕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도 신진 사대부가 국왕과 결합해 추진한 것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이성계와 연합해 고려를 넘어뜨리고 조선 신왕조를 개창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것은 사회의 주도 세력이 권문 세족에서 신진 사대부로 넘어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는 몇 차례에 걸쳐 지배 세력이 교체되며 사회 발전이 이루어졌다. 초기의 호족 시대에서 왕조의 기반이 확립되자 귀족 사회로 넘어갔고, 다시 무신란 뒤 신분 체제가 변화하자 권문세족이 지배 세력이 되었고, 신흥 사대부의 대두로 새 왕조가 교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고려의 문벌 귀족 사회는 조선의 양반 관료 사회로 전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고려사는 5백년 동안 언제나 새 사회를 지향하며 발전한 동적인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4. 사상 체계의 특징

나말 여초에는 정치 사회의 변화와 함께 사상계에도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신라 말기의 육두품출신들은 골품 제도의 운영 원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유교 정치 이념을 내세웠고, 그것은 고려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고려 건국기에 최치원(崔致遠) 계통의 문인들이 왕건에게 귀의하면서 유교 정치 이념을 표방했고, 최승로의 보필을 받아 숭유 정책을 추진한 성종 때 보다 본격화되어, 드디어 고려는 유교를 정치 실천의 원리로 삼게 되었다.

불교계에도 국가와 진골 귀족의 옹호를 받아 발달한 교종에 대해, 지방 호족들에 의해 선종이 크게 일어났다. 그것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선(禪)을 통해 심성을 깨닫는 서민적인 선종이 호족들의 체질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진골 귀족의 교종은 민중적이며 혁신적인 성격을 지닌 선종으로 교체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려의 불교계는 교종에서 선종으로 바뀌었으며, 나아가 천태종이 건립되는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또한,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채용되었고, 불교는 사상·신앙계의 지도 이념으로 이용되었다. 양자는 각기 그 세계가 달랐기 때문에 공존할 수 있었고, 유학자가 불교를 믿고 승려가 유교 경전에 능통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후기에 철학적이며 사변적인 주자학이 수용되면서 불교와 충돌하게 되었다. 주자학자들이 불교를 배척해 종래의 유불 공존에서 억불 앙유로 바뀌어 유불 교체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5. 중세 사회의 성격

한국사의 시대 구분의 문제는 아직도 시론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사에 있어서 중세가 언제부터 시작되고, 또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정립된 결론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고려를 중세 사회로 규정하는 데 큰 이의가 없는 것 같다.

고려 시대가 중세라는 점은 고대 사회의 편성 원리인 골품제의 극복에서 엿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출생한 혈족에 따라 지위와 신분이 규정된 골품제가 기본적인 사회 체제를 이루고 있었는데, 나말 여초에 지방 호족 세력과 지식층인 육두품 출신이 골품제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고려는 고대적이며 폐쇄적인 골품 체제에서 보다 개방되고 전진된 사회라는 점에서 중세라 할 수 있다.

고려가 중세 사회라는 것은 지방 호족의 대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라는 왕경(王京)의 중앙귀족 중심의 정치 체제를 이루고 지방 세력의 성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토착적인 촌주 출신과 왕경에서 내려간 중앙 귀족들이 지방의 호족으로 대두해 새로운 지배 세력이 되었다. 그들 지방 호족은 마침내 고려를 건국하고, 지배층이 되었으므로, 그것을 중세 사회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용한 것도 중세 사상의 성립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진골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유교 정치 이념을 채용하고, 당·송의 제도를 본받아 중앙 집권적인 정치 제도를 실시한 점에서도 고대적인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전진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불교에 있어서도 귀족적인 교종에서 벗어나 민중적이며 혁신적인 선종의 유행을 보게 된 것도 새로운 중세 사상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경제적인 면에서도 중세적 요소가 나타났다. 신라의 고대적인 토지 소유 관계와 농민에 대한 수취 관계의 모순을 시정하려 했는데, 태조의 조세 개혁과 그 뒤의 전시과 제정이 그것이다. 전시과의 시행은 확실히 일보 전진한 형태로, 중세적인 토지 지배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특히, 일반 농민이 조상 대대로 이어받아 경작하는 민전이 광범하게 존재한 것은 농민의 토지 소유의 일반화를 말해주는 것으로, 농민 지위의 성장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토지 소유 관계의 진전과 농민의 성장은 신라의 고대적인 것과 다른 중세적인 성격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세 사회의 성격은 다음 조선의 근세 사회로 발전하는 토대를 이루었다.

<변태섭>

출전 : [디지털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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