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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4 (수)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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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4210      
[고려] 고려시대의 과거 (민족)
과거(고려시대)

세부항목

과거
과거(고려시대)
과거(고려 말 조선 초의 과거)
과거(조선시대) 1
과거(조선시대) 2
과거(과거제도의 개혁론)
과거(과거의 영향과 의의)
과거(근대화와 과거제도의 폐지)
과거(참고문헌)

[과거제의 성립과 그 배경]

과거 제도는 유교를 국가의 지도이념 내지는 실천 윤리로 삼았던 나라에서 주로 유교 경전의 시험을 통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다. 이와 같은 과거 제도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천자가 귀족 세력을 제압하고 중앙 집권적인 관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실시한 것으로서 수ㆍ당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에서 비롯된 과거제도가 우리 나라에 도입된 것은 광종 때였다. 광종은 고려 초기 왕권을 위협하던 호족 출신의 무협적 공신 세력(武俠的功臣勢力)을 억압하고, 그들 대신 새로이 유교적 교양을 갖춘 충성스러운 문신 관료 중심의 문치적 관료 체제(文治的官僚體制)를 갖추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958년 중국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의해서 과거제가 처음으로 실시되었으며, 이후 우리 나라의 관료 선발 제도로서 정착하게 되었다.

과거 제도가 고려 초에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건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조성되고 있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전보다 대폭 늘어난 강역과 인구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종래의 골품 체제(骨品體制)만으로는 새로운 통일 정권을 유지해 나가기가 어렵게 되어 새로운 통치 체제, 즉 전제왕권의 수립을 꾀하였다. 이를 위하여 충과 효를 중시하는 현실적 실천 윤리인 유교의 이론을 채택하였다.

귀족적 전통보다는 왕권의 지배를 받는 행정부적 성격의 집사부(執事部)를 최고의 행정관부로 하는 전제주의적 정치체제를 갖추었다. 이와 함께 신분적 제약을 받는 육두품(六頭品) 출신의 지식인들이 왕권과 결탁하여 신분적 권위에 집착하는 진골(眞骨)귀족에 대항하였다. 이들은 유학이나 외교 문서 작성을 비롯하여 시간 관측, 역서(曆書) 제작, 의학, 율학(律學) 등의 학문적 식견에 의하여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국왕의 정치적 조언자가 됨으로써 중요한 정치적 구실을 하였다. 즉, 육두품은 관료로서의 소양을 갖추어 왕권에 접근함으로써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682년(신문왕 2) 국학(國學)을 설립하고, 788년(원성왕 4)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설치되었다. 국학은 유교경전을 주로 가르치는 관리 양성의 교육기관으로서 대체로 육두품의 자제들이 입학하였다. 그리고 독서삼품과는 국학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운영된 것으로서 국학생이 관직에 나아가는 등급을 정하는 시험이었다. 이러한 국학과 독서삼품과를 통하여 육두품들이 전제왕권의 강화를 위한 관료 세력으로 진출하게 되자, 골품체제를 고수하려는 진골귀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그 진출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국학과 독서삼품과도 더 이상의 발달을 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육두품 지식인들은 골품의 열세를 당나라에 유학하여 당나라의 권위와 학문으로 만회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말기에 다수의 육두품들이 당나라에 건너가 유학을 하였다. 이들은 귀국 후 진골정권으로부터 소외당하게 되자 지방의 호족세력과 유대를 가지게 되었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시기는 골품제가 무너지고 호족들의 무력에 의한 각축이 심화된 혼란기로서, 대체적으로 유교가 후퇴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육두품 출신 유학자들의 활약이 활발하지는 않았다.

고려 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하여 도입한 과거제를 실시함에 있어서 이들의 뒷받침을 크게 받게 되었다. 즉, 과거제 실시 초기의 시험관과 응시자 및 급제자는 바로 신라의 육두품 귀족들이 어려운 중국의 유학에 통달하려고 수백년 동안 노력해 온 결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교적 소양을 갖춘 육두품 출신 지식인들이 통일신라시대 이래 많이 배출되어 있었기에 광종 때 과거제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그것의 성공적인 이식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왕권을 위협하던 호족 출신의 무장들을 대신하여 국왕에 충성을 다하는 문신을 관료기구에 편입시킬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과거제의 실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충성스러운 문신관료들에 의한 문치주의적 사회로 옮아가는 첫발을 내디딘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서는 골품제에서 관료 제도로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종류]

고려 시대의 과거는 크게 제술과(製述科)ㆍ명경과(明經科)ㆍ잡과(雜科)로 구분되었다. 그 중에서도 제술과와 명경과는 조선의 문과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합격하면 문관이 될 수 있었기에 가장 중요시되어 흔히 양대업(兩大業)이라 하였다.

제술과는 처음에는 시(詩)ㆍ부(賦)ㆍ송(頌)ㆍ시무책(時務策)이 주요 시험과목으로서 때에 따라 취사되었으나, 1004년(목종 7) 삼장연권법(三場連卷法:初場에 합격해야 中場에, 중장에 합격해야 終場에 응시할 수 있는 시험제도)의 시행과 함께 초장에 경의(經義), 중장에 시ㆍ부, 종장에 시무책을 시험보이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초ㆍ중ㆍ종장의 시험 과목은 시대에 따라 자주 바뀌었다.

명경과는 제술과와 달리 ≪상서 尙書≫ㆍ≪주역 周易≫ㆍ≪모시 毛詩≫ㆍ≪춘추 春秋≫ㆍ≪예기 禮記≫가 시험 과목으로서, 그 내용을 읽고 뜻이 통하는지를 시험하였다. 그런데 고려시대는 한ㆍ당유학(漢唐儒學)의 영향으로 경학(經學)보다 사장(詞章)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양대업 가운데서도 제술업이 더욱 중요시되었다.

과거를 실시함에 있어서 제술업의 급제자 수는 문종 이후 매회마다 대체로 30인 전후이었던 데 비하여, 명경업의 경우 평균 3, 4인에 불과하였고, 그나마도 장기간 뽑지 않고 거르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고려 전시대에 걸쳐 제술업 급제자수는 6,700인이나 되었지만 명경업의 경우 449인에 불과하였다. 고려시대의 과거라 하면 바로 제술과를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잡과는 명경과보다 격이 떨어지는 기술관 등용시험으로서, 과거가 처음 시행된 광종 때는 의업(醫業)ㆍ복업(卜業)만이 있었으나, 성종 때 크게 늘어났다. 995년(성종 14) 규정에 의거하여 잡과의 종류와 시험과목을 열거하면 〔표 1〕과 같다. 이 밖에 정요업(政要業)이라는 것이 있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에는 삼례업(三禮業)ㆍ삼전업(三傳業)이 잡업(雜業)으로 격하되어 나타나고 있으나 실제로는 명경(明經)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이 둘은 일찍이 쇠퇴해버렸다.

고려 시대에는 과거의 중요한 하나인 무과가 실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시 과거제의 결함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데서 고려시대의 우문좌무(右文左武)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예종 때 국자감에 7재(七齋)를 설치하면서 무학재(武學齋)인 강예재(講藝齋)를 두어 무학을 가르치고 여기에서 양성된 인재들을 시험을 통하여 선발 등용한 적이 있었다. 가중되는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무학재는 문치주의를 지향하는 문신들의 반대로 20여년 만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 뒤 무과는 1390년(공양왕 2)에 설치되었지만, 그 실시는 조선시대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따라서, 고려시대는 무과가 시행되지 않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과거 이외의 시험으로 한림원(翰林院)에서 출제하여 문신들로 하여금 매월 시 3편과 부 1편을 짓게 하는 문신월과법(文臣月課法)이 생겼다. 또 1122년(예종 7)부터는 각촉부시(刻燭賦詩)라는 즉흥시회(卽興詩會)를 열었는데 이것이 문신중시법(文臣重試法)이다.

승려들에게 승계(僧階)를 주기 위한 승과(僧科)가 고려시대에 시행되었으나, 이것은 관료 선발 기능과는 거리가 있었다. 승과는 고려건국 초기부터 있어 왔으며 광종 때의 승계 확립과 아울러 성행하여 많은 국사(國師)ㆍ왕사(王師)가 이로부터 배출되었다. 무신 정권 이후로 조계종(曹溪宗)이 발달하면서부터 승과는 쇠퇴일로에 있었다. 1370년(공민왕 19) 마지막 승과에서 종파를 망라하여 불교계의 통합을 기도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예비고시와 본고시]

중국의 송ㆍ원 시대, 그리고 우리 나라의 조선시대는 지방 장관이 고시관이 되어 시행하는 예비시험인 향시(鄕試), 그 합격자를 예부(禮部)에서 재시험하는 회시(會試:省試 또는 覆試라고도 함), 또 그 합격자를 국왕이 스스로 고시관이 되어 시험하는 전시(殿試)의 3단계 시험, 즉 과거삼층법(科擧三層法)이 실시되었다.

고려 시대 과거제가 시행된 초창기에는 예부시(禮部試:성시 또는 東堂試라고도 함) 한 번의 합격만으로 급락(及落)이 결정되는 단일제였다. 비록, 합격자에 대한 엄선을 기한다 하여 재시험하는 복시(覆試)가 있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이따금 실시된 것이지 정식화된 것은 아니었으며 그것마저 의종 이후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과거제가 실시된 지 약 50년 뒤인 1024년(현종 15) 각 지방에서 시행하는 예비시험(1차 시험)인 향시(鄕貢試ㆍ擧子試ㆍ界首官試라고도 함)가 실시되었는데, 그 규정은 다음과 같다.

① 1,000정(丁) 이상의 주현(州縣)에서는 3인, 500정 이상의 주현에서는 2인, 그 이하의 주현에서는 1인의 비율로 해마다 선발한다. ②계수관(界首官)이 시관(試官)이 되어 제술과는 오언육운시(五言六韻試) 1수, 명경과는 5경(五經) 각 1궤(机:講籤이라 하여 경서의 제목을 적은 나무꼬챙이를 대롱에 넣어 흔들어 수험생이 그 중에서 하나를 뽑아 강(講)하게 하는 제도)로 시험 보인다. ③ 향시에 합격한 자는 서울의 국자감에서 재시험을 보여, 이에 합격한 자에게 본시험인 예시에 응시할 자격을 준다. 이와 같은 규정의 향시에 합격한 자를 향공진사(鄕貢進士)라 하였다.

이와 함께 서울인 개경에서 시행하는 예비시험인 개경시(開京試)도 실시되었는데, 주로 하위의 종사원(從仕員)을 대상으로 시취(試取:시험으로 인재를 뽑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개경시는 조선시대의 문과 한성시(漢城試)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에 합격한 자를 상공(上貢)이라 하였다.

한편, 귀족 관료들의 자제들에게만 입학 자격이 주어지는 국자감의 유생들은 일반 응시자들과 달리 별도의 예비시험을 치렀는데, 이것이 바로 감시(監試:이 감시는 조선시대의 館試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조선시대의 小科에 해당하는 國子監試를 약칭한 감시와는 서로 뜻이 다름)이다. 감시에는 국자감에서 3년 이상 수학한 자, 또는 3년 동안에 300일 이상 출근한 자에게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문종 이후 사학(私學) 12도(徒)가 성하고 국자감이 쇠퇴하자 사학 12도 및 외방생도들이 일종의 연합강습회인 도회(都會)를 수료하면 감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이와 함께 국학진흥책의 일환으로 인종 때 국자감 유생에게는 과거 응시에 있어 특전이 주어져 재학중 성적이 우수한 경우 예비고시인 감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본고시인 예시에 응시하게 하는 직부법(直赴法)이 시행되었다.

즉, 국자감의 정기시험인 고예시(考藝試)를 실시하여 14분(分) 이상의 점수를 얻은 유생에게는 예시의 초장과 중장의 시험을 면제받고 곧바로 종장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으며, 13분 이하 4분 이상의 점수를 얻은 유생에게는 초장의 시험을 면제하고 중장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예비시험인 향시와 개경시, 그리고 감시에 합격한 수험생들은 본시험(2차 시험)인 예시에 응시하였다. 물론, 이들은 각자의 전공에 따라 제술업 또는 명경업에 응시하였겠지만, 그 대다수가 고려시대에 가장 중시된 과거인 제술업에 응시하였다.

이들 예시 응시자들은 삼장연권법의 시험 절차에 따라 초장에 합격해야만 중장에 응시할 수 있고, 중장에 합격해야만 종장에 응시할 수 있었다. 즉, 본시험 합격의 영광을 누리려면 세 차례의 시험에 다 통과되어야만 하였다. 예외도 있어서 국자감 유생의 경우 고예시의 성적이 좋으면 그 정도에 따라 중장이나 종장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고려시대는 예시의 합격으로 급제가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왕권강화의 측면에서 예시 합격자에 대한 엄선을 이유로 재시험(3차 시험)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이것이 복시로서 이따금 국왕 스스로 고시하는 수도 있었으나, 대체로 문신에 명하여 고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복시는 제도로 정해진 것이 아니었으며, 그나마 의종 이후 거의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의종 다음의 무신집권기와 그 뒤를 이은 원나라의 내정 간섭기에 왕권이 제대로 발휘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잡과도 예비고시와 본고시의 두 단계로 구분되어 시행되었다. 잡과 예비고시의 경우 양대업과 달리 지방에서 시행되는 향시 같은 것은 없었고 중앙에서만 시행되었는데, 대체로 해당 기술을 교육하는 관부에서 주관하여 실시하였다. 율(律)ㆍ산(算)ㆍ서(書)의 경우 국자감에서 교육을 담당하였고, 그 주관 아래 율업감시ㆍ산업감시ㆍ서업감시가 이루어졌다. 이 밖에 하론업감시ㆍ정요업감시도 국자감 주관 아래 치러졌다.

국자감에서 가르치지 않는 의(醫)ㆍ복(卜)ㆍ지리(地理)의 경우 그 교육을 직접 담당한 전문기관, 즉 태의감(太醫監)ㆍ사천대(司天臺)ㆍ태사국(太司局)에서 각기 감시에 해당하는 예비고시를 주관하여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잡과의 제업감시(諸業監試)에 합격한 수험생들은 본시험인 예시의 여러 잡업, 즉 명법업ㆍ명산업ㆍ명서업ㆍ의업ㆍ주금업ㆍ지리업ㆍ하론업ㆍ정요업 등에 각기 전공별로 응시하였다. 잡과는 예시로써 급제가 결정되며, 제술과에서 이따금 실시된 바 있는 복시가 시행되지는 않았다.

고려 전기에 잠시 시행되었던 명경의 일종인 삼례업과 삼전업도 잡과와 같이 예비시험과 본시험의 두 단계로 나누어져 시행되었다. 예비시험인 삼례업감시ㆍ삼전업감시가 국자감 주관 아래 시행되었으며, 그 합격자들이 본시험인 예시의 삼례업ㆍ삼전업에 응시하여 급제가 결정되었다.

고려시대 과거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의 소과(小科)에 해당되는 시험이 새로이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1032년(덕종 1)에 생긴 국자감시와 그 100여 년 뒤인 1147년(의종 1)에 생긴 승보시(升補試)가 바로 그것이다. 국자감시는 감시ㆍ남성시(南省試)ㆍ진사시(進士試)라고도 하였으며, 충렬왕 때 국자감이 성균관으로 개칭된 이후 성균시라고 하였다. 이 국자감시는 국자감 입학시험으로서 조선시대 소과의 하나인 진사시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승보시는 국자감에 7재가 생긴 뒤 국자학(國子學)ㆍ태학(太學)ㆍ사문학(四門學)의 유생들을 대상으로 그 재생(齋生)을 뽑는 시험이었다. 이것이 1367년(공민왕 16) 생원시(生員試)로 바뀌었으며,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진사시와 함께 소과로 제도화되었다. 고려 시대는 국자감시나 승보시 모두 다 시ㆍ부ㆍ경의를 시험과목으로 하고 있었지만, 조선 시대는 이와 달라서 진사시가 시ㆍ부ㆍ책(策), 생원시가 사서오경이었다.

[고시 절차]

(1) 응시 자격

고려 시대 과거 응시에 제한을 받은 자들은 오역(五逆)ㆍ오천(五賤)ㆍ불충(不忠)ㆍ불효(不孝), 그리고 향(鄕)ㆍ소(所)ㆍ부곡인(部曲人), 악공(樂工)ㆍ잡류(雜類)와 같은 천류(賤類) 등이었다. 이 밖에 승려의 자식들에게도 과거 응시의 자격을 주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시대는 원칙적으로 양인신분(良人身分)이라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다.

문신 등용 시험인 제술ㆍ명경 양대업의 경우 실제로는 응시자격의 폭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즉, 양대업의 경우 대체로 귀족관료의 자제인 문음자제(門蔭子弟)나 국자감 유생, 그리고 각 주현의 향리 중 향공(鄕貢)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부호장(副戶長) 이상의 손자와 부호정(副戶正) 이상의 아들 및 입사직(入仕職)인 중앙의 서리(胥吏) 등에게만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다만, 잡과의 경우 부호정 밑의 하급향리의 자손은 물론, 일반양인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고려 말기로 내려가면서 지방향리 자제들의 과거를 통한 중앙으로의 진출이 늘어났다. 특히, 향리들의 잡과를 통한 면역(免役) 및 신분 상승이 늘어나 향역(鄕役)을 담당할 향리의 수가 줄어들게 되자, 고려 말에는 향리의 세 아들 중 한명만 잡과에 응시할 수 있다는 규제를 가하였다.

과거 응시 자격이 있다 하더라도 부모의 상중(喪中)에 있는 자는 탈상이 되는 27개월까지는 응시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현직 관리의 경우 6품 이상의 관리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그 이하의 관리만 응시할 수 있으나 세 번 이상은 응시할 수 없었다. 무관자(無官者)들이 열 번째 응시하여 불합격될 경우 은사과(恩賜科)로 급제되는 것과 비교하면 온당한 대우가 아니라 하여 1154년(의종 8)부터는 다섯 번까지로 늘렸다.

(2) 시험 기일과 고시 절차

고려 시대의 과거 시험은 1084년(선종 1)에 정해진 삼년일시(三年一試), 즉 식년시(式年試)를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실제로는 매년 또는 2년이나 수년 만에 한 번씩 과거가 시행되었다. 시험 기일은 처음에는 봄에 실시하여 가을이나 겨울에 합격자 발표를 하였다.

그 뒤 1004년(목종 7)부터는 명경과와 잡과는 11월에 실시하여 다음해 3월에 발표하고, 제술과는 3월에 실시하여 같은 달에 발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것도 실제로는 대개 2∼5월 사이에 실시되고 있어서 일정하지 못하였다. 시험 기일에 앞서서 시험을 관리하고 점수를 매기는 고시관이 임명되었다. 과거제를 처음 실시할 때는 고시관인 지공거(知貢擧)만을 두었다. 972년(광종 23) 부고시관인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두어졌다가 곧 없어졌으나, 977년(경종 2)에 부활되었다.

지공거제는 고려 시대의 고시관 제도로 굳어지게 되었다. 고시관의 임명은 시험기일에 앞서 미리 하는 것이 예사였으나, 이것이 부정 개재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 하여, 1370년(공민왕 19)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시험 1일 전에 임명하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고려 시대 과거 시험의 절차는 ① 수험생은 우선 행권(行卷:수험생의 이름ㆍ나이 및 四祖, 즉 父ㆍ祖ㆍ曾祖ㆍ外祖를 기록한 두루말이)과 가장(家狀:家系를 증명할 증빙서류인 家系表)을 공원(貢院:시험관리소)에 제출해야 되었다. 행권과 가장은 명경과와 잡과 수험생의 경우 11월 말까지, 제술과 수험생의 경우 12월 20일까지 제출해야 되었다. 공무 또는 특별 휴가 등 피하지 못할 사정으로 기한 안에 제출할 수 없는 자는 시험기일까지 제출해도 되었다.

② 공원에서는 접수된 행권ㆍ가장의 사실 여부를 조사하였다. 전에 여러 번 응시하였던 수험생은 서류심사만으로 그쳤다. ③ 수험생들은 시험 수일 전에 자기의 시권(試卷:시험지) 머리에 이름ㆍ본관ㆍ나이ㆍ4조를 기록한 뒤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 없도록 그곳을 풀로 붙여 공원에 제출하였다. 여기에 호명지(呼名紙)를 붙여 시험 당일에 본인들에게 반환될 수 있게 하였다.

④ 시험 전일 오후 지공거는 3장(三場)의 시험문제를 써서 봉한 후 입궐하여 국왕에게 바치면, 국왕은 스스로 봉한 것을 뜯어 각 시험문제를 검토한 뒤 검인을 찍고 다시 봉하여 지공거에게 돌려 준다. 지공거는 이를 공원에 가져다 두었다가 시험날 아침 일찍이 써 붙인다.

이때 지공거는 남쪽을 향하여 북쪽 걸상에 앉고, 동지공거는 동쪽을 향하여 서쪽 걸상에 앉으며, 감찰(監察)과 봉명별감(奉命別監)은 북쪽을 향하여 남쪽에 앉는다. 그리고 장교(將校)들이 기를 들고 계단 아래 양쪽에 줄지어 서고, 열쇠를 가진 공원리(貢院吏)가 수험생의 이름을 불러 양쪽 행랑채에 나누어 입장시킨 다음 현판 위에 시험문제를 써서 걸면 시험이 시작된다.

⑤ 시험장에 승선(承宣)이 금인(金印)을 가지고 와서 공원리가 가져오는 수험생의 답안지에 도장을 찍는다. ⑥ 지공거와 동지공거가 초장의 시험을 채점해 놓으면 이틀 뒤 승선이 와서 봉한 이름을 뜯어 합격자를 발표하는데, 중장ㆍ종장도 이와 같이 한다. ⑦ 3장이 끝나면 지공거는 합격 후보자의 답안지 뒤에 과(科:甲科ㆍ乙科ㆍ丙科ㆍ同進士)와 차(次:제1ㆍ제2등의 등수)를 써서 황표(黃標)로써 봉한 뒤 함에 넣어 국왕에게 바치면, 국왕은 이를 참고로 합격자를 결정한다.

⑧ 합격자가 결정되면 합격자 발표 의식에 따라 국왕을 비롯하여 중신 및 고시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 이름이 발표되고 주과(酒果)가 하사되는 동시에 국왕으로부터 위유(慰諭)의 말을 듣는다. 신급제자에게는 합격증서로 홍패(紅牌)가 하사되었다.

고려 후기는 이 의식이 끝난 뒤 성행(成行)이라 하여 신급제자를 앞세우고 며칠씩 시가행진을 하였다. 그리고 지방출신 신급제자의 경우 집에 돌아온다는 전갈이 오면 주관(州官)이 주리(州吏)를 거느리고 오리정(五里亭)까지 마중나가 영접하는 동시에, 그와 그의 부모를 관사(館舍)에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한편, 국가에서는 세 아들 이상의 급제자를 낸 부모에 대하여 특별히 일정한 세미(歲米)를 주어 표창하였다.

(3) 고시관과 급제자와의 관계

고려 시대에 고시관인 지공거와 급제자 사이에는 일생을 두고 지속되는 좌주(座主)ㆍ문생(門生)이라는 독특한 사제 관계를 맺어서 하나의 학벌을 형성하였다. 과거 실시에 있어서 왕권의 개입을 의미하는 복시가 비교적 자주 실시되었던 고려 전기는 지공거의 권한이 커질 수 없어서, 아직 좌주ㆍ문생의 관계 같은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 후 왕권이 미약해진 무신집권기에 들어와서 고시관인 좌주와 급제자인 문생의 유대 관계가 강화되는 면을 보였다. 즉, 고시관인 지공거를 좌주, 또는 학사(學士)라 하고 그가 관장한 시험에 합격한 급제자를 은문(恩門)이라 하여 양자 사이에는 좌주ㆍ문생의 유대 관계가 맺어졌는데, 이 관계는 부자간과 같이 긴밀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생토록 지속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좌주가 영달하면 그의 문생 또한 출세하게 마련이고, 이와 반대로 좌주가 출세하지 못하면 그의 문생도 출세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와 같은 좌주ㆍ문생제와 관련하여 장원급제자는 동년(同年)의 우두머리로 동년회를 주관하여 유대 관계를 다졌고, 또 장원급제자끼리는 따로 용두회(龍頭會) 같은 것을 만들기도 하였다. 한편, 좌주ㆍ문생의 관계는 좌주의 좌주, 문생의 문생으로 확대되어 하나의 문벌을 형성하였으며, 그 결과 고려 후기 이래 좌주ㆍ문생간의 유대 관계를 세력기반으로 하는 문벌에 의하여 정치가 주도되었다.

<조좌호>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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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0 사전1 [문학] 한문학 (두산) 이창호 2002-09-22 4571
2949 사전1 [고려] 고려의 역사 (한메) 이창호 2002-04-17 4482
2948 사전1 [고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이창호 2002-05-24 4405
2947 사전1 [조선] 조선 개화기 참고문헌 (민족) 이창호 2002-06-13 4375
2946 사전1 [조선] 조선 시대의 불교 1 (민족) 이창호 2002-04-18 4345
2945 사전1 [불교] 불교-한국의 불교 (두산) 이창호 2002-04-10 4275
2944 사전1 [고려] 고려시대의 과거 (민족) 이창호 2002-04-24 4210
2943 사전1 [고려] 고려의 성립과 발전 2 (민족) 이창호 2002-04-23 4130
2942 사전1 [제도] 신분-조선시대의 신분제도 (민족) 이창호 2002-08-28 4108
2941 사전1 [남북국] 발해 (두산) 이창호 2002-03-22 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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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