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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6-16 (일) 17:02
분 류 사전1
ㆍ조회: 5755      
[조선] 조선 시대의 대외 관계 (민족)
조선(1)(대외관계) 조선 시대의 대외 관계

세부항목

조선
조선(1)(정치) 1
조선(1)(정치) 2
조선(1)(경제) 1
조선(1)(경제) 2
조선(1)(사회)
조선(1)(문화)
조선(1)(대외관계)
조선(1)(연구사)
조선(2)(1864년∼1910년대의 조선)
조선(2)(국제관계)
조선(2)(정치)
조선(2)(사회경제)
조선(2)(사상ㆍ종교)
조선(2)(역사적 성격)
조선(2)(연구사)
조선(2)(참고문헌)

[명과의 관계]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사대(事大)로써 친선을 유지하였다. 여기서 명나라에 사대한다 함은 조선의 왕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 그 연호를 사용하며, 중요한 국정을 보고해 그 의견을 듣는 따위의 일을 말한다. 고려 말에 있었던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은 원나라를 배경으로 한 권문세족과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려는 사대부층의 이익이 상반되었기 때문이다. 신흥사대부층의 지지를 받은 이성계가 당시 권문세족과의 투쟁 과정에서 내세웠던 친명 정책은 조선 건국 후에도 필요하였다.

명나라는 조공(朝貢)이라는 관무역으로 이득을 취하고, 명목상 종주국이라는 자존심을 얻었다. 이에 대해 조선은 정치상 기본적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 조공에 따르는 관무역으로 이득을 얻고, 선진 문화를 수입했으며, 정권의 국제적 승인이라는 효과를 거두었다.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한 편이었으나 종계변무(宗系辨誣) 등의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이는 ≪대명회전 大明會典≫에 조선 태조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수정해 달라는 요청으로 약 200년을 끈 다음 선조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해결되었다.

[여진과의 관계]

여진과는 교린(交隣)이라는 관계를 맺었다. 조선은 여진 추장에게 명예 관직을 주어 형식상 종속 관계를 맺고, 진상과 회사(回賜)라는 관무역이 행해졌다. 조선은 그들의 복종에 만족하고, 여진은 문물 수입으로 만족하는 관계였다. 조선 초기 여진의 갈래는 흑룡강 유역의 야인(野人), 두만강과 압록강 북쪽의 건주여진(建州女眞), 송화강 유역의 해서여진(海西女眞) 등이 있었다.

명나라는 영락제(永樂帝: 成祖) 때 만주 경략을 본격화해 약 180위(衛)를 두어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의 북쪽 경계 밖에는 명나라 지배가 미치지 못한 지역이 많았다. 조선은 이들을 야인이라 하고, 한편으로는 정복하고 한편으로는 회유하는 정책을 썼다. 두만강 유역의 여진과의 관계를 보면, 태조 때부터 여진 경략에 착수, 세종 때 김종서(金宗瑞)에게 종성ㆍ온성ㆍ회령ㆍ부령ㆍ경원ㆍ경흥 등에 6진을 두게 하고 두만강으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한편, 압록강 방면의 여진은 세종 때 최윤덕(崔潤德)ㆍ이천(李蓚) 등에게 여연(閭延)ㆍ자성(慈城)ㆍ무창 (茂昌)ㆍ우예(虞芮) 등 4군을 설치하게 하여 압록강 상류 지역까지 국경선을 확장하였다. 6진 설치로 압력을 받은 오도리족은 그 대부분이 압록강 방면 파저강(婆猪江) 부근으로 이주, 그 곳 우량하족의 추장이며 건주본위도독(建州本衛都督)인 이만주(李滿住)와 합류하였다. 그러나 두만강 북안에 잔류한 여진은 기회만 있으면 조선에 침입해 소란을 피웠다.

그리하여 1460년(세조 6)에는 신숙주(申叔舟)가 강원도ㆍ함경도체찰사로 우량하족의 본거지를 무찔렀고, 1491년(성종 22)에는 허종(許琮)이 우디거 여러 촌락을 소탕하였다. 4군이 설치된 지역은 방어하기가 더 어려워서 1458년에는 4군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이는 영토의 포기가 아니라 국방선의 후퇴였다. 세조 초에 건주여진의 추장에게 주는 관직 문제로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하고 있을 때 만주에서는 명나라가 건주본위를 토벌하고자 조선에 협공을 요청해왔다. 조선에서는 이에 호응해 강순(康純)ㆍ남이(南怡) 등이 압록강을 넘어 건주위의 본거지를 공략, 이만주 부자를 죽이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1479년에도 명나라의 요청으로 윤필상(尹弼商)이 압록강 너머 여진 본거지를 토벌하게 했고, 그 뒤 신립(申砬)도 여진의 이탕개(尼湯介) 토벌에서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17세기 초 건주좌위 출신의 누루하치가 청나라를 건국해 조선은 호란이라는 대란을 겪게 되었다.

[청과의 관계]

건주좌위 출신의 누루하치는 16세기 말경 인근 촌락을 차례로 정복, 세력을 확장하더니 1616년(광해군 8)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워 만주 지방의 태반을 통합하였다. 광해군은 양단정책(兩端政策)을 써 명나라에 대한 사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후금의 비위도 거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향명배금정책(向明排金政策)을 뚜렷이 하자 후금이 1627년(인조 5) 우리 나라에 침입하니, 곧 정묘호란이다. 1636년에 후금은 국호를 청이라 하고 다시 조선에 침입, 병자호란을 일으켰는데 이 때 조선은 청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숭명배청(崇明排淸)의 경향이 오래 지속되었으나, 표면상의 대청 관계는 사대의 예를 지켜 부연사행(赴燕使行)이 계속되었다. 조공 이외에 사신에게 공인된 사무역이 행해졌고, 또 국경에는 호시(互市)가 시작되어 관허무역인 개시(開市)와 밀무역인 후시(後市)가 있었다. 효종 때에는 북벌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또, 효종 때에는 청나라의 요청으로 두 차례나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출병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유사 이래 러시아와의 첫 대결로서 조선은 모두 승리하였다.

한편,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문제되기도 하였다. 1712년(숙종 38) 청나라는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시켜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웠는데, 이 때 북계의 경계에 대한 우리측 주장과 그들의 주장이 서로 달라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 뒤 북계의 국경 분쟁은 고종 때 다시 일어났으며, 1909년에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남만주철도(南滿洲鐵道)의 부설권을 얻어낸 대가로 간도(間島) 지방을 청나라의 영토로 넘겨주는 간도협약을 맺었다.

[일본과의 관계]

조선 건국 초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뜸하였다. 그것은 조선의 국세가 강해진 것과 신무기인 화약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왜구의 소규모 약탈 행위는 가끔 있었으므로 1419년(세종 1) 이종무(李從茂)에게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게 하였다. 1443년에는 일본과 계해약조(癸亥約條)를 맺어 웅천의 내이포(乃而浦),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鹽浦) 등 3포를 개항하고, 세견선(歲遣船)을 50척, 세사미두(歲賜米豆) 200석으로 제한하였다.

그 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으로 3포가 폐쇄되어 일본과의 교역이 중단되었다가 1512년 임신약조(壬申約條)로 세견선과 세사미두의 수량을 반감해 다시 교역을 허락하였다. 1535년 고성(固城) 사량진(蛇梁津)의 난으로 통교가 중단되었다가, 1547년(명종 2) 정미약조를 맺어 더욱 많은 제약 밑에서 교역하였다. 16세기 수 차례의 왜변으로 조정에 비변사를 상설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 오랜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 국내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豊臣秀吉)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까지 전후 7년 간의 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은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어 왜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으로 국가 재정이 고갈되자 납속(納粟)으로 관직을 팔아 국정이 문란해지고, 인구는 줄었으며, 토지는 황폐해져 경작 면적이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호적과 토지의 대장이 소실되어 역을 부과하고 조세를 징수하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또한, 문화재 손실도 커서 왕궁을 비롯, 유서깊은 시설들과 사고(史庫)의 실록 등 많은 문헌들도 소실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뿐만 아니라 명나라 및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국력을 기울이다가 결국 청나라에게 멸망하였다. 일본은 조선에서 도자기와 활자 등의 기술을 배워갔으며, 성리학 등 학문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가 서자 일본의 요청으로 1609년(광해군 1)에 기유약조를 맺어 통교를 재개하였다. 기유약조 이래 통신사(通信使) 파견은 모두 12회나 되었다. 조선 통신사는 일본에 경조(慶吊)의 일이 있을 때마다 에도(江戶: 지금의 東京)까지 내왕했는데, 비단 외교사 절일 뿐 아니라 문화 전파의 역할까지도 담당하였다.

한편, 왜인들의 내왕을 통제하기 위해 전기와 같이 입국 증명을 꼭 소지하게 하였다. 입국 왜인의 개항장은 부산이었고, 입국 왜선은 세견선(歲遣船)과 임시적인 사송선(使送船)이 있었다. 사송(使送)을 목적으로 입국하는 차왜(差倭)는 무역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그들은 예조판서ㆍ동래부사 등에 공식적인 서계(書契)와 예물인 별폭(別幅)을 바치고 회답서계(回答書契)와 회사(回賜) 예물을 받아갔다.

이후 예물은 점차 증가되어 무역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차왜의 종류에는 막부장군(幕府將軍)의 관백승습(關白承襲)을 비롯, 통신사호행(通信使護行)ㆍ진하(陳賀) 등 30여 종이나 되었다. 1811년(순조 11)에는 역지교역(易地交易)이라 하여 조선 통신사를 대마도에서 영접하기 시작하였다. 역지교역이란 일본이 조선 통신사 일행 500여 명 내외가 에도까지 내왕하는 데 드는 접대비가 과다하다는 이유로 대마도에서 외교와 교역 사무를 처리하자고 한 것이다. 이 역지교역은 일본의 국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이 무례하다 하여 역지교역이 실시된 1811년부터 1876년 병자조약 때까지 통신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유구ㆍ남만과의 관계]

유구는 고려 말에 중산(中山)ㆍ산남(山南)ㆍ산북(山北)의 3부로 나뉘어 있었다. 그 중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고려 및 명나라와 각각 교섭을 시작하였다. 조선 건국 후인 1401년(태종 1)에 찰도가 다시 사신을 보내 수호하고, 매년 신하라 칭하며 방물(方物)을 공납해왔다. 그 중에는 조선이 공인하는 세견선으로 내왕하고 관직을 받은 자도 있었다. 유구는 해외 무역으로 생계를 삼았는데, 토산물과 안남(安南)ㆍ샴(暹羅: 지금의 태국) 등 남쪽 산물을 중개하였다.

조선과 유구의 교통은 비교적 많은 편이었고, 표류민을 자주 송환해왔다. 유구에는 조선에 오는 해로를 잘 아는 자가 적었다. 때문에 일본의 승려ㆍ상인으로서 유구에 거주하는 자가 사신이 되어 오는 경우가 있었다. 유구의 조공물은 남양 산물이 많았으며, 그들과의 통교는 인조 때까지는 아주 끊어지지 않았다. 자바(爪褙)와 샴을 남만이라 불렀는데, 당시 남만의 배는 안남을 지나 마카오ㆍ광둥(廣東)ㆍ아모이(泉州) 내지 대만ㆍ유구ㆍ일본의 기타큐슈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그 중에는 조선까지 들어온 것도 있었다.

샴은 당시 아유티아 왕조로서 태조 때 사절을 보내왔으며, 방물로는 소목(蘇木)ㆍ속향(束香) 등이었다. 자바도 태종 때 이래 진언상(陳彦祥)이 여러 번 사절로 왔고, 남양의 여러 토산과 인도 지방에서 생산하는 번포(蕃布) 등을 가져왔다. 이 때의 자바는 마지바히트 왕조로서 국세가 한창 융성하던 시기였다.

<이재룡>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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