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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0-28 (월) 14:55
분 류 사전1
ㆍ조회: 1592      
[조선] 인현왕후 (민병태)
인현왕후(仁顯王后)

조선 18대 숙종왕비(肅宗王妃) 1667~1701

    숙종─인경왕후 김씨─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 희빈 장씨 - 숙빈 최씨
                   ↓                   ↓                     ↓                ↓             ↓
           3녀(일찍죽음)       자식없음            자식없음       균(경종)    영조(연잉군)

효경 숙성 장순 원화 의열 정목 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 민씨(閔氏). 본관(本貫)이 여흥(驪興)으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인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된 문정공(文貞公) 민유중(閔維重)의 따님이시며, 좌의정 민진원(鎭遠)의 누이되시는 분이시다.

1667년(현종 8년) 4월 23일 지금의 중앙일보사 사옥 맞은편 순화빌딩의 주차장 터에서 탄생하였다. 조선조 제 19대 숙종 7년 신유(辛酉:1681)에 15세의 나이로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 20세까지 왕자를 낳지 못해 숙종에게 장희빈(張禧嬪)을 후궁으로 천거하였으나 장희빈의 모함으로 6년동안 안국동 감고당(感古堂)에서 칩거하였다. 숙종 27년 신사(辛巳:1701)에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가 35세였다.

인현왕후는 명문에서 태어나 덕이 높고 인자하시고 아량이 넓으시어 모든 일을 초연한 마음으로 처사해 나가시는 희세(稀世)의 현비(賢妃)이시었다. 15세에 숙종왕후비로 들어가시어 종고지성과 금슬지락이 두터워웠으며 날이 갈수록 나라의 기초가 견고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왕비가 입궐하신지 6년이 지나도록 왕자를 탄생하지 못하여 나라의 큰 걱정이 되었고 왕비 자신에게도 큰 수심이었다.

그리하여 늘 생각하시기를, 기왕 나 자신이 왕자를 탄생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상감께서는 늘 염두에 두시는 궁녀 장희빈을 다시 데려다가 인연을 맺게하는 것이 왕비로서 현명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생각하시었다.

하루는 사가의 여인으로써 감히 흉내낼 수 없는 큰 아량을 가지시고 상감을 모신 자리에서 장희빈을 다시 불러드리시라고 진정으로 권하였더니 상감께서도 기꺼이 승낙하시었다. 그러나 상감께서는 "나로서야 이런 말을 어떻게 여러 어른에게 사뢰며, 또한 여러 신하에게 이를 수가 있겠소." 하시니 왕비께서는, "제가 대왕비와 왕대비전에 사뢰어 보겠다." 고 자청하고 나섰다.

이런 대화가 있은 후 인현왕후는 자기 일신을 희생시키더라도 상감을 위한 인정과 의리를 갖고 장희빈을 구해주려고 결심하였다. 그 얼마나 너그러운 아량이시랴. 그리하여 인현왕후는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뵈옵고 여러번 간청하였더니 두 대비는 인현왕후의 성덕에 감동되었다. 숙종12년(1686년) 병인 4월 장희빈의 재입궐이 결정되었다. 숙종대왕의 전교로 장희빈을 불러들인 것은 그해 5월 16일이었다.

장희빈은 입궐하자 차차 간음한 모략과 흉악한 계교를 꾸미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장희빈은 남인들과 결탁하고 상감의 총명을 어지럽히면서 일조에 큰 세도를 부리게 되었으며, 결초보은 해야 될 인현왕후를 폐하기 위하여 가진 흉계를 꾸몄다.

또한 1688년 후궁 장희빈이 아들 균(경종)을 낳은지 두 달만에 숙종에게 간청하여 원자로 세우려고 하자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하였다. 마침내 숙종 15년(1689) 기사년 4월 21일 왕비 생일날 상감은 청천벽력같은 죄명을 둘러씌워 인현왕비를 폐위시키는 전교를 내렸다.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을 축출하고, 남인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이를 기사환국이라 한다(기사환국 참고).

그리하여 정원에서는 충신간관들이 상감에게 '폐의 불가'함을 아뢰고 또 간곡한 상소를 올렸으나 장희빈의 고자질만 경청하고 충신들의 간언은 듣기는커녕 도리어 엄벌에 처하였다. 그 중 박태보는 끝까지 항거하다가 참형을 당하였다. 하늘도 무심하여 높으신 인현왕비의 성덕은 여지없이 유린되어 폐비를 당하고 피눈물로 친정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장희빈은 그것도 부족하여 사약을 내리어 민비를 아주 죽이려고 상감을 졸라댔다. 어쨌든 인현왕후에 대한 충성의 결과로 후궁 최씨는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의 한 분으로 일컬어지는 영조대왕을 낳는 인연이 되었다.

그 당시 장희빈은 세도가 하도 어마어마하여 백성들이 민비를 동정하고 장씨를 미워하여 불렀다고 하는 민요(民謠)는 다음과 같다.

"장다리는 한 철이나 미나리는 사철이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다. 메꽃같은 우리딸이 시집삼년 살더니 미나리 꽃이 다피었네."

이 노래에 "미나리"라 함은 민비를 뜻하고 "장다리"는 장씨를 뜻한다. 여기에서 첩에 빠져있는 남편에게 첩은 한철에, 본처는 사철에 비유해서 남편에게 그 잘못을 말하고 본처에게 돌아오기를 말하는 방법인 것이다. 김만중은 사씨 남정기에서 인현왕후에 비하여 간악한 처첩을 그려 인현왕후의 복귀를 묘사하였다.

이같이 장희빈에 대한 세상 인심이 험악하더니 결국은 구할 수 없는 큰 죄가 발각되어 1694년 4월 폐비 민씨를 복위하고 왕후 장씨를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이에 남인이 몰락하고 노론이 집권하는 감술옥사가 일어났다(갑술환국 참고).

복귀된 인현왕후는 갖은 고난으로 숙종 37년(辛巳, 1701년) 8월 14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춘추 35세 일기로 승하하시었다. 그후 친정으로 쫒겨나간 장희빈이 인현왕후가 죽기를 저주하는 굿을 한 것이 탄로가 나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무고의 옥 참고).

장희빈이 일으킨 궁중비극은 막을 내리고, 숙종도 뛰어나게 선정을 베풀어 성군이 되시었다. 인현왕후는 12월 9일 명릉에 모셔졌으며, 숙종이 1720년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에서 춘추 60세로 승하하시어 10월 21일 인현왕후 옆에 묻혔다.

출전 : 민병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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