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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0-27 (일)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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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387      
[조선] 송시열과 예송논쟁 (김형찬)
송시열의 예학

조선 왕조 실록에 가장 많이 이름이 거론된 사람이 송시열로서 3000번 이상이라고 한다. 그만큼 송시열은 뜨거운 당쟁의 중심에서 철학논리를 주장하다가 간 사람이다.

송시열은 이론적인 의미에서 깊은 철학을 남긴 인물이라기 보다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성리학을 계승하여 예학(禮學)을 발전시킨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부자의 학문을 조선의 현실 정치에 실천한 사람이다.

조선 건국 후 지식인들은 이론적으로 불교를 비판하며,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가꿔갔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불교의 풍속을 제거하고, 이를 유교적인 것으로 대체하기 위한 예에 관한 책들을 간행했다.

국초부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 예서가 일반에 보급되면서 일반인들의 관혼상제는 유교적으로 변해갔다. 주희가 성리학적 관점에서 예를 정리한 '주자가례(朱子家禮)'도 조선 선비들 사이에서 중요한 예서(禮書)가 됐다. 그러나 이에 만족치 못한 정구, 김장생 등 조선의 예학자들은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設分類)', '가례집람(家禮輯覽)', 등 우리의 시각에서 '예(禮)',를 정리해 냈다. 17세기 송시열의 시대에 예학은 일상으로 깊이 스며들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당시 서인(西人)을 대표하던 송시열은 현종 즉위년(1659)의 제 1차 기해예송(己亥禮訟)과 숙종 즉위년(1674)의 제 2차 갑인예송(甲寅禮訟)을 통해 유휴, 허목 등 남인(南人)과 맞서며, 왕실의 상례(喪禮)도 일반인들의 예법과 같아야 함을 주장했다. 예송의 승패는 정권의 향배와 직결됐다.

예로부터 예는 '자연의 이치가 현상적으로 드러난 것(天理之節文)이라고 했다. 자연의 이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인간사회에서 예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우주자연의 이치를 통찰하는 학덕(學德)을 가졌다는 것이고, 이런 능력을 가진 자는 군자로서 소인들을 교화하고, 통치할 자격을 갖는다.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추구했던 조선에서 "예"를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정치 현실에서 정권을 획득할 조건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런 논리를 정치 현실에서 주도했던 것이 바로 이이-김장생-김집의 적통을 자부했던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함께 북벌을 꿈꿨던 효종이 죽자 화양구곡으로 물러나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중앙정계를 좌우하는 서인의 수장이었다. 그는 맑은 물가에 앉아 마음을 다스리며, 왕에게 상소문을 올렸고, 제자들을 통해 사림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대부들이 학문적 이념적 차이에 따른 집단을 형성해 정치에 참여하는 '붕당(朋黨)정치'에서 반대파의 입장도 함께 수용해야 한다는 이이의 온건론보다는 군자와 소인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김장생의 강경론을 따랐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딛고, 소중화(小中華)를 내세워서라도 청나라에 맞서며, 자존심을 회복하고, 내부 결속을 다지려했던 그로서는 이런 강경론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두 번의 예송을 통해 정권이 뒤바뀌면서 예송은 단순히 예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건 정쟁으로 변해갔고, 1680년의 경신환국(庚申換局)과 1689년의 기사환국(己巳換局), 1694년의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이어졌다. 기사환국에서 집권한 남인은 끈질기게 송시열의 제거를 요구했고, 82세의 이 거인은 끝내 사약을 받고 만다. 그러나 '성스럽게 죽은 그는 갑술환국으로 복권되어 사람이 신화'가 됐다.

좋게 말하면 조선의 예학은 송시열에 이르러서 정치 현실에서 실천으로 완성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예학이 현실정치와 결합하면서 그 폐단을 극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그가 '신화'로 부활한 후, 서인을 중심으로 한 사림의 위세는 왕실을 압도하며, 정권을 좌우했다.

17세기 서인-남인 예송 논쟁

17세기 조선에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예송논쟁(禮訟論爭)은 도덕적 이상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에서 학문이 정치와 결합하면서 일어난 독특한 현상이었다. 유학에 따르면 예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실천은 모든 공부의 기본이었고, 또한 모든 공부는 예의 실천을 통해서 삶 속에서 완성된다. 따라서 정계에서 벌어진 예송논쟁은 곧 누가 통치를 담당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를 논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왕실의 상례(喪禮)를 둘러싸고 벌어진 1659년의 기해예송(己亥禮訟)과 1674년의 갑인예송(甲寅禮訟)은 성리학적 이상국가에서 본보기가 돼야할 왕실의 예법을 논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본래 유가에서 나라의 정치는 왕의 수신으로부터 비롯되고, 왕실은 온 천하의 모범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왕실의 예법은 곧 정치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다.

기해예송은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였던 자의대비 조씨가 효종에 대한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것이었다. 효종은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요절한 형 소현세자와 조카를 대신해 세자로 책봉됐었기 때문에, 이는 효종의 정통성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효종이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3년상이 아닌 1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수(眉수) 허목(許穆)을 비롯한 남인은 여염집과 달리 왕실에서는 왕통을 계승했으면 적통으로 인정해야 한다며 3년상을 주장했다. 기해예송은 서인의 승리로 끝났다.

갑인예송은 1674년 모후인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가 사망하자 다시 조대비가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일어난 것으로서, 그 결과는 남인의 승리였다.

이들의 논쟁은 17세기 전반 서인과 남인의 양대 학파에서 연구됐던 예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서인은 대체로 주희의 '가례'에 입각했던 반면, 남인은 원시 유학인 육경(六經)의 '고례(古禮)'에 입각했다. 서인은 왕실이나 일반인 모두 같은 '예'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남인은 왕실과 일반 집안의 '예'는 같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서인의 입장은 왕도 기본적으로는 선비와 다를 것이 없다는 진보적인 것이었으나, 서인이 집권하자 사림과 외척이 왕권을 농단하는 세도정치에 이르게 된다. 이에 비해 남인의 입장은 왕실과 일반인의 예를 차별화 함으로써 왕권의 강화를 지향한 보수적인 것이었으나, 후대의 정약용처럼 왕 중심의 강력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오히려 절실히 공감할 만한 것이었다.

동아일보, 2002년 6월 3일, 김형찬기자 : khc@donga.com

출전 : 민병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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