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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7-01 (월) 11:18
분 류 사전1
ㆍ조회: 5148      
[고려] 고려 시대의 토지제도 (민족)
토지제도(고려시대) 고려 시대의 토지 제도

관련 항목 : 전시과

세부항목

토지제도
토지제도(상대 : 삼국 시대)
토지제도(통일신라시대)
토지제도(고려시대)
토지제도(조선전기)
토지제도(조선후기)
토지제도(개항이후)
토지제도(광복이후)
토지제도(참고문헌)

1. 전시과 제도

전시과(田柴科)는 고려 전기의 기본적 토지 제도였다. 전시과는 좁은 의미로는 문무 관료 및 직역(職役) 부담자에 대한 수조지의 분급을 규정한 토지법을 의미하는 것이며, 넓은 의미로는 이 토지법을 기초로 하여 구성된 광범위한 토지 지배의 체계를 의미한다. 이 토지 지배 체계는 다분히 미분화 상태에 있는 소경영 농민의 자가경영주의를 기반으로 삼고, 이에 입각하여 대민 수탈이 강행되는 구조였는데, 전시과는 바로 그러한 다양한 형태의 수탈을 실현시키기 위한 토대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전시과는 976년(경종 1)에 처음 제정되어, 998년(목종 1), 1014년(현종 5), 1034년(덕종 3)에 각각 수정·보완된 뒤에 1076년(문종 30)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정비되었다. 현종 및 덕종대에 실시된 수정·보완의 경우 기록으로 남은 것이 없어서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처음 제정된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와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 그리고 최종 정비된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의 내용은 ≪고려사≫(식화지 1, 전제조)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우선 1076년의 경정전시과의 규정에 따라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시과의 토지, 즉 과전의 분급을 받는 관료 및 직역 부담자는 18과등(科等)으로 분류되었다. 1과로부터 18과에 이르는 각 과등 안에는 수급자(受給者)의 직함 및 그들에 대한 전지와 시지(柴地)의 지급액 결수가 명시되어 있다.

예를 들면, 최고의 과등인 1과는 전지 100결, 시지 50결을 받게끔 규정되어 있으며, 지급 대상자로는 중서령(中書令)·상서령(尙書令)·문하시중(門下侍中)의 관직명이 열거되어 있고, 최하의 과등인 18과에는 한인(閑人)·잡류(雜類)가 배치되어 전 17결을 받도록 되어 있다. 또한 군인과 서리(胥吏) 등 직역 부담자는 제15과등 이하의 낮은 과등에 배열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전시과는 본래 국가의 관직에 복무하는 관료나, 행정적 혹은 군사적인 신역(身役)에 복무하는 서리·향리·군인 등 국가적인 공직·공역(公役)에 종사하는 자들에 대해서 그들이 국가의 공직·공역에 복무하는 보수의 대가로서 일정한 액수의 전시를 지급하여, 그들의 신분과 지위에 알맞은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필요한 재정 기반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제정된 토지법이었다. 이것이 말하자면 일반 전시과였다.

이와는 별도로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직·역과 관계없이, 무산계(武散階)가 수여된 계층이나 승려·지리사(地理師) 등 특정한 관념 세계의 직무자에 대하여 지급하는 무산계전시과·별사전시과(別賜田柴科) 등이 마련되기도 하였고, 또 5품 이상의 고급 관료에 지급하는 공음전시과(功蔭田柴科), 그리고 6품 이하의 의지할 곳이 없는 관료 미망인, 전망군인(戰亡軍人)의 처, 퇴역한 연로군인(年老軍人) 등에 대하여 지급하는 구분전(口分田)의 제도 같은 것도 준비되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별정 전시과의 구실을 하는 것인데, 이러한 급전의 배려는 일반 전시과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밖에 또 관아(官衙)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공해전(公力田)과 아직 그 실체는 분명하지 않으나 내장택(內庄宅)·궁원에 지급되는 공해전도 설정되어 있었다. 일반 전시과의 지급 대상이 관료·직역 부담자로 고정되는 것은 998년의 개정전시과 이후인듯하며, 976년의 시정전시과에서는 관료뿐 아니라 관계(官階)만을 받은 자삼(紫衫) 소속의 많은 호족들도 급전의 혜택을 입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 뒤 관료 체제의 정비에 따라 급전 대상자의 틀이 정비되어 관계만을 띤 호족들은 급전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전시과는 국가의 공직·공역에 종사하는 관료·직역 부담자에 대하여 복무의 보수 규정으로서 제정된 분지법(分地法)이었다. 국가의 공직에 복무하는 관료에 대하여 보수의 뜻으로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는 이미 신라 689년(신문왕 9)에 관료전이라는 명목으로 제정된 일이 있었다. 이때까지 신라에서는 관료들에게 녹읍을 지급해 왔었는데, 종래에 있던 녹읍을 혁파하고 그 대신 설정한 것이 관료전이다.

관료전 제도는 약 70년 동안 존속하다가 녹읍이 다시 부활되는 것을 계기로 해서 폐기된 듯한데, 그 이유는 당시의 통일 신라 사회가 단순한 전조의 수취만을 목적으로 하는 분급 수조지 제도(分給收租地制度)를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조건으로서는 토지 자체에 대한 지배보다는 인간의 노동력에 대한 지배가 더 중요시되는 저급한 토지 생산력의 단계에서 볼 수 있는 고대적 현상을 들 수 있겠다. 하여튼 전시과 제도가 제정됨으로써 귀족 관료들의 생활 경제의 기반이 녹읍이나 식읍과 같은 지역 지배(地域支配)에서 일정한 면적의 토지 그 자체에 대한 지배로 옮겨졌다는 것은, 전시과제도에 하나의 큰 전진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시과 제도가 토지 자체에 대한 지배, 다시 말해서 토지에서 생산되는 현물수확의 수취를 전제로 하는 지배의 형태였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 지배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하여는 아직 해결을 보지 못한 문제들이 많다.

우리가 가장 궁금하게 느끼는 것은 과연 어떤 지목(地目)의 토지가 전시과의 과전(科田) 내지 양반전으로 배정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과전이 조선 초기의 과전법의 경우처럼 민전 위에 설정되었을까, 아니면 민전이 아닌 어떤 다른 지목의 토지 위에 설정되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현재로서는 과전이 민전 위에 설정되었으리라고 보는 견해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서로 맞서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과전과 민전은 같은 동일한 토지이며, 다만 보는 입장에 따라서 호칭이 달라질 뿐인바, 경작자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민전(공전)이요, 수조자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과전(사전)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과전으로 편성된 토지는 본래 그 과전을 지급받은 양반이나 군인이 가지고 있던 사유지이며, 이 과전(사유지)에 대한 경영도 수급자(受給者)들이 직접 담당했을 것이라 한다. 즉, 일반 농민들의 민전과는 구별되어야 하는 토지라는 것이다.

비슷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과전은 본래 그 기원이 신라 말 고려 초에 각 지방에서 할거하고 있던 호족들이 그들의 전장인 사유지로서 지배하던 토지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들 호족들의 전장에 군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되어 전시과가 창설되는 과정에서 일단 국가에 회수되는 형태를 취했다가 다시 과전으로서 호족이나 신왕조의 관료군들에게 재분배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과전이 배정되어 있는 토지의 성격 문제와도 서로 관련되는 문제이지만, 전주(田主, 수조권자)인 관료가 그들이 수급한 과전에서 과연 어느 정도의 전조(田租)를 수취하였을까 하는 수취의 비율에 관해서도 아직 정설이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과전이 민전 위에 설정된 것이라면, 수조권자인 전주는 민전인 공전에 대한 수조의 규정에 따라 수확량의 4분의 1 또는 10분의 1에 해당되는 액수를 수취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라면 사전에 대한 수취 규정에 따라 수확량의 2분의 1에 해당되는 액수를 수취하였으리라 상정된다.

전시과 체제하의 전국 토지는 크게 나누어 공전과 사전으로 구분되었다. 공전으로는 내장토(內庄土)나 어분전(御分田) 같은 궁정에 소속된 토지(1과공전), 공해전·학전 등 국가에 부속된 토지(2과공전), 그리고 일반 민전(3과공전) 등이 있었고, 이에 대하여 사전을 형성하는 지목으로는 궁원전·사원전과 양반전, 그리고 군인전·기인전(其人田)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양반전은 과전의 대표적인 존재이다.

공전과 사전에 대해서는 수취의 비율이 다른 차율수조(差率收租)가 적용된 것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공전의 수취율은 4분의 1, 사전의 수취율은 2분의 1로 해석하는 견해가 지금까지 거의 통설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서는 공전의 사분취일(四分取一)을 규정한 ≪고려사≫(식화지 1, 전제 조세조)의 기록은 공전 안에서 국유지에만 해당하는 것이지 민전(공전)은 이에 포함되지 않으며, 민전에 대해서는 10분의 1의 수취율이 적용되었다는 견해가 강력하게 대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민전을 포함한 공전의 4분의 1 수조율을 주장하는 측은 의창법(義倉法)에서 규정한 의창미 징수의 법규(≪고려사≫ 식화지 3, 상평의창조)에 의거하여 반론을 펴고 있다.

즉, 과전(양반전)이 민전 위에 설정되어 10분의 1의 수조를 하였다고 가정한다면, 민전과 양반전이 동일한 토지임에도 불구하고, 민전(3과공전)에서는 결당 1두의 의창미를 부담하는 데 반하여 양반전에서는 그 배나 되는 2두의 의창미를 부담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박하면서 완강히 맞서고 있다. 반대론자의 측으로부터는 아직 이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당시의 민전에서 상당한 부분이 신라의 ‘촌락문서’에서 보이는 대로 일정한 기간 경작하였다가 그 다음에는 농사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른바 휴경 농법이 적용되는 토질이 나쁜 농지였다면, 기술적으로 이렇게 생산성이 불안정한 토지를 관료에 지급하는 과전으로 배정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일이다.

반면 공전 사분취일설도 해당 공전조가 지대의 성질을 띠는 것이라면 알 수 없으나, 단순한 지세(地稅)로 해석한다면 그 수취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비판이 있다. 이런 문제들은 앞으로 해명되어야 할 조세 제도상의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사전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분취일의 수취율이 적용되는 것은, 사전 중에서 양반전이나 사유지에 국한된 지대 수취의 현상이며, 수조지 중에서도 군인전 같은 경우는 2분의 1이 아니라 4분의 1의 민전과 같은 수취율이 그대로 적용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있다. 이 해석에 따르면 군인전은 그 대부분이 군인들이 소유하는 소경영 농지인 민전 위에 설정된 면세지이며, 같은 전시과라는 명목으로 호칭되기는 하였으나, 양반전과는 지목의 성격이 크게 달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와 같이 전시과의 지목 편성은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한 것이었다.

공전과 사전의 성격차에 관하여는 국가에 지세를 부담하는 지목이 공전, 해당 토지에서 지대 수취의 경영이 행하여지는 사유지를 전형적인 사전이라고 보려는 해석이 유력하다. 민전은 사실상 농민들의 사적 보유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전이라고 인식되었다. 중국에서의 용례로서는 일반 민유지는 사전으로 취급되고 있었는데 고려에서는 그 반대였다.

이에 관해서는 민전에서 바치는 조가 공적인 국가 재정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되었으리라는 해석도 있고, 당시의 촌락 농민은 아직 공동체의 규제에서 충분히 자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농민적 토지 소유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민전을 사전이라고 부르기가 적당치 못하였으리라는 해석도 있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전시과의 과전이 어떻게 경영되었는지에 관해 그 경영의 형태 내지는 양식에 관한 설명의 방법인데, 이것은 과전이 어떠한 종류의 지목에 의하여 편성되었느냐 하는 문제와 서로 병행하여 고찰되어야 한다. 과전이 일반 민전 위에 설정되었다면 당연히 자영 소농민에 의한 자가 경영이 상정된다. 이럴 경우, 양반이 수취한 조는 국고에 수납되어야 할 부분이 국가의 지시에 따라 일정한 관료에게 귀속되는 형식이 된다.

이와는 반대로, 과전이 민전과는 성질이 다른 일정한 사전(수조자가 본래 소유한 사유지, 혹은 재래의 호족들의 전장이 일단 회수되어 분급 수조지의 재원으로 설정된 토지) 위에 배정된 것이라면, 당연히 지대의 수취를 목적으로 하는 소작제 경영을 취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종래의 통설로서는 과전(양반들에게 분급된 수조지)은 소작제 방식으로 전호에 의하여 경영되었으리라는 견해가 우세하였다. 그리고 이 양반과전은 비록 지대 수취의 경영이 이루어진다 해도 다만 수조권이 부여된 단순한 분급 수조지에 불과한 것이며, 그 과전의 경작·생산을 감독하고 또 조의 수취와 수송에 책임을 지는 것은 전주인 양반 자신이 아니라 지방 장관인 수령일 것이라고 이해되었다.

따라서 양반은 수조권을 가진 전주이기는 하되, 직접 토지의 경영·관리에 임하는 지주로 보기는 어렵다는 식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아직 소수의 의견이기는 하지만, 양반의 과전은 해당 양반들이 종전에 소유하고 있던 사유지 내지는 그 친족들의 소유지로써 편성된 것이며, 이 토지의 경영·관리에 책임을 진 것도 양반의 대리인이나 그 친족들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전시과체제 안에서도 양반의 지주적 성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가 나타나고 있다.

하여튼 양반의 과전은 그 소유와 경영에 대한 주체의 문제가 앞으로 해명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 양반의 전신인 호족들의 성격과 연결시켜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전시과의 과전은 과전법(조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내(畿內)의 토지로써 분급되었으리라는 의견이 종래 일부의 연구자에 의하여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현재로서는 이러한 해석은 소수의 의견인 듯하며,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과전이 지역의 제한이 없이 전국 각처에 산재하고 있었으리라고 보고 있다(단, 양계는 제외).

전시과에서 규정된 양반과전의 액수가 반드시 규정대로 지급되었을까 하는 문제는 오래 전부터 의문시되어 왔다. 이에 관해서는 전시과 토지재원의 만성적인 부족상태에 주목하여 전시과에서 규정된 양반과전의 지급액은 군인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급의 최고한도를 표시한 것에 불과할 뿐이며, 소정의 액수가 규정대로 지급되었다는 뜻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정액대로 지급된 것이 족정(足丁), 정액 미달로 지급된 것이 반정(半丁)이라는 해석도 나와 있다.

전시과 제도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토지의 소유·지배 관계가 일정한 정도에까지 성장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성립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고려 초기의 토지소유·지배관계는 관료전이 폐기된 8세기 중엽의 신라에 비하면 한결 발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러한 토지 소유·지배 관계의 발전은 어차피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문제, 그리고 또한 당시의 농민들이 얽히고 설키어 살고 있던 공동체의 문제와 결부시켜 설명이 되어야 할 일인데, 현재로서는 연구의 수준이 아직 그러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소농민의 자가 경영에 구조적 기반을 둔 전시과 제도와 이러한 구조에 입각한 민중 지배의 체제는 마침내 무신 정권의 성립을 고비로 하여 해체되어 12세기 이래 고려의 토지 소유·지배 관계는 농장이라는 이질적인 차원의 단계로 발전하였다.

2. 농장과 녹과전

[농장]

농장은 왕실·귀족·고급 관료·사원 등 권력자들이 지배한 사적인 대토지 소유의 특수한 형태를 의미한다. 전장·전원(田園)·장원(莊園)·농장(農場)·별서(別墅)·별업(別業)이라고 불려지기도 하였다. 농장 내지 전장이라는 토지 지배의 형태는 이미 통일 신라 시대 이래 존재하였으나 급속히 확대된 것은 12세기 후반기 이래의 일이며, 농장이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전시과 제도는 붕괴하였다.

농장은 탈점(奪占)·개간·사패지(賜牌地)의 지급, 기진(寄進), 장리(長利)·매입(買入) 등 다양한 경로를 밟아 성립하였는데,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손꼽히는 것은 불법적인 탈점과 개간 등이었다. 권력자들이 개간한 토지는 국왕의 사패를 받아 공신전 등의 명목으로 등록해서 면세의 특권을 얻어내는 것이 상례였다. 권력자들에 의한 탈점 행위는 이미 무인 정권의 초기부터 문제화되어 최충헌(崔忠獻)의 집권 당시에는 벌써 심각한 사회 문제로 다루어질 만큼 널리 진전되어 있었다.

몽고의 침략과 그로 인한 참담한 전화(戰禍)가 고려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 중에서도 가장 크게 주목되는 것은, 침략 전쟁에 후속하는 대몽(對蒙) 복속기에 접어들면서 농장의 형성이 전국적으로 더욱 급속히 확대되어 나갔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조세·부역 등의 국고 수입이 격감하고 국가 재정이 파탄에 빠져, 마침내 고려 왕조는 멸망하였다.

농장이 대토지 사유의 집적과 이에 대한 지배를 전제로 하여 성립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농장의 규모는 대체로 ‘미주과군(彌州跨郡)’이니 ‘표이산천(標以山川)’이니 하는 식으로 표현될 만큼 그 면적이 광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농장의 형태에 관해서는 몇 개의 촌락이 몽땅 한 덩어리가 되어 하나의 농장으로 편성되거나, 혹은 하나의 촌락이 촌락 단위로 농장으로 화한 경우 같은 것을 상정해 보이는 견해도 있다.

왕실의 ‘장(莊)’·‘처(處)’와 같은 특수한 경우는 예외로 치고, 보통 농장의 형태는 일정한 면적의 토지가 한 덩어리로 집적되거나, 또는 그렇게 집적된 토지가 여러 곳에 분산되어 하나의 농장을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왕실의 ‘장’·‘처’도 일종의 장원임에는 틀림없겠으나, 여기에서는 일단 경작지 그 자체에 대한 지배를 의미하는 농장과는 구별하여 처리하여 둔다. 왕실의 ‘장’·‘처’는 일정한 면적의 경작지 그 자체에 대한 지배라기보다는 일종의 ‘지역’(地域, 행정 구역)에 대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농장이라고 해서 반드시 굉장히 넓은 토지의 지배를 연상할 필요는 없고 30∼40결 정도의 비교적 규모가 작은 것도 있었다. 농장에는 지배의 거점으로서 장사(莊舍)가 설치되어 있었고, 여기에는 장주(莊主)·장두(莊頭)·간사,幹事)가 상주하면서 농장의 경영·관리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이들은 대개가 노복으로서 도읍에서 정치의 권좌에 앉아 있는 농장주의 대리인 구실을 하였다. 이것이 흔히 보는 농장의 지배 장치였다.

농장 안에는 경작노동을 담당하는 많은 전호(佃戶) 농민들이 살고 있었다. 경작노동은 노비가 맡을 경우도 있고, 양인의 전호가 맡을 경우도 있었는데, 양인 전호일 경우에도 ‘억량위천(抑良爲賤)’·‘압량위천(壓良爲賤)’ 등의 방법으로 노비와 동렬로 파악되는 것이 상례였다. 양인이 자진해서 노비가 되어 농장에 투탁하는 일도 있었다. 하여튼 농장 내 경작농민들의 성격은 다분히 노예적 색채가 짙은 것이었다.

양인을 노예의 신분으로 파악한 이유는 농장주가 농장 내에 국가의 수취가 미치는 것을 막고 예속농민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다. 농장주가 지배하는 사노비에 대하여는 국가의 공적인 세역(稅役)이 면제되어 공과(公課)의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농장을 비롯하여 대토지가 집적된 사유지 안에서 노동하는 전호를 당시에는 ‘처간(處干)’이라고 불렀다. ‘처간’은 ‘곳한’의 이두식(吏讀式) 표현인데 소작인이라는 뜻이다. 본래 처간은 남의 토지를 소작해서 지대를 부담하는 단순한 전호농민이었는데, 뒤에는 국가에 바쳐야 할 용(庸)·조(調)마저 포탈하여 농장주의 사적 예속민처럼 되어버렸으므로 국가의 공민이라는 성격은 잃고 말았다.

그러한 과정에서 농장 내 전호농민들에 대한 독점적 지배가 강화되는 한편, 양천의 신분 관계가 급속히 문란해져서 큰 사회적 혼란을 빚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이 누적된 결과 그것이 국가 재정의 궁핍과 서로 연결되어 정치적 파국을 초래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농장지배의 본질은 대체로 수확의 절반 정도를 거두어들이는 ‘사전’(과전)에서는 지대수취의 경영이 행하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기의 사전의 경우에는 ‘사전’주가 직접 경작 농민을 파악하여 그들과의 사이에 직접적인 지배 예속의 관계가 형성된 일은 없어 보이고 ‘전주’ 자신이 그가 지급받은 토지(과전)의 경영·관리에 직접 책임을 지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런데 후기의 농장주는 전기의 ‘사전주’에 비하여 토지의 경영에 직접 책임을 지고 전호와의 사이에 직접적인 지배 예속 관계가 확립되어 있었다는 의미에서 한결 지주로서의 성격이 뚜렷한 존재로 성장하였다.

소수의 의견에 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농장을 주로 사급전(賜給田:토지 제도의 틀 안에 제정된 사전) 위에 설정된 수조지의 일종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으며, 그 수조율은 공전의 경우와 같은 10분의 1 세율에 해당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 설에 의하면, 농장은 지대 수취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단순한 수조지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농장은 12세기 후반기부터 급속히 확대되어 나갔는데, 13세기 후반기인 몽고복속기에 접어든 이후에는 더욱 더 팽창하여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전국 대부분의 토지가 농장 안에 흡수되었다고 전하여질 만큼 그 양적 비중이 늘어났다. 농장 성립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탈점과 개간이었다. 권력자들에 의하여 개간된 토지는 유세지(有稅地)로서 농장을 형성하는 것도 있고, 국왕의 사패를 받아 무세지(無稅地)라는 특권이 부여된 채로 농장이 된 것도 있었다.

또 뚜렷이 경작중에 있는 유주부적(有主付籍)의 기전(起田)이 주인이 없는 황무지로 사칭되어, 황무지라는 명목 아래 다시 사패지로 사급된 예도 흔히 있었다. 이와 같이 농장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는 단순히 토지지배관계의 차원이라는 시각만으로는 풀이할 수 없는 부정비리 따위가 늘 따라붙었다.

고려의 농장을 거론함에 있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매우 중요한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왜 고려 중기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후반에 걸치는 약 1세기간을 과도기의 고비로 삼아 토지지배관계에 그렇게 큰 변화가 일어났을까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실증적이고 구체적 연구에 의해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지만, 우선 일차적으로는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과 결부시켜 해명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전시과체제하의 전기 농민들은 다분히 계급적으로 미분화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이들이 촌락이라는 공동체의 규제에서 어느 정도 자립하여 독립적인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퍽 회의시되는 점이 많다.

당시의 상황은 자연 관계(自然關係)가 매우 우월하였다는 조건에 제약되어 생산력 발전의 수준은 퍽 저급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저급한 생산력 수준 아래서 살고 있던 농민들은 혈연 집단을 이루어 기본적으로 동성 촌락(同姓村落)을 형성하여 서로 상부상조하는 의존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이 전시과 체제하에서 계급적인 분화가 아직 그렇게 심각하게 벌어지지는 않은 농민 생활의 구조였다고 인정된다.

이러한 구조 아래에서는 농민들 개인에게 돌아가는 생산의 잉여 같은 것은 국가에 수탈되는 몫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극히 미미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 중기의 일정한 시기, 즉 무인정권 성립 전후에 이런 농민 생활의 미분화 상태를 타파하는 큰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 변화를 실증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장래의 과제가 되겠지만, 일단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농작법(農作法)의 진보발전이다. 고려 전기의 농작법에 관하여는 연구자에 따라서 견해가 달라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는 매년 연작하는 상경법이 지배적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연구자는 도작(稻作)은 격년제 휴한법이 일반적이었다고 해석하였다. 또한 어떤 연구자들은 진전(陳田)이 항상적으로 재생산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일정한 기간 경작하다가 토질이 척박해지면 경작을 포기하여 진전으로 처분해 버리는 휴경법의 비중이 매우 높았으리라는 의견도 나왔다.

현재로서는 정확한 실정을 아직 파악할 수 없으나, 종래에는 연작법·휴한법과 휴경법이 서로 병존해 오던 농업생산의 기술이, 고려 전기가 막을 내리는 무인정권 성립기에 이르러서는 휴한법이 휴경법을 극복하여 전국 대부분의 토지가 1년 내지는 2년씩 터울을 두고 경작하는 격년제 농법으로 변하고, 이와 병행하여 매년 경작하는 연작법도 꽤 큰 비중으로 성장했으리라고 전망된다.

이러한 농업 기술의 진보 발전은 마침내 13세기에서 14세기로 넘어갈 무렵부터는 전국 경작지에서 연작상경법이 보편적으로 일반화하는 추세를 나타내게 한 것 같다. 이러한 농작법의 기술상의 진보가 사회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온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양전작업 및 수취정책의 기초 조건이 되는 결부제의 구조와 내용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결부제의 시행 과정에서 상·중·하의 전품을 등급짓는 기준이 종래와 같이 토지이용의 빈도수에 따라서가 아니라, 토지의 비척도에 따르는 방식으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과거에 중국의 경(頃)·무(畝)와 같은 뜻으로 단순히 토지의 절대 면적을 표시하던 결·부가 수등이척제(隨等異尺制)라는 새로운 양전법을 채택하여 이적동세(異積同稅)의 수취체제로 변질되었다.

이는 당시의 농법이 휴한법을 극복해서 연작법이 선진적인 농업기술로서 이미 일반화되어 가고 있었다는 형세와 서로 연결시켜 고찰하여야 할 문제이다. 말하자면 농법상의 새로운 기술의 발달, 사회생산력의 발전에 대응하여 등장한 것이 새로 제정된 결부법의 참면목이었다.

이와 병행하여 몽고의 침략이라는 일찍이 보지 못한 큰 전란으로 입은 처절한 전화의 피해가 다분히 미분화상태에 있던 농촌사회의 경제구조를 밑바닥으로부터 뒤흔들어 놓고 말았다. 전란의 와중에서 방대한 면적의 황무지가 늘어났고 경작지를 잃은 수많은 실업농민들이 방출되었다.

농촌에서의 이런 변동은 농장제 사회가 형성되는 역사적 전환의 과정에서 권력자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황무지를 개척하거나 또는 그런 구실을 빙자하여 남의 토지를 탈점하려는 강력한 의욕과 동기를 가지게 하였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미 이때에는 혈연으로 얽혀 다분히 미분화 상태에 있던 농촌에서도 점점 해체 현상이 나타나고, 또 농법과 기술발달의 결과 농가에서도 일정한 생산의 잉여가 형성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권력자들의 농장 경영은 진행되고 발전해 나갔다.

고려 후기의 토지 지배 관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권력자들이 경영하는 농장이었다. 그러나 농장의 비중이 아무리 높아졌다고 해도 전국의 토지가 모두 농장으로 변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소경영 농민들이 가족 노동력으로 경영하는 농토가 여전히 큰 비중을 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시과가 무너진 이후에도 분급 수조지(分給收租地)는 하나의 제도적 장치로서 상대적으로 일정한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녹과전]

농장의 팽창으로 인하여 국고의 조세수입이 격감한 결과 관료들에 대한 녹봉의 지출이 어렵게 되었다. 정부는 이 재정적 난국을 타개하고 관인들의 생계를 보장해 주기 위하여 13세기 중엽에 녹과전(祿科田)을 설치하였다. 녹과전과 병행하여 구분전(후기)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분급지가 설정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후기구분전이다.

녹과전에 관해서는 그 계보가 녹봉에만 연결된다는 견해와, 그런 것이 아니라 전시과 과전의 부활을 꾀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서로 엇갈려 있다. 전자에 의하면 녹과전의 지급대상자는 오로지 녹봉을 받을 수 있는 계층, 즉 관인들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직역자(職役者)들에 대한 토지지급까지도 아울러 규정하고 있는 전시과와는 그 성격이 다른 것이며, 양자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의하면 전시과의 계보는 전시과→구분전(후기)→과전법으로 그 계통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녹과전과 거의 동시에 이와는 별개의 토지지배의 범주로서 구분전(후기)이라는 새로운 의미·내용의 분급지가 등장하였는데, 이것은 특정한 부녀·노병들에 한해서 지급된 전기구분전과는 달리, ① 양반·군인·한인 계층 및 ② 향리·진척·역자(驛子)·직(直) 계층에게 널리 배분되어 그 지급대상이 퍽 넓은 것이었다.

여기서 ①의 계통은 과거의 전시과를 계승하는 것이며, ②의 계통의 구분전이 고려 말의 사전개혁을 통해 발전적으로 해소하여 조선 초기의 과전으로 인계되는 것이라 한다. 이와는 달리 후자에 의하면 녹과전은 고려 후기사회의 체제정비의 일환으로서 양반관리에 대한 새로운 국가적 토지분급제도로 성립한 것이며, 초기의 전시과제도가 무너진 이래 녹봉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상황에서, 녹봉에 대신한다는 표방 아래 설치한 것이 녹과전이라 한다. 그리고 이 녹과전은 실제로 관리에 대한 유일한 피급지(被給地)로서 고려 말까지 1세기 이상 존속한 것이라 한다.

하여튼 녹과전은 관료들만 그 지급 대상자로 제한되어 있었다는 의미에서 전시과의 과전과는 그 성질이 크게 다른 것이었다. 또 후자는 녹과전과 병존하는 후기 구분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관찰하고 있다. 전시과 제도하에서는 양반관료들에게 지급한 직전(職田)과 군인·서리 등 기타 역(役)을 부담하는 역인(役人)들에게 지급한 전정(田丁)이 전시과라는 하나의 제도적 틀 안에서 서로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시과가 무너진 이후 녹과전이 신설되는 형식으로 옛날의 양반 ‘직전’이 다시 부활 개편됨에 이르러, 직역부담자들에게 지급된 정전은 양반관료의 녹과전과는 별개의 범주로 처리되어 구분전이라는 명목으로 파악된 것이 아닐까 추리하였다. 구분전은 역의 부담자뿐 아니라 양반에게도 분명히 지급되었는데,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양반구분전을 전시과제도에 보이는 양반과전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양반공음전시과(兩班功蔭田柴科)에 결부시켜, 양반신분층 전체에 대한 생활보장책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설에 의하면, 녹과전은 전시과→녹과전→과전법이라는 식으로 단순히 전시과와 과전을 이어 주었을 뿐 아니라, 국가적 토지분급이 역과 분리되는 단서를 열어 주었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녹과전이나 후기구분전의 실체에 관해서는 앞으로 다시 검토해야 할 문제가 많다. 녹과전이 실시된 이후 얼마 안가서 녹봉 지급이 다시 시작되어 녹과전이 존속하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녹과전과 녹봉의 이원적 지급체제가 병행되었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보면 녹과전의 계보적 연결을 녹봉에만 결부시키려는 해석도 재고되어야 할 문제이며, 또 후기구분전의 성격을 역부담자들에게 지급된 전정이라는 차원에서만 파악하려는 견해도 양반관료들에 지급된 구분전의 존재가 기록상으로 엄연히 확인되는 이상 당연히 재검토되어야 할 일이다.

하여튼 녹과전·구분전(후기)은 경기 지역에 한정하여 지급된 듯하며, 특히 양반구분전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양반관료 전체가 지급대상으로 지정된 과거의 전시과와 같은 분급 수조 제도의 구실을 한 것도 아닌 듯하다. 고려 종말기에 이르러 이른바 사전 개혁이 단행된 결과 불법적인 대토지 소유는 대체로 부정되었다. 대륙에서 원(元)·명(明)이 교체하는 국제 정세의 변화에 즈음하여 고려 조정에서는 사전의 문제를 둘러싸고 친명 개혁파와 친원 보수파 사이에 큰 대립이 일어났다.

개혁파의 총수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에서 회군한 직후에 보수파 관료들이 소유한 불법적 대토지 겸병인 사전을 공격하여 그 혁파를 주장하고 개혁을 단행하였다. 농장과 사전은 반드시 그 개념이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사전 혁파의 결과 많은 농장들이 몰수되었다.

그러나 농장이라는 명목으로 존재한 토지 전부가 모두 부정된 것은 아니다. 몰수된 농장의 토지는 그 대부분이 탈점을 전제로 강행한 불법적 대토지의 집적이거나, 조선이라는 신왕조를 개창한 이른바 사류(士類)들과는 정적(政敵) 관계에 있다가 정치적 이유로 숙청된 사람들인 친원 보수파 계열의 권력자들의 소유 토지였다.

해당 농장의 토지가 불법적인 탈점으로 겸병한 것이 아닌 이상, 또 농장주가 혁명파 사류들과 특별한 적대 관계에 있었던 것이 아닌 이상, 예컨대 그 농장이 막대한 자력을 투자한 결과 진전이나 황무지를 새로 개척해서 설립한 것이라면, 이러한 농장이 사전 혁파의 과정에서 몰수되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럴 경우 해당 농장의 전주는 동시에 그가 개간한 토지인 소경전(所耕田)의 경작 주체로서 그 토지에 대한 소유권도 인정받을 수 있는 법제 구조였으므로, 이러한 권리가 사전의 혁파 과정에서 부인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고려 말의 ‘사패지’ 같은 것은 대개가 이러한 유형의 농장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사패지에 대한 수조권에 관해서는 사전 혁파의 과정을 통해서 당연히 변동이 있었을 것이라고 상정되지만, 그것은 ‘소경전’에 대한 경작권 및 소유권과는 별개의 문제에 속하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의 사료에 보이는 농장이니 누대농사(累代農舍)니 하는 것은 이렇게 하여 고려 이래 존속한 것이 적지 않았겠는데, 이 안에는 정치 권력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방의 향호(鄕豪)들에 의해 경영된 토호형 농장(土豪型農莊)도 꽤 많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토호형 농장은 정치적 권력을 매개로 해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경제적 요인으로 인하여 형성된 것인 만큼 농장주는 지주로서의 자주성이 한결 높았다. 조선 시대에 들어가서 널리 발전하는 병작형(幷作型) 농장은 주로 이러한 형태의 농장과 그 계보가 연결되는 것이 많다.

여기에서는 토지 소유 관계에 큰 발전의 자취가 엿보이는 것이 주목된다. 하여튼 고려 말 사전이 혁파되고 과전법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재래의 농장은 상당수가 몰수되었으나, 이와는 달리 계속 그 존재가 인정된 것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해당 농장이 형성된 배후의 사정에 따라서 그 향방이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강진철>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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