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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3 (화)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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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4130      
[고려] 고려의 성립과 발전 2 (민족)
고려(성립과 발전) 고려의 성립과 발전 2

세부항목

고려 역사 개관
고려의 성립과 발전 1
고려의 성립과 발전 2
고려의 제도
고려의 대외 관계
고려 문화
고려의 역사적 성격
고려 시대 연구사
고려 시대 참고문헌

(앞에서 이어짐)

3. 권문 세족의 집권과 사대부의 대두

[원의 간섭]

1270년 무신 정권이 붕괴되고 왕정이 복구됨으로써 고려사회는 커다란 전환을 보게 되었다. 몽고세력의 옹호로 왕권은 회복되었지만 대신 그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삼별초의 난을 몽고군의 도움으로 진압한 뒤 본격화되었다. 고려가 몽고에 굴복한 뒤 최초로 받은 압력은 일본정벌에 동원된 일이었다. 고려는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원정에 징발되었다. 이 때 원나라의 명령에 따라 군량을 공급하고 함선을 건조했으며, 직접 군사를 동원해 피해가 매우 컸다.

또한 원나라의 관청이 설치되어 내정을 간섭하였다. 원나라는 처음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더니, 1280년 일본 정벌을 단념한 뒤에도 이를 존속시켜 고려통치의 관부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로 정동행성의 장관인 승상은 자동적으로 고려왕이 겸하고, 그 밑의 관원도 고려왕이 임명한 고려인으로 채워져 명의상·형식상의 존재에 불과했고, 다만 원나라와 고려 사이의 의례적인 행사를 맡았다. 오히려 정동행성의 부속 기구인 이문소(理問所)가 원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고 불법적으로 사법권을 행사해 폐단이 많았다.

또한, 지방에도 원나라의 관부가 설치되어 영토의 지배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미 1258년 화주(和州 : 지금의 永興)에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더니, 1270년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해 자비령 이북의 땅을 다스렸다.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1273년에는 제주도에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두어 목마장을 관장하였다.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고려의 요청으로 충렬왕 때 반환되었으나 쌍성총관부는 공민왕이 무력으로 탈환할 때까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원나라의 간섭으로 고려의 관제 자체도 격하되었다. 삼성 육부의 체제는 상국(上國)의 제도로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서 첨의부(僉議府)라 하고, 육부는 사사(四司)로 축소되었으며, 중추원은 밀직사(密直司)로 개칭되었다. 양부(兩府)의 합좌기관인 도병마사는 원나라의 관제가 아니었지만, 그 기능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도평의사사로 개칭되었고, 왕실의 용어도 격을 낮추어 부르게 되었다.

역대왕은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받아들여 이른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칭호에 비기는 것을 피해야 하였다. 조(祖) 또는 종(宗)을 붙였던 왕의 묘호를 왕(王)으로 고쳐야 했고, 짐(朕)은 고(孤), 폐하는 전하, 태자는 세자로 개칭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간섭은 경제적 수탈로도 나타났다. 원나라는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공물을 강요해 금·은·포 등을 빼앗아갔다. 특히 인삼·잣·약재·매(해동청) 등 특산물을 요구해 많은 부담을 안겨주었다. 심지어 동녀(童女)·환관(宦官)까지도 요구해 고통은 더하였다.

또한, 원나라는 그들의 법속까지도 따르도록 강요하였다. 왕실과 상류층에서는 몽고식 이름을 가지고 몽고어를 사용했으며, 몽고식 의복과 변발이 유행하게 되었다. 또, 왕족의 혈족혼을 비난하고 노비 제도의 개혁도 요구했지만, 고려의 반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원나라는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 간섭을 가했으나 국권은 엄연히 존속되었다. 비록, 형식적으로 원나라의 정동행성이 설치되었지만, 고려의 국내정치는 고려정부에 의해 자주적으로 수행되었다. 더욱이, 외면적으로는 친원정책을 썼지만 내면적으로는 원나라에 대한 반감이 온존해 때로 반원 운동으로 폭발하기도 하였다.

[권문 세족의 집권]

고려 후기에 정치 권력을 장악한 것은 권문 세족이었다. 이들은 1백년간의 무신 정권과 그 뒤의 대원 관계가 진전되는 가운데 재편성된 사회 세력이었다. 먼저 무신 정권기에 새로 부상한 무반세력이 권문 세족에 편입되었다. 비록, 무신정권은 몰락했지만 무반 세력은 왕정이 복구된 뒤에도 유력한 가문으로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가문으로는 김취려(金就礪)의 언양 김씨(彦陽金氏)와 채송년(蔡松年)의 평강 채씨(平康蔡氏) 등이 있다. 고려 후기에 무반가문의 권문 세족으로의 등장은 고려 전기에 문벌 귀족이 문반 가문으로만 구성된 것과는 크게 다른 점이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세력은 원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대두한 가문이었다. 몽고어의 역인으로 성장한 조인규(趙仁規)의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그 대표적인 가문이었다. 응방(鷹坊)을 통해 진출한 윤수(尹秀)의 칠원 윤씨(漆原尹氏)와 삼별초의 난과 일본정벌에서 무공을 세워 출세한 김방경(金方慶)의 안동 김씨(安東金氏) 등도 원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대두하였다.

또한 고려 전기의 문벌 귀족도 그대로 지배 세력으로 존속되었다. 인주 이씨나 정안 임씨(定安任氏)·경주 김씨(慶州金氏)·파평 윤씨(坡平尹氏) 등 전통있는 문벌 귀족이 고려 후기에도 여전히 권문 세족으로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이는 고려 사회의 뿌리깊은 문벌 관념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 문벌 귀족의 전통적인 권위에 대해 실질적인 정치 권력은 크지 못했다는 것이 권문 세족의 새로운 성격이라 하겠다.

충선왕 즉위년의 하교에는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이 열거되고 있다. 여기에 경주 김씨·언양 김씨·정안 임씨·인주 이씨·안산 김씨(安山金氏)·철원 최씨 등 열다섯 가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문벌 귀족과 무신란 뒤에 새로 진출한 무반 가문, 그리고 대원 관계를 통해 대두한 세력들이다. 이들 가운데 당시 세력은 강력하지 못했으나 전기 이래로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가문이기 때문에 열거된 경우가 있고, 반대로 상당한 실력은 가졌지만 전통적인 문벌 관념에 의해 빠진 가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재상지종은 대체로 고려 후기의 지배 세력인 권문 세족을 가리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권문 세족은 양부인 첨의부와 밀직사의 재추(宰樞)가 되어 도평의사사에서 합좌해 국정을 보았다. 처음 도병마사에는 재신 5명 추신 7명이 합좌했으나, 후기에는 도평의사사의 기구가 확대되어 70∼80명에 이르는 재추가 회의에 참가하고, 그 기능은 최고의 정치 기관으로 대두해 도당(都堂)이라 불렸다. 이들 재추는 권문 세족들이 독차지하였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대토지의 소유자가 되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관리에게 주는 녹과전이나 녹봉보다는 불법적인 토지 집적을 통해 이룬 농장(農莊)을 경영해 부를 축적하였다. 농장은 면세와 면역의 특권 등 사적 지배력이 강한 토지였는데, 권문 세족은 산천을 경계로 하는 광대한 농장을 소유하였다.

이와 같이, 후기의 권문 세족은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광대한 농장을 경영하는 지배층으로 보수적인 사회세력이었다. 이들은 문화적 소양과는 거리가 먼 성향을 가졌고, 대체로 친원적인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권문 세족은 기성의 정치 권력을 유지하고, 경제 기반을 존속시키기 위해 원나라의 세력을 이용하고, 새로운 개혁에 반대하였다. 후기의 권문 세족이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으로 문벌을 중요시한 점은 전기의 문벌 귀족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그 성분부터 다른 데가 있었는데, 무반 가문이나 부원 세력 등 종래의 문벌관념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새로운 세력이 편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종래의 문벌 귀족이 가문 자체의 권위로 귀족적 특권을 누린 데 반해, 권문 세족은 현실적인 관직을 통해 정치 권력을 행사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이제 고려의 지배 세력은 가문 위주의 문벌 귀족에서 보다 관료적 성향이 짙은 권문 세족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사대부 세력의 대두]

고려 후기에는 지배 세력인 권문세족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신흥 사대부들이 대두하였다. 신흥 사대부는 권문 세족의 정치 권력의 독점과 농장의 확대에 따른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을 시정하기 위해 개혁 정치를 주장했다. 이리하여 보수적인 권문 세족과 진보적인 신흥 사대부는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신흥 사대부는 최씨 정권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최씨 정권은 정국이 안정되자, 그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학문적 교양이 높고 행정 실무에 밝은 문인들을 등용하였다. 이들은 유교적 지식이 부족한 무신 정권에 대해 학문과 행정 능력을 보충해주는 관료적 학자가 되었으며, 이들이 바로 신흥 사대부였다. 이들은 무신 정권의 붕괴 이후 더욱 활발하게 중앙 정계에 진출해 커다란 사회 세력으로 대두하게 되었다.

신흥 사대부는 권문 세족에 비해 가문이 낮고 지방의 향리층 출신이 많았다. 고려의 향리는 후기의 사회적·경제적 변동을 겪으면서 중소지주로 성장하였다. 향리자제들은 문학적 교양을 쌓고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리로 진출하였다. 따라서, 신흥 사대부는 이미 중앙 정계에서 보수적 세력 기반을 구축했던 권문 세족과는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문 세족에 대해 미약한 신흥 사대부의 개혁 운동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권문 세족들이 원나라의 세력과 결탁하고 있는 이상 그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충선왕의 개혁 정치의 실패에서 엿볼 수 있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전반적인 관제 개혁을 단행해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을 설치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개혁 정치를 수행하였다. 이 때 개혁을 주도한 사람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로 진출한 지방 출신의 신흥사대부들이었다. 그러나 충선왕과 사대부의 개혁 정치는 원나라와 결탁된 권문 세족들의 공격을 받아 실패하고, 충선왕도 퇴위하고 말았다. 신흥 사대부의 개혁 운동은 공민왕 때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이 때 신흥 사대부의 세력이 자못 성장했고, 또한 명나라가 일어나 원나라의 세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사대부를 기반으로 개혁 정치를 실행할 수 있었다.

공민왕의 개혁 운동은 안으로 권문 세족을 억압하고, 밖으로 그들의 배후인 원나라의 세력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우선 공민왕은 기철(奇轍) 등 부원파를 제거하고,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혁파하며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회복하는 반원 정책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새로이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사신을 파견해 친명 정책을 뚜렷이 하였다. 또한, 대내적으로 원나라의 간섭으로 변형된 관제를 삼성 육부의 구관제로 복구하고, 권문 세족의 관직 독점의 중심 기관이었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특히, 승려 신돈(辛旽)을 등용해 과감한 개혁 정치를 단행해 오랫동안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먼저 권신의 중심인물인 이공수(李公遂)·경천흥(慶千興)·이수산(李壽山) 등을 축출하고, 대신 문벌이 낮은 사대부를 등용하였다. 또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 권문세족이 빼앗은 전민을 원소유주에게 돌려주고, 노비로서 양민이 되고자 호소하는 자는 모두 해방시켜주었다. 이러한 공민왕과 사대부들의 대외·대내적인 개혁정치는 아직도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권문 세족의 반발에 부딪쳤다. 권문세족은 공민왕의 반원 정책과 혁신 정치로 인해 자신들의 세력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해 보수적인 반동 정치를 폈다. 그에 따라 신돈은 제거되고, 공민왕도 피살되어 사대부들의 개혁운동도 좌절되고 말았다.

[국제 정세의 변화와 위화도 회군]

내부적으로 권문 세족과 신흥 사대부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을 때, 밖으로는 왜구·홍건적의 침입과 원·명 교체에 따른 대외관계의 변동이 일어났다. 고려 후기에는 왜구의 창궐로 심한 고통을 겪었다. 왜구는 대마도(對馬島) 등 일본 근해의 해적들로 이미 고종 때부터 연해에 출몰하였다. 특히 공민왕 때는 거의 매년 전국각지에 침구하고, 심지어 강화도까지 약탈을 당해 개경에 계엄령이 내리기까지 하였다. 왜구의 창궐로 해상의 조운이 끊겨 중앙 정부의 재정이 곤란하게 되었으며, 연해의 농민들이 약탈을 당해 큰 화를 입게 되었다.

고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일본정부와 외교적 교섭을 벌였으나, 일본정부 자체가 이를 억제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별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에 국방력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토벌에 나섰는데, 그 토벌전에서 큰 공훈을 세운 장군이 최영(崔瑩)과 이성계였다. 이 때 최무선(崔茂宣)은 중국 상인으로부터 화약 제조 방법을 배워 화포(火砲)를 만들어 왜구를 무찔렀고, 박위(朴衛)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해 그 기세를 꺾었다.

공민왕 때는 또한 대륙으로부터 홍건적의 침입을 받았다. 공민왕이 즉위할 무렵 원나라가 쇠퇴하고, 각지에서 한족(漢族)의 봉기가 일어났다. 홍건적은 그러한 한인 반란군의 하나로, 허베이(河北省) 영평(永平)에서 한산동(韓山童)·유복동(劉福童) 등이 일으켜 북중국에서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고 그 세력이 강성했는데, 1359년 원군의 반격을 받은 한 무리가 요동으로 쫓겨와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 때 홍건적은 서경까지 이르렀으나 고려군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되돌아갔다. 그러나 1361년 홍건적은 다시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고, 왕은 안동으로 피난했지만, 정세운(鄭世雲)·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芳實) 등이 무찔러 몰아내었다.

한편 한인 반란군의 한 사람인 주원장(朱元璋)이 1368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명나라를 세우고, 원나라의 대도(大都 : 北京)를 함락시켜, 원나라가 멀리 북으로 달아나는 원·명 교체가 일어났다. 이에 반원 정책을 추구하던 공민왕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연호를 사용해 친명정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는 아직도 부원 세력의 기반이 잔존하고 있었으므로, 고려는 외교 정책을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 공민왕을 정점으로 신진 사대부는 친명파를 구성했고, 친원파는 전통적으로 원나라와 연결되고 있었던 권문 세족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친원·친명의 대립 속에서 공민왕은 1374년 반대파에 의해 살해되고, 중립파인 이인임(李仁任)의 추대로 우왕이 즉위하자, 고려는 원나라와 명나라에 걸치는 양면 정책을 추구하였다. 즉, 이인임 일파는 우왕이 즉위하자 곧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 승습(承襲)의 승인을 요청하는 한편, 북원(北元)에 사신을 파견해 국교를 회복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는 친원·친명 양세력의 대립 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명나라는 고려가 북원과 통하는 것을 힐책하고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 고려 사신을 유배하는 등 고압적인 태도를 취해 고려조정을 분개하게 했는데, 1388년 원나라의 쌍성총관부 관할하에 있던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의 직속령으로 삼겠다고 통고해왔던 것이다. 이 때 정권을 쥐고 있던 최영은 크게 분개해 도리어 이 기회에 명나라가 차지한 요동 지방까지 회복하려 요동 정벌을 꾀하게 되었다.

1388년(우왕 14) 최영이 팔도도통사가 되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요동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국내외의 정세로 보아 요동정벌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출병을 반대했던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에서 회군해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반대파인 최영 등을 제거하고, 우왕을 축출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것이 이성계가 고려를 넘어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성계의 집권]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권문 세족의 세력은 도태되었다. 특히, 같은 회군공신이지만 권문 세족에 속했던 조민수가 우왕의 아들 창왕을 옹립해 권세가 컸는데, 그가 이성계 일파에 의해 실각되고, 창왕마저 신돈의 아들이라 해 축출되자, 정치적 실권은 완전히 권문 세족에서 사대부 세력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사대부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사전 개혁이었다. 권문 세족들의 물질적 기반인 사전을 혁파해 새로운 토지 제도를 제정하려 한 것이다. 전제 개혁은 이성계 일파인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의 힘으로 추진되었는데, 공양왕이 즉위하고 이성계의 실권이 강화되면서 실천에 옮겨졌다. 먼저 전국의 토지 개량이 시작되어 1390년에 완료되고 종래의 공사전적을 모두 불태워버림으로써 전제 개혁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과전법이 제정되어 공포되었다. 과전법의 시행으로 종래 권문세족이 차지한 사전이 혁파되고, 국가 지배의 공전이 증가했으며, 관료들에게 과전을 급여해 신진 관료층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가 집권하는데 있어 사대부 내부의 또 다른 반대에 부딪쳤다. 사대부는 두 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고려 왕조의 적폐를 점진적으로 개혁하려는 온건파와 고려 왕조 자체를 바꾸려는 역성혁명파였다.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이 전자에 속했고, 조준·정도전·남은(南誾) 등은 후자에 속하였다. 그러나 군사 대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하고, 전제 개혁을 단행해 경제적 실권까지 잡음으로써 혁명파의 우세는 결정적인 추세가 되었다. 혁명파는 강력한 반대자인 정몽주를 죽인 뒤 공양왕을 내쫓고 이성계를 추대해 새 왕조를 개창하였다. 이로써 1392년 고려 왕조는 끝나게 되었다.

<변태섭>

출전 : [디지털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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